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

만주제국

국기파일:만주국 국기.
국장파일:만주국 국장.
면적1,972,550 km2
인구80,796,179명
건국1945년 8월 15일 (일제 독립 선언)
1949년 12월 1일 (쿠테타로 인해 군정 종료)
수도하얼빈
공용어한국어(사실상)[1]
정부 형태내각총리제, 만주식입헌주의(임기: 4개월 중임제), 총리제
총리[[이치로 료스케]
임기2018년 3월 14일 2018년 9월 25일 (예정)
국가만주 찬가
(러시아어: Манчжурия Гимн )
명목 GDP2조 230억 $ (2017년 추정)
GDP(PPP)3조 106만$ (2014년 추정)
1인당 명목 GDP25,121$ (2017년 추정)
1인당 PPP30,121$(2014년 추정)
인종황인종 60%,원주민계 20%,백인 10%,[흑인인]] 10%
종교국교 기독교
기독교 79%가톨릭11%도교9%), 토착신앙과 기타종교 2%
화폐단위[[만주국 위엔]

역사

1931년 일본제국의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아이신 교로 푸이 (선통제)를 옹립 하여 만일의정서 체택 이에 만주국이 건국 되었다. 역사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괴뢰만주국 또는 위만주국(僞滿洲國), 약칭 위만(僞滿)이라고 부른다.
①만주정통정부
1931년 12월 25일, 만주인들은 민족대표 11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독립을 위한 12·25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대체로 각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던 장(시장)의 개장일에 맞추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일본은 한국의 사건을 교훈 삼아 즉각 11인을 채포 및 일부를 교수형에 처하고 만주국의 감시를 더욱이 강하 하였다. 또한 통치 방식을 한국처럼 문화 통치로 전환하였다. 이는 국내외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3월 11일, 12·25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중화민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것처럼 만주국의 인사들은 상해에 임시정부 역할이던 만주정통저부를 수립 하였다. 과거 만주공화국 시절에는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대통령제와 3권 분립을 채택하고 만주의 독립을 위하여 외교·군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노선의 갈등으로 여러 인사들이 빠져나가면서 정무원 중심의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고, 일제의 방해까지 겹쳐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다.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탈이 가속화되자 내륙으로 청사를 이전하여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 충칭에 정착하였다. 이후 대방령를 주축으로 주석중심제로 재정비하고 한국(조선) 독립운동가인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건국강령으로 채택하였다. 12·25운동 이후 무장봉기로 활동한 을지 장군의 조국해방군을 흡수하여 독립군을 조직하여 한국임시정부와 함께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1942년 2월에는 대독 선전포고까지 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자 하였다. 1942년에는 공화정 세력인 만주민족혁명당의 조소방, 서서녕 세력과 견천, 선갑천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민족통일전선 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앞선 한국 임시정부와 선전포고로 인해 한국임시정부와 동맹 관계 상태로 1943년 버마 전선의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고자 공작대를 파견하여 일본군 포로 취조 및 암호 번역, 선전 전단 작성, 대적 회유 방송 등을 하였다. 또한 미국 OSS와도 연계하여 1945년 7월을 기한으로 민족해방의 날(만주 판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으나,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현행 만주제국 헌법 전문에는 만주제국은 12·25운동에 따라 건립된 과거 만주왕국 정통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었다.

②소련 군정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만주왕국은 일제 치하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만주지역은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신탁 통치하에 들어갔다. 소련 군정기간 동안 소련은 만주지역의 조차를 포기 하고 중국정부에 만주지역을 반환한다는 소식을 접한 만주 정통정부 인사들은 소련에 항의 하였고 이에 군정 후 독립국가 건설시 소련에 만주지역의 자원 및 일본제국에 상환 받은 만주지역 철도 조차권을 20년 동안 소련에 넘기 다는 내용의 블라디보스톡 조약을 체결하여 만주인들의 중국 화를 미연 방지 한다. 블라디보스톡 조약 이후 과거 공화정 세력과 왕정세력인 탕핑린,소소령 등은 1944년 설립한 지하조직인 건국연합위원을 모태로 만주건국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9월 탕핑린, 소소령 등에 의해 만주인민공화국 내각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1945년 11월 중화민국 쓰촨성 충칭에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만주정통정부 요인들과 '정통론' 문제로 갈등이 벌어졌고, 소련군정은 바실렙스키 포고령에 따라 인공 내각(만주인민공화국 내각)과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인공 내각은 해산되었다. 1945년 12월에 만주 내에는 정통정부와 공화정 세력 간의 좌, 우익 세력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곧이어 1946년 5월에는 소련만주공위가 개최되었으나 양측의 주장이 엇갈려 결렬되었다. 이때 탕핑린, 소소령, 김부석, 장보롄 등은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개시하여 소련마주공위를 재개하고자 하였지만, 만주민족당과 만주노동당 등 좌우익세력간에 불참으로 중도파 세력만의 운동으로 축소되었다.

