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벨 제국

슈타벨 제국
Stabbelische Reich
슈타벨 제국의 국기
슈타벨 제국의 국장
국가55번 병사의 노래
영토
슈타벨 제국 영토
인구81,254,327명
국가 원수디트리히 슈타벨 제국 대제
수도젠트룸
공용어독일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정치체제군주정 파시즘
경제체제국가 통제적 자본주의
화폐단위글뤼크
GDP2조 3124억 USD
국조검독수리
진영유럽 국가 연합

개요

동유럽 대부분을 장악한 군국주의 국가로, 세계 정세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들 중 하나이다. 과거엔 열강들에게 물어뜯기고 내정이 간섭당하였으며 이로 인해 20세기에 외세 및 친 외세 괴뢰정부에 의해 죽은 국민이 2천만명이 넘는다. 자주적 역사 발전은 완전히 저해되었고 이에 대한 울분이 타국에 대한 혐오로 변질되고, 그 혐오가 다시 보복주의로 변질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보복주의가 군국주의로 승화했다. 현재는 완벽히 현대화를 이루어 열강 반열에 진입하였으나 가장 국수주의적/팽창주의적이고 자국민 우월주의적인 국가로 남아있다. 유럽 국가 연합의 주도국이며 유럽 국가 연합과 남한성 조약기구의 동맹을 이어가며 아시아로도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역사

간단 연표

1. 왕조시대

960년: 미에슈코 1세, 폴란드 왕국 수립​[피아스트piast 왕조]
966년: 미에슈코 1세, 로마 카톨릭 세례를 통해 기독교를 정식 국교로 선포

1039년, 카지미에시 1세, 수도를 그니에즈노에서 크라쿠프로 천도

1241년: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크라쿠프 함락

1333년: 카지미에시 3세 등극, 발트 해- 흑해 연안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확장, 폴란드 왕국 전성기 구가

1364년: 체코 프라하 대학(1348)에 이어 중- 동부유럽 두번 째 대학인 크라쿠프 야기엘론스키 대학 설립

1385년: 피아스트 왕조가 끝나고​ 왕권 계승자인 야드비가여왕이 리투아니아의 야기에우워 대공과 결혼,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의 야기엘로니안 왕조 탄생

1410년: 야기에우워 대공, 튜턴 기사단과의 그룬발트 전투에서 승리, 폴란드 전역 지배권 확보

1525년: 튜턴 기사단 호엔촐레른 공작, 크라쿠프 광장에서 폴란드 지그문트 왕에게 충성서약

1569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두 왕조 간의 유대 관계를 항구적인 제도적 장치로 통합, 일종의 국가 연합을 결성,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 왕국 탄생

1572년: 왕위 계승자 부재로 야기엘로니안 왕조가 끝나고, 귀족들이 국왕을 선출하는 일종의 귀족 공화정 등장, 국왕의 권력이 귀족들에 의해 제한됨

1576년: 스테판 바토리가 왕이 되다.

1579년: 1581년까지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하다.​

1596년: 지그문트 3세, 수도를 남부 크라쿠프에서 중부 바르샤바로 천도

1605년: 1610년, 폴란드 지그문트 3세, 러시아 내분을 틈타 모스크바 2회 점령

1655년: 7월 스웨덴의 폴란드 침공, 11월 쳉스토호바 야스나구라 전투

1683년: 소비에스키 3세, 터키군의 오스트리아 빈 포위 공격 격퇴

1722년: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한 폴란드 1차 분할

1792년: 5월 3일, 유럽 최초의 성문 헌법인 폴란드 5·3 헌법 제정

1793년: ​러시아, 프러시아 양국에 의한 폴란드 2차 분할

1794 코시치우슈코 봉기 실패

1795년: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한 3차 영토 분할로 폴란드 왕국 멸망


2. 제1, 2차 세계대전

1914년: 1차 대전 발발 및 오스트리아군 휘하 피우수트스키 장군의 폴란드 군단 창설

1918년: 11훨 11일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원칙으로 독립 폴란드 공화국 탄생

1919 ~1921년: 대소련 전쟁을 통해 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을 편입, 영토확장

1922년: 12월 16일 제2공화국 초대 대통령 나루토비치, 취임 5일 만에 극우민족주의자에게 암살됨

1926년: 피우수트스키 장군, 쿠테타로 집권, 1935년 사망 시까지 철권통치

1932년: 7월, 폴란드- 소련 불가침조약 체결

1934년: 1월, 폴란드- 독일 불가침조약 체결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공격으로 2차대전 발발

1939 9월 17일 소련의 폴란드 침공, 폴란드 전역 독일과 소련에 양분, 멸망.

