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공국

리비아 공국
수도트리폴리 32°52′N 13°11′E
최대 도시트리폴리
 
시간대EET (UTC+2)
인문
공용어아랍어
인구
2018년년 어림7,200,000명
2016년년 조사6,653,210명 (108위)
인구 밀도3.74/㎢ (218위)
경제
GDP(PPP)2019년 어림값
 • 전체703.86억 $ (80위)
 • 일인당11,497$ (82위)
GDP(명목)2019년 어림값
 • 전체676.22억 $ (68위)
HDI▼ 0.769 High (64위, 2019년 조사)
통화디나르 (LYD)
기타
도메인.ly

리비아 공국, 또는 리비아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로, 수도는 트리폴리(아랍어: طرابلس, 타라불루스)이다. 서쪽으로는 튀니지, 알제리와 접하며 동쪽으로는 이집트, 남쪽으로는 니제르, 차드, 수단과 접한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공국 건국 이후 혼란스러워 폭력과 약탈이 난무했으나 강력한 처벌과 공작의 집권으로 인해 사회적 분위기는 대체로 안정되어 있다. 그러나 남부와 동부 일부 지역에서 이집트와 리비아를 넘나드며 활동하는 친카다피반군이 준동하고 있어 이집트와의 군사적 연계가 시급하다고 판단되고 있다.

역사

고대

원래의 리비아에는 베르베르인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에 카르타고, 그 이후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7세기, 이슬람교에 바탕을 둔 아랍 세력이 서진(西進), 북아프리카에 침입해 옴에 따라 리비아는 아랍화했다.

중세 및 근대

15세기부터 4세기 이상 리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되었다가, 1911년 이탈리아와 투르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이탈리아군(軍)이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에 상륙했다. 뒤이어 투르크가 발칸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돌입하자 이탈리아는 1912년부터 두 지역을 하나의 식민지로 만들고 리비아라고 불렀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리비아의 식민화를 강력하게 추진하였고, 1938년이 되면서 9만명에 달하는 이탈리아 이주자들이 리비아에 들어와, 트리폴리와 벵가지 주변에서 농장을 열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해 오마르 알 무크타르 등 리비아 사회지도층은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펼쳐 나갔고,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왕국군과 치열하게 맞써 싸웠다. 이탈리아 장군 아틸리오 테르지는 오마르 알 무크타르를 보고 "특별한 인내력과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란 평을 내릴 정도였다. 그는 쿠란을 강독하는 교사였으나 사막전에도 능해 자주 이탈리아 군을 공격해 승리하곤 했다. 이에 지친 이탈리아는 1929년 휴전을 제의해 휴전이 이루어졌으나 공공연한 리비아 인의 차별 등을 펼쳤다.

이에 오마르 알 무크타르는 다시 이탈리아 군과의 게릴라 전을 선포했으나 군사력이 약해 끝내 1931년 9월 11일 체포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체포당한 이후에도 그는 꿋꿋하게 담담히 처형을 기다렸으며 9월 16일 공개처형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형당한 이후에도 리비아 민중 속에 살아남아 리비아 인들의 저항에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독립과 리바아 왕국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이탈리아에 대한 민중의 저항운동이 거세게 지속되었으나 파시스트의 압정이 심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격전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구(舊)이탈리아 식민지 처리 문제에 대하여 미국·영국·프랑스 및 소련 사이에 이견(異見)이 있었으나 UN의 권고에 따라 1951년 12월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페잔 등 3개 지방의 연방제에 의한 리비아 연합왕국으로 독립하였다.

국왕 이드리스 1세는 1951년 12월 24일 리비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1969년 9월 1일 신병 치료를 받기 위해 터키에 체류하던 중 무아마르 카다피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강제로 퇴위당했고 결국 이집트로 망명하게 된다. 1971년 11월 리비아 인민 법원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83년 카이로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에 가매장되었다가 친국왕파였던 잘릴 가문의 공작 취임 이후 리비아로 돌아와 트리폴리 근방에 매장되었다.

