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기사단국

틀:남해기사단국

南海騎士團國
Oder of Saint George 's southern sea land
최대 도시센제오르지오
정치
기사단장에크하르트 피오레
 
 • 성 조지 기사단의 대만정복1637년
인문
공용어라틴어
국민어민어 스페인어 류큐어 일본어
기타
도메인sb
국제 전화+71 남해기사단국

'성 조지의 남해기사단국 남해기사단국은 아시아의 국가이다. 해남도 대만 유규제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한다. 수도는 센 제오르지오이며 국가는 주님, 적을 무찌르소서 , 공용어는 라틴어이며 국민어는 민어, 스페인어, 오키나와어, 일본어이다.

역사

건국

1630년 스페인의 참장 호르헤 데 아르멘다스는 군인 생활에 회의를 느껴 살라망카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매우 종교적인 열정으로 가득찬 인물이었으며 고행과 엄격한 규율을 사랑했다. 그는 또한 당시 예수회의 동방선교사업에도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삼종기도 시간 중 침묵기도를 할때에 그는 귓가에서 성 조지의 군대가 동방에 다으리라 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게되고, 그는 동방선교가 자신의 임무임을 확신하게된다. 당시, 그가 보기에 당시 아시아선교는 군사적 기반이 있는곳은 흥하였지만. 군사적 기반이 없고 현지인의 호감만 산 경우는 거의 실패한것으로 보였다. 특히 식민지인 필리핀은 선교가 매우 성공적인 반면,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권을 막부의 정책이 바뀌어 신자들이 박해받는 지경에 이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1636년 그는 신학교 시절 친구 12인과 함께 교황청에 성 조지 기사수도회의 인가를 요청한다교황 우르바노 8세는 이를 허락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1637년 호르헤는 대대적인 모병령을 발표하고 수사들을 모은다. 1638년에는 스페인 국왕에게 선박과 선원, 그리고 1만의 군대를 요청했고 , 이는 받아들여졌다. 1640년 4월 성 조지 기사단은 중국으로 향했다. 목표는 대만의 스페인인을 지원하고, 대만 북부를 기사 수도회의 거점으로 삼는것이었다. 1641년 10월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하여 현지의 정보를 탐색하고 준비기간을 가졌다. 이 기간 성 조지 기사단의 단원들은 남방 중국어를 습득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1645년 마닐라를 떠나 다시 대만섬으로 향하였다. 당시 타이베이 근방에 상륙한 호르헤는 서부 해안의 스페인 상단에 연락을 취해 , 협력을 구하고 대만 북부를 개척해나갔다. 성 조지 요새 , 우르바노 요새를 세우고, 농토를 일궈 자급할수있는 기반을 만들어갔다. 또한 성 조지 성당을 이때부터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1645년 성당이 완공되자. 성 조지 기사단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이후 계속하여 농토를 개발하고, 섬 내부로 진입하며, 원주민에게 전교와 편입에 힘썼다. 그리고 1655년 경에는 대만 북부를 거의 장악하게되었고 1651년 호르헤 데 아르멘다스가 노환으로 사망한다. 이때 기사단국은 북부의 원주민을 국민으로 편입하고, 전교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652-1700

