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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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Portrait of Sir Isaac Newton, 1689 (brightened).jpg
출생 1643년 1월 4일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울즈소프
(現 영국 잉글랜드 링컨셔 울즈소프)
사망 1727년 3월 31일 (향년 84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미들섹스 켄싱턴
(現 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 켄싱턴)
직업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연금술사, 탐정, 신학자, 정치인, 조폐국장
분야 수학, 물리학, 천문학, 철학[1], 신학, 연금술
서명
아이작 뉴턴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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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웨스트민스터 사원
종교 개신교(성공회) | 기독교적 이신론
작위 기사 (Knight Bachelor)[2]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사)
케임브리지 대학교 (석사)
부모 아버지 아이작 뉴턴 시니어 (1606년 – 1642년)
어머니 한나 에이스코 (1623년 - 1679년)

개요

뉴턴과 과학주의

뉴턴의 작업은 근세 초기 당대의 철학자들의 새로운 사고방식과 갈릴레오와 케플러와 같은 물리학자들의 다양한 지적 성과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뉴턴의 작업은 근대 과학혁명의 완성이라 불릴 만큼 기존의 학자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근대 과학의 새로운 혁신적 내용과 방법을 담고 있다.

달이 궤도를 도는 것과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같은 현상이라는 점, 지상과 천체의 운동이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통합된다는 점, 그리고 가속 운동은 그 무엇이든 힘을 전제로 한다는 점은 뉴턴만의 독창적인 사고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뉴턴은 중력의 법칙을 정식화하고 힘과 운동의 법칙도 일반화함으로써 그동안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돼왔던, 지상의 운동과 천체의 운동에 관한 지식을 고전 물리학이라는 하나의 지식 체계로 통합하였다. 나아가 중력에 대해서도 그러한 힘의 존재를 단순히 추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력을 운동의 법칙과 연계하여 그동안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지 설명이 어려웠던 갈릴레오의 낙체의 법칙이라든가 케플러의 행성 운행의 법칙들을 수학적으로 도출하여 증명하는 등, 중력의 법칙을 체계화하여 정립하고 이를 세련되고 엄밀한 수학적 기법을 도입하여 정당화하였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근대 물리학의 출발점인 고전역학을 완성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대 이래로 서로 다른 영역으로 구분돼 상호 연계 없이 독립적으로 전개되어온 기하학과 역학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지향 아래 통합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뉴턴적 원리는 이후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고전역학을 뛰어넘어 전자기학, 열역학, 광학 등 다른 물리학 분야의 새로운 현상들에 확장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화학, 생물학 등 타 학문 분야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로 패러다임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성공의 바탕이 된 뉴턴적 원리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운동 현상으로부터 자연의 힘을 탐구하고 이 힘으로부터 현상의 발생을 증명할 수 있도록, 자연의 힘에 관한 법칙—뉴턴에게선 중력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하는 것이다. 이는 가령 사과의 낙하 운동이나 달의 궤도 운동과 같은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의 질문(‘why-question?’)에 대한 답변을 제공한다. 두 번째는 운동의 일반 공리로서 운동 법칙을 일반화하여 정립하는 것이다. 이는 운동이 일반적으로 진행되는 방식과 과정을 보여주므로,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는가?’의 질문(‘How-question?’)에 대한 답변을 제공한다. 세 번째는 고전 물리학의 언어를 수학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가령 고전역학의 기본적인 용어들인 질량, 운동량, 힘의 개념을 수량의 형태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을 수학의 언어로 탐구하는 전략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운동의 본성을 논할 때 그의 기반이 되는 시간, 공간, 운동 개념을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분석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에 대해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를 구분하여 탐구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절대적이란 외부와 아무 관계없이 그 자체로 참이며 이상적인 수학적 형상을 띠고 있음을 함축하는 반면, 상대적이란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인지될 수 있는 일상에서의 상식적인 수준의 가변성을 함축한다.

과학 역사가들의 일반적 견해에 따르면, 뉴턴은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주장에서 시작된 근대 과학혁명을 1687년 『프린키피아』를 통해 완성시킨 과학자로 널리 받아들여진다. 흔히 ‘뉴턴의 종합’이 그 완성의 근거로 제시되는데, 그렇다면 뉴턴의 종합은 무엇이고 이것이 왜 근대 과학혁명의 완결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자. 첫째, 이론과 실험의 대등한 조화다. 자연을 수학 언어로 분석하고자 고전역학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하였는데, 결국 이론 자체가 수에 의존함으로써 계량적 측정과 관찰이라는 실험을 언제나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근대 물리학의 구조를 만들었다. 여기서 이론과 실험은 대등하면서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 결국 근대 과학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이론적(수학적) 전통과 실험적 전통이 뉴턴에 의해 통합된 것이다. 둘째, 지상계의 사물의 운동과 천상계의 행성 운동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물질의 단일한 운동으로 통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지상의 운동을 다루는 전통 물리학(동역학)과 천상의 운동을 다루는 천문학(우주론)을 천체역학으로 통합한 것이다. 셋째, 중력이 진공에서도 작용함을 근거로, 연속적인 무한의 진공 공간 속에 불연속적인 물질 원자들이 존재하는 자연의 조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다시 말해 연속적인 공간 개념(추상적)과 불연속적인 물질 원자 개념(구체적)을 통합한 것이다. 뉴턴 종합은 뉴턴 과학의 성공을 의미한다. 근대 과학혁명을 통한 뉴턴 과학의 이 같은 성공은 대표적인 성공의 모범 사례가 되면서, 이후 다른 여러 과학 분야들에서 같은 방식으로 해나가면 마찬가지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뉴턴 종합이 근대 과학혁명의 완성으로 불리는 이유다.

  1. 자연철학은 그 당시 과학의 다른 이름이며, 뉴턴 사후 1세기가 지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자연과학이 확립된다.
  2. 1705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knight)에 서훈되었는데, 이는 과학자가 자신의 학문적 업적으로 작위를 받은 첫 번째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