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시오 공화국

아키시오 공화국
あきしお共和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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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국장
상징
국가만민의 노래
국화해당화
국조신천옹
역사
1884년 10월 1일 아키시오 제1공화국 성립
1912년 5월 9일 아키시오 제2공화국 성립
1952년 12월 1일 아키시오 제3공화국 성립
면적
153,424.22k㎢
수도
후지시로 도 (藤城都)
인문 환경
전체 인구24,017,410명(2019년 10월 1일)
인구 밀도156.54명/㎢(2019년 10월 1일)
출생 인구53,300명(2019년)
기대 수명79세(2019년)
출산율1.14명(2019년)
공용 언어일본어
러시아어
종교기독교 52.3%(로마 가톨릭 74.9%, 정교회 23.0%, 장로교회 2.6%), 불교 33.5%, 기타 15.1%
군대아키시오군
하위 행정 구역
1개
1개
정치
정치 체제공화제, 이원집정부제, 양원제
대통령이즈미야마 쿠니오
총리마츠야마 이치로
부총리타니구치 아츠시)
국회의장이가와 게오르기
최고재판소장카네다 타카오
경제
경제 체제시장경제
GDP
1인당 GDP38,914 달러(2019년)
GDP(PPP)
1인당 GDP(PPP)36,336 달러(2019년)
수출량
수입량
공식 화폐아키시오 엔
단위
기년법서력기원
시간대UTC+10:00
도량형SI 단위
외교
가상국제연합 가입2012년 12월 5일
국가 코드
AK
ccTLD
.ak
국제 전화 코드
+88

아키시오 공화국 (일본어: あきしお共和国, 러시아어: Республика Акисио 레스푸블리카 아키시오[*][주 1])은 태평양에 위치한 섬나라이다. 아키시오 제도(아키시오모토지마 섬 및 니시아키시오 제도), 나다노 제도, 신페이 제도를 영토로 하고 있으며 아키시오령 히카사 군도를 1952년부터 관리하고 있다.

설정 중심의 1인 가상국가 중 하나였다. 그 전신은 2007년 토끼(당시 닉네임 사탕)가 세운 신진국으로, 아키시오라는 명칭은 신진국 운영 당시 "설정 상 발견"하였던 아키시오 섬에서 유래한다. 신진신동제국 연방 당시에는 대규모 연방의 일부인 "아키시오 주"로서 신진국 연방 정부가 직접 통치하였으며, 2011년 신진공국으로 설정이 개편된 뒤에는 유일한 영토가 된다.[주 2] 이후, 2012년 "아키시오 공화국"이라는 오늘날의 설정이 정착하였다. 2016년 12월에 주전자로 운영자가 바뀌었다.[1]

상징

국호

'아키시오' (秋潮)는 1756년 도쿠가와 막부에 헌상된 그림인 "가을의 물결흐름"(秋の潮流れ)에서 따서 도쿠가와 쇼군이 직접 내린 이름이다. 당대의 실권자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나, 덴노가 직접 지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전에는 에조(지금의 홋카이도 섬) 동쪽에 있다고 해서 히가시에조(東蝦夷), 후소아즈마 (扶桑東)등으로 불려왔다.

사실 아키시오는 아키시오 섬과 아키시오 공화국을 모두 가리키며, 아키시오 내부에서는 후자를 가리킬 때는 "공화국"이라고 칭하고, 대외적으로는 "아키시오 공화국" "아키시오 섬"으로 구분해서 표기할 것을 권장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국내에선 아키시오라고 하면 아키시오 공화국으로 인지되는 경우가 많아, 이 항목의 표제어는 아키시오로 한다. 아키시오 공화국으로 검색해도 넘어올 수 있다.

국기와 국장

노래

국화

국조

아키시오의 국조 신천옹(알바트로스)은 북태평양에 주로 서식한다.

국조는 신천옹(알바트로스)으로 1961년 《국가의 상징에 관한 법률》 제정 당시 지정되었다. 신천옹은 1941년 ~ 1945년 제2차 닛초 전쟁 당시 활약한 공화국 수비군 제1연대 산하 공중강습특전대대의 상징이었다.[2] 이 '신천옹 부대'의 활약은 매우 대단하여 일본군 사이에선 저승사자(しにがみ), 아키시오 국민들 사이에선 천사라 불리었다. 신천옹 부대의 상징인 신천옹을 아키시오의 국조로 정하는데 앞장선 이는 신천옹 부대 출신의 국회의원 이이다 히데키였다. 발의자가 제헌 시절부터 활약한 중진으로 국민당의 원내총무를 맡았던 사람이고, 신천옹 부대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여야 가릴것 없이 찬성으로 거들었다. 한국에서는 신천옹을 영어권의 표기에 따라 알바트로스 (Albatross)로 표기하고, 일본에서는 '바보새'라는 뜻의 아호도리(アホウドリ)라 부르나 아키시오에서는 신천옹(일본어: 信天翁 (しんてんおう) 신텐오[*])라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1961년부터 2000년까지는 '신천옹'을 '아호도리'라 표기하면 과태료를 부과하는 상징법 시행령이 있었으나, "전근대적이다"라는 비난과 함께 2000년 폐지되었다. 아키시오 공화국의 표준어를 관리하는 문교성 산하 국립한림원은 일본어 표기로 일본어: 信天翁 (しんてんおう), 한국어 표기로 '신천옹'을 표준으로 지정하였다.

역사

아키시오의 역사
あきしお史
История Акисио
Flag of Akishio.png

이 항목은 문단이 늘어나면 아키시오의 역사 항목으로 이설될 것이다.

에도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 전후를 빼면 2차 대전때까지 크나큰 전란 없이 평온가도를 달리던 일본 열도와는 달리 아키시오는 에도 시대 이후, 근대와 현대에도 전쟁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전쟁 경험은 근대기의 통합된 상비군 체제 형성이나 언제든지 빠르게 유사 시에 무장할 수 있는 동원시민군 제도의 도입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선사 시대

아키시오에 인류가 살아가기 시작한 시점은 종래의 15세기설이 제일 유력하였으나[3], 2008년 북방의 하마사카 시 일대에서 최소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그 연대가 앞당겨졌다.[3][4] 2010년대 이후 정립되고 있는 가정은, 아키시오가 일본 열도 및 한반도와 붙어있던 시대, 즉 토카이 지각대변동[주 3] 직전에 유라시아 대륙에서 인류가 넘어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나카아키시오 산지 중심부의 산악 지대에는 20세기 초중반까지 수렵 생활과 토속 신앙을 유지하던 부족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선사 시대에 넘어와 거주하던 선주민의 후손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국민당 정부의 강제 이주 정책과 동화 교육으로 원래의 모습을 잃고 일본계와 동화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국민당의 흑역사 중 하나가 되겠다.[3][5]

식민지 시대

석기시대 유적의 발굴로 아키시오에서 최초로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앞당겨졌지만, 인류가 대규모로 정착 생활을 시작한 것은 확실히 15세기 이후가 맞다.[6] 후지시로, 엔카이 등 여러 네임드 도시들은 이 시기에 정착민들이 건설한 소위 "진사이"(陣砦, 진채)에서 출발하였다. 이 때문에 최초의 일본인 유배인들이 출항한 1394년부터 후지시로와 나사(那佐) 사이의 첫 대회전이 벌어진 1541년의 나사 호수 전투 (那佐湖の戦い)까지를 진사이 시대, 그 이후를 센고쿠 시대라고 한다. 식민지 시대라는 명칭이 통용되나, 아키시오 사학계 내부에서는 "식민지"라는 단어의 사용을 기피하여 일반적으로는 진사이 시대라고 호칭한다.[6]

