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페이 내전

신페이 내전
냉전[4]의 일부
교전국

아키시오 아키시오
유엔군[1]
미국

심평배달공화국
소비에트 연방[2]

무장적군파
이라 소비에트 공화국[3]
지휘관

아키시오 대통령

아키시오 총리

유엔 평화유지군
아서 빌링슬리[5]

강선한(~1992)[6]
해길신(1993~1994)[7]

이가리 신지(伊賀里進司)
쿠마가이 타츠오(熊養辰男)

신페이 내전(일본어: 心平内戦 (しんぺいないせん) 신페이 나이센[*]) 혹은 심평내전(心平內戰)은 1985년 10월 16일부터 1992년 12월 24일(성탄 협정 발효(發效)일)까지 아키시오신페이 제도에서 일어난 일련의 내전 상황을 말한다.

닛초 전쟁 종전 이래 40년 만에 아키시오는 다시 전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전례없는 포악성과 잔혹성이 드러난 전쟁으로서, 전쟁 기간 중 폭격과 인종학살, 증오 범죄로 말미암아 300만명에 이르는 한국계와 일본인이 학살당했다. 이로 인해 아키시오의 대외 신인도가 하락하고 외환 위기(1995년~1998년)가 발생하여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민당52년 체제가 몰락하였다. 신페이 제도에는 한국계 주민들의 자치권이 보장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지시로를 비롯한 아키시오 섬 각지에 있던 여러 한인 교포들이 2000년대 초반까지 시민권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으로 대거 영구 귀국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개요

아키시오의 역사
あきしお史
История Акисио
Flag of Akishio.png

신페이 제도에서, 1985년 5월 1일 독립을 의결하고 정부를 수립한 한국계 국가인 심평배달공화국이 같은해 10월 16일 "아키시오 섬의 한국인들을 해방하겠다"며 아키시오에 선전포고 후 나다노 제도카타츠에 군 일대를 자주포로 포격하면서 시작되었다.[8] 공식적인 양국간의 교전은 1992년 8월의 야타마 시가전 종결 이후 종전 협정이 같은해 12월 24일에 발효되며 끝났으나, 해길신의 게릴라군과 이라 소비에트 공화국 등 제3세력과의 교전은 1994년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전쟁의 원인과 목적 - 배달민족 지상주의

배달민족 지상주의(倍達民族 至上主義)란 배달민족, 즉 한국인이 모든 인종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인종주의 사상이다. 심평배달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강선한은 저서 《겨레가 나를 부른다》에서 "배달민족은 어느 인종보다도 우수한 민족이며 이는 자발적으로 문자를 창시한 것 등, 역사적 사실과 과학으로 증명을 할 수 있다."[9] 라는 문장을 통해 이를 처음으로 언급하였고, 이후 형태만(亨泰晩) 등의 후세 역사학자들에 의해 정의가 내려졌다.

강선한은 같은 책에서, "배달민족은 원래 유라시아 대륙의 반절을 집으로 삼고 나머지 반절을 마당으로 삼을 정도로 광대하고 융성한 활동을 해 온 기마민족이었으나, 중국과 일본의 침략과 왜곡으로 인해 한반도 안에 갇혀 사는 민족인 것처럼 전락당했으며, 마침내는 일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유다인처럼 디아스포라를 당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배달민족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아시아와 태평양 각지에서 우리의 땅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라 적었다. 이 책은 1973년에 쓰인 것으로, 이미 이때부터 다른 국가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자신의 의사를 공공연히 사회에 밝혔던 것이다. 그러나 강선한은 당시 신페이 제도 사회에서는, 듣보잡 그저 헛소리하기 좋아하는 말단 문인으로 인지되어 왔기에 그의 책에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잘 가꾸지 않는 외모 때문에 행려병자로 오해받아(..) 몇차례 치료감호소에 끌려가는 수모를 겪었다. 감호소 생활 중에도 <겨레가 나를 부른다>의 원고를 비롯해 여러가지 책을 저술하던 그는, 자신을 행려병자로 취급한 경찰에 대한 이미지를 "일본인이라는 요괴가 배달민족의 땅을 빼앗는 이미지"로 덧씌웠고, 출소 이후에 이 내용은 <요괴에게 빼앗긴 나라>(1977)라는 책으로 출간된다.[10]