그리고 1651년 2대 단장으로 흐르헤 데 리스파놀이 취임한다. 당시 그는 중국의 혼란상을 간파하고, 대 베트남 선교에도 염두를 두는 만큼, 해남도를 정복할것을 결심한다 1651년 4월 호르헤는 그 해 4월 우르바노 요새에서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해남도를 공격하였다. 당시 명의 지배통제력은 미약한 수준이었기에 해남도으 중심지 하이거성은 쉽게 함락되었다. 호르헤는 지방관을 처형하고, 먼저 조세를 인하하는 조치를 취하고, 주민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 계속 확장하여, 명나라의 통치가 미치지 않았던, 리족과도 접하였고, 이들에게 통치와 복음을 받아들일것을 요청했으나 이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호르헤는 전쟁을 명했고, 리족을 총포로 압박하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리족은 그곳의 지세를 꿰고, 울창한 삼림지대에 유리했기에 좀처럼 기사단이 승리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사단은 전술을 바꿔, 그들이 사는 취락을 파악하여 그 인방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전술을 취했다. 호르헤 데 리스파놀은 군인으로서 기사단에 종군한이였기에 전쟁수행에 걸림이 없었다. 1657년 리족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섬 중앙부로 도시를 확장해왔다. 또한 해안가에 대만섬과 같은 요새를 건설하여 해안 방비에 철저함을 기했다. 또한 중국 남방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개종을 종용했다. 또한 청에 입조를 하고, 정성공 세력 토벌에 협조를 하기로 약조하였다. 해남도와 대만북부를 정복 한뒤 통치체제를 정비하여, 기사단장을 중심으로한 전제적인 통치체제를 완비한다. 1661년 4월 29일에는 정성공이 대만섬 남부의 네덜란드인의 요새를 공격하려하자 , 이를 지원하여 격파하였다. 호르헤는 정성공의 시신을 청에 보내는 조건으로 기사단국의 항구적 청 입조하 영토 및 체제 보장을 요구하였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기사단국은 계속하여, 대만섬과 해남도를 개척해나갔다. 1665년에는 류큐왕국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청의 입조국으로서 일본의 에도막부와도 외교관계를 맺었다. 1685년에는 청을 통해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가 쇠락해가면서, 기사단국 측 역시 에스파냐로부터 지원은 기대할수 없게되었다. 1686년에는 3대 단장인 돈 후앙이 취임한다. 돈 후앙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대만과 해남도 현지인이 기사 수도회에 입회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스페인인과 중국인의 혼혈인구가 많아진다. 돈 후앙은 기사 수도회의 봉쇄 수도원과 교육 수도원을 설립하고, 적극적으로 동양인을 열등민족으로 보지말것을 수도회칙에 넣었다. 또한 청황실에 예수회와 함께, 기술자. 학자들을 파견해 청에 서양문물을 전하고, 남중국 인근에 가톨릭 신앙 전파에 힘썼다. 또한 이때 남중국 대교구가 편성되어, 교황청에서 남중국 교구장과 대주교 , 그리고 주교들을 임명해왔다. 돈 후앙은 특히 , 류큐왕국 선교에 주력했는데 , 대일본 선교는 완전히 막혀있지만. 류큐에대한 선교는 가능했기에, 일본 선교를위한 돌파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류큐왕국의 왕과 재상에게,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면, 스페인의 도움으로 사쓰마번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날수 있디고 주장했다. 이에 관심을 가진 류큐국왕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기사단국은 1689년 7000의 병력을 류큐국 인근에 파견하고 일본국이 류큐국이 조공으로 얻은 청의 하사품을 강탈하고 있다고 청의 사절을 보냈다. 이를 확인한 에도 막부는 사츠마 번주에게 류쿠국의 조공수익을 가로채지 말것과 류쿠로부터의 철군을 명했다. 이듬해 7월 기사단국의 병력은 나키진에 상륙하고, 서방에서 류큐국에대한 보호국을 자처했다. 성당과 수도원 그리고 조차지를 건설하고 1689년 본국으로 귀환했다. 기사단국과 스페인은 류큐의 특수 조차지를 통해 무역에 있어서 이득을 취했다. 또한 돈 후앙은 조선 선교 역시 시작했는데 , 조선왕의 생일에 악단과 선물을 보내는 등 호감을 쌓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좀 처럼 선교를 정식으로 인가 받기는 어려웠다. 결국 조선은 자생적으로 발전하는 길을 걸을수 밖에 없었다. 1701년 단장인 돈 후앙이 79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제 4대인 전여민이 취임한다. 전여민의 세례명은 야고보로 그는 대체로 전 야고보로 불리었다고한다. 기사단국은 17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남아시아 무역에 있어서, 큰 이익을 보고 청나라와 조공무역을 하는 등 경제적으로 번성하기도하였다.