이 시기는 아키시오의 존재가 일본에 알려진 시기이기도 하다. 몽골과의 전쟁 이후 해안선 일대의 정찰을 하던 어가인(御家人) 호조 무네우지(北條宗氏) 일행이 표류하여 최초로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6] 이후 가마쿠라 막부가 정기적인 탐사를 시행하였으나, 당시에는 "산지가 험준하고 화산 폭발이 잦아 사람이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반역죄를 지은 사람들 등 흉악범들의 유배지로 쓰였다. 무로마치 시대 중반기에 들어, 아키시오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난보쿠초 시대를 종식시키고, 두 왕실 사이의 화해를 주선하였다. 그러나 당시 아시카가는 물론, 국왕 고코마쓰 덴노까지 남조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꺼림칙하게 여겼으며 실제로 남조의 고카메야마 덴노는 북조의 고코마쓰 덴노가 "국왕 자리를 남조, 북조 두 왕실이 번갈아가면서 즉위하기로 한" 약속을 깨고 자신의 아들에게 양위하자 불만을 품어 남조 부흥 운동을 추진하기까지 했다. 이에 아시카가는 후환을 제거하기 위하여, 1394년부터 1399년까지 몇차에 걸쳐 남조 소속 슈고 다이묘들 산하의 농민들과 무사들을 죄수들과 함께 강제로 배에 태워 아키시오로 보냈다.[6] 정작 다이묘들과 고위 무사들, 유력자들은 제외하였는데 이들까지 직접 송환하면 통제력을 갖춘 이들이 집단으로 반기를 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수 세기 뒤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이들은 우선 지금의 후지시로 일대에 정박하였는데 후지시로는 다른 지역에 비해 해안선이 단조롭고 지대가 낮아 선박의 정박이 용이하며, 한편으로는 양 옆의 시바우라 곶(芝浦岬)과 카나우라 곶(金浦岬)이 방파제 역할을 하는 등 천혜의 요지였다. 유형자들은 지금의 후지시로 항에서 동북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고지까지 이동하여 진채를 건설하였으며, 그 진채와 항구를 중심으로 하여 약 1리 (약 4km) 떨어진 지점까지는 집을 짓고 자유롭게 살도록 허용하였고 그 바깥으로는 나무와 돌을 섞은 장벽을 쳐서 출입을 통제하였다.[주 4]

센고쿠 시대

일반적으로 1512년 나사 호수 전투 때부터를 센고쿠 시대라고 호칭한다. 오닌의 난에 대한 소식이 아키시오로 넘어오면서, 아키시오 각지의 슈고 다이묘들이 허수아비가 된 막부에 반기를 들고 독립적인 영지를 구축해나갔으며, 이들은 곧 한정적인 영토와 식량을 더 확보하기 위해 다른 다이묘들을 치기 시작한다. 후지시로의 영주였던 미치노쿠 카츠노리(陸奧勝紀, 세이와겐지 방계 귀족. 성씨는 도호쿠 출신인데서 유래)와 나사 성의 영주 나사 겐포 (那佐元法)[주 5]가 충돌한 나사 호수 전투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여러 다이묘들 간의 난전이 벌어진다.

1570년대에 들어서면 영세한 다이묘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이른바 센고쿠시치유(戰國七雄, 전국칠웅)[주 6]이라 불리우는 일곱 센고쿠 다이묘가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다. 서쪽에서 동쪽 순으로 키토오쿠 국(北奧國; 지금의 하마사카 현)의 키타미 씨, 타네 국(多寧國)의 오오무라 씨, 벤조 국 (弁藏國)의 벤조 타케다 씨[주 7], 시라노 국 (후지시로)의 이케다 씨[주 8], 아즈키 국코모로 씨, 호제 국카나야마 씨, 엔카이 국엔카이 무라노 씨가 이 센고쿠시치유였는데, 쌀 생산 환경이 척박했던 키토오쿠 국은 감자 생산량으로 대신 계산한다 치더라도 모두 평년 식량 생산이 8,000석을 넘었다.

제일 돋보이던 세력은 무라노 씨와 이케다 씨. 무라노 씨가 무력을 통해 주변 다이묘들을 무너뜨린데 반해 이케다 씨는 가까운 다이묘들은 공격하거나 재력으로 끌어들이고, 먼 다이묘들에게는 정략 결혼을 통해 우호를 도모하였다.

이케다 철검대 시대

로마 가톨릭 교회(엄밀히 말하면 교회 소속의 예수회)는 이케다 철검대의 주요한 지원군 중 하나였다. 17세기 초에 일본을 경유하여 후지시로에 들어온 카를로스 디아스의 예수회 선교단은 지금의 후지시로 성에서 서남쪽으로 1km 떨어진 곳의 빈 집을 사들여 선교를 시작하였다.[주 9]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그리스도교는 신분 차별을 반대하고 만민 평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옆동네 일본에서 가톨릭 교회가 에도 막부의 집중 탄압으로 갈려나간 반면, 철검대 진영은 에도 막부에 저항할 목적으로 가톨릭과 예수회를 우방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처음에 예수회는 이들 또한 타파의 대상으로 여겼으나 일본에서 교회가 통치 세력과 척을 진 결과를 제대로 눈여겨본 뒤였고, 결정적으로는 철검대 진영이 "철검대장은 나라에서 당신들이 말하는 왕(王)이다. 우리에게 협력하며 신기술을 제공하면, 왕으로서 포교에 적극 동참할 것"이라며 설득한 것이 컸다. (그리고 당시 철검대장 이케다 마사이에는 이후 세례까지 받았다) 이런 타협에 따라 예수회는 "닥치고 모두 평등"에서 "왕은 남기고 우리끼리 평등하게 지내자"라는 온건한 노선으로 선회하였고 그 대가로 철검대는 예수회의 선교 활동을 철저히 묵인해준다.[주 10] 에도 막부는 사신을 보내 철검대장에게 참근교대 동참과 함께 가톨릭 교회의 박멸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조적으로 지정, 공격하겠다고 경고하였으나, 그에 대한 대답은 사신의 잘린 수급이었고, 막부는 경고한 대로 철검대를 조적으로 지정, 임진왜란 이후 근 40년 만에 전쟁에 돌입한다.

아키시오에서는 훗날 신앙 전쟁이라 부르게 되는 이 전쟁은 막부군이 2번에 걸쳐 원정군을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1차 원정대(1646년)는 악천후를 맞아 병력의 반 이상이 날아간 상태에서 아키시오모토지마의 서해안에 당도하였으나, 마에시라즈 절벽[주 11]에 막혀 정박지를 찾지 못하다가 2개월 반이 지나서야 후지시로 근교의 시바우라(芝浦)에 정박한다. 그리고 오랜 항해로 굶고 지친 상태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할 수 없었기에 그 일대에서 숙영하다가 야간 기습을 당해 전멸. 뒷감당을 할 수 없었던 공격대장 우라소에 사콘(浦添佐根)[주 12]은 남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귀순하였다.[주 13] 우라소 정벌대가 개털리고 대장이라는 작자가 귀순하면서 끝나버린 1차 정벌에 관한 전갈은 1년이 지나서야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서 에도 막부에 도착했다. 막부는 우라소에의 가족들을 전부 참형에 처하고, 절치부심하며 준비한 끝에 소성조(小姓組) 무관 출신의 마쓰다이라 히데미츠(松平英光)를 대장으로 임명해 2차 정벌을 보낸다. 이 사람은 성씨에서 알 수 있듯이 도쿠가와의 방계이고(이에야스의 원래 성씨는 마쓰다이라였다), 이에야스가 철검대와 동맹을 맺었을 당시 아키시오에 파견을 가서 많은 전투를 경험했기에 지리에도 밝아서 2차 정벌대(1650년)는 2주 만에 시바우라 시에 도착하여 후지시로로 진격, "칼을 들고 있는 자, 십자가(묵주를 가리킴)를 쥐고 있는 자들은 죄다 죽이라"는 방침을 정해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하였다. 점령지에서는 당연히 가톨릭 신자를 가리기 위해 후미에를 시행하였고, 신자를 밀고하는 이들에게 공물을 하사하며 철저하게 가톨릭 신자들을 말살해나갔다. 그러나 예수회는 봉사 활동과 식량 자선 등으로 이미 현지 주민들의 민심을 얻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적으로 돌린 것은 정벌대의 큰 실수였다. 처음에는 조정의 군대가 왔다하여 멋모르고 환영하던 농민들도 이웃들이 학살당하자 저항하기 시작, 정벌대의 점령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보급도 끊겨서 겨울에 들어서는 궤멸 위기에 놓인다. 후지시로 근교에 성채를 짓고 해를 넘기며 곤궁히 버티던 와중에, 당대 쇼군 이에미츠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고, 쇼군의 장례와 새 쇼군의 책봉에 참석해야했기 때문에 마츠다이라는 철수를 선언, 2차 정벌도 실패로 끝난다[주 14] 우라소에와는 달리 마츠다이라는 나름대로 전공을 거두었고, 철수한 것도 쇼군의 사망으로 인한 것임이 참작되어 전쟁 영웅으로서 식읍을 받았고, 이후 식읍이 있는 고향 이바라키로 내려가 원로로서 조용한 여생을 보낸다.

