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의 개혁과 고대 말기 (로마 가상 세계관)

테오도시우스의 개혁

서로마 야전군 개혁

“서방군을 지방군과 중앙군으로 나누고, 지방군은 훈련을 제외하면 자급자족 하도록 하며, 중앙군은 중앙정부의 월급을 받아 생활한다.”(메디올라눔 칙령 중)

제국 전체의 황제로 즉위한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서방 속주들을 지키기 위해선, 개혁을 실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좋은 상태에 있었던 동방 속주들에는 장남 아르카디우스와 관료집단에게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자신은 서방 속주들 개혁에 집중하였다.

서방의 군대는 사산조의 대규모 정규군이 아닌 게르만족의 소규모 군대를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과, 군대 입대를 꺼리는 사유가 군 생활 시 재산 축적이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이에 서방 군대에 한해서는 둔전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침입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지방군과 큰 침입을 대비하는 중앙군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지방군은 평시엔 농사를 지으며, 재산을 축적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농사에서 얻은 수익을 월급으로 대체하였기 때문에, 중앙 예산을 군사에서 줄일 수 있다.

또 기병대의 필요성을 느낀 테오도시우스는 마케도니아 지역을 비롯한 좋은 군마가 나는 지역의 말들을 서방에서 자라게 하여, 서방 기병대의 기반을 잡게 하였다.

군 체계가 틀을 잡아가자, 서방 내부는 야만인의 침입으로부터 점차 안정되었으며, 이로서 내부 개혁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마 내부 개혁

“적그리스도가 있다면 테오도시우스 그 자일 것이다. 어찌하여, 열렬한 신자인 우리를 이교도로 몰아, 재산을 몰수하고, 죽임을 당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죽어서도 그 자를 저주할 것이다.” (코넬리아의 일기 중)

오현제 시절 때, 제국 서방의 무역은 도로를 주로 통해서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테오도시우스는 도로망을 정비하고 추가로 구축하였다. 무역을 활성화시킴으로서, 무역의 거점들인 도시에 사람들이 몰리게 하여, 도시화를 진행시켰다. 도시화가 진행되자,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되는 그리스도교 교세가 서방 속주들에게도 빨리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국가 기초 산업인 농업 생산력이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인식하여, 생산력이 높은 북방식 농업을 서방 속주들에게 전파하였다.

또, 서방 속주들 토지 대다수가 전통적인 귀족 세력들에게 잠식되어, 경제 발전에 저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자, 전통귀족들을 이교도나 아리우스파라고 프레임을 씌워서,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로 귀속시킨 뒤, 농노들을 자영농으로 만들어 주거나, 중앙군 월급을 충당하는 땅으로 사용하였다.

동방 속주에 비해, 관료층와 학자들이 부족하다는 것도 인식하여, 동방의 유능한 관료들과 학자들을 일부 데려왔으며, 도시들에 관료 육성 학교와 학문을 연구하는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서로마 제국의 수도를 라벤나로 하였는데, 라벤나가 방어에 최적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국의 두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라벤나에 삼중성벽을 세웠는데, 이 두 성벽을 각각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이라고 한다.

이러한 내부 개혁들은 서방 속주들을 수호하는 군대들을 재건하여, 적들로부터 자신을 수호할 수 있게 하였고, 관료층을 성장시켜서, 서방 행정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게 하였다. 학자들을 확충하면서 서방이 학문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세웠다. 또, 무역과 주류 농법을 북방식 농법으로 만들면서, 경제 발전을 도모하였고, 훗날 있을 소빙하기를 서방 속주가 대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경제구조를 바꿈으로서 장기적으로 경제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도시화 정책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서방 속주들에게 빨리 퍼지어, 서방 내부가 종교를 통해 안정되게 하였다.

게르만 대이동과 훈족의 침략

게르만 대이동

“제국 서방을 짐의 손자 발렌티니아누스에게 맡기며, 아에티우스를 섭정으로 한다.”(테오도시우스의 유언 중)

테오도시우스가 장수한 탓에, 그의 아들들과 사위 스틸리코 모두 사망하여, 그의 손자에게 서방의 제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이때를 노리고, 많은 게르만족들이 침공하였으나, 브리튼 제도를 점령한 앵글 족과 색슨 족, 주트 족을 제외한다면, 아에티우스에 의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서방에서 실패한 까닭에, 많은 게르만 족들이 군사력이 분산되어 있는 동방을 침공하였고, 반달족은 이집트에, 서고트는 마케도니아에, 프랑크는 트라키아에, 동고트는 아나톨리아에 정착하게 된다.