3.냉전시대

1945년 6월: 폴란드 임시정부 수립

1947년 1월: 소련의 강압속에 실시된 총선 실시 결과, 공산​· 사회 양당 중심의 인민전선 압승, 공산당 정부 수립

1953년 4월: 피아넨 장군의 반공 쿠데타 성공

1953년 11월: 피아넨 장군의 암살, 부패와 내부 정권 찬탈의 연속. 미국과 나토에게 대부분의 이권이 팔아넘겨지고 주권이 훼손됨.

1955년 2월: 대규모 민주화 운동 발발, 유혈 진압으로 훗날 '바르샤바 대학살'로 일컬어질 2.14 사태 발생. 군을 동원한 유혈 진압으로 전국에서 약 100만여명이 사망하고 300만명이 실종됨.

1958년 9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하고자 하는 공산주의적 장교들의 공산 쿠데타,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입.

1959년 1월: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구 피아넨 장군 추종자들의 반란, 적백 내전 시작.

1962년 7월: 미국이 개입한 증거를 잡아낸 소련의 갑작스런 직접적 개입으로 내전 1주만에 종결.

1962년 12월~1965년 6월: 공산당 정부의 대숙청으로 1100만여명이 처형됨. 처형 대상에는 5세 이상이면 모두가 포함되었으며 구 백군에 협조하였거나 해당 점령지에서 파르티잔 활동을 하지 않은 모든 자였다.

1967년 5월: 나토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민주화운동과 백군 추종자들의 2차 반란, 그러나 내부 고발자로 인해 반란은 시작하기도 전에 주동자들이 모두 처형되며 종결되고 민주화운동은 대대적인 탄압과 공개처형으로 묵살됨. 약 150만명 정도의 희생자가 발발함.

1971년 1월: 극심한 인구난으로 산업이 거의 마비됨. 이미 부패해버린 공산당 정부는 소련으로부터 인력을 받고 자신들의 신변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산업시설을 모두 소련에 양도한다는 말도 안되는 조약을 채결, 국민들 50%가 실직하게 되는 대참사가 발발. 그 와중에 식량 배급조차 거의 되지 않아 국민들은 순무와 양파껍질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현 정권이 생겨난 계기가 된 '8.18 혁명'이 일어난 1990년까지 이어짐.

1980년 7~8월: 약 300만명이 기아로 사망하고 나머지들도 다 그리 될 운명에 처하자 또 한번의 대대적인 시위 발발, 군 부대마저 합세. 다급해진 공산당 정부는 소련에 구원을 요청하지만 수도 방위군이 반란에 가담해버리면서 정부 요인 전원이 몰살, 공산당 정권의 또 한번의 몰락이 찾아옴.

1981년 4월: 약 1년간의 '인민자치기구' 통치는 잠시동안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었으나 미-소 비밀 협정에 따라 서쪽에는 최초의 '문민정부'인 자유당 정권이 성립됨.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괴뢰정에 불과했고 또다른 부패정권일 뿐이였다. 바로 다음날 소련이 폴란드 동부를 점령하며 폴란드 인민 군정을 설치, 구 공산당 정권과 같은 형태의 정권이 세워짐. 또한 이러한 형태로 인해 포위되버린 동독을 구조하기 위해 서폴란드 군은 무장할 수 없고 영해권은 동폴란드가 가지며 주둔 미군의 규모는 5000명 이하로 해야 했다.

1991년 1월: 독일의 통일을 바라본 동 폴란드의 대령 '파울 베커'가 부패한 비밀경찰을 매수, 특유의 화법과 설득력으로 주요 사단장들을 포섭하고 쿠데타 계획을 세움.

1991년 8월 18일: 00시 00분에 시작된 쿠데타는 10만명 규모의 동폴란드의 주요 전력들, 그리고 특수부대와 치안성을 모두 아우르는 규모로 시작되었고 수도 방위군은 그들을 마주치자마자 투항, 동폴란드 정부 요인을 모조리 죽인 후 서폴란드로 기습 진격, 공수부대의 수도 점령 밎 서폴란드 정부 요인 전원 사살로 갑작스런 통일이 이루어짐. 운마저도 좋아서 그 날은 소련에서 '8월 쿠데타'가 발발, 소련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져 세계가 혼란에 빠진 날이였고 그 누구도 개입하지 못했다. 파울 베커를 최고지도자로 하는 '인민평의회'가 설립됨.

4. 냉전, 그 이후.

1991년 9월: 4개년 계획의 발표. 4개년 계획에는 단순한 대대적 경제 부흥책뿐만이 아니라 인구를 다시 늘리기 위한 주택 지원 밎 사회 활동 장려 등 결혼 촉진책과 복지정책, 베커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던 항공/해운 사업과 기술 증진도 포함되었다. 주로 대규모 공공사업과 특별 채권 발행을 통한 기업 활성화, 주요 산업의 정부 통제, 무역에서의 자립책, 내수 경제 활성화 등이 주요 경제 정책으로 꼽힌다.