두 번의 정벌이 모두 실패한 이후, 새로 쇼군에 오른 이에츠나가 문치 정책을 추구하면서 이러한 양안 관계도 개선의 조짐이 보였다. 이에츠나는 사신을 파견하여 화해를 주선하였고, 철검대에서도 이에 응하여 철검대장과 에도 막부 대표 호시나 유키사다(당대의 네임드인 호시나 마사유키의 사촌) 사이에 등나무의 맹이 체결된다. 이 등나무의 맹에 따라 아키시오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를 비롯, 아키시오의 사정에 대해 에도 막부는 더 이상 간섭을 하지 않기로 하였고, 대신 철검대는 조정(과 막부)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매년 무역선 편으로 공물을 지불하도록 하였다. 참근교대 참여도 3년에 한 번, 세 달 동안(근 100일 간) 입조하는 것으로 대체하게 허락하였다. 이것 또한 18세기 들어서는 "해적들이 들끓고 천재지변이 잦아 왕래가 까다롭다"는 이유로 공물을 더 얹어보내는 것으로 대체. 참근교대가 에도 막부가 엄격하게 수호하던 제도임을 감안했을 때 에도 막부에 상당히 불리한 조항이었지만, 많은 국력을 동원해 전쟁을 일으켰음에도 사실상 패한 상황이었고 지리적 거리도 상당해서 어쩔수 없이 들어준 것이 컸다.

이케다 철검대는 다이묘들의 난립에서 교훈을 얻어 중앙집권통치를 추구하였다. 에도 막부의 통치 방식을 본따 후지시로 성을 제외한 나머지 성들에 대해 철폐 조치를 내렸다. 대신 조선의 관아에 해당하는 지사부(地司部)와 호민소(護民所)를 설치하였다. 지사부는 지금의 현청과 동급이었고, 호민소는 시청 및 군청과 동급이었다. 현지사(縣知事)에 해당하는 지사(地司)와 시장·군수에 해당하는 호민관(護民官)은 중앙에서 직접 문관 출신으로 임명하여, 2년에 한번씩 임지를 바꾸도록 하였고, 상피제를 적용하여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는 임관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이는 지역 토호들과 지방관의 유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조세 제도의 통합과 개혁도 이루어졌다. 이제까지는 각 영지의 다이묘들마다 제각각이었으나, 1608년 《오석령》(五石令)을 지정하였다. 모든 공물과 조세는 1년마다 쌀로 통합해서 납부하되, 개인이 가지고 있는 논밭의 크기를 정하여 100석 미만의 농민들은 쌀 5석, 1,000석 이상의 대농들은 20석과 같이 차등하여 세금을 부과하였고, 쌀이 자라지 않는 북방 지대에서는 보리, 고구마나 감자 등으로의 납부를 허용하였다. 땅이 없는 소작농들의 경우에는 지주가 통합해서 대납하도록 하였으나, 지주들이 조세 시기가 다가오면 장부를 고쳐 소작농들이 논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꾸며 소작농들이 지주와 관청에 2배 이상의 세금을 내야하는 일도 자주 발생하였다. 가혹한 쌀 납부 강요와 생활고에 지친 소작농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망가서 화전민, 산적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타치바나와 카미가와의 반란

나다노 제도 남부와 신페이 제도은 오랫동안 불모지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몇몇 다이묘들이[주 15] 세력을 이끌고 도피해 정착하였다. 이 중 가장 돋보이는 세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족임을 주장하던 도요토미 사다하루(豊臣貞治)로, 오사카 성 전투에서 히데요리가 죽자 스스로를 "태합의 정통 계승자"로 칭하며 지금의 야타마 시 일대에 나카야마 성을 건립, 나카아먀 막부의 창건을 선언한다. 그러나 막부의 설치나 정이대장군 관직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덴노가 허락하는 것이었으므로, 일반적으로 역사계에선 "사칭" 막부, 즉 나카야마 사칭 막부라고 부른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통 일족들은 사실상 끊겼다고 보아도 무방하였고, 이미 덴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정이대장군직을 하사하였기 때문에 이는 어그로 끌기에 불과하여 되려 조적(朝敵)[주 16]으로 지명되기에 이른다. 결국 2대 쇼군인 카미가와 하루토키(上川治時) 대부터는 도요토미라는 성씨를 쓰지 않게 된다. 그러나 조적 지명이 철회되는 일은 없었다... 신앙 전쟁 이후 등나무의 맹을 체결하면서, 에도 막부는 철검대의 존재와 아키시오 지역에서의 그리스도교를 인정해주는 조건으로 나카야마 막부를 공격해주기를 요청하였고, 이케다 철검대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은 에도 막부의 바람과는 달리 손쉽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케다 철검대에게는 나카야마 사칭 막부 외에도, 나카야마 막부로 공격해가는 길목에 있던 엔카이 지방의 타치바나 세력 또한 17세기의 큰 골칫거리였기 때문이다. 타치바나라는 성씨는 흔하지만[주 17] 아키시오사에서 제일 유명한 타치바나 씨는 단연 엔카이 부엔카이 시를 본관으로 하던 엔카이 타치바나 씨(延海立華氏)일 것이다. 1691년 지방관으로 파견된 쿠사노 마사오키(艸野正興)는 당시 교통이 불편하여 통제가 잘 닿지 않던 엔카이 지역에서 근무하였는데, 당대에는 산적들이 들끓어 후지시로를 오가기 위해서는 가도로 직접 다니기보다는 바닷길로 돌아서 가는 것이 나았을 정도이다. 쿠사노가 이런 한직으로 밀려난 데에는 문관들 사이의 권력 암투에서 진 것이 컸다. 이에 불만을 품었던 쿠사노는 당시 똑같이 촌뜨기 취급을 당하며 무시당하던 엔카이 주민들을 선동, 무장 봉기를 하면서 성씨도 타치바나 씨로 바꾸고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를 타치바나의 난이라고 한다. 당연히 철검대에서는 진압대를 보냈는데 영 좋지 않게도 태풍에 역관광당하며 실패, 오히려 "하늘도 우리를 도우고 있다"는 타치바나의 선동 도구로 쓰이고 말았다. 타치바나 마사오키는 엔카이 일대를 장악하고는 정벌을 그만둔 이케다 정권의 묵인 하에 천수를 누리다 갔으며 6대에 걸쳐 사실상의 독립 국가로서 이케다 정권과 나카야마 막부 사이의 중간 무역을 통해 떼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이 두 세력은 1836년 나카야마 막부 쇼군 계승 전쟁에서 싸그리 갈려나간다. 타치바나 가문은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지며 폐서인되어, 평민 일족으로의 강제 입적을 통해 사실상 멸문당했고[주 18], 나카야마 막부는 철검대와의 정략 결혼으로 인해 허수아비 세력으로 전락했다. 이 때부터 나다노 제도와 신페이 제도에 대한 아키시오의 실질적 통치가 시작되었다 해도 무방하다. 타치바나 씨의 족보는 등서(騰書; 사본) 1부만을 남기고 전부 태워졌는데 그 사본은 후지시로 성을 개조한 대통령궁 옆의 역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타치바나 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나오는데 유전자 감식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짜 타치바나 씨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불명.