이 게르만 족들이 약탈하려는 이전과 다르게, 지속적으로 정착지를 찾아서 욺직였는데, 이는 훈족이 그들을 원래 정착지로부터 밀어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게르만 족들이 밀리자, 훈족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훈족과 제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훈족의 침략

“제국의 절반을 주지 않는다면, 침공하겠소.” (아틸라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보낸 편지 중)

초창기의 훈족은 조공을 받기 위해 침공 협박을 하였고, 제국에 실제적인 문제가 되었던 건, 그들의 침략으로 인해 거주지를 잃은 게르만족들이었다. 군사적인 여유가 없었던 동방과 달리, 서방의 군사력은 분산되어 있지 않고, 게르만 족의 침략만을 막았기 때문에, 훈족에게 공납금을 바치지 않았고, 훈족의 지도자들도, 서방의 저력을 알았기에, 침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틸라가 즉위하면서, 이 얘기는 달라졌다.

아틸라는 제국의 절반을 주지 않는다면 침공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게르만 족과의 전투만 하였던 서방 중앙은 훈족도 그런 게르만 족의 일종이라고 치부하고, 무시하였다. 이로 인해, 아틸라는 서방을 침공하였다.

“오 주시어, 저희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채찍으로 저흴 때리시나이까?” (아틸라의 침공에 대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평)

아틸라가 갈리아 지방군을 궤멸시키자, 서방 중앙은 즉시 당황하였고, 아에티우스로 하여금 중앙군을 이끌어, 아틸라의 침략을 저지하게 하였다. 아에티우스는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를 저지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서방 중앙은 일시적으로 안도하게 된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로 인해 궤멸된 갈리아 지방군을 다시 구축하기 위해, 아에티우스를 갈리아로 보내었다. 이때, 아틸라가 다시 침략하여, 북부 이탈리아를 유린하게 되었다. 라벤나의 삼중성벽 앞에서 공성을 하던 아틸라를 무찔러, 그가 서방을 다시는 유린하지 못하게 한 장군이 있었는데, 그가 마요리아누스였다.

마요리아누스는 중앙군의 일부를 가지고, 라벤나에서 아틸라를 무찌르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마요리아누스는 황제의 사위가 된다.

서고트 족의 침공과 마요리아누스의 치세

“짐의 사위는 짐이 고를테니, 그대는 갈리아 지방군이나 잘 구축하게!”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아에티우스에게 보내는 서신 중)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마요리아누스를 자신의 사위로 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에티우스는, 자신의 아들을 사위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반감을 가졌다. 이에, 아에티우스가 항변하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그와 언쟁을 벌였으며,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가 제위를 노린다고 생각하여, 그를 암살하였다.

아에티우스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서고트 족이 이탈리아를 침략하였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전공을 얻어 군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상대적으로 쉬워보이는 서고트 족과의 전쟁을 친정한다. 이 때,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사망하게 되고, 마요리아누스가 제위에 오르게 된다.

“우리는 모두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일치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이시고 같은 성자이심을 고백하도록 가르친다.

바로 그분께서는 신성에서 완전하시고 같은 분이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같은 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이성적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참으로 인간이시다.” (루그두눔 신경 중)

마요리아누스 1세는 서고트 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갈리아의 군대를 재편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아틸라로 인해, 폐허가 되었던 도로망을 복구하였으며, 교황 레오 1세의 부탁에 따라, 루그두눔 공의회(현실의 칼케돈 공의회 위치)를 개최하였다. 루그두눔 공의회에서 단성론을 파문하였으며, 단성론자들을 쫓아내고, 참 신앙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게르만족과 사산조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던 동방과 달리, 서방은 지속적으로 학문의 발전이 있었기에, 점차 학문의 중심지가 서방으로 이동하였으며, 루그두눔 공의회는 해당 이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공의회들은 서방의 황제가 소집하여, 서방에서 이뤄지게 되었다.

동로마의 멸망

“비록 새 로마와 제국 동방은 멸망하였지만, 아직 옛 로마와 서방은 견고하다...우리의 옛 땅을 언젠가는 되찾으리라.” (마요리아누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마르키아누스 사망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의 대가 끊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위를 향한 내전이 일어났으며, 이를 틈타서, 동고트 족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해,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는 데에 성공한다. 삼중성벽으로 인해 정공법으로 함락시킨 것은 아니나, 물자를 끊기게 하여, 굶주리게 하여,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항복하게 하였고, 결국 제국 동방 중앙 정부는 멸망하게 되었다.

이 때, 동고트족의 왕은 마요리아누스에게 동로마 제관과 휘장을 바치었으며, 마요리아누스는 제관과 휘장을 받고, 제국이 다시 한 명의 황제에 의해 다스려짐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옛 영토의 수복 의지를 보였다.

제국 동방이 함락되자, 제국의 외교엔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이제 동로마 지역에 살던 야만인들을 포섭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그리하여, 동고트 왕국의 아나톨리아와 콘스탄티노플 일대의 지배를, 서고트 왕국의 마케도니아 일대 지배를, 프랑크 왕국의 트라키아 일대의 지배를, 반달 왕국의 이집트 일대의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그들을 속국으로 임명하였다. 그 외의 지역은 사산조가 점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