1700-1800

전 야고보는 해외선교 사업보다는 내치에 중심을 두었는데, 기사단국이 해남도와 대만북부로 양분되있는 이상, 국력을 한데 모으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대만남부의 네달란드인을 쫒아내는것을 염두해두고 있었다. 본래 1600년대에 대만 남부는 스페인인과 네덜란드인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으나, 스페인이 기사단국을 통해 북부 일대에 중점을 두자, 자연스레 남부는 네덜란드의 차지가되었다. 그는 우선 중심부의 원주민의 다두왕국을 공격하여, 다두왕국을 멸망시키고 , 중부를 편입한다. 그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해안 요새를 공격하여 전쟁을 벌인다. 해안 요새들을 함락시키고 대만 남서부 해안 지대를 장악했다. 그리고 대만섬 전체에대한 대대적인 개척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대만의 중심부의 산악지대를 개발하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때 네덜란그가 해안 요새 정복에대해 항의하고 영토를 돌려줄것을 요구했으나, 청나라에 외교적 중재를 요청하여, 청을 통해 대만섬 전체가 기사단국의 영토라고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에서 공인하게된다. 전 야고보는 1730년 자진해서 퇴임하고 1732년 이홍래 , 베드로가 이 베드로가 기사단장에 취임한다. 그는 이 시기 산 다미아고, 산 살바도르 산 프란치스코가 크게 발전했다. 이때부터, 해남도를 기반으로한 베트남 선교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해남도의 많은 신부들이 베트남으로 건너갔다. 또한 조선에서 천주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늘자, 이 베드로는 조선에 신부를 파견하고, 교황청에 조선교구를 편성할것을 요청한다. 성 조지의 기사단은 전 야고보와 이 베드로의 시기를 기점으로 수도회와 기사단 즉 전투집단으로서의 면모보다는 통치조직으로서의 면모가 훨씬 강조되었다. 또한 청, 조선, 일본, 류큐에 본래 待滿國을 자처했으나 이때부터 동북아시아를 한정으로 기사단장은 王의 칭호를 겸한다. 또한 이때 성 조지 기사단국의 동북아시아에서의 명칭은 待滿王國이된다. 이 베드로는 1745년 사망하여 다음해에 다시 스페인계인 그레고리오 데 산 살바도르가 기사단장에 올랐으며, 그는 농민의 복지에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농민들에게 농사방법에관한 책을 배포하고, 정전제를 실시하였고, 조세또한 인하하였다. 또한 느슨하게 마을의 수령이 다스리던 종래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지방마다 기사를 파견하여 나라를 다스렸고,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산 다미아고를 수도로 정하고, 해남도를 7부 대만섬을 14부로 개편하고 부마다 부자사를 파견하였다. 이때부터 행정언어로 스페인어보다 한자를 우선하고 , 후에 스페인어와 라틴어로 문서를 재작성하였다. 그레고리오 데 산 살바도르는 1789년 자진퇴임하고 1789년에 보르지오 데 산 다미아고가 기사단장에 올라 통치한다. 그는 독신인 기사수도회로서는 통치조직을 완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 재속 성 조지 기사단을 설립히여, 참여를 독려하였다. 또한 그의 치세 즈음하여 대만의 개발이 완성되어 인구가 늘어 이 시기 인구가 200만에 달하게된다. 보르지오 데 산 다미아고는 王으로서 최초로 대관식을 열고, 기사들 가운데 총리를 임명하고, 위엄과 통치력을 강화했다. 그는 기사단국을 기사단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왕이 다스리는 세속왕국으로 확장하고 동북아시아를 경략하는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대부분의 원로들의 생각에 반하는것이었고, 많은 기사들이 그의활동에대해 수도회의 본질을 흐리는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를 교황청에 전하여 교황에게 그의 해임령을 종용하게 됬고 보르지오 데 산 다미아고는 자진사임하고 환속한다. 이때가 1799년이었다.