독립 전쟁과 제1공화국 건국

1884년 아키시오는 일본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아키시오 독립 선언문)

제2공화국

태평양 전쟁

1941년 12월 16일 일본군 (북양군)의 기습적인 공습이 이루어졌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본에 선전포고하였으며, 이로써 닛초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초창기 나치 독일의 전격전 전술을 모방하여 후지시로로 가는 길목에 있는 주요 거점들만을 빠르게 점령해나갔으며, 1942년 1월 하순에는 후지시로에서 20km 떨어진 지점인 키츠네 고개(きつね峠)에 이른다.[주 19] 아키시오 또한 15만명에 이르는 육군과 민병대를 동원하여 각지에서 일본군과 격돌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키츠네 고개에 이르러서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며 결국 일본군에게 진로를 내주고 만다. (키츠네 고개 전투) 키츠네 고개에서 최후의 전투가 시작될 즈음, 아키시오는 청야 전술을 택하여 후지시로 일대에 대한 소개령을 선포, 후지시로 및 근교의 시민들을 동북쪽으로 250km 정도 떨어진 미야하라로 피난시키고 피난에 필요하지 않은 잉여 식량과 물자들을 모두 불태워버린다. 일본 제국이 건국절로 기념하는 날이었던 2월 11일, 일본군은 마침내 후지시로에 입성하였고, 수색 작전을 벌인 끝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이와토 후미오(岩戶文央) 시장과 20명의 시민군을 붙잡았다.

당시 침공군 사령관이었던 마츠이 사부로(松井三郞) 중장은 전 병력을 통제하여 약탈, 방화, 살인, 겁탈을 비롯한 일탈 행위를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이와토 시장에게 일본군이 끌고 오는 전쟁 포로들을 자치적으로 관리하며 후지시로를 재건하도록 하였다. 한편으로는 4월에 엔카이 시, 마츠오카 시를 점령하였고, 미야하라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키리바시 고개까지 진격하였으나 모종의 사건으로 도조 히데키의 눈 밖에 나서[주 20] 본국으로 송환되어 강제 예편당했다.

일본군의 점령지에는 북양청 산하 아키시오 개척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아키시오는 내지의 일부로 편입되어, 개척사령부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개척사령부는 미처 도망가지 못한 시민들과 전쟁 포로들을 상대로 후지시로 대학살, 카만카타 해안 죽음의 행진을 비롯한 온갖 전쟁 범죄와 가혹 행위를 자행하였고, 처음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던 일부 대일본주의자 사상자들까지 이반하여 레지스탕스로 들어가는 등 일본군은 극심한 저항에 시달렸다.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투자를 받지 못해 허술했던 육군이나 민병대와는 달리 아키시오 해군은 전력을 온존한 상태에서 북양함대와의 교전을 통해 제해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아키시오 전선은 점차 수렁에 빠져들어갔다.

1943년 후반, 알류산 열도 전역에서 승리한 미군이 아키시오 전선에 뛰어들었다. 무기대여법 시행으로 아키시오군에는 엄청난 물량의 군수품 지원이 이루어졌고, 미 해군의 일부 병력도 전선에 투입되었다. 북양군은 거점마다 방어선을 구축하여 치열하게 저항하였으나 1944년 8월 아키시오군은 나다노 제도, 신페이 제도, 아키시오모토지마 섬을 전부 수복하였다. 미 해군의 병력이 철수한 후 아키시오 해군과 해군 육전대 (현 아키시오 해병대)가 단독으로 참전한 니시아키시오 제도 전역이 1945년 7월에 거의 종결되면서 아키시오군은 일본 본토 침공 계획을 세웠으나,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침공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아키시오는 연합국의 승전국으로 분류되어,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이 점령했던 중부 태평양의 히카사 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도쿄에서 열린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및 GHQ에 일부 고문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현대

제3공화국 성립

신페이 내전과 수정헌법

개혁당-사회당 내각 이후

기타: 아키시오 설정 변천사

아키시오는 2008년 신진제도 남쪽에 섬이 발견되었다는 설정에서 출발하여 많은 설정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지방

아키시오는 각 지방별로 뚜렷한 지역색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키시오모토지마 섬의 북쪽에서부터 사이호쿠 지방 (西北地方), 토호쿠 지방 (島北地方)[7], 사간 지방 (左岸地方), 유간 지방 (右岸地方), 코잔 지방 (高山地方), 추산 지방 (中山地方), 엔쇼 지방 (遠松地方)으로 나뉘며, 나다노 제도와 신페이 제도는 나다노 지방과 신페이 지방으로 분류한다. 수도권은 유간 지방 쪽에 있지만, 유간 지방에 포함하기도 하고 별도로 분류하기도 한다. 본 항목에서는 별도 서술.

수도권

후지시로 도와 마에하마 현의 일부 위성도시를 포함하는 수도권.

사이호쿠 지방

토호쿠 지방

사간 지방

바다 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안토쿠 강 (安徳川) 좌안이라고 해서 사간 지방이다. 니시오카 현, 토요히라 현이 여기에 들어간다. 평지가 이어지는 토요히라 현은 유서깊은 곡창 지대이다.

유간 지방

안토쿠 강 우안. 마에하마 현, 후지시로 도, 삿소 현에 해당한다.

코잔 지방

나카아키시오 산지 일대를 가리킨다.

행정 구역

아키시오의 행정구역은 아래와 같다. 1도(都), 1부(府) 11현을 두고 있다.

(都)
(府)
(県)

오늘날의 행정구역은 1952년 이후 거의 확정되었다. 최근의 도부현급 행정구역 변화는 2015년에 미야하라 현에서 시모호쿠토 현이 분할 설치된 사례다. 한편, 히카사 군도는 행정구역 상 엔카이 부 히카사 군에 속해있다.

지리 및 환경

아키시오는 북태평양 상에 위치해 있다. 아키시오모토지마 섬(秋潮本島)[주 21], 니시아키시오 제도[9], 나다노 제도, 신페이 제도, 아키시오령 히카사 군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토의 최동단은 신페이 제도 로호쿠 섬(郎北島)에 있는 무다사시 곶(武田剌岬), 최서단은 니시아키시오 제도 와카자루가시마 섬(若猿島), 최북단은 크라스나야 대공국과 분할 점유 중인 카나스 섬(加奈須島), 최남단은 아키시오령 히카사 군도오오츠키 섬이다.

지형

약 2만 년 전 최종빙기 때 일본 열도, 크라스나야 제도와 함께 유라시아 대륙에서 최대 섬이자 화산섬인 아키시오모토지마 섬에는 제주도의 오름을 연상하게 하는 측화산 지형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섬 중앙의 모토미야 산(本宮山)은 유일한 화산으로, 이름 모토미야 자체가 자궁(子宮)을 가리키는 말이다.[10] 곧 모든 측화산들의 어머니인 셈이다. 모토미야 산을 주봉(主峰)으로 하는 나카아키시오 산지가 섬 중앙을 양분하고 있어 교통 개발에 어려움이 컸다. 모토미야 산은 100년 ~ 200년 주기로 크고 작은 분화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니시아키시오 제도는 아키시오 섬 생성 직후에 있었던 모토미야 산의 분화로 인한 지각 변동으로 인해 떨어져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기후

자연재해

환태평양 조산대 상에 위치하여 있으며(히카사 군도 제외), 잦은 지진과 화산 활동으로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이러한 연유로 전문가들은 아키시오모토지마 섬에 3,000만명 이상은 쾌적하게 거주하기 힘들다고 지적한다.[11] 역대급 피해를 남긴 재해로는 1973년의 모토미야 산 분화와 1980년의 타가-마츠오카 대지진,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을 꼽는다.