카다피 집권 이후의 리비아

1969년 9월 1일, 국왕의 외유 도중 발생한 무아마르 카다피 대령의 쿠데타는 리비아를 뒤흔들었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화 정책을 추진, 1972년에 이집트, 시리아와 연합하여 아랍 공화국 연방을 세웠지만, 1977년 이집트의 친 이스라엘 정책에 반발하여 탈퇴를 선언했다.

이후 카다피는 리비아를 그 자신의 독특한 이슬람 사회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었으며, 그의 사상은 녹색서(the Green Book)에 잘 나타나 있다. 카다피 정권은 반미주의에 입각하여 미국과 서방 세계를 상대로 수차례의 테러를 감행했으며 (로커비 사건 등), 그 결과 1986년에는 미국의 공습을 받기도 하였다. 그 이후로도 핵무기 개발과 인권 탄압 등으로 리비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가 이루어져, 카다피가 서방에 대한 개방을 선언한 2003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카다피는 서방에 대한 개방과 핵무기 포기 등을 선언하면서 서구권의 기업들을 유치했으며, 이로 인해 경제제제로 침체된 리비아 경제를 크게 일으켰다. 그러나 인권 탄압은 공공연하게 발생했으며, 이 뿐만 아니라 석유 수익 상당수를 카다피가 독점한다는 목소리가 각 부족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오갔다. 이런 와중에 반정부 시위가 발생, 리비아공국의 탄생을 알린 리비아공국 전쟁(2011~2012)이 발발한다.

리비아 내전

2011년 2월 15일 벵가지에서 발생한 시위가 유혈사태로 빚어지자, 각 국의 리비아 대사와 외교관들은 사임을 표명하였으며(2월 21일), 반정부 시민들은 시민군을 결성하였다. 차츰 시민군-정부군의 전쟁으로 비화되던 전쟁은 여러 부족의 참전과 반정부군 지지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이런 와중에 카다피 정권에서 법무장관으로 일했던 무스타파 압둘 잘릴이 반정부군에 참여하였고 카다피 정권의 여러 인물들 역시 반정부군에 참여하였다. 리비아의 핵전 사령관이자 내무장관이었던 압둘 파타 유네스도 이 중 하나였는데, 그의 참여로 인해 카다피는 기존의 핵 탄두가 위치를 알아버린 반군에 빼앗기는 것을 경계, 리비아 남부 사막지대에 숨겨버렸다.

이 가운데 반정부군은 벵가지에서 국가과도위원회를 수립하고 시민들이 결성한 인민해방군을 결성해 저항을 하였으나, 3월 16일 정부군이 벵가지 근처까지 진격하면서 과도위원회와 인민해방군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국가과도위원회를 유일한 리비아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3월 17일 유엔 안보리에서 리비아 사태에 대한 개입을 통과, 이로써 리비아의 전쟁은 새로운 정국을 맞았다. 다국적군(연합군)의 참전은 시민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으며, 군사고문 등의 파견으로 인해 시민군의 질은 크게 향상되었다.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으나 지도자가 없던 국가과도위원회는 무스타파 압둘 잘릴을 투표를 통해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국가과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뽑았으며, 이 때 무스타파 압둘 잘릴(좌)은 자신의 사촌이자 친카다피 군에 잔류 중이던 서부부족연합의 수장 압둘 알리 잘릴(우)을 포섭, 많은 군사력을 포섭하는 동시에 정부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트려 놓았다. 알리 잘리는 리비아 인민해방군의 부사령관으로 취임, 유니스 최고사령관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아 주요 지역을 시민군의 손아귀에 넣었다.

압둘 알리 잘릴은 이때까지는 크게 돋보이는 인물이 아니었으나, 7월 28일 리비아 시민군(반정부군)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압둘 파타 유네스가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 내의 내부 알력에 의해 피살당하고, 이어 7월 30일 벵가지 외곽에서 벵가지로 이동하던 그의 사촌 무스타파 압둘 잘릴 위원장 역시 내부의 반대 세력에 의해 사망하자 인민해방군 부사령관의 직함으로 친위 쿠데타를 선포, 인민해방군을 발빠르게 자신의 손 안에 넣었다.