1992년 1월: 4개년 계획의 실행.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혼잡한 경제체제" 라는 세계의 비판과 조롱에도 "우리의 경제이념은 없는것이 이념" 이라는 명언을 남기며 실행함.

1992년 12월: 군 부패 척결과 부패한 재벌들을 처단/교체하기 위한 정부의 자작극이였던 '크리스마스 선물' 작전의 성공. 제 1차 4개년 계획에 박차가 가해짐.

1994년 2월: 자원과 주요 기술 자체 보유에서부터 시작해 물물교환론에 다다른 경제 자립책의 성공으로 수출 규모가 수입 규모를 뛰어넘게 됨. 그러나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 적당히 멈춤으로서 수입/수출 비는 현재까지도 대등함을 유지중이다. (실제로도 자국에서 물건이 나갔는데 들어오는건 달러뿐이면 유통 화폐만 늘어나고 물건을 줄어 물가만 높아지는 결말을 가져온다. 일본의 경제가 갑작스레 침체기를 맞은것도 이것을 관과했기 때문이다.)

1996년 1월: 1차 4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바닥을 기던 경제력이 4년만에 세계 20위권에 들게 됨. 2차 4개년의 실시. 2차 4개년 계획은 주로 기업의 기술력/경쟁력 강화를 위한 투자와 자립책의 마무리에 치중을 두었다.

1997년 1월: 군사 기술 증강 5개년계획의 발표, 실시. 이 계획은 육군 장비의 국산화, 즉 기술력 확보를 목적으로 하였고 이것을 위해 산업스파이까지 보내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997년 3월: 정부의 잇다른 성공이 지난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삶의 질 향상을 가져다주자 국민들의 지지도는 거의 100%에 달하였고, 사실상 1인 독재를 가능하도록 해주는 개헌에 85%가 찬성함으로서 정식으로 독재 시대가 시작됨.

1999년 5월: 최초의 국산 보병화기 개발에 성공.

2000년 1월: 제 2차 4개년 계획의 성공, 항공/차량/조선 등 중공업 기술이 주로 발달하게 되며 이는 이후 군 확장정책에 있어서도 큰 뒷받침이 되게 된다. 최후의 4개년 계획인 3차 4개년 계획이 실시되며, 이번 계획에는 경공업과 소프트웨어 발달, 지나친 경기 과열로 인한 부의 불평등 해소등이 주 목표였다.

2002년 1월: 국산 현대 보병화기와 기갑장비, 해군 장비 등의 개발에 성공하며 1차 군사 기술 증강 계획은 나름 성공적으로 완료됨. 2차 군사 기술 증강 계획의 시작.

2004년 1월: 3차 4개년 계획은 소프트 웨어 발달을 제외하면 모두 성공적으로 완료됨. 경제력이 안정적으로 세계 순위권에 입성하는데에 성공.

2007년 1월: 항공모함의 진수와 미국의 지원을 받은 4세대 전투기 개발, 공군 장비 개발 등이 완료되며 2차 군사 기술 증강 계획이 순조롭게 완료됨.

2010년 11월: 슬로바키아 기습 합병 계획 '유리거울 작전'이 입안됨.

2011년 3월: 내부 쿠데타 진압을 명목으로 2개 군단이 슬로바키아에 진주, 부정선거가 판치는 상황속에서 99%의 높은 지지표로 폴란드의 슬로바키아 합병이 결정됨.

2013년 2월: 파울 베커의 사망, 집단 지도체제 돌입

2019년 1월: 디트리히 슈타벨의 전권 장악, 제정 선포

2019년 5월: 군국주의 체제 돌입

2020년 2월: 대제 선포

2020년 5월: 러시아와 대랜드제국 분할 점령

정치

정치 개요

표어: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국민을 섬기는 것이고 나를 섬기는 것이다.

국가주의 폴란드는 초창기 혁명 이념이던 '국가 민주주의'의 원론에 따라 약 22년간 국가주의 폴란드를 통치하던 파울 베커 최고지도자가 사망한 이후 새로이 지도부 내에서 떠오르던 인물인 디트리히 슈타벨 총참모장이 정권을 장악, 스스로 대제에 즉위하여 초창기 이념과는 많이 변형된 형태의 슈타벨 제국이 형성되며 사라져버렸다.

새로이 형성된 슈타벨 제국은 "국가의 주권은 그것을 구성하는 인민에 있고, 절대 다수 인민의 뜻을 실행하는것이 지도자의 업무다. 이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우리는 세계에 이바지해야 한다." 라는 국가 민주주의를 다르게 해석, "인민은 국가 그 자체이기에 국가에 영구히 종속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민은 온 유럽인을 뜻하며, 예속적 체제에 사로잡힌 유럽인들을 제국에 종속시켜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로 변질되었고 그것에 맞게 각 행정부서가 하는 업무도 '대민 지원'에서 '대중 선전과 감시'로 변경되었다. 그 결과 현재는 나라 자체가 아예 군국주의로 운영된다. 만약 과거 파울 베커 시절에 만들어놓은 경제 성장이 없었다면 슈타벨 제국은 지금쯤 북한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다.