정치

다당제 민주주의와 함께, 대통령이 국가 대표로서 외교 및 국방을 총괄하며[주 22][12] 나머지 내무는 총리와 내각이 담당하는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고 있다. "반공"을 기치로 자유주의 우파 성향의 정당들이 국민당을 중심으로 1952년 총선에서 대연합을 이루어 승리한 52년 체제로 말미암아 국민당이 1980년대 후반까지 장기집권하였다.[12] 물론 북안 미사일 기지 사태, 68혁명과 오일 쇼크에서 드러난 국민당의 병크로 1968년과 1972년 총선에서 아키시오 공산당사회당 등에게 털리며 위기를 맞았으나[주 23], 공산당이 계파 분쟁으로 지리멸렬하며[주 24] "역시 빨갱이들은 안 된다!"(やっぱ赤坊主は駄目だ)[주 25]는 레드 컴플렉스를 내세운 호토리 시로 총재가 1976년 총선을 승리로 거두며 국민당 정권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신페이 내전에서 일본계 중심의 인종차별 정책이 한계를 드러내며(화조주의(和潮主義) 항목 참조) 전세계적인 비판을 샀고, 1988년 총선에서 패배, 아예 중소정당으로 밀려나며 현재까지도 집권을 못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보수적인 농어촌 지역의 표심으로 버텨왔는데 그것마저도 2000년대 들어 대외 성향만 친러로 다를 뿐인 중도우파 정당인 기민당, 민주당에게 빼앗기고 만 것.[12] 2017년 현재까지 중도우파 성향의 기독민정당민주당이 점점 흔들리는 개혁당-사회당 연립 내각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며, 다음 대선은 2017년, 총선은 2020년에 있을 예정이다. 대선은 5년에 한 번, 총선은 4년에 한 번 치르게 된다.

대통령은 5년제 단임으로 국민이 직접 선출하며, 총리는 원내 제1정당(여당)에서 선출한다. 규정 상 선출이지만 일반적으로 총리는 당 대표가 단독으로 나가서 뽑히는 경우가 많다.[주 26] 국민당이 일본 자유민주당의 영향을 많이 받은지라[주 27] 자민당의 종특 특색인 계파 정치와 정경유착도 두드러진 사회 문제였다. 유럽 유학파가 중심인 개혁사회 연립 시대에 들어서는 대대적으로 정화되었다지만 일명 "코드 인사", "사제 관계"로 인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12]

행정은 아키시오 공화국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전담한다. 행정조직과 관련된 내용은 아키시오의 국가행정조직 항목을 참고할 것.

국회는 단원제로 운영되고 있다. 2차 대전 이전에는 양원제를 채택하였으나, 거국 내각을 거치면서 의사 결정이 느리다는 비판을 받아왔고, 52년 개헌을 통해 단원제로 수정되었다. 4년에 한번씩 총선을 가지며, 국회의원은 소선거구제로 선출하되 의석 200석 중 10%인 20개석은 비례대표제를 채택, 표를 가장 많이 얻은 정당부터 비례하여 의석을 얻는다.[12]

사법부는 3심제로 운영하며, 사법 기관은 대한민국과 동일하게 법원(法院)으로 불리운다. 지방의 주요 도시에 위치한 지방법원, 광역권의 거점에 자리한 고등법원, 후지시로에 있는 공화국 대법원 순의 서열이 존재한다.

현재 대통령은 이즈미야마 쿠니오(泉山国雄)[주 28]이며, 총리는 59대 총리인 마츠야마 이치로(松山一朗)이다. 현행 내각은 마츠야마 내각 항목을 참조할 것.

원내 정당 목록

정당 목록은 가나다 순이다.

당명 성향 설립년도 비고
개혁당 사회민주주의, 친러 외교, 중도좌파 집권여당, 사회당과 연립
공산당 유럽 공산주의, 좌파 1920년
국민당 신자유주의, 야마토 민족주의, 친일 외교[주 29] 1891년
민족총화당 국수주의, 야마토 민족주의, 파시스트 1973년
사회당 사회민주주의, 친중 외교, 좌파 1968년 개혁당과 연립
민주당 자유주의, 중도우파 1891년
크리스천 민주정치당 (기독민정당) 기독교 민주주의 (가톨릭, 정교회 성향), 중도우파 1920년

경제

전통적으로 농업 및 낙농업과 임업 등의 1차 산업이 중심지였다. 국토의 대부분이 미개발된 원시 지역으로 인구가 해안과 가까운 특정 지역에 몰려있는 편이어서, 19세기 들어서는 해안선을 따라 공업화가 이루어졌고 (난카이 공업 벨트),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미개발 지역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각종 다국적 기업들의 지식 연구 단지가 들어서고 있다.[13]

교통

철도 교통

봄철과 가을철이 되면 도로가 얼었다 녹아내렸다를 반복하는 등 도로 사정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며, 철도가 교통의 중심이다. 따라서 주철종도 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도로의 98%와[14] 철도의 83%를 아키시오 철도청이 운영하고 있다. 특히 아키시오 철도청은 운영 면에서 일본국유철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방만 경영으로 많이 까였다. 차이점이라면 좌측통행과 영국식 케이프 궤간(1067mm)을 사용하는 일본과는 다르게, 우측통행과 표준궤(1435mm)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일부 북방 화물노선은 러시아식 광궤를 사용 중. 광역 이동은 항공기와 더불어 1982년에 개통한 아키시오 신칸센이 주축을 이루며[주 30] 두 개의 해저 터널을 차례로 개업한 신칸센과 저가 항공사들이 경쟁하는 추세이다. 비정상적으로 인구가 과밀된 후지시로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서는 국철과 후지시로 고속철도 등의 사철이 실사판 OTTD를 찍으며 경쟁을 벌이는 수준이다.

간선 철도를 제외한 도시철도의 경우 후지시로 시영 지하철엔카이 시영 지하철이 도시권 수송을 책임지고 있다.

해상 교통

섬나라의 특성상 항만 교통도 많이 발달하여, 항공 교통 발달 이전에는 후지시로 제1항후지시로 제2항(지금은 니시후지시로 시 소재)은 근대기부터 태평양을 오가는 무역선과 여객선의 주요한 경유지 중 하나였다.[15][주 31] 후지시로 외에 시마모토 시, 키타하마사카 시, 엔카이 시, 우라베 시 또한 섬 각지의 주요한 항만 도시로 발달하였다.

항공 교통

항공 교통은 2차 대전 이후 크게 발달하였다. 가장 큰 허브 공항은 후지시로-미사토 이케다 테루히데 국제공항이며 이외에 엔카이 국제공항, 나다노 국제공항, 야타마-쿠마시키 국제공항 등 4개의 국제공항이 들어서 있다. 이밖에, 각 광역권 도시 별로 중소 규모의 공항과 민·군 공용 비행장이 설치되어 있어 도시 간에 항공 교통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도로 교통

상술한 바와 같이 아키시오 공화국은 철도 중심의 교통 정책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도로 교통은 수도권과 엔카이 부 쪽을 제외한 지역의 경우 도로보다는 철도를 이용하는 편이다. 수도권과 엔카이 부의 경우에는 후지시로 도시고속도로엔카이 부 고속도로, 그리고 두 도시를 잇는 후지엔 고속도로가 있다.

외교

1952년부터 (형식 상) 2013년까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부속 조항[16]에 의거하여 무장중립국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집권 정당의 성향을 많이 타면서 친미 노선을 오랫동안 탔고 이후에는 친러 노선으로 갈아타는 중. 사실 소련이 떡하니 버티던 시절에도 총리가 대놓고 "공산주의는 신앙을 부정하는 저주받은 집단"이라며 디스한다던지, 레이건-부시 행정부 때는 신페이 내전으로 인해 대량으로 미국제 무기를 수입한 적도 많아서 사실상 유명무실한 조항에 불과하였다. 지니게이의 아키시오 침공을 계기로 중립국 지위를 완전히 포기, 크라스나야 대공국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였다.

주변국 관계

크라스나야와의 관계

군사동맹 관계. 아키시오는 크라스나야와 2013년에 군사 동맹을 체결하면서 한참 전에 유명무실하였던 중립국 지위를 완전히 청산하였다.