1970년대 당시의 신페이 제도는 국민당의 "민족 동화 사업"(民族同化事業)이 가장 크게 추진되던 지역이었다. 한국어의 사용은 점차 제한되었으며, 새로운 세대에게는 일본어와 러시아어가 각각 '제1국어', '제2국어'로서 교육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신페이 제도의 일본어 한자로 된 각지 지명을 한국식으로 읽곤 했는데(야타마 시→ 미령시), 국민당 정부는 "한 지역을 두고 2개 이상의 다른 지역명을 사용하는 것은 혼란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이러한 한국식 읽기 또한 금지시켰다. 국민당의 이러한 조치와 더불어, 일본계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외도인(外島人)들 또한 한국인 차별에 동참하였다. 외도인이란, 채무 전쟁으로 신페이 제도가 아키시오에 편입된 이후 아키시오에서 이주해 온 일본계 주민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나카야마 사칭 막부 시대를 전후해 일본에서 바로 건너온 이들과 그 후손인 내도인, 그리고 외도인과 내도인 간의 혼혈인 소베인(相辺人)과 대비해 사용하던 개념이었다.[11] 외도인들은 내도인과 소베인도 차별하였지만 일본어를 사용할 줄 거의 모르는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차별을 하였다. 예컨대 외도인 상인들은 한국인들에게는 절대 물건을 팔지 않았으며, 신페이 제도를 남북으로 잇던 철도인 신페이난보쿠 본선의 통근 전철에는 조선인 전용석이랍시고 화장실과 마주한 자리에 자리를 달았을 정도였다.[12]

이러한 차별 정책에 분노하던 한국인들은 강선한이 <요괴에게 빼앗긴 나라>를 출간하자 그에게 비로소 주목하기 시작한다.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제발 우리나라 와서 일 좀 해주세요. 돈이고 집이고 다 제공해드립니다!"라며 잔뜩 데려와서 부려먹을 땐 언제고[13] 이제 살만해지니까 헌신짝 버리듯 없애버리려는 것으로 국민당의 민족 동화 사업을 받아들였기에, "우리 민족은 원래 그 어느 민족보다도 우수하고 월등한 민족이다. 그런데 일본놈들이 나라도 빼앗고 정기도 빼앗아서 2등 국민 취급하는 것이다!"는 식의 강선한의 증오 선동이 굉장히 잘 먹혔다.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강선한의 책들이 갑자기 불티나게 팔려나기 시작했고, 행려병자 취급이나 당하며 살던 가난한 문인 강선한은 일약 '슈퍼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돈방석에 오른 강선한에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가 오기 시작했다.

배경

강선한은 책 인세로 벌어들인 돈으로 자신과 친인척에 잡혀있던 수십억 대의 채무를 전액 청산하였으며, 이후 책을 통해 얻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정치에 나아갈 결심을 한다. 이윽고 1980년 총선거에서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야타마 A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시의 지역 정당이던 심평배달당 소속 김하주(金昰柱), 최대 적수였던 개혁당후루카와 아츠시(古川 敦)를 가까스로 꺾고 당선하였다. 심평배달당은 이 때까지만 해도 중앙의회 1개 의석(바로 김하주가 갖고 있던 야타마 A 지역구였다), 지역의회 3개 의석만 가지고 있던 안습한 정당이었는데 중앙의석을 무소속 듣보잡 작가에게 빼앗기면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 때 당 대표를 겸하고 있던 김하주는, 강선한에게 심평배달당으로의 입당을 권하였으며 강선한은 이를 받아들여 정치가로 변신한다.

특유의 선동 능력과 달필로 말미암아 강선한은 날이 가면 갈수록 지지를 얻어갔으며, 마침내는 김하주를 압박해갔다. 김하주로 대표되는 온건파 세력들을 두고 강선한은 "국민당 패당과 합의할 궁리만 하는 매국노 무리"라고 매도하였던 것이다.

1984년 로고 현지사 보궐선거

1984년, 총선거와 함께 개최된 현지사 보궐선거에서 강선한은 김하주에게 로고 현지사 출마를 제의하였다. 이제까지 김하주를 "매국노 무리"라고 매도하기 바빴던 강선한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하주는 아직까지 어느 정도 신페이 제도 한인 사회에서는 명망있는 인사였기 때문에 그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생명을 위협받던 김하주는 강선한의 갑작스런 '변화'를 의심하면서도, 이윽고 제의를 받아들여 심평배달당 소속 후보로 출마하였다.