제국 대제 직속 부서인 제국 총참모부, 보안성, 외무성, 노동복리성, 국민 계몽성, 사회 계획성, 경제성, 기술성, 재무성의 9성 구조로 운영된다. 그중 군사 지출과 복지 지출, 보안 지출 비용이 압도적이며 나머지 부서는 이들의 업무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수준이다.

이념

사회

복지가 상당히 잘되어있고 치안도 좋은 편이다. 노조가 없는 대신 노동법이 튼튼하여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며, 결혼 가정에는 4인가구 규모 집을 짓고 생활할 비용을 무이자로 국가가 대출해주며, 일대일 무역의 성공으로 물가도 안정적이다. 치안이 강화된 북유럽이라 보면 적당하다.

사회 분위기

앞서 말했듯 복지가 잘되어있고 치안도 좋은 편이지만 사회 분위기는 20세기 초반 유럽처럼 보수적이다. 대부분 제국민들은 '정부에서 하는것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권위주의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고, 노출이 심한 문화나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문화는 꺼려지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역시 '헛된 망상'으로 치부되는데, 이는 과거 소련의 괴뢰국이던 동부지역은 공산주의적 이념과 공포의 숙청재판이 만들어놓은 문화이자 국민성이고, 미국의 괴뢰국이던 서부지역에선 브루주아 정치에 대한 반감이 불러온 결과이다. 현재 연이은 성공 행진으로 제국 정부에 대한 충성심은 매우 높으며, 조작 없이도 98% 이상이 제국 정부를 지지한다.

형벌 제도

엄벌주의적이며 사형보다 높은 제도인 무기한 강제노동형이 존재한다. 사실상 가장 고통스럽게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슈타벨 제국 북방영토 어딘가에 존재한 비밀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져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소모적인 노동을 하다가 그 가치를 잃게되면 다양한 방법으로 소모되게된다. 여기서 말하는 '소모'의 종류는 다양한데, 결코 편안한 최후는 아니다. 흉악범중에서도 흉악범이 선고받으며 현재까지 이 비밀스런 수용소를 찾아낸 자도, 살아돌아온 수감자도 없다. 악명높은 국가 판사들조차도 선고를 가급적 꺼리며 어떤 흉악범이라도 이곳을 선고받게되면 세상을 포기한 표정이 된다. 일례로 과거 10여년간 8세-16세 어린이 10여명과 가족을을 납치하여 강간하고 살해, 그 인육을 먹는등 엽기적이고 잔인한 행각을 벌인 흉악범인 '제이드 뢰스팅거'는 재판정에서 사형에 대한 얘기가 오고가도록 "나는 아무런 잘못을 한것이 없다." "인육이 참 맛있더라." "후회없는 삶이였다." 등의 망언으로 유가족들을 절규하게 만들었지만 판사가 '무기한 강제노동형'을 선고하자 넋을 놓고 통곡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추태를 보인 적이 있을정도로 가장 끔찍한 형벌로 알려져있다. 그 외에 단순 강도같은 경범죄를 다루는 징역/벌금형도 상당한 엄벌에 처해진다.

군사

[슈타벨 제국 국가 인민군]
상비군: 869000(2년 징병제+모병제 동시 운용)
전시 동원 인력: 1900만명
연간 군사비 지출: 약 960억 달러
창설 연도: 1991년

구 독일군의 군복과 계급체계를 거의 그대로 사용중이며, 군내 분위기는 의외로 경직되지 않고 두발 자유도 허용되는 등 말 그대로 가족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하지만 타국인에 대하여서는 예외적이다. 타국인에 대한 고통에 무감각하도록 교육받은 이들은 목표를 위해서라면 학교에 백린탄을 투하하는 등 전쟁범죄도 서슴치않으며 포로에 대한 처우도 끔찍하기 그지없다. 여러모로 이스라엘군과 비슷하다. 그동안 기술발전과 질 향상에 더 집중하였으나, 근 15년간엔 무서운 확장세를 보이고 있다.

육군력

서쪽으론 프로이센, 동쪽으론 러시아를 두고 있어 육군 강국들에게 포위된 형세이며, 러시아와는 과거사로 인해 특히 사이가 안좋다. 때문에 육군이 3군중 가장 투자량이 많으며, 그만큼 발전되어 있다. 수적 열세와 넓은 대러시아 전선의 규모를 극복하기 위해 전군을 차량화/기계화 하는등 기동전에 특화되어 있으며, 현재는 전군 차량화/기계화를 달성하였다. 기술력도 세계 탑급이다. "전차에 맞서는 가장 훌륭한 수단은 더 우수한 전차이다"란 신념으로 인해 특히 기갑장비에 대한 기술력이 발전하여 현재는 러시아 전차들보다 훨씬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보안성 산하에 정예로 명성이 드높으며 모병제를 통해 엄선된 군인들로 이루어진 3개의 친위대 사단을 보유중인데, 이들은 평시엔 제국 대제의 직속 지휘를 받으며 쿠데타 진압, 수도 방위, 반란 진압 및 잔학성 임무를 수행하지만 전시엔 정예 선봉부대로 활약한다.

