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하

월본의 역대 천황
월본 국장.PNG
48대49대50대
무로구리하에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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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理霞
구리하 | Kuriha
월본 월본의 49대 천황 월본 국장.PNG
생년월일1941년 11월 20일
사망일1990년 3월 26일
재위월본의 천황
1954년 4월 7일 ~ 1978년 5월 9일
구리하 (久理霞)
어칭호다이세하시 (大繐厦颸)
출생지월본 월본 조번 마치본궁 어태소
학력황립전월본학습원
경력월본의 친왕 (1941~1953)
월본의 피섭정 왕위계승자(1953~1954)
월본의 천황(1954~1978)
가족아버지 무로
어머니 미효
동생 구도하, 수인가
아내 미요미
인태연
아들 대문정, 에지스, 사이치
휘하 총리추가바람

구리하(久理霞, 1941년 11월 20일 ~ 1990년 3월 26일)는 월본 황실의 천황이자 월본의 군주였다.
무로 선황의 퇴임으로 사이가 20년 4월 7일 (1954년 4월 7일) 황위가 계승되었다.

생애

1941년 11월 20일에 마치본궁어태소(御胎所)에서 오전 4시 22분에 태어났다.[1] 무로의 하나뿐인 아들이었기에 주위의 큰 관심을 받았다. 어머니 미효무로의 정실이었으며 구리하를 출산한 후 얼마 못 가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무로는 후에 측실을 두지 않았으며 미효 사후 구리하는 엄격한 교육을 통해 근시일 내로 천황 즉위시키겠다는 황당할 수도 있는 발언을 한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일이었고, 구리하가 13세가 되기까지는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황립전월본학습원 6학년에 진학하고 나서 구리하 친왕이 피섭정 황위계승자로 지정된다.

피섭정 황위계승자로서의 삶

구리하는 약식으로 천황 즉위식을 올린 후 천황 자리에 앉게 되었으나 어린 그에게 천황직을 맡기기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무로는 스스로 섭정이 되었다. 당시 후보로서는 무로의 동생인 동로 또는 어태소 어잉산장서기 김숙동이 있었는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무로 스스로가 섭정인이 된 것이다. [2] 구리하는 친왕 때보다 더욱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아버지 무로와 다툼이 있었다. 궁내청은 이를 무산시키기 위해 구리하를 다른 관으로 옮기는 등 화해시키려 별에 별 일을 다 해보았으나(...) 틀어진 관계를 성립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사실 구리하는 이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유모를 친모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이미 죽은 것을 안 것은 천황 즉위 후의 일이었다. 이 때 아버지 무로와 틀어진 관계는 천황 즉위 후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의견이 많이 분분한데 차라리 나이가 많았던 동로를 황태제로 책봉하고 천천히 양위하는게 훨씬 나았을 것이라는 역사학자들의 분석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분석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동로가 전쟁 중에는 생각보다 제국주의자였던 것이다. 물론 후일에는 황실에서 반전주의자로 활동하며 개념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옆나라 일본과 같이 사회주의 열풍이 월본을 휩쓸었던 터, 동로는 정치적으로 상당히 편향된 인물이었다. 그래서 구리하에게 양위하였단 설이 있고, 두번째 분석은 동로의 제국주의적 행보는 군부의 강요에 의한 이미지 메이킹이었고 동로와 무로가 불화가 있어 구리하에게 양위하였다는 설이다. 현재로서는 두 번째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동로 사망 직전까지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무로였다. 심지어는 동로의 사망이 무로의 독살 때문이라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러나 동로는 끝까지 형에 대한 섭섭함을 버리진 못했지만 화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싸움의 원인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었다만.. 후일 무로는 "동생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동로의 행보는 우려스려웠다"고 발표했다. 이게 너무 막장 드라마를 뛰어넘는 수준이라 월본 역사학계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는 궁내청 기록 문서 간에 안 맞는 것이 너무 많아서 생존자 증언으로 구성을 해보면 더더욱 막장이 되는 수준이라 무로-동로의 다툼은 현재까지 주요 논쟁거리이다. 아침드라마?

천황 정식 즉위와 25년의 다이세 시대

길고 길었던 악몽같은 섭정 시기가 끝나고 1954년 4월 7일(사이가 20년 4월 7일) 구리하는 황립학원 7학년의 나이로 천황에 즉위한다. 천황 즉위 이후에도 황립학원에 재학하였으나 대부분 황립학원의 교사가 궁내에서 가정교사의 형식으로 가르쳐야만 했다. 연호는 사이가 20년 3월 14일 발표되었는데, 다이세(大繐)였으며 이는 구리하의 어칭호로부터 유래한다. 구리하의 어칭호는 월본의 문학고전인 신원서(新垣曙,Aragaki Sho)의 <백일철학>의 한 구절으로부터 유래하였다. "無義於 與助良"-"정의가 없는 것에 베로 기워 이롭게 하라"이었는데 이것이 하필 가장 앞 글자가 "無"라 구절이 정해진 직후에는 궁내청의 일부가 반발하여 다른 어칭호를 제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총무성이 이를 기각, [3] 어칭호가 결국 다이세로 지어지게 되었다.

  1. 월본어잉산장일기(月本御孕産長日記), 신정원의연(新井原義淵, Araihara Yoshifuchi) 제1저, 김숙동(金淑棟, Kim Sukdong) 제5저, 현행 어잉산장일기 저자는 소균도(蘇均禱, So Kyundo)로 궁종주사(宮從主事)에서 승격, 제7저. 17세기 이래로 쓰여온 황실 성장기록. 구리하에 관한 것은 어잉산장일기 제5저에 나온다.
  2. 다만 무로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미효 사후 이래로 꾸준히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 이 역시 어잉산장일기 제5저에 기록된 내용이다. 물론 현재는 무로가 100세가 넘도록 생존해 있기에 별 의미는 없지만(...)
  3. 총무성의 지위가 궁내청보다 높았다. 궁내청은 무로와 동로의 싸움이 시작되며 급기야는 총무성에서 이 둘을 적극적으로 중재하기에 이른다. 물론 지금은 궁내청이 총무성보다 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