③만주인민공화국 수립 및 2공화국

소련의 군정으로 인해 군사안보는 소련군정하의 국경경비대를 일반 치안경찰 수준의 경비대로 창설 하였으나 과거 만주군은 소련친위대격인 수도방위군으로 창설 하였다. 이에 따라 수도방위군 과 국경경비대의 차이가 심화 되었다. 불평등 차별에 불만을 느낀 국경경비대는 이때 소련군 군사훈련을 받고 귀국한 리홍정은 이에 국경경비대들의 심리를 이용 봉기 하고 단숨에 군을 장악 하였다. 1946년 8월 8·8 군사정변 이후 정통정부를 장악한 리홍정의 군사세력은 블라디보스톡 조약을 승계하는 내용의 신징조약을 체결 하며 만주인민정부공화국의 수립을 인정 하여 만주지역내의 단독 정부로 인정받게 되어 소련군정단은 해산 하였다. 또한 인민정부의 정통성 및 타당성을 국제사회에 홍보 하였다. 1945년 10월에는 북조선인민위원과의 긴밀한 관계를 갖고 1945년 11월 11일에는 만주인민헌법을 개정하여 초대헌법인 만주인민헌법이 구성 되었다. 익월인 12월 13일에는 정통정부의 왕정 수장인 애신각라 부호가 미국으로 망명 하여 정통성이 인정 되지 않자 이듬해 1946년 1월 1일 공화정 세력 중 하나인 만주노동당을 흡수 만주인민당을 창설하고 군사정부세력을 이용 만주민족당을 해산 시키어 리홍정을 1대 만주 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당선하게 된다.

1946년 1월부터 당선 된 리홍정은 2차 개헌에는 헌법 수립 중 기간을 5년 임기에 3선 금지 조항 철폐 및 주석의 권한을 막강하게 하는 내용으로 개정 하였다. 향후 5년간 리홍정의 폭압으로 불만으로 국민의 민주주의 운동이 발발 하였다. 1951년 민중이 봉기 되고 서방세력에서 귀국한 만주지식인들은 국내에 민주주의 운동을 전개 하였고 5.16 라오중 사건이 발생하자 민중은 무장봉기로 인민세력과의 게릴라전을 펼치게 된다. 또한 1951년 6월 민중항쟁 중 리홍정이 신징 연설 중 피습 당하자 정부는 인민정부는 붕괴 되고 민주 정부가 설립 된다. 또한 민중 지도자인 김이룽 정권은 민주주의를 지향하기 위하여 만주국의 직접 선거를 통하여 당선하게되어 만주민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김이룽 정부는 민주주의 정통성을 위해 미국과의 수교 및 서방세력의 지원 받기위해 노력 하였고 한국전쟁 당시 소련과 함께 북한을 지원 하던 만주민주공화국은 중립을 선포 또한 미국과 연합국 및 한국과 북한에 대한 양국공동의 의료지원을 선포하였다. 이후 한국전쟁 종류 후에는 미국에 지원 하에 유엔에 가입 하였고 과거 냉전시대 소련과 중국 등의 공산화세력의 위협에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언론의 자유와 만주국의 정통성을 위해 미국으로 망명한 애신각라 부호 및 왕족들을 귀국시키려 하였지만 그들의 거절로 무산 되었다.