그가 발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도미니언(러시아)의 지원을 얻었기 때문인데, 당시 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으로 구성된 다국적군에서 제외된 러시아는 의외로 인민해방군이 정부군을 압박하자 리비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 감소를 우려했고, 이에 알리 잘릴을 지원함으로서 리비아에 대한 기존 러시아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국가과도위원회의 주요 위원들을 포섭하고 무스타파 압둘 잘릴 위원장과 압둘 파타 유네스 최고사령관의 피살에 관여된 위원들을 체포해 구금한 그는 인민해방군을 이끌고 주요 전투에서 승리해나가 작전명 '인어공주(mermaid)'를 실행, 트리폴리를 함락했다. 이어 10월 20일 무아마르 카다피가 자신의 고향 시르테에서 사살당하면서 사실상 리비아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남아있는 친카다피군을 수도권에서 몰아내고 사실상 리비아의 통일을 구축한 그는 국가과도위원회를 해산하지 않고 치안을 유지시켰으며, 카다피의 재산들과 국외 재산을 국유화 시켜나갔다. 리비아의 국가과도위원회 2대 위원장에 뽑힌 그는 리비아공국전쟁이 2012년 친카다피 군의 주요 세력을 궤멸시키면서 끝이 나자 친위 쿠데타 당시 자신을 지지하고 후원한 도미니언을 방문했다.

카다피 이후

도미니언 방문 당시 도미니언의 니콜라이 2세에게 리비아 공작위를 받은 그는 리비아로 귀국한 후에 리비아 내 야권단체로부터 "제2의 카다피", "리비아의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도미니언의 경제적인 지원 등에 힘입어 국민투표를 통해 84%라는 높은 지지율로 공식적인 리비아 공작에 취임했다.

이후 리비아 공작이 된 그는 리비아 공국의 발전을 위해 도미니언 제국으로의 편입을 주장했으며, 결국 2012년 리비아 공국은 상당한 자치권을 보장받는 국가로써 도미니언 제국의 제후국이 되었다. 이로써 압둘 알리 잘릴 공작은 초대 리비아 공작이 되었으며, 새로운 리비아의 군주로써 야권과 협력해 정치 개혁 및 국가 개혁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그는 공작 취임 이후 잘릴 가문과 특별한 친분이 있던 이드라스 1세의 유해를 다시 모셔와 국부로써 선포했으며, 잘릴 가문의 공국이 공식적으로 리비아 왕국의 법통을 이음을 선포했다. 또 그 전까지 리비아 내전, 리비아 인민해방전쟁 등으로 명칭이 통일화되지 않았던 전쟁을 공국의 시발점이 된 전쟁이라 평가해 리비아공국 전쟁이라 부르게 하였다.

압둘 알리 잘릴 공작의 자식은 원래 3남 1녀 였으나 첫째 아들인 살레 잘릴과 셋째 아들인 아흐마드 라힘 잘릴은 공국 전쟁 도중 전사했으며, 둘째 아들인 알리 키밧 잘릴은 공국 전쟁 당시 카다피를 지지해 공작의 후계자리가 박탈되었다. 유일한 딸인 하디자 잘릴 공녀가 현재 공국의 제1순위 후계자이며, 압둘 알리 잘릴 공작의 동생인 이브라힘 알리 잘릴 백작이 제2순위 후계자이다.

그러나 러시아 연방제국으로 국명을 변경한 도미니언 제국은 리비아 공국을 침공하여 UED라는 괴뢰 기구를 통한 통치를 실시한다. 이후 공국은 러시아 연방제국으로 부터 독립해 현재에 이른다.

지리

이집트, 튀니지, 알제리, 수단, 차드, 니제르와 국경을 접한다. 리비아의 전체 면적은 1,759,540㎢로 세계에서 17번째로 큰 나라이다. 리비아는 인도네시아보다 조금 작으며 어림 잡아 미국 알래스카 주와 같은 크기이다. 북쪽으로 지중해와 마주하며 남동쪽으로는 니제르, 서쪽으로는 튀니지, 알제리와 접한다.

