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바에스파냐

쿠바 원주민과 스페인의 쿠바 정복

1492년 10월 27일, 제1차 항해중이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현재의 쿠바 섬을 발견하고 이 섬을 스페인 영토로 잠시 점유하고, 왕자 후안(Juan)의 이름을 따서, 후안 섬(Isla Juana)이라고 명명했다.[3] 1511년 스페인 제국의 정착지가 스페인에서 파견한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에 의해서 바라코아에 최초로 세워졌다.

1512년 벨라스케스는 300명을 이끌고 이스파니올라를 떠나 쿠바로 향하여 본격적으로 스페인령임을 선포하고는 2년동안 일곱 곳의 개척지를 건설했다. 미래에 수도가 될 산 크리스토발 데 라 아바나(San Cristóbal de la Habana, 1515년 설립) 등 다른 마을도 그 뒤를 이었다. 2년동안 스페인인은 수천 명의 원주민을 죽였으며 벨라스케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원주민을 모두 서쪽으로 쫓아버렸다. 그러나 당시 쿠바는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1516년 벨라스케스가 멕시코로 네 번의 원정을 후원하여 그 중 1519년에서 1521년까지의 에르난 코르테스의 정복이 이루어진 이후에 쿠바는 남미로 가는 스페인의 관문으로써 역할을 하게 되었다.

1514년에는 전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지 체제를 확립하였다. 엔코미엔다 제도가 구축되면서 커다란 사유지가 형성되었고, 스페인은 기독교로의 개종에 저항하는 약 10만명의 원주민을 억압하고 종교 교육의 구실 아래 인디언에 대한 노예화가 필연적으로 진행되었다.

1542년에 엔코미엔다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혹독한 착취와 유럽인이 가지고 온 질병에 의해 인디언 인구는 5,000여 명 수준까지 감소하였고, 사금(砂金) 채취와 농장 노동 등으로 혹사당한 원주민들은 1528년의 대(對)스페인 반란, 1530년의 악성 유행병 등을 거쳐, 1세기 만에 모두 사라졌다.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감염병이 원주민 인구 감소의 지배적인 원인이라고 믿고 있다.[4][5] 이런 상황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고 스페인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하여 노예 노동력의 수를 유지했다. 북미의 노예 매매와 다르게 쿠바의 아프리카 노예들은 부족별로 함께 살게 되어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문화 중 몇몇 측면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목장에서 일하도록 보내졌고 소와 관련된 생산 - 가죽이나 말린 소고기 -은 18세기에 담배가 쿠바의 주요 돈벌이가 되기 전까지 기간 산업이 되었다.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쿠바의 독립 투쟁

쿠바는 1511년부터 1898년까지 거의 40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다가 1898년 미서전쟁의 결과 미국에 넘어갔다. 이 기간 중, 점점 다른 유럽 국가의 세력이 카리브해의 스페인 지배를 위협하였는데 1655년에 영국자메이카를 차지하고 아이티는 1697년에 프랑스 수중에 떨어졌으며 쿠바 역시 계속해서 공격의 위협을 받았다. 영국 군대는 1762년 6월 6일 쿠바를 침입하여 아바나를 포위하고 11개월 동안 점령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은 4000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고 쿠바의 무역망을 광대한 범위로 넓혔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이 스페인 식민지 시절, 경제의 기반은 담배·사탕수수 재배 등 플랜테이션 농업, 광업, 유럽으로의 - 그리고 나중에는 북아메리카로의- 사탕수수·커피·담배 수출에 두었다. 1783년 미국 독립으로 인한 시장의 창출과 1791년 하이티의 노예 폭동으로 쿠바 설탕 생산의 최대 경쟁자가 사라짐에 따라 설탕 생산이 쿠바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수입되는 수만 명의 노예들 덕분에 1820년까지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설탕을 생산하는 국가였다. 농업에 의하여, 다른 스페인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스페인계 후손인 지주들이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여 사회적·경제적 권력을 지녔다. 이것은 이 섬에서 태어난 스페인사람(이들을 스페인 본토 출신의 스페인 사람과 구별하여 크리올라고 불렀다.)과 다른 유럽사람들 그리고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들 덕택이었다. 더욱이 쿠바는 스페인과 아메리카대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스페인은 이곳을 총독령(總督領)으로 만들고 신대륙 경영의 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본국의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으로 쿠바는 경제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정치적으로도 권리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