1800-1859

이후 독일 출신의 기사인 하우출벤 폰 아우구스부르크가 기사단장에 오른다. 그는 스페인어 독일어 중국어 라틴어에 능하고, 국제정세에 밝고 영민하고, 기민하고 매우 신앙심이 깊었다. 그는 다시금 유구왕국에대한 보호국을 선언하고 , 유구왕국과 각별한 외교적관계를 이어나갔다. 또한 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다시금 선교사를 적극적으로 파견하여, 통치가 아닌 선교라는 기사 수도회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노력했다. 한편, 조선정부의 천주교인 박해에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조선정부에 천주교인 박해에대해 항의하고, 천주교인을 박해하고자하면, 오히려 기사단국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조선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1803년 그는 직접 함대를 이끌고, 부산항 인근에 근하여, 경남지역 천주교인을 싣고, 그들을 대만으로 호송했다. 조선정부는 이에대해 깊이 항의하고, 청나라에도 이를 고발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더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에대한 박해를 멈추지 않는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전했다. 그리고 탐라 근해에 함대를 대기 시켰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계속하여 천주교인을 박해했다. 한편 이때 , 기사수도회의 선교사들이 인도네시아 , 인도차이나반도에서 활동하고, 응우옌 왕조와 새로이 외교관계를 가지고, 사절을 파견하고 수도에 성 바오로 대성당을 건설한다. 그런19세기부터 선교사들의 유입과 동남아시아에대한 식민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됬기에, 이 시기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게된다. 특히 남아시아의 여러 술탄국에서도 활동했으나 이들의 저항이 극심하여, 선교사들은 쉬이 순교하였다. 1848년에는 베트남에대한 프랑스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베트남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철수해야만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선교사업은 축소될수 밖에 없었다. 1836년 하우줄벤 기사단장이 사망하고 새로이 청나라 출신의 주문부 바오로가 기사단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청나라 출신이었기에 식민제국의 침탈에 매우 민감했다. 그는 우선 베트남의 우방을 자처하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을 비난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회사의 학살과 원주민에대한 강제노역에대해 교황청에 보고하여,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위배되는것이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외교적 활동은 열강의 활동을 축소할수 없었다. 한편 1849년에는 네덜란드가 류쿠왕국에대한 침략을 시도하였다. 당시 스페인은 계속해서 약화되었기에 기사단국에대한 실질적인 보호국은 전무하였고, 교황청의 영향력도 당대에는 무용한것이었다. 네덜란드 함대가 1849년 7월 류큐왕국 나카진 해상에 나타나 류쿠왕국을 공격하였다. 류쿠왕국은 기사단국에 원조를 요청하였고 기사단국은 곧바로 60척의 전함을 파견하고, 청나라에 신하된 나라가 야만인에게 침략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네덜란드와 곧바로 해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이때, 근해에서 태풍이 북상하여, 대부분의 배가 침몰, 네덜란드의 유구 침략은 좌절되었다. 한편 이때 기사단국 역시 괴멸적인 타격을 입어 군사력을 재생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이때 주문부가 전사한다. 주문부에 이어 전광석이라는 청나라 해병 출신 기사가 기사단장에 오른다. 그는 군사력을 재정비하는데 집중하고 향병제를 실시해 평시에 농민들을 농사를 짓지 않는 철에 군사훈련을 시켜 언제든지 징발할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류큐왕국의 관계는 매우 긴밀해져, 류큐왕국은 수시로 국빈을 대만에 파견하고 왕자들을 산 살바도르의 신학교에서 수학시켰다. 전광석은 한편으로는 청나라의 王으로서 책봉받아 청나라와 우호관계를 다지고 해안요새를 정비하여 네덜란드와 여러 열강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기사단국은 청의 입조국이면서 가톨릭교회의 일원이라는 독특한 입장으로 인해, 청과 조공무역, 중국과 서양세력의 중계무역지로서 각광받았다. 그러나 19세기 초엽부터 서양은 중국과 직접 거래할 길을 찾고자 노력하였고 1840년에는 영국과 중국이 아편전쟁을 벌이기에 이른다. 그리고 1856년에 벌어진 전쟁의 결과로 청나라의 대 서양무역이 본격화되자 기사단국의 무역수입은 급감하고 보호국이었던 청의 위상이 떨어져, 기사단국의 위치는 점점 좁아졌다. 전광석 단장은 중국식체제와 칭호를 과감히 버리기로 결정하고, 재서양화를 추진하기에 이른다. 당시 , 대외적으로 王을 칭하고, 중국식 지방행정제도와 군사양성을 과감히 버리고, 본국과 같은 스페인으로부터 근대식 화기와 전함을 수입하였다. 또한 대만과 해남도에 공장과 철도를 설치하고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중국의 조공을 받치는것을 포기하였다. 또한 교육제도도 정비했는데, 신학교뿐만 아니라, 보통학교와 고등학교와 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한편 일본은 1871년 명치유신을 통해 이를 시작하였다. 또한 그는 수도회 정화사업을 시작했는데 은처자를 가지거나 미사에 꾸준히 참여하지 않는 이들을 수도회에서 쫒아냈고, 이를 구실로 개혁에 반대하는 이들을 내쫒았다. 그리고 독일, 프로이센, 프랑스,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고 공관을 설치했다. 또한 당시 중국의 양식에 맞추어진 중국어 전례를 금지하고 라틴어 미사만을 허용했고, 스페인어와 라틴어만을 행정기관에서 사용하도록하였다. 전광석은 1859년에 사망했다.