[보유중인 주요 장비 현황]
3.5세대 전차 1800대(EW-V 1500량, 레오파르트 2a7 300량)
3세대 전차 900대(EW-IV 500량, T-90 400량)
장갑차 총합 6040대
자주포 1900문
MLRS 120문

육군 편제

제 1군
ㄴ제 1 기갑사단
ㄴ제 2 기갑사단
ㄴ제 4 기계화 보병사단
ㄴ제 7 기계화 보병 사단
ㄴ제 19 기계화 보병사단

제 2군
ㄴ제 5 기갑사단
ㄴ제 6 기갑사단
ㄴ제 9 기계화 보병사단
ㄴ제 10 기계화 보병사단

제 3군
ㄴ제 3 기갑사단
ㄴ제 12 기갑사단
ㄴ제 25 기계화 보병사단
ㄴ제 33 기계화 보병사단
ㄴ제 34 기계화 보병사단

제 4군
ㄴ13 보병사단
제 14 보병사단
ㄴ제 16 보병사단
ㄴ제 18 보병사단

제 5군
ㄴ제 20 보병사단
ㄴ제 22 보병사단
ㄴ제 23 보병사단
ㄴ제 24 보병사단

제 6군
ㄴ제 15 기갑사단
ㄴ제 8 기계화 보병사단
ㄴ제 11 기계화 보병사단
ㄴ제 28 기계화 보병사단
ㄴ제 55 보병사단

제 7군
ㄴ제 17 기갑사단
ㄴ제 44 기갑사단
ㄴ제 25 기계화 보병사단
ㄴ제 31 기계화 보병사단

제 8군
ㄴ제 26 보병사단
ㄴ제 29 보병사단
ㄴ제 30 보병사단
ㄴ제 32 보병사단

제 9군
제 36 보병사단
ㄴ제 37 보병사단
ㄴ제 38 보병사단
ㄴ제 39 보병사단

[친위대]
친위대 최고사령부
ㄴ제 1 친위대 기갑사단
ㄴ제 2 친위대 기갑사단
ㄴ제 3 친위대 기갑사단

[특수전 전력]
2개 해병사단
1개 공수여단
3개 특작여단

공군력

러시아 육군은 그럭저럭 상대가 가능하다 쳐도, 러시아의 대규모 공군은 슈타벨 제국에 있어 거대한 위협이었다. 그러나 당장 우수한 전투기를 생산할 능력은 없었기에 유로파이터등 공동 개발 프로젝트와 기술 공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노하우를 쌓고, 산업스파이까지 도입하며 기술력을 쌓는 한편 록히드 마틴 사로부터 십수년간 F-15, F-35등 우수한 전투기와 B-1등의 폭격기를 구매하여 공군력을 키워야만 했다. 그러나 전투기 자력개발의 꿈을 접지 않아, 2015년 마침내 우수한 품질의 준스텔스 4.5세대 전투기 So-262를 개발하는데에 성공한다.

[보유중인 주요 장비 현황]
5세대 전투기 20기(F-35 20기)
4.5세대 전투기 250기(F-15 100기, So-262 150기)
4세대 전투기 50기
폭격기 10기
전자전기 35기
헬리콥터 500기

공군 편제

제 1 전투 비행단
ㄴ제 1 비행대대
ㄴ제 2 비행대대
ㄴ제 3 비행대대
ㄴ제 4 비행대대
ㄴ제 5 비행대대

제 2 전투 비행단
ㄴ제 6 비행대대
ㄴ제 7 비행대대
ㄴ제 8 비행대대
ㄴ제 9 비행대대
ㄴ제 10 비행대대

제 3 전투 비행단
ㄴ제 11 비행대대
ㄴ제 12 비행대대
ㄴ제 13 비행대대
ㄴ제 14 비행대대
ㄴ제 15 비행대대

제 4 폭격 비행단
ㄴ제 16 폭격 비행대대

해군력

해군은 미국의 원조를 받은 구 서폴란드의 영향으로 나름 기술력이 발전했다. 이후로도 타국과의 기술적 협력을 통해(대부분 국가가 당시 폴란드를 별로 경계하지 않았고, 폴란드 해군이 확장을 가속화할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선진국들 못지 않은 해군 기술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폴란드가 점차 군국주의적/팽창주의적으로 변모하게 되고 서유럽 국가들과의 긴장이 고조되며 유사시 발트해의 돌파력을 가진 정예 함대가 필요해지게 되었다. 적의 대함미사일 도배를 막을 이지스함과 화력 투사 및 제공권 확보에 필요한 구축함, 항공모함 전력의 필요성이 급부상했고 그 결과 2009년부터 대대적인 건함 정책이 시작되었다.