④제3·4공화국

1959년 3월 21일 일본계 출신인 만주노동당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야마모토 타로스케가 대통령 직선제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3·21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여야가 합의하여 대통령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한 개헌이 성사되었다. 이로써 야권의 정치 참여가 허용되었으며, 1959년 치러진 제4대 총선에서는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나왔다. 만주노동당은 불리한 여론을 극복하는 돌파구로 3당 합당을 추진해 공화당을 탄생시켰다. 또한 리홍정 측근에 대한 사법조치를 단행(국정감사)하고 민간인들을 정계에 대폭 고용하기도 하였으며 경제개발기획 및 국가발전을 꽤 하였으며 소련과의 관계회복에도 노력하였다. 1963년 만주경제 붐에 성공하여 만주국의 근현대사의 반환점을 마지 하였다. 또한 인구증징을 위해 해외난민 유입을 꽤 하기 도 하였다. 1964년 치러진 제 5대 대선에서는 만주민주당의 강료은이 후보가 당선되면서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국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당면한 과제는 군인들의 색깔론진형을 통합 하는 것 이었고 경제 붐의 유지 및 자유주의 경제정책 이였다. 그러나 강료은 대통령의 1965년 6월 5일 다롄 산업단지 시찰 때 이용하던 대통령 전용헬기가 추락하면서 대통령이 사망하게 이르자 국회에서는 비상사태 선포를 하였고 바로 부통령이던 왕이천 내각이 구성 되었다.

⑤내전 및 제 5공화국

왕이천 내각이 구성 되면서 3차 개헌을 통해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구성했고, 언론 자유와 혁신계 정치활동을 허용을 강화 하였다. 또한 군벌조직 방지를 위해 군인들의 권력 축소 및 권력의 중립에 제동을 걸자 군인들은 반발 하여 1965년 4월 15일 송림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봉기하여 내전이 발생 하였다. 이에 정부는 계엄을 선포 하였고 당시 송림과 갈등을 이룬 군부세력을 규합하여 반정부군에 대항 하였으나 1979년 남과 북으로 나뉘어 대립 하였고 이후 1983년 2월 7일 송립 세력이 정부를 통합하여 약 18년간의 군사독재정부가 탄생 되었다. 남북으로 대립 할 때 18년 기간 동안 속에 송립이 아들 송희립이 집권 하였고 정당성을 위해 3차 개헌을 선언하여 송씨 가문의 만주지배를 위한 법안을 수정 하였고 이에 미국에 망명하였던 왕실은 송씨가문의 부당성을 홍보 하였고 만주왕실 부활 필요성을 느낀 왕실은 1989년 만주왕실 및 국민 부흥군을 조직 미국사회 및 세계사회에 송희립 정부의 부당성을 선전하기도 하였다. 1999년 7월 8일 에는 랴오닝성 다롄에 민주항쟁이 발생하였고 이에 군사정부는 다롄에 계엄을 선포하였고 다롄 지역에 과거만주군의 특수부대인 특전공수사령부 2공정대를 투입 무력으로 시민들을 진압 하자 소요가 푸신 번시 까지 번지자 군사정부는 극단적으로 공군을 투입하여 해당 지역에 무차별 포격까지 강행한다. 또한 만일협정을 통해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동시에 외한을 보유하고자 하였다. 또한 공군 투입으로 설량한 시민들을 폭격한 정부에 항거하여 만주지역에 국민들이 일어나 2001년 1월 7일 국민무장봉기가 발생한다, 국제사회에서도 현 정부를 비난 하였고 현 정부를 불법정부로 간주 만주국의 정통성은 미국의 망명한 왕실에 있다 라고 하며 왕실 및 무장봉기한 국민들을 지지 하였다. 이 기간에 송희립은 2001년 9월 19일 송희립에 불만을 느낀 인민공안국 부장 김규 와 국가정보국 부장 연설수가 모의 하여 송희립을 암살 하였다.
⑥만주제국 수립
2001년 9월 19일 송희립 암살 사건으로 군사정부는 붕괴 되었다. 이에 정치권은 빠르게 국회를 가동 하였고 송희립 암살 사건을 조사하고 사후 처리를 진행 하였으며 송희립 암살 사건 주모자인 인민공안국 부장 김규는 사형을 선고 받았고 국가정보국 부장 연설수는 20년 징역형을 선곡 받는다. 또한 국회는 최제봉 내각이 구성 되었고 국민투표를 진행하여 정치체제 선호도 투표를 진행 하자 입헌군주제를 선호한다가 51%의 찬성표가 나와 결국 내각은 미국에 망명 한 왕실 후손인 애신각라 타페히를 옹립 하였다. 타페히 옹립 후 2002년 1월 1일 타페히 왕조 즉위식이 강행 되었고 2002년 2월 7일 5차 개헌으로 국민헌법이 개정 되었다. 2002년 3월 1일에는 총리선거가 진행 하였고 이 민주당 후보인 하토스케 이치로가 당선 되었다.