1859-1900

, 프랑스 출신의 시몬 드 부아르가 기사단장에 오른다. 그는 본국인 프랑스와 우호를 다지고, 프랑스인사를 적극적으로 수도회에 입회시켜, 프랑스인의 세력을 늘렸다. 이때를 기점으로 스페인계 다음으로 세력을 자랑하던 혼혈계와 청나라계는 밀려나고 프랑스계가 국정에서 두각을 들어낸다. 그는 우선 류큐를 병합하고자 했는데ㅡ, 우선 류큐에 해상관측과 열강침략으로부터 보호라는 명목을 내세워 정상통감정 程相統監을 세워 총독으로 자신의 친구인 조르주 드 보레를 임명한다. 이후 류큐왕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활동하게된다. 한편, 일본 역시 해상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주목하여 류큐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일본은 류큐국과 문화적인 동질성과 관계를 내세워 류큐왕국에대한 지배권이 있다고 선언했다. 시몬은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류큐에 주둔하는 병력을 늘려간다. 1874년 류큐왕국 해군을 공격, 이에 시몬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일본과 해전을 벌인다. 이를 남일 전쟁이라 한다. 일찍이 해군을 양성한 기사단국이 우위에 있었다. 일본은 군편제를 시작했으나, 해군력은 충분히 증강하지 못했고, 결국 패배한다. 류큐의 쇼소인 국왕이 1875년 사망하고 시몬은 스스로를 부단장으로 강등시키고 당시 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제 1왕자를 기사단장에 임명하고 그를 류큐왕국 왕위에 올려, 류큐왕국과 기사단국 사이의 동군연합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총리아문에 올라 양국의 국정을 총괄하였다. 또한 이듬해 11월 양국간 병합조약을 체결하여, 앞으로 기사수도회 장상이 류큐왕국의 국왕을 겸하도록하였다. 그는 류큐의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류큐의 산업화를 이끌고 류큐의 해군력을 증강하였다. 당시 류큐국왕이자 기사단장이었던 쇼 하이네루는 아무 권력이 없었다. 시몬이 1880년 사망하고 마크롱 드레이크가 부단장과 총리아문에 취임한다. 그는 본격적으로 세계각국과 외교관계를 맺는데 1881년에는 미국, 오스만제국, 페르시아. 핀란드, 스위스등과 수교하였다. 또한 류큐왕국이 청에 하던 조공을 중단하고 류큐왕국의 전통적 의례를 황제국의것으로 격상하였다. 또한 슈리성에서 쇼 국왕에게 전통 즉위식과 가톨릭식 대관식을 함께 치루게한다. 또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고, 일본에 사절과 선교사를 파견하고 일본과 정식으로 수교를 맺었다. 마크롱은 재무성, 외무성, 국무성, 교육문화성 , 군무성 ,궁내청, 수도상서성 , 의 7성을 설치해 중앙행정을 보다 근대적이고 효율적으로 통치했으며, 성 조지 대학교와 쇼소신 국립대학을 설립하고 사법고시 ,행정고시 , 의료고시를 실시하였고 기사가 지방행정을 담당하는것이 아닌 행정고시 통과자들을 지방관과 관료로 등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기사들의 큰 반발을 샀고, 마크롱은 이를 강행하자 1883년 타이난을 중심으로 기사의난이 발발한다. 이들은 모두 대만 남부의 부찰사들과 해남 북부의 부찰사였고 이들은 향토군을 기반으로 하여 무력시위하였다. 이에 마크롱은 1910년까지 이를 유예조치하고 현직 지방관들은 계속하여 부임하도록하고 1915년부터 행정고시 통과자들을 관료로 등용하기로 결정한다. 또 그는 수도회 조직이 너무 권력화되었다는걸, 지적하고는"앞으로 성 조지 기사수도회는 수도생활과 선교사업에 주력하고, 정치와 군사업무에서 손을 떼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와 유예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의 무력시위는 계속되었고 마크롱은 총리아문과 부단장에서 내부의 압박으로 사퇴하고, 쇼 국왕이 통치하기로한다. 쇼 국왕은 우선 류쿠의 위상을 황제국으로 격상하여 스스로 칭제건원하였다. 또한 류큐에 한정하여 7성의 관료와 지방행정관료를 행정고시 통과자를 뽑도록하고, 기사단국은 여전히 기사들에게 통치를 맡기기로한다. 대신 그는 행정고시 통과자들을 향리로서 부찰사와 촌주들에게 파견하기로 결정학고 류큐제국 황제의 위상은 격상되고 통제력은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05년을 기점으로 하여 부를 폐지주와 현을 설치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현직기사들이 사망하는대로 행정고시를 통과한 주자사와 현장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10년의 임기로 부임지가 계속 변경됬다. 이러한 주현제는 류큐에도 적용되게된다. 이때 그는 중앙의 군사를 직접 이끌고 대만과 해남도를 순회하면서 이를 무력으로라도 이루겠다고 선언했다. 한편 1895년부터 청일전쟁이 시작되고 결국 일본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1900-1945

