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영토의 수복과 이슬람의 발흥 (로마 가상 세계관)

유스티누스 1세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

유스티누스 1세의 치세

“짐의 조카, 페트루스여, 짐은 군영에서만 생활한지라, 국정 운영이 부족하니, 라벤나에 와서 짐의 일을 도우라.” (유스티누스 1세, 조카 페트루스 사바티우스[훗날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보낸 편지 중)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동로마가 멸망하자, 여러 유민들이 몰려왔는데, 그중에 유스티누스 1세도 한 명이었다. 동로마 유민들을 공직자로 많이 받아주었는데, 유스티누스 1세도 이를 기회로 군대에 입대한 뒤, 마요리아누스의 근위대장까지 역임하였다. 마요리아누스가 후사가 없어서, 자신의 근위대장인 유스티누스 1세를 후계자로 삼았으며, 그 직후 사망하였다.

유스티누스 1세는 병영에서 생을 보낸지라, 국정운영을 할 기초적인 지식이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조카 페트루스 사바티우스에게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고, 고등 교육을 받게 한 뒤, 성년이 되자, 그를 라벤나의 궁정에 불러,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유스티누스 1세는 조카 유스티니아누스의 조언에 따라, 동로마 멸망으로 인해 관계가 멀어진 동방 교회와 다시 교류하였으며, 고위 관리와 하층민과의 결혼 금지법을 없애도록 하였다.

또, 조카 유스티니아누스의 조언에 따라, 마요리아누스가 했던, 갈리아 지역군이 재편성되도록 노력하였으며, 반달 왕국이 이집트에 거주함에 따라, 아프리카에도 체계적인 지역군이 편성되도록 하였다. 또,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제국을 구하기 위해, 해군의 증건하였다.

유스티누스 1세는 국정운영에 열중하여, 후사를 보지 못하였다. 유스티누스는 자신의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를 후계자로 삼은 뒤, 얼마 안되서 사망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초기 통치

“고대서부터 현재까지 작성된 모든 법과 판례들을 모아, 하나의 법전으로 만들 것을 명령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로마법 대전 편찬을 명하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고대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황제였다. 그가 즉위하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고대부터 존재해왔던 모든 법과 판례들을 하나로 모아, 책으로 편찬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동방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재정을 튼실하게 했으며, 여러 관료들과 어떤 영토를 수복해야 경제적 이익이 가장 클지도 논의하였다. 또, 정복 사업을 반대 없이 통과시키기 위해,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했으며, 이에 따라, 청색당과 녹색당을 억압하였다.

히포드롬의 반란

“녹색당과 청색당이여, 영속하라.” (히포드롬의 반란[현실의 니카의 반란] 구호)

청색당과 녹색당은 로마 민회의 후예로서, 일종의 정당 역할을 하였다. 황제들은 한 정당을 지지하였고, 지지받지 못한 정당은 황제를 견제하였다. 청색당은 테오도시우스 개혁 이후로 대지주들이 된 귀족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녹색당은 신흥 관료층과 동로마 유민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보통 이들은 대립하는 관계였으나, 황권이 강해져서, 전제화되려고 할 때, 결속하여, 대응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즉위 시점부터 지속적으로 황권을 강화시키려고 하였으며, 양 당 모두를 정치적으로 탄압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양당은 로마의 히포드롬에서 모였으며, 몇몇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와 함께, 황제를 퇴위시키려고 하였다.

“황제의 의상은 가장 좋은 수의입니다.” (히포드롬의 반란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제위를 버리고 도망가려고 하자, 황후 테오도라가 한 말)

라벤나로 사람들이 몰려오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제위를 버리고 항구로 가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황후 테오도라는 그런 시도를 저지하였고, 라벤나가 천연요새라는 점, 라벤나의 삼중성벽은 견고하고 아틸라의 군세에도 함락당하지 아니했다는 점을 인식하게 하여, 도망치지 않게 하였다. 이에 황제는 이성을 되찾고, 충실한 장군 벨라사리우스와 나르세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벨라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군사적 역량을 알아보아, 그들을 수복 사업에 활용할 생각을 하였다.

“솔로몬이여, 짐이 그대를 능가하였도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완공된 라테라노 대성전을 보며)

히포드롬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 교황의 주교좌 성당이자, 황실과 교황청의 우호의 상징인 라테라노 대성전이 불탔다. 라테라노 대성전이 황실과 교황청의 우호의 상징인 이유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로마 교황에게 증여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라테라노 대성전이 불타자, 황제는 재건축을 명하였고, 이를 통해서 라테라노 대성전은 몇 백 년 동안 가장 큰 돔을 가진 건축물로 남았다. [재건축된 라테라노 대성전은 현실의 하기아 소피아와 동일합니다. 단, 모스크로 개조된 역사가 없습니다.]

