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군벌

이괄의 난은 조선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며, 인조의 정통성을 뿌리부터 흔들었던 대민란이었다. 정충신은 사병이 금지된 조선에서도 여러 야인들로 구성된 독자적인 군벌집단을 조선영토 이외의 영토인 4군 6진에 설치하고 있었으며 이를 이괄 토벌에 적극적으로 이용하므로서 이괄을 진압할 수 있었다.

마탄 전투가 끝나고 4일 후, 정충신은 남이흥과 함께 2천명의 병력으로 야밤에 숨어들어서 이괄 군을 도발한다. 이에 낚인 반란군은 전 병력을 동원해서 안현에 세운 정충신의 진지를 공격하지만, 고춧가루와 함께 돌풍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한명련이 죽고, 이괄은 패했다!"라고 소리쳤던 남이흥의 기지 덕분에, 병사들이 탈주하면서 지휘권이 와해되고 한양을 점령한지 2일 만에 대패했다. 남이흥의 진지가 박살나는 와중에도, 정충신 군의 진지는 굳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러모로 이 승리는 행주대첩과 비슷하게 분석되기도 한다.

이괄의 난 1달 후 인조는 안주목사 정충신과 연안부사 남이흥을 불러들여 후금에 대해서 묻고, 정충신은 후금의 군사가 압도적으로 강력하다고 하며 야전에서는 후금의 기병에 상대가 안되니 성을 이용한 수비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괄의 난에 의해 6000명, 7000명이던 안주성의 수비 병력도 2000명 밖에 남지 않았고, 3000명, 4000명은 되어야 안주성을 지킬 군사력이 된다고 한다. 또 남이흥 역시 올해에는 남쪽에서 군사를 징발하지 않아 군사가 터무니 없이 적다고 한다.

인조는 군사가 적은 것은 상관없고, 장수가 중요하다고 하며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뭔 소용이냐고 따지다가 후금의 군사력의 규모를 묻는데 정충신은 대략 9만에 말도 명마로 1만 필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영조대나 가서야 겨우 회복된 서북방위 전력이라 인조로서도 적은 오랑캐고, 열심히 싸우면 된다는 정도의 원론적인 답밖에 해줄 수 없었고 무장들도 답답해 하는 것말곤 할 말이 없었다.

연대기

1612년 누르하치와 북부 진족 연합전선
1618년 만주 통일, 대량 난민 사태 발생
1626년 이괄의 난과 충무공 정충신의 북부 군벌 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