상황은 심평배달당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외도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국민당의 마스오 토시키(틀:LANG)는 정촌의 유지들을 불러 술잔치를 연 사건이 들통나 후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내도인과 소베인들이 주로 지지하던 개혁당의 후루카와 아츠시는 여전히 골치아픈 상대였지만, 외도인들이 자신들이 지지하던 후보가 물러나자 투표를 아예 안 해버리는 바람에 인구 수로 보나 비율로 보나 압도적이었던 한국계의 몰표로 결국 김하주가 당선되었다.[14]

강선한의 분리 독립 운동

심평국 건국

경과

나다노 제도 침공

아키시오 침공과 실패

1987: 평화유지군 진주

1988~1989: 휴전 협정 발효

1988~1990: 이라 소비에트

1991: 휴전 종료와 아키시오군의 반격

1992: 신페이 제도 최종전

심평국의 멸망과 해길신의 반란

이라 소비에트의 멸망

전쟁 범죄

심평국의 전쟁 범죄

개전 이후 경자동차 부대를 이용한 공격적인 영토 확장으로 나다노 제도를 순식간에 장악한 심평국의 당면 과제는 점령한 영토를 안정화하는 것이었다. 심평군이 진주했을 당시, 이른바 '내도인'이라 불리우는, 나카야마 사칭 막부 시대부터 대를 이어 거주해온 일부 일본계 주민들은 아키시오 일본인들의 텃세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해방군'으로서 심평군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강선한은 이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내도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나다노 제도와 신페이 제도의 내도인 거주지에는 어떤 자치권도 부여되지 않았다. 침례정사단멸망 이래 독립 국가를 다시 세울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내도인들의 희망이 묻혀진 채, 나다노 제도에는 '탄현도'(灘峴道)라는 행정구역이 설치되어 도지사로 박휘근이 임명되었다.[15] 강선한과 심평배달당의 '배달민족 지상주의'에 따라 이들 내도인을 비롯한 토착 일본인들은 대개 살해당하거나 징용되어 각종 국가 사업에서 노예 노동을 강요당하였다. 역사학자 형태만은 심평배달당이 일부 건장한 남성들을 납치해 일명 '강화군인'을 만들어내기 위한 생체 실험에 동원했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아키시오군을 상대로 민병대를 조성해 반란을 일으켜 이들을 쫓아내고 심평군을 맞아들인 대가 치고는 너무나도 가혹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다노 제도에서의 이러한 '안정화 정책'이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자, 강선한과 심평배달당은 당의 핵심 요원들을 지역 행정관 등 주요 요직에 임명하여 최소 시정촌(市町村) 단위에서의 일본인 색출과 강제수용, 학살을 주도하였다. 미나미야타마 시(남미령시) 일대의 행정관이자 배달원장을 겸했던 임용남(林勇男, 1935?~1994)이 한국인 경찰들을 집합시킨 자리에서 연설했던 아래의 문장은 이들의 당시 방침을 엿볼 수 있다.

본인은 야수 같은 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 우리의 임무는, 미령(야타마)을 둘러싼 수도권에서 우리 한국인들이 움켜쥘 수 있는 부를 모두 되찾아오는[16] 것입니다. … 본인은 여러분이 쪽발이 원숭이들(일본계의 멸칭)을 최대한 가혹하게 다루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심평배달당의 학살 정책이 계속되자 일본인들은 물론, 이러한 학살 정책에 염증을 느낀 일부 한국인들도 신페이 레지스탕스라 불리우는 지하 조직에 참가하여 심평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어제까지 서로 이웃하며 지내던 사람을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죽이라고 하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아키시오의 전쟁 범죄

아키시오에서의 전쟁 범죄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심평국처럼 정부가 대놓고 한국계를 학살하거나 감옥에 집어넣을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심평국에서 벌어지는 일본계 인종 학살에 자극을 받은 일본계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인들이 주먹패를 조직해 일본인 양민들을 때려죽인다" "일본계 주민들이 모여사는 곳의 상수도 시설에 한국인들이 비소를 푼다더라" 따위의 낭설에 동요하거나 때로는 직접 이를 퍼뜨리며, 1980년대 후반에 자경단을 조직하였다. 일본인 자경단은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주장하며 한국계가 모여사는 니시후지시로, 키타마치 등을 습격하거나 한국인 상인들을 공격해 살해하거나 폭행해 중태에 빠뜨리고, 상점을 약탈하는 등의 증오범죄를 저질렀으며, 1989년에는 키타마치 방화 사건을 일으키며 그 악행이 절정에 이르렀다. 북웅파로 대표되는 한국인 폭력 조직도 이에 질세라 일본인 거주지를 습격하는 등 점차 과격한 활동을 벌였으나, 1990년 이후 범죄와의 전쟁을 표방한 후지시로 경시청의 대규모 진압으로 사실상 해체 순서를 밟기 시작하였으며, 북웅파는 조직 내부의 균열로 인해 자멸하고 말았다.