2003년 6월 7일에는 리오베르트 왕조(가상 섬)가 합방을 요구 하였다. 이에 국제사회

감시 하에 합방을 선어 하였다. 또한 국민투표에서 칭제가 41% 칭제 찬성에 따라 만주왕국은 만주제국에서 칭제를 선언 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를 인식하여 국내에서만 제국이란 호칭을 사용하기로 하였고 국외에서는 만주연방왕국의 호칭을 겸 하기도 하였다. 2004년 11월 7일에는 국제연합에 가맹 한다.

국방

만주국은 주변의 적성국가인 북한 과 중국을 견제 하기 위해 다방면적으로 자주국방을 실현 해왔다.

제국군

  • 육군 부분

보병:83만명 근무/126만 명(예비군)
장갑차:19000대
야포:2100문
전차:4100대

  • 해군

고속정:130척
호위함:56척
구축함:49척
이지스함:44척
잠수함:6척
상륙함:9척
경항공모함:2척

  • 공군

전투기:617(300기 순차 퇴역중0
공격기:50기

헌법

헌법은 만주제국 카페북를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지리

  • 지리

①흑룡강성

헤이룽장 성의 지형은 산악지대와 평원이 교차하여 분포하는 형태를 보인다. 주요 산지로는 다싱안링 산맥(大興安嶺山脈), 샤오싱안링 산맥(小興安嶺山脈), 장광차이 산(張廣才山), 랴오예링(老爺嶺), 완다 산(完達山) 등이 있다. 가장 높은 곳은 지린 성과의 경계에 솟은 다투딩쯔 산(大禿頂子山)으로 1690m이다.

산맥들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저평한 평원이 펼쳐져 있는데, 주요 평원으로는 둥베이 평원(東北平原)을 이루는 싼장 평원(三江平原), 싱카이호 평원(興凱湖 平原), 쑹넌 평원(松嫩平原) 등이 있다. 아무르 강의 지류인 쑹화 강(松花江), 넌장 강(嫩江), 무단 강(牧丹江) 등이 평원을 흐르고 있다. 성의 북쪽 경계는 아무르 강이며, 싱카이 호(興凱湖)는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크라이와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헤이룽장 성은 아한대 기후이다. 겨울은 춥고 길며 평균기온은 1월에 -31도에서 -15도 사이이며 여름은 짧고 시원하고 평균기온은 18도에서 23도 정도이다. 평균 강우량은 500-600mm이며 여름에 그 대부분이 내린다.

②랴오닝성

랴오닝 성은 세개의 지리적 지역으로 구별할 수 있다. 서부의 저산성구릉지대, 중부의 평원, 동부의 산지이다. 서부의 구릉지대는 주로 누루얼후(중국어 간체: 老鲁儿虎, 정체: 老魯兒虎) 산지이다. 이 산지는 랴오닝 성과 내몽골 자치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중부의 평원은 랴오허 강의 유역이다. 이 지역은 대체로 평평하고 고도가 낮다. 동부지역은 장백산(중국어 정체: 長白山)과 천산(千山)으로 대표되는 산지이다. 산지는 바다로 이어지면서 랴오둥 반도를 형성한다. 랴오닝 성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화보쯔산은 이 지역에 위치한다. 평원으로는 랴오허 평원이 있으며, 랴오허(중국어 정체: 遼河), 훈허(중국어 정체: 渾河), 타이쯔허(太子河), 다링허(중국어 정체 大凌河), 샤오링허(중국어 정체: 小凌河) 등이 있고 북조선과의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이 있다. 해안에는 약 500여개의 섬이 있다.


③길림성(류베이주,성)


지린성은 남동부가 높고 북서로 가면서 낮아지는 형태를 보인다. 평원은 전체 면적의 30~40%를 차지하고, 산지 구릉 지대가 60% 가량 된다. 주요 산지로는 백두산(白頭山), 지린하다산(吉林哈達山, 길림합달산, 2402m), 룽강산(龍崗山, 용강산, 1986m), 라오링(老岭) , 다헤이산(大黑山, 대흑산, 2168m) 등이 있다. 백두산은 둥베이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높이는 2691m이다. 주요한 평원과 분지로는 쑹넌(松嫩) 평원, 쑹랴오(松遼) 평원, 옌지(延吉) 분지, 훈춘(琿春) 분지, 둔화(敦化) 분지 등이 있다.