리비아는 지중해에 인접한 아프리카 국가중 해안선 길이가 가장 길어 전체 해안선 길이만 1,770 km에 이른다. 사막의 열풍이 불어서 피해가 나기도 하는데 리비아에서는 이를 기블리(gibli)라고 부른다. 기블리는 봄과 가을에 하루~4일에 걸쳐 가끔 불어오는데, 이는 사하라 사막 일대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오아시스도 전역에 흩어져 있으며 가장 중요한 식수 공급처이다.

리비아의 국토 다수가 사막이라 척박한 땅을 갖고 있지만 카다피 정권 말기와 국가 과도 정부 시기, 그리고 공국 선포 이후 지속적인 국가 개발을 통해 지리적인 한계점은 점차 개선되어 나가고 있다. 담수화 시설의 확충을 통해 북부 지역에는 다양한 작물이 자랄 수 있게 되었으며, 석유 수출 대금의 30% 정도를 지속적으로 담수화 시설의 확충 및 보수에 쓴다고 발표해 리비아의 척박한 토양은 눈에 띄게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구 통계

언어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외국어로는 주로 영어가 쓰이나,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은 까닭으로 북부에서는 이탈리아어도 사용된다.

종교

국민의 절대 다수가 이슬람 교를 믿는다.

문해율

문해율은 89.2%이다.

경제

주민의 80%가 농경, 목축, 유목으로 생활하고 있었으나 석유가 채굴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도시로 유출하는 경향이 생겨 도시 노동자의 수도 증가하고 있다.

광업

1959년에 유전이 발견된 이래 세계유수의 석유산출국이 되어 경제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으로 농경지가 지중해안의 협소한 지역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전에는 아프리카의 가장 가난한 나라였으나, 현재에는 세계 제4위의 산유국으로 부국이 되었다. 카다피 시절 석유무기화를 제창하여 생산제한·금수·가격인하 등 제반문제에 선봉을 서고 있다.

잘릴 가문의 공국 건국 이후에는 석유에 대한 시출이 국가 재정비로 거의 중단되다시피 해 세계적인 석유파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 석유에 대한 시출이 다시 재개되면서 자원개발공사를 중심으로 많은 석유가 다시금 팔리고 있다.

천연가스 매장량도 상당한 수준으로 알려졌으며, 철광과 암염, 석회석 등의 다양한 광물자원역시 매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카다피 시절 기밀정보였으나 최근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남쪽 사하라 사막 근방에는 은광과 금광도 일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농업

리비아는 본래 농업국으로 밀·보리·감자·대추야자 등 식량작물과 올리브·감귤류 등이 재배된다. 북부 리비아는 지중해에 인접해 있어 지중해성 기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며, 최근 공국의 농업민주화 5년 계획에 따라 '담수화 시설 확충, 농지 개발, 국영농장 설치' 등 다양한 재배 방법과 재배 경작지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또 양·염소·낙타 등이 사육되어 피혁·양털 등을 수출하나 그 양은 극히 적다. 원래 식량의 85%를 수입했으나 농업민주화 5년 계획에 따라 식량 자급률 증가를 위해 국가가 개입할 것을 시사, 세계 5대 메이저 식량회사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2012년 현재 식량 자급률은 34%로, 아직 미미하나 기존의 식량 자급률에 비해 크게 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는 2015년까지 자급률 50%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삼고 있다.

제조업

제조업의 경우 거의 척박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아랍권 기업들의 적극적인 유치를 통해 제조업을 성장시켜 가고 있으며, 해외 유명 기업들의 유치 및 국가 중심의 제조업 산업 진흥에도 힘쓰고 있다.

인건비가 다른 제3세계 국가들에 비해 비싼 편이지만 국민의 의식 수준과 교육 수준이 높고, 국가의 지원금 등의 요인등에 따라 최근 상당한 제조업 기업들이 리비아 공국으로 공장을 옮기거나 혹은 확충하고 있다.

단순 제조업(가발, 모자, 섬유업)이 전체 제조업의 70%를 차지하지만 중화학 공업 역시 30%에 육박할 정도로 크게 성장 중이다. 중화학 공업들은 주로 해안가에 위치해 있으며, 과도정부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다수다.

문화

카다피가 이슬람 사회주의를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12년 공국기본법의 새로운 제정에 따라 기존의 종교적 차별의 완전 철폐와 제정분리 입헌군주제를 꾸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