고구려(메이플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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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Goguryeo
메이플 세계관의 고구려 국기.jpeg 메이플 세계관의 삼족오.png
국기 국장
표어강대국은 계속 이어가리
국가애국가
고구려지도2.png
수도서울특별시
최대 도시평안남도 평양
정치
태왕강황세
내각총리대신
합동참모의장
태대사자
태대형
홍윤성
대광현
윤민우
공석
역사
기원전 58년고구려 건국
 • 국내성 천도3년
 • 진대법 시행194년
 • 한사군 축출313년
 • 불교 전래372년
 • 율령 반포373년
 • 평양 천도472년
 • 추군과 세군의 동란545년
 • 임유관 대첩598년
 • 살수 대첩612년
 • 천리장성 축조631년
지리
면적35,0000km (?)
내수면 비율56.8%
시간대KST (UTC?)
DST시행하지 않음
인문
공용어고구려어
국민어고구려어
지역어고구려어
인구
2020년 어림10억명
2019년 조사9억 6천명 (20위)
인구 밀도1/800명 (18위)
경제
GDP(PPP)2020년 10월 어림값
 • 전체1조 5,868억 (세계 5위)
 • 일인당30,644$ (세계 30위)
GDP(명목)2020년 10월 어림값
 • 전체2조 7천억 (세계 10위)
HDI0.348 (45위, 2019년 조사)
통화원 () (화폐 단위:Wan}
기타
ISO 3166-126도, 28도, 24도
도메인kr.
국제 전화+48
천하의 중심 대제국

개요

만세일계로 108대까지 내려온 천하의 중심이다. 초대 추모태왕부터 115대 태왕 밀라베어 강 8세까지 한번도 멸망 당하지 않고 굳건히 제국을 지켜온 나라이다.

황실

왕조

고구려에는 총 2개의 왕조로 나뉘어져 있다. 심양 강씨와 진주 강씨. 왕조만 바뀌었지 혈통은 단 한번도 변함이 없었다. 심양 강씨 가문은 한민족 최초의 국가 배달국에서 시작 되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황실이 심양 강씨와 청주 한씨인데 청주 한씨 가문이든 진주 강씨 가문이든 심양 강씨에서 시작 되었고 두 가문이 고조선에서 시작 되었다.

아무튼 강사 고구려국본기에 강이식 장군의 아버지인 강철상이 고구려 문자명왕의 막내 아들이기 때문에 혈통은 그대로 고구려 황실의 혈통이다.

정치

역대 군주

문서 참고

역대 내각총리대신

문서 참고

역사

건국

부여의 단제이던 강주몽이 고조선의 제후국이던 고구려를 제국으로 바꾸겠다는 의미로 국호를 고구려로 바꿨다.

수도 3번 천도

고구려 초기 처음에는 졸본을 수도로 자리를 잡았으나 서기 3년에는 국내성으로 천도를 하고 서기 427년에는 평양으로 수도로 천도하고 지금도 여전히 수도를 평양으로 두고있다.

진대법 시행

율령 반포

추군과 세군의 동란

한사군 모두 수복

사마씨 가문의 진(晉)나라가 8왕의 난에 의해 한눈이 팔 기회를 타서 미천태왕(고구려 제15대 태왕)은 요동군, 현도군, 대방군, 낙랑군, 임두군을 수복하고 고조선의 옛 영토를 미천태왕 대에 완성 되었다.

고수 전쟁

임유관 대첩

서기 598년 강이식 장군은 병마대원수로서 요서, 산둥, 임유관을 털었다.

살수대첩

서기 612년 을지문덕 장군 고구려의 명장으로서 살수에서 수나라군을 털어 또 다시 수나라에 패를 안겨줬다. 그 뿐만이 아니다. 수나라는 이 전쟁의 영향으로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 되었고 2번이나 진행 되었던 고수 전쟁은 종결 되었다.

천리장성 축조

연개소문의 집권

연개소문이 친당파인 고구려 영류태왕을 시해하고 강보장을 왕위에 앉히고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지리의 자리에 올라 지금도 이어질 초대 대막리지가 되었다. 그는 반당 정책을 펼치면서 군주를 대신해서 고구려를 다스렸다.

고당 전쟁

안시성 전투

당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 이세민이 친당파인 영류태왕을 시해한 사건을 명분으로 고구려를 침공 했으나 안시성에서 대패했다

백제의 멸망

연개소문은 이제 삼국을 통일할 때가 되었으며 당나라의 힘 없이 오직 고구려 1인의 힘으로 백제를 멸망 시키고 의자왕은 백제의 수도 사비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했다.

신라의 멸망 그리고 한반도 통일

서기 936년에는 신라를 멸망 시켜 고구려사 최초로 한반도를 통일 하게 되었다! 한반도를 통일한 고구려는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니 한반도 지역에 난은 일어나지 않았다.

려요 전쟁

서기 993년(고구려 성종 12년), 요나라가 고구려의 대요 강경 정책에 불만을 품자 요나라는 고구려를 침공 하였으나 강민첨 장군과 강감찬 장군의 활약으로 고구려 현종 10년인 1019년에 고구려의 승리로 려요전쟁의 막을 내렸다.

동북 9성 축조

묘청의 난

무신 정권

문신들이 무신들에 대한 차별을 하자 무신들의 뚜껑을 열려 무신들은 문신들을 처리하고 강의방을 초대 집권자부터 마지막 집권자인 임유무까지 긴 세월동안 무신 정권이 이어져 왔지만 왕정 복고가 이루어지고 무신 정권은 막을 내린다.