[수상 주력함]
15000톤급 이지스 구축함 2척(+1척)
7천톤급 준이지스 구축함 2척
8천톤급 구축함 8척
7천톤급 구축함 14척
5천톤급 구축함 10척
3천톤급 호위함 6척

[상륙함/항모]
10만톤급 원자력 항공모함(+1척)
7만톤급 원자력 항공모함 1척
15000톤급 강습 상륙함 4척
1천톤급 수송함 9척
공기 부양정 50척

[잠수함]
9천톤급 SSN 3척(+4척)
3천톤급 재래식 잠수함 5척
2700톤급 재래식 잠수함 11척

해군 편제

제국 전투함대

제 1 함대
ㄴ7천톤급 준이지스 구축함 1척
ㄴ8천톤급 구축함 3척
ㄴ7천톤급 구축함 3척
ㄴ3천톤급 호위함 2척

제 2 함대
ㄴ15000톤급 이지스 구축함 1척
ㄴ8천톤급 구축함 2척
ㄴ7천톤급 구축함 2척
ㄴ5천톤급 구축함 2척

제 3 함대
ㄴ7만톤급 원자력 항공모함 1척
ㄴ15000톤급 이지스 구축함 3척
ㄴ8천톤급 구축함 2척
ㄴ7천톤급 구축함 5척
ㄴ5천톤급 구축함 4척
ㄴ3천톤급 호위함 1척

제 4 함대
ㄴ7천톤급 준이지스 구축함 1척
ㄴ8천톤급 구축함 1척
ㄴ7천톤급 구축함 4척
ㄴ5천톤급 구축함 2척
ㄴ3천톤급 구축함 3척

잠수함대
ㄴ9천톤급 SSN 3척
3천톤급 재래식 잠수함 5척
2700톤급 재래식 잠수함 11척

경제

경제개발사

폴란드이던 시절, 미국의 괴뢰국이였던 서폴란드는 미국의 기술 원조와 빈부격차따윈 무시한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체제로 상당한 공업기반과 기술적 기반이 존재하였으나, 동폴란드는 그렇지 못하였다. 동폴란드의 경제정책은 부패적이고 융통성이 없어 통일 직후 양측의 경제적 격차는 엄청났다. 그러나 당시 최고지도자이던 파울 베커는 이를 기회로 이용하였다.

통일 직후, 첫번째 4개년 계획

첫째로, 국가의 영향력 아래 종속된 재벌과 기업들을 살려두어 대대적인 국토 재개발 사업에 나선다.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는 이 동폴란드 지역의 재개발 사업은 건설업계와 공업계의 호황을 가져왔다. 한편 빈부격차는 점차 올라갔고 동서간의 빈부차이도 올라가 서폴란드 지역에 인구가 밀집하는 현상까지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정부는 "4년만 기다려주십시오. 4년만 기다리면 경제가 안정적 성장궤도에 오를 것이고, 여러분의 삶의 질은 전국적인 향상이 있을 것입니다. 딱 4년입니다. 4년 내로 해내지 못하면 저의 목을 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실현된다.

외국들간의 경제협력에서는 반드시 참석, 자국 기업을 진출시켜 외화를 벌어들여 기술력과 경험을 쌓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세계 각국의 재벌들에게 '투자가치가 있는 새로운 땅'으로 인식되었고 투자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는데, 당시 그가 미국의 어느 대자본가에게 보낸 편지가 당시 슈타벨의 투자 열기를 보여준다. "당신은 새롭고 성장가능성이 높은 투자처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폴란드로 오셔야 합니다. 여긴 말 그대로 백지상태에, 사겠다는 사람밖에 없거든요!"

하지만 투자자들에 대한 '협박'도 서슴치 않았다. 이것은 폴란드 내에 굴러들어온 외국 자본이 지금 당장은 상당한 경제적 부를 가져다주겠지만, 나중엔 그것이 국가 경제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양날의 검이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당시에도 약한 폴란드의 국력을 알고선 자본을 이용해 국정을 휘두르려는 이들이 존재했다. 이것을 막고 단물만 빨아먹기 위해선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는데, 베커는 모험을 하기로 한다. 그는 당시 폴란드에 투자한 투자자들을 불러 폭탄선언을 한다. "폴란드에 대한 빚 독촉과 심지어는 내정간섭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다간 폴란드는 해외 투자자들의 손에 나뉘어 공중분해될 것이고, 폴란드에 투자된 자본들은 중심이동 사태에 직면, 투자의 본전조차 찾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그 자리에 있던 패권주의적인 투자자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고, 폴란드 내의 내정을 돈을 이용해 간섭할 생각을 하지 말란 것이였다. 또한 당시 폴란드가 대규모 공공사업을 펼치며 만들어진 해외 부채의 이자 감액과 상납 연장을 의미하기도 했다. 대자본가들 입장에선 대략난감이였지만, 그들은 마침내 폴란드에 대한 자신들의 파워를 휘두르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정한다. 나라가 공중분해될수도 있지만 내정간섭을 통해 더 큰 이득을 얻는 위험한 도박을 택하기보단 안전하고 안정적인 투자처의 존속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심리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이다. 어쩌면 소련 붕괴 직후란 것의 불안감이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폴란드는 이렇게 해서 정말로 외국 자본의 꿀만 빨아먹었다.