일본과의 관계

러시아와의 관계

사실 두 나라 사이를 잇는 최대 키워드는 단연 정교회일 것이다. 아키시오의 정교회는 크게 세 가지. 러시아 정교회, 크라스나야 정교회, 그리고 극소수의 그리스 정교회가 있는데 이 중 러시아 정교회가 전교 역사도 가장 오래되었고 규모도 최대이다. 현재 집권 중인 개혁당-사회당 연립 정권이 극동주의를 표방하며 친러 성향을 드러내고 있어서 2000년대 들어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미국 선교사들은 19세기부터 아키시오 섬 동해안에 자리잡으면서 그리스도교 선교를 해왔는데, 이미 가톨릭이 자리잡은 국가라는 사실을 알고 많이 놀란 모양이다.[17] 공화국 건국 이후 미국과 바로 수교하였으며, 닛초 전쟁 당시에는 미 해병대 2개 연대가 파견되어 아키시오군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웠다. 소련의 배후를 노릴 수 있는 국가였기에 미국 측에서는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써서 전후에도 공병대대를 파견하여 재건을 지원하는 한편으로 무기와 군대를 빌림으로써 생긴 부채도 탕감시켜주었다. 1952년 이후, 아키시오는 표면적으론 중립국 상태였지만 지리적 이유나 시장경제체제를 선택한 것, 결정적으로 집권 국민당 정권이 친미 성향인 것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미국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러시아와 더불어 북해안 미사일 사태에 얽힌 국가로, 쿠바 미사일 사태에서 소련을 압박하기 위하여 케네디 정부가 아키시오 북해안에 핵미사일을 무장한 잠수함을 심어놓았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미국 대사가 초치당하는 등(..)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한국과의 관계

한국 전쟁 당시 1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대대, 2개 의무대를 파견하여 지원한 바가 있다. 이른바 "잊혀진 전투"라 불리우는 1951년 안변·통천 전역에서 유엔군을 지원하였다. 파병 부대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따라붙은 '중립국 규정'에 따라 전원 철수하였다. 당시 생환해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국민당 정권에 의하여 반공 투사이자 전쟁 영웅으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정권이 바뀐 지금도 국가유공자의 예우를 받고 있다. 이러한 파병 병력의 대부분은 한국계로서, 자원한 경우가 많았다.[18] 1973년 공식으로 수교하였으며,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수교하지 않고 있다. 서울특별시에 대사관이, 부산광역시에 영사관이 설치되어 있다.

가상국제연합 내 활동

2012년 cocat_blu가 일으킨 지니게이의 아키시오 침공을 계기로, 유령 연합이 되어버린 UVS에서만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 2012년 12월 가상국제연합에 가입을 신청하였으며, 이듬해 2월 UVS와 가상국제연합의 통합에 따른 "구 UVS 가입국 예우"에 따라 이사국 지위를 취득하였다.

국방

이전까지는 비동맹 중립 노선을 유지하여 대부분의 무기를 직접 개발하거나, 소련 붕괴 이후에는 러시아제 무기를 간간히 수입해왔다. 이후 크라스나야와 2013년 군사 동맹을 체결하여, 크라스나야군이 일부 주둔하고 있다. 반대 급부로 아키시오는 합동 군사 훈련에 동참하고, 특수전여단 1개 지역대를 크라스크로 파견, 특수전요원 양성을 비롯한 각종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병역 제도

모든 국민은 병역의 의무를 지고 있으며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다. 아키시오에서의 뱡역 제도는 일명 동원시민군(動員市民軍) 제도라 불리우는데, 이는 만 19세부터 만 45세까지의 모든 시민권자에게 1년 중 연속하는 10일 동안 기초군사훈련을, 또 10일 동안 군사특기 훈련을 받도록 하는 제도이다. 무슨 달에 입소할지, 그리고 무슨 주특기로 교육을 받을 것인지는 본인이 지망해 선택할 수 있으며,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동원지정부대에서 10일간 기초군사훈련을, 그리고 나머지 10일은 본인이 선택한 주특기에 맞추어 군사특기 훈련을 받는다. 당연히 이 기간 동안 보수도 나오고, 출퇴근식이다. 주둔지에서 집이 너무 떨어져서 통근이 제한되는 경우에는 개인 생활관을 제공한다.[주 32]

평시에는 이렇게 동원예비군처럼 매년 훈련을 받다가, 전시에는 동원령이 발령되어 상비군부대 및 전투근무지원부대로 예비군 연령 내의 모든 국민이 배속되어 싸운다. 이러한 병역 제도는 스위스의 것을 모방한 것으로, 소련의 견제로 대규모 군대를 만들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택한 최선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완전모병제로 전환하자는 목소리가 있었고, 2011년에 실제로 그렇게 될 뻔했으나 북크로센 전쟁지니게이의 아키시오 침공 사태에서 동원시민군 제도가 상당한 효율을 입증하면서, 다시 "전 국민이 전시에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기술을 배양한다"는 동원시민군 제도의 목적만 재확인한 셈이 되었다.

육군

해군

공군

사회

민족

아키시오 공화국의 근간은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는 일본계 아키시오인으로, 지금은 세대를 거치며 제도교육이 정착해 별 차이가 없어졌지만 무로마치 시대에 유배를 온 이들의 후손인 무로마치계, 센고쿠 시대에 전란을 피해 넘어온 귀족층의 후손인 센고쿠계[주 33], 에도 시대 이후 박해를 피해 넘어온 그리스도인의 후손인 키리시단계 등 다양한 계통으로 나뉘었으며 이들 사이의 언어적 이질감도 꽤 됐었다. 한국계 아키시오인도 적지 않은데 신페이 제도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 노동을 목적으로 이민을 와서 신페이 제도 일대의 광산 채굴이나 닛초 전쟁 중의 공화국 측 유급병, 건설 노동자 등 상대적으로 기피되던 종직에 종사했다. 다수의 일본계가 비교적 소수였던 한국계의 성장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자, 국민당 정부는 일조주의(호주의 백호주의와 유사한 개념) 정책을 표방하며 노골적인 인종 차별 정책을 추진해나갔고[주 34], 한국계에 대한 차별로 누적된 불만을 강선한을 중심으로 한 분리주의자들이 선동해 폭발시킨 것이 신페이 내전으로, 신페이 내전의 여파로 집권한 개혁당-사회당 정권은 일조주의 정책을 싸그리 폐기하고 인종 융화 정책으로 노선을 전환해야만 했다.[19]

러시아계는 19세기부터 정교회 선교 및 러시아 제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건너왔는데 북안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했다. 일본계와 혼혈을 이룬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성씨가 일본식이어도 러시아식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있으면 대개 양친 중 한 명이 러시아계인 경우다.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 사람들이 대다수이지만 가끔가다 가톨릭으로 넘어오는 경우도 있다.[주 35][19]

언어

주로 일본어, 러시아어가 쓰이며 한국계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어도 쓰인다. 그 밖에 소수 민족들이 아이누어를 사용하며, 영어 또한 제도교육을 통해 보급되어 있다.[주 36]