려몽 전쟁

강동성 전투 이후 고구려와 몽골 제국의 관계가 악화 되어 시작 되었다

강화도 천도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우가 국권을 유지하기 위해 기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에서 강화도의 강도로 수도를 옮겼다

원 간섭기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지만 중국 원元나라의 제후국으로 살아가야 했다. 원나라의 황녀가 고구려 태왕의 아내가 되었어야 했고 태왕들의 시호에 충忠자가 붙여지는 치욕을 겪었다.

쌍성총관부 탈환

홍건적의 침입

유교사상 도입

훈민정음 창제

고구려 세종이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자 고구려만의 문자를 만드니 그것이 훈민정음이다 줄곧 중국의 한자를 써오던 고구려가 고구려만의 한글 문자를 쓰게 된 것이다.

경국대전 반포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의 정복 야욕을 품고 고구려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했으나 고구려는 거절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명나라로 가겠다는 목적으로 고구려를 침공 하였다. 고구려 선조는 일본이 침공을 안한다는 동인의 말에 손을 들었으니 방어를 제대로 하지않은 탓에 처음에는 고구려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7일 동안이나 진행 되었던 임진왜란은 막을 내리고 고구려와 명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병자호란

고구려 인조는 후금을 거절하고 끝까지 명나라에 손을 들어준 탓에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고구려를 침공 하였다. 결국 고구려는 청나라의 막강한 힘에 이기지 못하고 청나라 태종에게 고개를 숙이는 대제국답지 않은 치욕을 겪었다. 그 이후 고구려는 청나라의 제후국이 되고만다.....

세도 정치

고구려 정조 때부터 서서히 성장을 해나갔다. 안동 김씨, 풍산 조씨, 풍산 홍씨가 나라를 움직였으나 황족인 흥선대원군이 세도정치를 격파 하면서 아들을 강명복을 황위에 올리니 그가 고종이다.

갑오개혁

고구려 제국의 자력을 일군 개혁이다.

수교국

국력

72년(484년)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나라로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을 드는데, 제나라 사신을 첫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 삼국사기 18권 고구려본기 장수왕
영명 7년에 평창남둔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더니 원회에서 고려(고구려)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안유명이 위나라 주객과 배숙명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 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한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 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로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
— 남제서 동남이열전 고구려
정시 연간에 세종이 동쪽 당사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였다.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는 섭라에서 생산 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저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구이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없게 하오”
— 위서 열전 고구려
15만 군대가 내달리고 깃발이 30리에 뻗쳤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이 누런 뱀이 흙먼지를 토하듯 하였고 기병들이 들판을 뒤덮은 것이 마치 붉은 개미떼와 같았다
— 수당기화

재야사학이 아닌 주류사학으로 말해보자면 고구려의 시작은 압록강 근처의 작은 소국이였고 4세기까지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유력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성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 전역을 범위로 잡아도 존재감이 뚜렷할 정도로 그 위상이 매우 높아진다 5세기에 광개토태왕, 장수태왕과 진주 강씨 황가의 직계 조상인 문자명태왕 대를 기점으로 한강 유역과 만주를 복속하면서 전성기를 맞이 하였으며 7세기 즈음 해서는 당대 세계사 국가들을 기준으로도 수당, 동로마 제국, 사산 왕조를 제외 하고는 고구려의 상대라고 부를만한 나라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나라로 군림 하였다.

  • 생산력: 건국 직후의 고구려는 한사군 중에서도 현도군의 변방이였던 압록강 상류의 산지에서 낮은 농업 생산력으로 인구를 부양하며 국력을 어렵사리 키워나가는 판국이었다. 왕권은 미약했으며 왕위 찬탈도 일어났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송화강과 요하일대에 있는 동북평원과 간도, 평안도, 황해도, 한강 이북의 비옥한 땅을 구하여 높은 생산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다만 가장 생산성이 높은 한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영유하지는 못하였다.
  • 군사력: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는 신라와 백제를 굴복시켰다 자부하고, 중국으로부터 탐라와 백제, 말갈 등을 포함하는 패권을 인정받는가 하면 만주와 내몽골, 연해주 일대에 말갈, 거란, 실위 등을 두고 요긴하게 활용하거나 공존하고 혹은 그들에게 강력한 패권을 행사하였다
  • 외교력: 초창기 고구려 관련 외교는 인접한 중국 군현의 태수, 일개 주의 자사 정도 선에서 최고 책임자로서 해결을 보던 사안이었다. 하지만 6세기 이후에는 천자를 위시한 중앙 최고위 요인들이 다발로 뭉쳐서 대륙 반대편까지 인력과 물력을 박박 긁어와야 할 정도로 중원 대륙이 온 국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대가 되었다. 대륙 세력들이 치고받는 중심지에서 살짝 비껴난 입지와 착실히 쌓아온 전적까지 더해져서 고구려는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유연, 남조를 쥐어패는데는 망설임이 없던 북위는 고구려에게 압박이나 도발을 받고도 대결을 피하고 오히려 남조와 동등한 의전으로 달랬으며 백제나 탐라, 말갈 등에 대한 패권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북제와 북주, 유연을 굴복시킨 돌궐 제1제국을 상대로는 고구려가 승리하여 인국으로서 대등하게 병존하였다. 그 돌궐을 무너뜨린 수나라는 이러한 병존적인 질서를 뒤엎고 새로이 판을 짜다가 고구려를 상대로 수백만의 대군을 쏟아넣는 등 등 국력을 고갈하여 멸망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가 실질적으로는 신하국이 아님을 자각하고 중화사상을 배제한 대우를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고구려를 상대하다가 나라가 휘청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