2000년 아키시오 대통령은 내전 당시의 이러한 증오 범죄에 대하여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였다. 후지시로 도 조카마치 구키타마치 역 광장에는 키타마치 방화 사건의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영향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아니, 모두가 모든 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길민태, 《》 서장[17]

아키시오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당시 컬러 텔레비전의 보급과 국민당 내각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민영 방송국들의 다수 개국, 외신들의 적극적인 취재를 통해 내전 실황은 물론 내전 와중에 벌어진 인종 차별 행태와 증오 범죄가 전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처음에는 심평국에서 자행하는 비한국계를 대상으로 한 제노사이드와 인종 범죄만이 주목을 받았으나, 그 이전에 심평국의 건국 원인이 되었던, 한국계에 대한 국민당의 지독한 차별 정책이 세간에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물론 전세계에서 아키시오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당장 아키시오를 도와주었던 미국조차 "지난날 미국이 그래야 했던 것처럼, 아키시오는 이번 일을 계기로 살을 에고 뼈를 깎는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18]

신페이 내전은 1990년 아키시오 대통령 선거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선거에서 국민당에게 파멸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고, 국민당의 자리를 빼앗은 개혁당, 사회당 등 좌파 계열 정당들은 말 그대로 살을 깎고 뼈를 에는 적폐 해소와 인종 융화 정책을 기조로 한 신노선을 채택한다. 이 노선은 1997년 수정헌법에도 크게 반영되었다.

정치적 영향

국민당의 정치적 생명이 끝장났다.

닛초 전쟁 이래, 강력한 소련에 대한 레드 컴플렉스를 바탕으로 국민들의 표심을 잡고 있었던 국민당은 가톨릭 교회와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1959년)에도, 68혁명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도 (1968년 ~ 1972년) 잠깐 휘청거렸을 뿐, 우타가키 타카히데 (宇多垣高秀), 야마시타 켄토(山下健斗), 호토리 시로 (穂鳳四郎)로 이어지는 이른바 짓세이 (実勢, 실세)라 불리운 사람들이 활약한 덕분에[19] 실각을 면하고 꾸준히 집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이 온갖 말도 안되는 차별 정책을 펼쳐 한국인들의 분노를 이끌었던 것, 그리고 내전 이후 후지시로 등에서 벌어진 인종 범죄에 대해 묵인한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국민당에 대하여 국민들이 하나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것이다. 국민당은 뭔가가 더 있다."고 주장한 나무로 렌야 (南室練也)라는 시라노 신문 기자가 목숨을 걸고 이 '짓세이 정치'에 의한 추태를 밝혀내면서 1990년대 선거에서 줄줄이 참패하며 군소정당으로 몰락하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농어촌 지역의 지지로 어떻게든 버텨먹고 살았으나, 농어촌 지역의 표조차 2중대 소리를 듣던 민주당에게 빼앗기며 극우 일본계 외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잉여 정당이 되었다. 지금은 그냥 1세기 넘게 이어왔다는 부심으로만 먹고 사는 수준(..) [20]

한국인들을 일본인들의 차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자경단에서 출발했으나 여태까지 조직폭력배로 탄압당하던 북웅파 같은 경우는[21] 국민당이 실각한 것을 계기로 완벽한 양성화에 성공, 키타쿠마 그룹 등을 운영하면서 사회에 정착한다.

경제적 영향

내전 자체보다는 내전 이후 국민당 정부의 노골적인 인종 차별 정책이 드러나면서 주가가 급전직하했다. 1985년 일본 엔의 엔고가 시작되자 졸렬(..)하게 고정환율을 폐지한 것과 함께 전쟁이 시작되면서 통화 대란이 벌어져 일시적인 인플레이션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아키시오 정부는 엔을 무차별로 찍어대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이러한 인플레이션 현상은 1994년 이후 사회당 내각이 내수 안정화 전략을 펼친 게 성공하면서 정상 궤도를 타게 되...는 줄 알았으나 1년 후....