일본어의 경우 후지시로벤, 엔카이벤 등 지역별로 중세 시대부터 변화되어 온 방언이 두루 쓰였다. 이 방언들의 뿌리는 중세 간사이 방언(간사이벤)인데 무로마치 막부에 패배한 일본 남조 출신의 유배자들이 아키시오 일본인들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이후 이들이 식민지 개척을 위해 각지로 뻗어나가면서, 나카아키시오 산맥을 비롯한 다양한 지리적 요건 때문에 점점 이질성이 커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각 지방의 방언으로 다시 변화한 것. 한국어에서 갈라져 나온 제주어가 사실상 뿌리만 동일한 별도의 언어로 취급을 받듯이, 일본어라는 뿌리만 둔 "아키시오어"라고 봐도 무방했을 정도이다. 그러다 근대기에 들어 도시화와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면서 이케다 정권은 후지시로벤 중심으로 현지의 일본어를 통일하려고 하였고, 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이러한 시도는 계속되었다. 각 지방의 방언 하나 하나가 한국어-제주어 만큼이나 많은 차이를 보이던 상황이었고, 정부 입장에서는 수십개의 방언으로 일일이 공문을 적으며 통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독립 이후 최대의 과제가 표준 "아키시오어" 정하기 였을 정도다. 이러한 문제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어느 정도 해결이 되어가고 있는데 바로 도쿄의 표준 일본어를 도입해 일본어 교육을 아예 일본과 통일시켜버린 것이다. 처음에 국민당 정부는 반일 국민 정서를 감안하여, 도쿄 표준어와 후지시로벤, 러시아식 외래어 표기법을 짬뽕한 "인공" 아키시오어를 제정하여 보급하려 했으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고, 1970~80년대 일본 문화 컨텐츠에 대한 금수가 풀리며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드라마 《오싱》 등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도쿄 표준어가 서로 간에 알아듣기도 힘든[20] "벤"(弁) 시리즈들을 밀어내고 자연스럽게 비중을 늘려나가게 되었다. 아키시오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21] 1990년대생 이후 세대의 90% 이상은 도쿄식 표준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으며 오히려 벤들은 세대를 얹어갈수록 점차 사용자 수가 줄어들고 있다. 단적인 예로, 마츠오카 현 일대의 마츠오카벤(松岡弁)은 계속되는 도시 개발과 이주민 유입으로 현 서부의 산악 지대로 밀려나면서 화자의 수가 급감하여, 사멸 위기에 놓인 상태이다.[22]

2006년, 개혁당 내각은 국내의 다양한 언어들의 보존을 목적으로 아키시오 국가학술원을 설립하였다. 이 '국가학술원'은 일본어 (특히 방언들)는 물론이고 러시아어, 한국어, 소수민족 언어의 연구와 보존을 담당한다. 아키시오 공화국의 일본어 한글 표기는 이곳에서 정해 배포(2008년)한 것이다.

종교

아키시오는 국교를 갖지 않는 세속 국가를 표방하고 있으며, 종교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하고 있다.[23] 일본인 이전에 살던 선주민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토속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15세기부터 이주해 온 일본인들은 신토와 불교를 믿고 있었고, 센고쿠 시대 이후에는 예수회의 아시아 선교 방침에 따라 여러 가톨릭 선교사들이 건너와 선교를 하면서 그리스도교 또한 정착하였다. 19세기에는 러시아 제국의 영향으로 북서쪽에서 건너온 러시아인들을 중심으로 정교회가 전파되었으며, 미국과의 무역 과정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개신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주 37][23]현대에 들어서는 옴진리교에서 파생된 "신옴진리교"와 같은 신흥 종파와 가톨릭·개신교·불교 등 기성 종파에서 갈라진 "근본주의" 신앙이 사회 문제로 두각되고 있는데, 신페이 내전의 배후에서 아삼복이 이끌던 환민교(桓民敎)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24]

아키시오에서 일단 제일 큰 종파는 가톨릭 교회로 2009년 조사 당시 국민의 57%가 가톨릭 교회의 신자임을 밝혔다.[25] 가톨릭 교회는 16세기부터 선교를 개시하였다. 예수회 선교사 카를로스 데 디아스[주 38]를 중심으로 이들은 각 지방에 상주하며 교리를 가르쳤는데 이 때 먼저 일본에서 선교하고 있었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일행으로부터 많은 지원과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근세 아키시오의 일본어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인 《성교회전례 의역》(聖敎會典禮譯本)는 이들이 쓴 것.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모든 가톨릭 전례는 언제 어디에서나 라틴어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지인 사제 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쓰인 책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신앙 전쟁에서 철검대가 승리하며 자유로운 신앙이 다시금 허용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였으며, 18세기에 이미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중국과 더불어 유이하게 관구(官區) 체제가 들어서는 등 그 체계도 빠르게 잡혀갔다. 그러나 고인 물이 썩는다고, 현대에 들어서 국민당 정부와의 오랜 유착 관계가 드러나면서 신자들이 정교회나 개신교 등으로 돌아서는 사태가 발생한다. 1960년대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자, 예수회를 중심으로 교회 쇄신 운동이 일어나면서 지금은 많이 깨끗해지고 이미지도 회복 중.

정교회는 러시아와 크라스나야의 영향으로 들어왔으며, 현재는 크라스나야 정교회 산하의 아키시오 정교회가 존재한다. 러시아·크라스나야식 전례를 따르고 있으며 1960년대에 가톨릭으로부터 넘어온 신자들을 대거 받아들이며 성장하였다. 현재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북방 지역을 중심으로 교세를 넓히는 중이다.

불교는 화엄종, 천태종, 태고종, 정토종 등이 들어와있으며 이밖에 소수 종파도 존재한다. 불교는 일본인들이 이주해 왔을 때부터 함께 해온 종교이며, 화엄종을 비롯한 대규모 종파들은 가톨릭 교회가 전래되면서 생활 양식이 변모해가는 것에 대한 반발로 각 사찰을 중심으로 전통 의식 및 생활 양식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23] 한편으로 일본에서 대처와 육식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일본 제국 시기에 전 종파에 대처승이 허용되기에 이르자 이를 전면으로 비판하며 더욱 보수적인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국민당의 표밭이 불교 신자들이라는 분석이 있었을 정도이다.[26]

신토(神道)는 아키시오 신토 중앙위원회에서 신토를 대표하며, 각 지방의 신사(神社) 보전 및 운영 지원을 맡는 형식으로 운영되지만, 신을 모시는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봉사와 지원으로 운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사를 관리하는 칸누시(神主)는 하나의 가문이 대대로 물려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더불어 신토의 세가 약해지면서, 신사로 쓰이던 곳이 성당으로 개수되는 경우도 많았다.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를 비롯한 대신(大神)을 섬기거나 규모가 큰 신사는 특별히 신궁(神宮)이라 불리우며, 대표적인 신궁으로는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와 스사노오노미코토를 섬기는 후지시로노후타가미노미야(藤城二神宮)[주 39]가 있다.

교육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닐 것이다.
— 이가와 요시오(伊川吉夫) 당시 문교과학부 장관, 1979년 졸업 시험 제도 발표 당시의 기자회견 중

미국의 제도를 본딴 6-3-3-4의 교육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중학교까지는 의무 교육으로서 무상 지원이 이루어지며, 기본적으로 중학교 졸업까지는 보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중졸에서 그치지 않고 산업 현장에서의 전문 기술 등을 공부하는 과학·기술고등학교나, 대학교 진학을 목적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고등학교 단계부터는 입학 시험이 없거나 거의 간단한 대신, 이른바 "소츠시"(卒試, 졸시)라 불리우는 졸업 시험이 존재한다. 특히 대학교의 경우 졸업 시험에서 통과하지 못하면 졸업을 못하고 중퇴하거나 장기 휴학을 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렵다.[주 40] 이 졸업 시험 제도는 1979년 중등교육법·고등교육법 개정 과정에서 프랑스의 제도를 본따 도입된 것으로, 국·공립 학교 외에도 사립 학교에서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다.