1919년 쇼 황제 겸 기사단장은 제 4황자인쇼 슈이 황자를 황태자로 임명하고 그에게 기사단장직을 위임한다. 당시 기사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시몬 전 단장의 꼭두각시였던 쇼 황제와 류큐의 7성의 관료들이 단숨의 권력의 중심에 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지방에서 기사의 위치는 한없이 전락했으며 민중의 여론 역시 기사들이 권력을 탐하기보다 수도와 선교에 집중하여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한편 1919년 4월 29일 국무회의에서 쇼토쿠 황제는 초기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기사 수도회는 기사단국을 해체함으로서 순수성을 찾아야만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실수 였는데 기사단국의 상위기사들은 여전히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 5월 쇼토쿠 황제는 가오슈이 기사단장 겸 황태자를 통해 기사단국의 해체를 명했다. 그러나 1919년 6월 슈라성에 있던 쇼토쿠 황제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야만했는데 , 40인의 근위기사가 기사단장인 쇼슈이를 시해하고 류큐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는것이다. 이에 화가난 쇼 황제는 전 류큐의 전 병력을 이끌고 , 친정하여 대만과 해남에대한 정벌을 선언했다. 이것이 해유전쟁이다. 그러나 군사력은 여전히 기사단국을 중심으로 증강되었기에 유구제국은 열세였으며, 쇼제는 결국 전사하고 유구해군은 대패한다. 새로이 기사단장에 취임한 세르반테스 데 타이위안은 류큐황실을 폐지하고 , 류큐제국 황실의 자산을 국고로 환원했다. 또한 7성에서 궁내청을 폐하고 6성의 장관은 전원 기사로 임명하되, 실무행정관료는 고시통과자만 지원 가능하도록했다. 또 헌법을 제정하여 반포했다. 그는 취임한지 1년만인 1920년 노환으로 사망하고 앙리 호르손이 기사단장에 오른다. 그는 행정구역을 3도 26주 80현으로 개편하고 해남도,대만도, 유구도에 근위기사 3인을 파견하여 도지사로 임명하고 대만도의 도지사는 기사단장이 겸하도록하였다. 그는 류큐의 민심을 달래기위해 1대 도지사의 쇼토쿠 황제의 제 2황자 였던, 쇼소인을 임명한다. 하지만 총리아문에서 발전한 도편장에게 류큐의 군권을 넘겨 반란을 억제했다. 1925년부터는 도시문화가 급격히 발달하여, 유흥업소,대극장, 주점등이 만들어지고 서민의 놀이문화가 발전하였다. 한편 공장주와 기업주를 중심으로 부르주아계급과 노동자계층이 형성되고 공산주의, 자유주의등이 일찍이 유입되었다가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또한 대중문화산업이 발달하였다. 또 류큐를 통해 불교와 도교가 민간에서 다시 유행하게되었다. 이때 국명을 남해기사단국으로 정식화하고 王과 대만왕국이라는 명칭은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또한 국가통치의 자립성을 유지하기위해 국내에서 나고 자란 국민 출신의 수도회원만이 근위기사에 오를수있도록 제한했다. 또한 기사의 등급제도 정비하여 3품기사 2품기사 1품기사 근위기사 로 나누었다. 또 폐지했던 중국어전례를 허용하고 , 류큐어 및 각지역어 전례를 허용했다. 이 시기 이후 경제를 이끌 주요 기업이 양성되는데 각각 성명식품, 성심제철, 금간공업, 일관조선이다. 이들은 초대기업으로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육성되었으나 이후 정관유착과 중소기업 성장의 부진과 재벌경영의 원인이된다. 전간기 동안, 남해기사단국은 현대국가로서의 면모를 완성하게된다. 그러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대치하였던적이 많았던 기사단국이었으나, 이미 일본에 국력을 추월 당한지 오래이기에 중립을 지켰고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2차세계대전에서도 중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본 내지 해군이 중국 방면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해군력을 동원해 길목을 막고 버텼다. 그러나 1940년 일본군은 전쟁수행을위해 남아시아국가에대한 정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기사단국을 공격, 기사단국은 첫 해전에서는 무다구치 요 제독의 뛰어난 지휘로 승리하였지만, 일본 공군과 해군의 연속된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대만섬으로 패주하였고 대만섬 역시 4차례에 해전을 겪고 함락된다, 이 전투로 일본은 중국의 해상을 봉쇄하게되고 일본은 동남아시아 전체를 사정권에 두게된다. 한편, 남해기사단국은 해남도의 하이커우를 임시수도로하여 항전을 이어나갔다. 한편 1940년 4월 1일 앙리 기사단장은 사망한다. 일본은 이를 기점으로 남아시아를 완전히 편입하게게되고 버마 또한 정복한다. 그러나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미국과 태평양에서 전면전을 치루자,일본군의 전쟁은 불리한 양상을 띄게되었다. 한편 부단장인 임안석 토마스가 기사단장에 오른다. 그는 남해도를 중심으로 일본군이 주둔한 대만섬에 지속적으로 공습을 가했고, 직접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의 항복과 함께, 대만과 류큐를 수복한다.