그러나 내수경제의 활성화만으론 경제 강국을 이룩할 수 없었다. 현대 국가에서 경제의 성장은 해외 무역과 교류에 큰 영향을 받는다. 폴란드는 영국과 독일, 프랑스, 미국에 무역 확대를 요구했다. 틈이 날때마다 폴란드 경제의 궁핍상을 떠벌리고 폴란드 상품을 사줄것을 요청했다. 주요 논지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 상품을 충분하게 사달라는 것이다. 우리가 획득한 외화를 금고 속에 넣어 두는 것이 아니고, 외국에서 상품을 수입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에 그것은 국제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였다. 당시 폴란드가 발달했던 중공업과 경공업 상품을 구매해준다면 상대로부터 원료와 그 외 부족한 것들, 식료품을 구매하며 세계 경제의 호황을 이끌겠다는 것이였다. 문제는 독일이였다. 기존 공업강국인 독일은 그들의 자리를 내주기 싫어하였고, 이들은 마지막까지 무역 확대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소련의 붕괴로 동유럽이 혼란스러우니 폴란드가 자신들에게 넘어오면 동유럽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질서를 유지하는데에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교역 확대 요구에 응하였고, 폴란드는 나토에 가입하며 군사기술의 발전도 덤으로 이룩하게 된다.

교역처를 확보했으니 이젠 돈을 벌어들이는 일만 남았다. 급격한 수출의 증가는 내수시장의 물가 상승을 유발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돈을 버는것이 급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베커는 극단적인 수입 제한 수출 진흥을 적극 추진했다. 1992년 9월부터는 정부 기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어떤 기업도 수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외채를 채권자에게 직접 상환하는 자는 '조국의 경제 활력을 탈취하는 대역죄'로 간주한다고 경고했다. 1993년에는 새로운 수출 진흥책을 내놨다. 수출 진흥 기금을 설치한 후, 수출업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수출 진흥 기금의 자금은 산업계로부터 7할, 은행 업계로부터 3할을 기부 형태로 징수했다. 폴란드 산업계가 전력을 기울여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고, 재군비나 그 외 분야의 원자재 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수출업자들은 '덤핑 정책'에 힘입어 수출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같은 제품이여도 폴란드 제품을 수입하는 일이 많아졌다. 폴란드 제품은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기 때문에 값도 쌌을 뿐 아니라, 일대일 교역 플랜으로 폴란드도 상대의 물건을 물물 교환 방식으로 사주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조치로 특히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던 약소국과 중견국들은 그들 자체의 외채도 해결해야 했고, 경제 위기도 해결해야 했기에 자신의 물건을 사주는 폴란드가 고마웠다. 폴란드의 무역망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수입은 종전 수준으로 묶어두고, 수출을 늘리는데 성공했다," 이는 주요한 선전문구가 되어 경제성장의 기반이 된 수출정책을 기리는 표어가 되었다.

이 기간동안에는 재군비 사업도 이어졌는데, 이는 앞서 말했던 대자본가의 횡포가 언제든 주변국의 횡포로 변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를 막으려면 스스로를 지킬만큼의 군사력은 필요했다. 이에 1992년,국가인민군이 15만명 규모로 증설되었고, 구 소련과 미군정이 지원해주었던 장비와 나토에 가입하여 얻어낸 군사기술력을 바탕으로 육군력을 강화하는데에 성공하였다. 이 시기에 암암리에 타국의 장비를 속칭 '쌔비는' 일이 잦았는데, 그 당시엔 폴란드가 서방의 전략상 중요한 위치여서 서방은 이를 사실상 묵인하였고, 러시아는 이를 알자마자 강력히 항의, 기소까지 할 것이라고 협박했으나 무기의 특성상 배끼는 것의 기준과 정의, 증거확보가 힘들어 결국 러시아도 포기하게 된다. 그땐 슈타벨이 생겨날거라고 아무도 예상못했다