지린성의 수계는 크게 넷으로 나누어지는데, 가장 동남쪽으로 흘러가는 압록강과 두만강, 남쪽 경계를 따라서는 랴오허 강의 지류들, 그리고 나머지 지역들은 아무르 강의 지류들인 쑹화 강과 무단강이다.

지린성은 북방 대륙성 계절풍 기후에 속하며 길고 추운 겨울과 짧고 따뜻한 여름을 관찰할 수 있다. 1월의 평균 기온은 -20에서 -14도까지 떨어지며, 7월에는 16도에서 24도 사이에 분포한다. 연 강수량은 350~1000mm 정도이다.

④만주령 네이멍자치구(랴오베이주-랴오닝성-허베이성 경계로 몽골 국경까지 맞다는 행정구역)

동서로 길게 뻗고 있어 동쪽에서 차례로 헤이룽장 성, 지린 성, 랴오닝 성, 허베이 성, 산시 성 (산서성), 산시 성 (섬서성), 닝샤 후이족 자치구, 간쑤 성과 남쪽으로 접해 있으며, 북쪽은 몽골, 러시아와 접하고 있다.

외교

만주제국의 외교는 아래 참고 하십시오

현 수교국

  • 남화민국령 정운백제
  • 바람나라
  • 아인제국
  • 빈트제국
  • 이스라엘
  • 오월국
  • 플란드왕국
  • 앨런제국 대사관
  • 대독일제국
  • 러시아제국
  • 아리매제국
  • 남경정부
  • 북아프리카연방 대사관

만주제국은 현재 가상국가 답게 영토분쟁을 사전 조율하는 새로운 외교인 게이트라는 외교 정책을 고수 하며 현재 시범 운행 중이다.

  • 게이트란 게이트 자위대 그의 땅에서, 이처럼 싸우며 애니를 참고 하여 구상한 외교로 어떤한 이유로 영토가 겹치는 국가에서 서로 오고 갈 수있는 게이트가 열려 교류 할 수있는 외교이며 빈트제국의 중재로 이한공화국 과 접촉 삼국 정상들이 블라디보스톡을 통해 회담 결과 삼국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 하며 블라디보스톡 회담을 걸치며 약 3차례 회담을 통해 회담을 진행 하고 있다.그러나 가상국제연합 속에서 한빛민주공화국-이한공화국간 분쟁이 발생하자 만주제국은 입장을 표명 하며 게이트 회담을 연기 한 바 있다.

-현 게이트 시범 운용국

  • 이한공화국
  • 대진제국

블라디보스톡 조약문 내용

1.위 회담을 게이트시범운영회담이라 하며 약칭 우스리크 회담이라 한다
2.중재국인 빈트는 빈트제국으로 협의국인 만주는 만주연방왕국 이한는 이한공화국라고 칭한다
3.양국은 공동세계관을 배제한 게이트 외교를 시범 운영 한다.
4.양국은 영토 및 역사 설정이 비슷하거나 겹치기 때문에 게이트 외교를 통해 영토 분쟁을 최소화 한다.
5."게이트"란 게시판을 양국에 신설 하며 영토가 겹치는 수교국이라 쉽게 알도록 표기 하며 게이트 소속으로 대사관을 신설 한다.
6.대사관 및 게이트 위치는 양국의 논의 하여 지정 하며 지정된 위치는 양국의 논의한 특별법에 속하게 된다.
7.게이트 게시판 신설 조건은 영토가 겹치는 국가가 B국으로 부터 수교를 신청 할 때 신청 승인 후 부터 신설 가능 하며 A국 과 B국이 같은 영토를 운영 하며 외교 활동시 겹치는 국가인 C국도 게이트 게시판을 자동 신설 하여 혼란의 방지를 차단 한다
8.위 운영은 조약을 체택한 국가 중 한 국가가 소멸 또는 망국 되면 자동 페기 되며 해당 망국민 중 일부 난민을 희망하는 국민은 게이트 외교 지역을 통해 난민을 신청 할 수 있다.

위 내용은 제1차블라디보스톡 회담 이후인 제2차우스리스크 회담으로 결정 된 내용문이다.

  1. 만주국는 특이하게 국어(영어로 national language)는 있고 공용어가 따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나라인데, 국어로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만주국 국내 원주민 언어를 포함해2개의 언어를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식적 언어 생활이 한국어로 이루어진다. 그 외에도 영어/표준중국어/러시아어가 상용어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