1945-2018

승전과 함께, 시작된 전후사회는 많은 변동을 겪게되었다. 우선 대외적으로 중화민국이 멸망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장악하게되어, 남해기사단국은 냉전지역에 있어서 중국과 최전선에 위치하게되었다. 이런 이유로 남해기사단국은 전후 미국과 동맹을 맺어 , 미국의 지원 아래 경제발전을 꿰하게된다. 한편 민중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정치참여가 활발해짐에따라 전통적인 체제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민주적인 체제를 바라는 이들이 생겨나게되었다. 산 살바도르 신학교를 중심으로 민중신학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1950년 임안석 토마스 기사단장은 전후 경제개발기획을 발표, 전후 경제를 회복하기위해 중공업과 조선업을 대대적으로 양성한다. 또한 현대전에 대응하기위해 국방학연구소를 설치하여 신무기를 자체적으로 연구하게하였다. 미국의 경제원조 하에 남해기사단국은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켜 후일 일본,싱카포르.대한민국과 함께 아시아4대룡으로 불리게된다. 한편 1950년 6월 25일 ,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중국과 군사적 긴장을 유지한채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남한을 지원하였다. 1960년에는 산 제오르지오 대학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대학생이 인민주권쟁취동맹을 결성, 민주화를 요구하는 항쟁을 시작했다. 임안석 기사단장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나, 바타칸의 파문선언과 미국의 압박으로 스스로 사임 , 다음 정부에 공을 돌렸다. 다음 단장인 그리모어 단장은 민주화를 약속하고, 기사단 원로회를 열어 입법원을 설치하고, 근대 민주주의를 정착시킬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1963년 4월 헌법초안을 발표했다. 입법원과 사법원 행정원을 설치하고, 기사단장은 명목상 국가원수로 밀려나고 실질적인 권력은 수상에게 전원 이양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기사수도회는 초기의 순수성을 회복하기위해 모든 무력을 해제하고 군무성에 이를 전적으로 위임하기로 했다. 이는 국민투표를 통해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1963년 4월 첫, 총선이 시작되었고 첫 총리로 에르반디오 데 다미아고가 당선되었고 내각이 임명되었다. 또 7월에는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민주진보당의 총재이던 에르반디오는 산 제오르지오 대학 경제학과 출신으로 경제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1960년 그가 가르치던 제자들의 추대로 민주진보당의 총재가되었다. 그는 총리 취임 직후 일본총리대신과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양국 국교정상화와 긴밀한 공조를 약조하고, 해역을 확정하였다. 또한 국민보험제도와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다. 