동방 영토 수복

“고결한 영혼을 지닌 황제는 자연스럽게 제국을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프로코피우스,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아첨하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야만인들에게 함락당한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수복하려고 했던 지역은 상대적으로 이성적인 통치를 하였던 마케도니아, 시리아, 성지인 팔레스타인 유역, 이집트, 소아시아의 해안가였다. 당시 마케도니아는 서고트족이, 소아시아 해안가와 콘스탄티노플은 동고트족이, 이집트는 반달족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은 사산조의 압제에 맞서 로마인 왕국을 건설한 로마-시리아 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증건한 해군과 라틴의 불[현실의 그리스의 불과 같음]을 활용하여, 콘스탄티노플을 황금 각쪽에서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다른 소아시아의 해변가 도시들 또한 그렇게 점령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마케도니아는 나르세스를 통하여, 이집트는 벨라사리우스를 통하여,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고, 로마-시리아 왕국은, 전투 없이 다시 제국 안으로 편입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고대 시절의 제국의 영광이 다시 재현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흑사병이 도래함으로서, 당시 테오도시우스의 개혁으로부터 지속된 도시화로 인해, 도시화율이 높았던 제국은 큰 피해를 얻게 되었고, 황제마저 흑사병에 걸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국 중앙 정부는 수복한 고토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특별한 대우를 원했던 고토의 시민들은 (고토는 각 지역마다 총대주교청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는 콘스탄티노플, 시리아는 안티오키아, 팔레스타인은 예루살렘, 이집트는 알렉산드리아) 점차적으로 제국의 통치에 비협조적으로 대응하였다.

결국 흑사병으로 인해, 제국의 계획된 확장은 과소비로 다가왔고, 이에 제국 재정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고토의 시민들의 비협조로 인해, 몇 번의 침략 이후, 회복된 고토를 잃어버리게 된다.

수복된 영토에서의 침공

“폐하께서는 조용하시다가도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셨다. 하리트라는 이름을 부르면 발작을 멈추셨지만...이런 황제에게 어떻게 제국의 운영을 맡길 수 있을까?” (유스티누스 2세의 황후 소피아의 일기 중)

아바르 족이 침공함에 따라, 점차 수복된 영토들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 갔다. 이는 아바르족이, 수복된 영토와 지속적으로 통치해온 사이의 영토인 일리리아와 다키아 관구 유역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또, 아바르족의 침공에 따라, 파노니아 유역[현실의 헝가리 유역]에 거주했던 롬바르드족을 쫓아내서, 롬바르드족이 마케도니아 유역을 거의 점령하는 데 성공하게 하였다.

또 사산조와 지속적인 전쟁을 지냄에 따라, 유스티니아누스의 수복 사업과 흑사병으로 인해 고생을 받던 제국의 국고에 더더욱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럴 때에, 마우리키우스가 즉위하여, 콘스탄티노플 총독부를 건설하여, 롬바르드 족의 마케도니아 침공을 중지시켰고, 사산조 내부의 반란을 해결하는 데 도와줌으로서, 사산조의 전쟁도 종결시킨데다가, 아바르 족의 침공을 완벽히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포카스의 폭정과 헤라클리우스

“그대가 다스린다면 더 낫겠는가?” (포카스, 헤라클리우스 1세에게)

마우리키우스의 태평성대는 포카스가 반란으로 뒤엎으면서 끝이 났다. 포카스는 대숙청을 통해, 유능한 인재를 학살하였고, 유능한 인재의 부족으로 인해, 제국은 야만인의 침략과 사산조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해, 수복한 동방의 땅을 다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아바르족에 의해 이탈리아가 유린되고, 제국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다. 이 때, 아프리카의 총독 헤라클리우스가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포카스의 공포정치를 종료시켰다.

헤라클리우스 1세가 즉위했을 때에는 갈리아와 같은 서방의 영토들은 아바르 족과 슬라브 족[아바르 족을 제외한 슬라브족은 현실의 다뉴브 동쪽 독일에 위치한다.] 의해 유린되고 있었고, 수복한 동방 영토들은 사산조의 지배를 받게 되어, 최고의 성유물인 참십자가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헤라클리우스 1세는 이 근본적인 문제가 포카스의 숙청으로 인해 군사력이 약화되었음을 인식하고, 점차 군사력을 증강하게 된다.

군사력을 증강하자, 헤라클리우스 1세는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세웠으며, 라벤나 공방전에서 아바르 족과 슬라브 족들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한다. 다시는 참십자가가 빼앗기지 않도록, 라벤나로 이송시켰고, 이로 인해, 제국은 다시 태평성대를 맞이하였다.

이슬람의 발흥

“잘있거라, 시리아여. 그대에게 기나긴 작별 인사를 고한다. 나의 사랑하는 속주여. 너의 아름다움은 이제 이교도의 수중에 있구나. 오, 시리아여, 그대에게 평화가 있으라.” (헤라클리우스 1세 시리아를 떠나며)

헤라클리우스 1세가 되찾은 태평성대는, 헤라클리우스 시절에 끝이 나게 된다. 지속된 제국과 사산조의 전쟁으로, 상인들은 아라비아 반도를 거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아라비아 반도가 발전하게 된다. 이때, 무함마드가 아랍인들을 결속시킬 신념을 창조하니, 이를 이슬람교라고 한다. 이슬람 제국은 아라비아 반도에만 있었으나, 제국과 사산조가 약화된 것을 보고, 제국과 사산조를 침략하였다.

헤라클리우스 1세는 이들을 막으려고 노력하였으나, 노환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또, 시리아와 이집트에는 단성론자들이 많아서, 제국 중앙 정부가 아닌 당시엔 관용적이었던 이슬람의 통치를 받기를 원했기에, 지원을 하지 아니하였다. 결국, 시리아와 이집트는 이슬람 세력의 손에 넘어갔으며, 동고트 족에게 다시 소아시아의 도시들을 빼앗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