제 2차 4개년 계획

제 1차 4개년 계획은 성공적으로 끝맞추었고, 이젠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국민의 삶을 향상시켜야 했다. 우선적으로 손을 댄 것은 물가안정이였다. 당시 폴란드는 엄청난 양의 수출을 하고 있었다. 수출량이 늘어나면 당장 돈은 지갑에 들어온다. 하지만 물건은 밖으로 빠져나가고 돈만 풀리니 물가는 올라가며 대외 경제 의존도는 높아지는 것이 그 불편한 현실이였다. 결국 무역이란 것은 파는 만큼 사지 않으면 손해란 결론에 도달, 반드시 수출량과 수입량을 일정하게 상황에 따라 조정하기로 하였다. 수출이 있다면 그만큼 수입도 하고, 외화가 궁할때는 수입량을 줄이는 등으로 조정하는 방식이였다. 여담으로 이 당시엔 군비 지출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고, gdp의 1% 이하를 군비에 투자했다. 경제가 계속 무섭게 성장중인 와중에 군사비 지출마저 는다면 심각한 인플레가 닥칠 것임을 알았고, 그 당시 군의 목표는 철저히 자국 방위뿐이였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는 꽤나 파격적인 조치들이 가해졌다.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노동조합을 폐지하였지만, 아무도 반발하지 않았다. 노동자를 보호하는 노동법이 제대로 준수되는지 기업측에 대한 상시 감시와 그것을 불이행할시 노동자에 대한 배상 조치를 철저히 하였고, 노사갈등 조정위원회를 국가 산하에 창설하여 항상 노동자와 기업이 소통, 파업등의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원천봉쇄하였다.

반면 감세정책으로 오히려 세수를 늘리는 기이한 현상도 일어났는데, 이는 굉장히 주도면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의 주요한 감세 항목은 아래와 같다.

1. 자동차세
2. 공산품 매출세
3 .의료세
4. 주택 토지세
5. 방공시설물 제작업의 소득세
6. 설비투자 사업세
7. 건물 투자 사업세
8. 도매업의 매출세
9. 가구세
10. 실업보험의 인하
11. 임대료 인하

그렇다. 감세의 대부분은 경기대책과 관련되어 있었고, 건물/설비 투자와 공산품, 의료세나 실업 보험, 임대료등은 대부분 돈을 자국 기업에만 쓸수밖에 없는 것들이였다. 즉, 감세조치는 여유가 생긴 국민들의 구매욕을 자극했고 이로 인해 유통, 특히 국산 기업들의 판매량이 늘어났으며 이로 인해 경기가 좋아지고 국내 기업들이 일어나게 해주는 자금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세수는 늘어나게 된 것이다. 특히 감세조치는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부양 가족이 많을수록 감세량이 많았기에 빈부격차를 극복하고 중산층의 수를 늘리는 결과를 만들기도 하였다.

복지 측면에서도 엄청난 개선이 이어졌다. 앞서 말한 의료세 하락은 물론이고, '건강은 국민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구호 아래 의료계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강행한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전체주의 특유의 선전력을 발휘하여 자선사업체들에게 힘을 쏟아주는 선전을 개시, 기부금을 늘리기도 하였다. 유해한 물질을 내뿜는 화학 공장에는 의무적으로 환풍기와 공기 정화기를 부착하도록 하였으며, 해당 시설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정기적 건강검진도 해주었다. 출산 가정에는 양육비 지원 제도를 실시한것도 출산을 장려하였다. 또한 '출산 대출'을 운영하여 혹시 이정도 지원에도 출산을 꺼릴 정도의 하류층을 위해 사용하였다. 이 대출금은 이자가 낮았으며 대출금을 통해 육아 관련 물품들을 구매했기 때문에 이는 관련 산업의 활성화와 경기 부양, 출산율 증가의 3가지 효과를 모두 가져왔다. 이렇듯 국민들이 전반적으로 건강해지고 사회적 빈부격차가 좁혀지니 경제활동 인구도 많아졌고, 국민들과 경제 모두 만족하였다.

보다시피 대부분의 경제정책엔 국가가 개입하고, 큰 정부, 독재정권의 특성상 비리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를 막기 위한 대책도 있었다. 모든 정치가와 공무원이 민간 기업의 임원이 되는 것과 공개적인 공무 수행 이외에 민간 기업과의 접촉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퇴직한 이후에도 민간 기업에 취업하는 것을 엄금했다. 공무원의 비리행각을 감시하는 특수 비밀경찰도 있을 정도이다. 만약 비리행각이 밝혀지면 그의 최후는 참담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신상이 온 국민앞에 공개되었으며, 죄질이 나쁜 경우엔 강제노동수용소로 가게되었다. 정치가와 관료, 민간이 유착했을 때 일어난 폐해를 이미 지난 세월들을 통해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한 것이였다. 공무원과 정치인은 절대로 사리를 추구해선 안된다는 것이 국가 운영철학이였다. 덕분에 아직까지도 국가가 청렴하게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제 3차 4개년 계획

사실 제 3차 4개년 계획은 그렇게 거창하진 않았다. 그동안 놓쳐왔던 소프트웨어와 기술력의 압도적 상승이 그 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