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라 왕국

도하라 왕국
東原王國
Kingdom of Dohara
도하라 왕국.jpg
국기
미정
국장
국호도하라 왕국
東原王國
상징국가우리의 땅 유키시마 (雪島)
국화미정
국조미정
표어미정
자연환경면적(영토)32,769km²
인문환경인구7백만 명
인구밀도214명/km²
공용 언어일본어 , 한국어
정치국체입헌군주제
정부형태내각책임제
국왕후가네 타다오府金忠央)
총리미도리카와 타케오 (綠川武夫)
경제GDP$0000
1인당 GDP$0000
GDP(PPP)$0000
1인당 GDP(PPP)$0000
공식 화폐공식화폐
단위
법정연호서력기원
시간대UTC +9

목차

역사

도하라 왕국의 역사는 일본으로부터의 도하라(東原) 번이 설치된 1709년 4월 1일 부터 시작됐다. 일본의 동해 진출로, 지금의 유키시마(雪島)를 발견하게 됐다. 이곳에는 유키시마 원주민이 원시부족 형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유키시마가 동해 쪽에 있다는 뜻의 도하라(東原) 번을 설치하게 됐다. 다이묘(大明, 지방 영주)에는 일본인 후가네 토모스케(府金智介)가 임명 됐으며, 유키시마 원주인 후가네 스크라보(府金----)와의 동침 이후 그의 손자들은 현재까지 유키시마를 통치하고 있다.

1890년 도하라 번은 지리적 특수성을 인정받고, 도하라 부로 승격됐다. 총독은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하사받은 후가네 유키다로(府金幸太朗)가 임명됐다. 후가네 가문은 본국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본국의 적은 간섭으로 고(高)자치권을 누리게 됐다.

별볼일 없이 평화롭던 도하라에 1932년 막대한 양의 석유가 발견 됐다. 그 이후, 일본정부는 도하라에 많은 투자를 붙이며, 도하라의 근대화 및 공업화에 전폭 지원하게 됐다. 1930년 말, 일-중전쟁이 본격화 되면서 東原의 석유는 일제와 지나(중국)과의 전쟁에 큰 도움이 됐다.

부민들은 석유 광출과 근대화와 공업화로 부유하게 됐으며, 특히 득을 보았던 후가네 가(家)는 지금도 세계에서 꼽는 부자 가문이 됐다.

1943년 미군은 일-미 전쟁의 일제 기지와도 같으며, 석유의 원천지인 유키시마를 공격, 점령했다. 석유가 많이 나는 이곳은 미국에게도 사랑을 받고(?) 1949년 미국의 자치령으로 도하라 왕국(東原王國)으로 독립을 하였다. 국왕으로 후가네 타마시이(府金靈魂)가 즉위했다. 외교, 국방을 제외한 자치를 누렸으며, 정치체제는 사실상 국왕과 후가네 가문의 독재체제라고 볼 수 있다. (명목상의 성문헌법은 있음.) 그러나, 부유한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관심이 없었으며 성공적인 경제정책과 폭넓은 지식인 등용 등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됐다. 특히 후가네 타마시이 국왕은 1997년 외환위기를 국제금융업계의 음모로 규정, 서방의 헤지펀드들이 도하라 왕국 내 굼융시장에서 장난치지 못하게 철저히 붕쇄함으로써 외환위기를 피해갔다.

2019년 4월 2일 제 2대 국왕으로 후가네 타다오(府金忠央)이 즉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