그는 기업육성에 주력했으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대기업들이 자리에 잡게된다. 그는 1974년까지 재임에 성공하였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정계는 민주진보당과 기독교정치당으로 양분되어왔다. 에르반디오 총리락 1973년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재임에 실패하자 1974년에 기독교정치당의 총재 아마데오 포르제가 총리에 취임한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엄격했다. 한찬 경제성장이 한창이던때 닥친 석유파동이었으나 아마데오 포르제는 적극적으로 이를 이용하여 민주진보당을 음해하여, 집권하였다. 그는 도덕적 개혁을 부르짖으며, 금주법 ,피임금지법을 입안하였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석유파동도 계속되자 기독교정치당은 재집권에 실패하고 민주진보당의 장 호르헤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주고 , 기독진보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장 호르헤 집권기 동안 남해기사단국은 전자제품 분야에서 일본과 각축을 벌이는 국가로 성장했다. 성일전자, 성심전자등이 냉장고,커피포트,전자레인지, tv 라디오 시장에 뛰어들어 세계시장을 휩쓸었다. 그러나 1989년 3기에 걸쳐 집권한 장 호르헤에이어 민주진보당의 세르베스 피오레가 집권한다. 그는 사회보장제도를 정비ㅏ하여 노동권을 보장하는데 힘썼고, 고용안정제와 실업수당을 시작하고 소학 중학 무상교육을 실시했다. 한편 1991년 민중신학이 전국에서 계속해서 성행한 가운데서, 남중국 대주교인 프란치스코 톨레가 무염시태 ,교황무류설 교황수위권 사제의 강제적 독신에 반대하여 독릭교회를 선언하고 남해독립교회를 선언했다. 이에 당시 기사단장이던 에크하르트 피오레 역시 동참하였다. 이에 성 조지 기사단 역시 남해 독립교회로 소속을 옮기게 되었다. 남해독립교회는 주교회의와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한다. 1999년 세르베스 피오레가 퇴임하고 기독진보당의 정 페르난도가 총리에 취임한다 그러나 그의 임기동안, 대기업의 중소기업 성장 억제, 성장둔화, 주요기반산업의 경쟁자의 등장과 약진, 청년실업문제가 부각되었다. 그는 대기업에대한 대대적인 감찰과 이를 통한 대기업의 해체를 꾀하고자했으나, 오히려 대기업관계자의 비리폭로로 이는 좌절되고 오히려 페르난도 게이트로인해 임기동안 국정은 혼란하였다. 성장둔화가 점점 두들어지고 2006년에는 기업가 출신의 이망박 총리가 취임하나, 무리한 외교정책과 토목사업의 실패로 국민들의 공분을 사게된다. 2011년에는 초치로 류큐 출신의 총리 소 마사요네가 취임하였다. 그는 성장둔화를 완화하고 실업문제 해결을위해 대기업에대한 대대적인 감찰과 로빈후드세를 실시하였고, 부실경영과 위법소지가 심한 성심그룹, 성혜그룹을 해체한다. 또한 정보통신기술을 육성하ㅣ기위해 허베이산업단지를 조성, 정보분야의 벤처사업가를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16년에도 재임에 성공하게되고, 중소기업 육성을 중심으로 경제난 극복에 집중하고있다.

정치

행정구역

국방

사회,문화

대외관계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