문화적 영향

각주

  1. 평화유지군 자격. UVN이나 UVS를 하고 싶었지만 일단 유엔으로 처리함
  2. 정확히는 소련제 무기를 심평국이 사들였으며 소련은 공식적으로 심평국을 도와준 적이 없다. 다만 소련제 무기가 대거 발견돼서 말이 많았을 뿐... 이라 소비에트 공화국이 설립되었으나 딱히 도움을 주지 못했다.
  3. 리버티 공산당내 급진파의 지원을 받았다.
  4. 미국에서 사들인 장비로 무장한 아키시오군과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심평군의 대결이라 간접적인 대리전이라고 보기도 한다. 문제는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총대를 맨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거진 끝물이라 별 도움을 못 줬다는 거지만(..)
  5. 1940~2008. 당시 계급 육군 소장. 미 8군에서 파견되었으며, 유엔 아키시오 평화유지군 사령관(~1997)을 지낸 뒤 예편했다.
  6. 야타마 시가전 도중 지하 벙커에서 자살하였다.
  7. 오노 산 전투 중 부하들을 투항시킨 뒤 자살하였다.
  8. <'한인 해방 기치로' 심평국, 아키시오 침공>, 정중앙일보, 1985-10-17
  9. 강선한 씀, 조중일 엮음, <겨레가 나를 부른다> (2013년 개정판), 복음사.
  10. 강선한 씀, 박동열 엮음, <요괴에게 빼앗긴 나라> (2001년 개정판), 북웅출판사
  11. 외양 상 큰 차이는 없지만, 언어를 통해 구분할 수 있었다. 시라노벤(후지시로벤)·엔카이벤 등 일본어의 아키시오 방언을 사용하거나 그 억양이 섞인 표준 일본어를 사용하면 외도인, 신페이벤·나다노벤이라 불리우는, 오와리벤(나고야 지방의 방언)에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질적인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내도인 혹은 소베인으로 구분하였던 것이다.
  12. 당시의 쿠모하 81계 전동차는 통로 쪽에 화장실이 달려있었는데 이게 선로 밑으로 배설물을 배출하는 방식이었다. 지금은 전부 폐차.
  13. 심지어 그 신페이난보쿠 본선은 돈류 중폭격기폭격으로 우르르 죽어나가면서 지었던 것이다!
  14. 참고로 아키시오에서도 투표날은 국가 공휴일로 지정이 되어있다. 외도인들의 투표 거부와 김하주의 당선은 정치적 무관심의 사례로 자주 교육되고 있으며, 지금도 심심찮게 "투표권 미행사시 벌금 부여 등 처벌을 가하자" 같은 주장이 거론되는 이유이다.
  15. 사실 '나다노'(灘野)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탄야'인데 어감이 별로 좋지 않다 하여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탄현'(炭峴, 잿고개)을 따 탄현으로 창지개명(..)해버렸다.
  16. 사실상 약탈.
  17. 신페이 내전 참전 용사(이 사람은 심평군에 징집되었으나 인종 범죄에 학을 뗀 뒤 탈영, 전향해 정부군 소속으로 싸웠다)의 자전적 소설로, 전쟁 이후 황폐화된 아키시오에서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2010년 후쿠시마 상 수상.
  18. 미주한겨레, <美, "아키시오, 머리부터 발끝까지 쇄신해야 한다">, 1990년 1월 22일자.
  19. 그리고 야마시타와 호토리는 각각 자기 계파의 수장이기도 해서 두 사람이 있던 시기의 국민당 총리들은 모두 양 계파에서 번갈아가면서 맡았다.
  20. 그리고 국민당과 별 다를바 없는데 더 정신나간 극우 일본주의를 표방하는 야마토당이 2014년에 창당하면서 극우 일본계의 표마저도 빼앗기고 있는 것 같다. 후새드....
  21. 근데 엄밀히 따지면 폭력배 집단에서 출발한게 맞다. 물론 1대 수장 김영휘가 1988년에 죽은 뒤, 조필제를 비롯한 온건파들이 집단 통치를 시작하면서 범죄 행위에서 차차 손을 떼고 합법적 사업 (담배는 물론이고 호텔, 철도(!)에도 손을 뻗는다)의 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