대학교는 국·공립 대학교와 사립 대학교로 나뉘며, 대부분은 등록금 장벽이 낮고 국비 장학금 지원이 많은 국·공립 대학교를 선호한다. 국·공립 대학교가 각 지역 거점에서 다양한 고급 학문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정부의 계획에 따라 설립된 데에 비해[주 41], 사립 대학교들은 특정 학문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예수회 소속의 성 이냐시오 대학교(후지시로 도)는 가톨릭 신학을, 사이슈인 대학교(濟衆院大學, 니시오카 시)는 의학(치의학)이 중점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초·중등교육 과정은 큰 개선 과정을 겪어온 바 있다. 국민당 정권 시기에는 대한민국, 일본과 다를 바가 없이 상급 학교에 진급하기 위한 소위 '주입식 교육'과 더불어, 일본인 중심주의에 입각하여 각종 동화교육이 이루어졌으나,[27] 신페이 내전 종전을 계기로 민족 차별을 비롯한 사회 문제들이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드는" 교육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개혁당 및 좌파 교육인들을 중심으로 거세졌고, 서독의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기초로 한 <현대 민주시민 양성을 위한 신교육 체제 결의안>(1995년, 일명 '요아케 결의'[주 42])이 통과하였다. 이후 결의안 내용에 기초하여 교육과정을 손보면서 '민주시민교육' 및 관련 과목들을 신설, 초등학교 때부터 다양한 주제로 토론 수업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으며, 2010년대에 들어서는 지역 대학을 중심으로 각종 지역 현안에 대해 토론 대회가 열리며 "총칼보다 강한 펜과 말"을 강조하고 있다.[27]

의료

아키시오 시민권자들은 모두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가 제공하는 건강보험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다. 이러한 건강보험제도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종류별로 시행되는 <공화국민 건강보험계획>에 가입하여야 한다. 공무원 및 사기업 노동자들은 <근로자 건강보험계획> 혹은 각 회사가 정부에 신고하도록 되어있는 기업별 <건강보험계획>을, 자영업자 혹은 퇴직자, 어린이, 청소년 등은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건강보험계획에 가입하면 된다. 대한민국의 제도를 모방한 의료전달체계를 적용하여 각 지방 소도시의 소규모 의원부터 광역거점도시들의 대학병원·종합병원에 이르기까지 단계별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민간 병원에도 건강보험계획이 적용되며, 여기에서 발생하는 손해액은 의료 실적에 따라 정부에서 보조금 형식으로 지급하며 이는 일본의 건강보험제도를 본딴 것이다.

1960년대까지 아키시오는 남성 흡연율이 37%에 육박하였으나, 국민당 정부의 의욕적인 금연 및 절연(節煙; 흡연량을 줄임) 권장 정책으로 말미암아 흡연율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1977년에 제정된 <건강증진을 위한 금연촉진법>에 따라, 철도역을 비롯한 공공시설에서는 흡연이 금지되어 있으며, 지정된 흡연실을 이용해야 한다.

치안

제1공화국 시대까지는 지방군에서 관할하던 치안의 영역을 20세기에 들어 경무성 (오늘날의 경시청)으로 이관하면서 현대적인 치안 당국이 들어섰다고 본다. 오늘날 경시청은 군대로부터 이양된 민정 치안, 즉 단순하게는 교통 단속에서부터 크게는 범죄의 해결, 사건과 사고의 조사 및 처리, 폭동의 진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 아키시오의 경찰이라고 하면 제일 유명한 것은 1997년 아키시오 경찰 특공특임대로 통폐합될 때까지 존재하였던 특수경찰전위경찰[주 43]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검은 전투복과 미국산 신예 소총으로 무장한 특수경찰은 북웅파, 사키타 파를 비롯한 강력 범죄 조직과의 싸움을 위해 설치된 무장 경찰 조직으로, 저항하는 무장 조직원을 상대로 총리가 즉시 사살을 허용할 정도로 범죄와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며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고, 방패와 최루탄 (1989년 이후 사용 금지됨), 물대포 (1997년 이후 사용 금지됨) 상징이었던 전위경찰은 68혁명 이래 카르네트와 급진 좌파 세력, 혹은 반대로 극우 국수주의 세력의 폭력 시위와 폭동을 진압하고, 평시에는 대통령궁 및 정부 주요 시설을 경비하기 위해 강도높은 훈련을 받은 특수 부대였다. 그러나 북웅파와 한인들을 과잉 진압하는 과정에서 생긴 여러 인도적 문제와 비판을 수렴하여 1997년 헌법 수정 당시 특공특임대로 통합되는 개혁으로 사라졌다.

소방청은 철검대 시대에 철검대장과 각 지방관 직속으로 설치되어 있던 멸화대 (滅火隊)가 원형이다. 제1공화국 정부 당시 멸화구제성이 설치되어 각 지방의 멸화대를 통합 관리하기 시작하였고, 1920년 소방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52년 소방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아키시오 정부는 늘어나는 각종 재해에 대비하여 소방관 1명이 25~35명의 시민들을 담당할 수 있을 정도의 소방력 강화를 주요 정책으로 삼고 있다.

공휴일

공휴일 (祝日, 슈쿠지츠) 정책은 노동시간 억제와 더불어, 1996년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기존에는 가톨릭 축일만을 종교 공휴일에 편입하였으나, 1997년 정교회, 불교의 기념일도 일부 공휴일로 수용하였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2003년 '연휴 제도'와 대체휴무일의 도입으로 신정과 오본의 전후로 1일씩 연휴가 추가되는 등, 새로운 공휴일이 추가되고 있다. 모든 공휴일은 양력으로 지내고 있다.

  • 신정 연휴 (12월 31일 ~ 1월 2일): 새해 첫 날 (1월 1일)을 포함한 연휴이다.
  • 정교회 성탄절: 1월 7일
  • 성인의 날: 1월 둘째 월요일
  • 제1공화국 독립기념일: 2월 16일
  • 춘분 : 3월 21일
  • 노동자의 날: 5월 1일
  • 헌법의 날: 5월 2일[28]
  • 가족의 날: 5월 3일
  • 부처님 오신 날 (석가탄신일)
  • 자연보호의 날: 6월 둘째주 월요일
  • 바다의 날: 7월 둘째주 월요일
  • 세계 평화의 날·성모 마리아 승천 대축일: 8월 15일
  • 노인의 날: 9월 둘째주 금요일
  • 현충절: 10월 16일[29]
  • 산림 보호의 날: 11월 둘째주 월요일
  • 민족 화합의 날: 12월 24일[30]
  • 주님 탄생 기념일 (크리스마스): 12월 25일

문화

문학

미술

음악

건축

의식주

스포츠

축구는 하나의 국기 (國技) 수준으로 자리잡은 인기 종목이다. 미나카미 슈지 (水上習司), 아카기 테츠오 (赤城哲男), 한국계인 정동인 (丁東仁) 등의 여러 레전드들이 각종 국제 리그에서 활약했다. A리그라고 불리우는 국내 리그는 3부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크게는 FC 나카노 팰컨즈와 같은 엘롯기급 전국구 인기 구단부터 작게는 정, 촌 단위의 지역구에서 활동하는 팀까지 100개가 넘는 축구팀이 리그에 참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축구가 활성화된 것은 스페인 출신의 FC 후지시로 전 감독 호세 발렌시아가 1980년대 팜 제도를 정비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31][32]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 축구 데뷔를 목표로 공부와 훈련을 병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단순히 사회에서 직장 생활을 마치고 사회인 축구단에서 운동하다가 프로에 투신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이러한 경우에는 은퇴 후에도 자유롭게 진로를 모색할 수 있다. 상기한 FC 나카노 팰컨즈 (마에하마 현 카마가와 시 연고)와 FC 후지시로는 (그 규모에서는 프리메라 리가에 비할바가 못되지만) 프리메라 리가의 엘 클라시코에 버금가는 라이벌 관계에 있어, 양팀이 맞붙은 1999년 A리그-1 남부 컨퍼런스 결승전 당시에는 시청률이 56.4%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33]

한국이나 일본 야구계에서는 야구의 보급을 위해 힘쓰고 있지만, 상기한 축구의 인기가 워낙 넘사벽인 관계로 프로 야구의 정착은 매우 힘들었다. 2000년대 들어서 몇개의 프로팀이 생겨났지만 아마추어 야구가 중심이고, 운영비 부담도 높으며 날씨에 따라 경기 운영이 까다로워서 특히 하루가 멀다하고 눈이 쏟아지는 하마사카 같은 곳에서는 축구조차 하기 힘들다. 아직까지는 미미한 편이지만, 어쨌건 2005년 이후에는 정기적으로 프로 리그가 열리고 있다.

농구는 축구만큼은 아니지만 인기 스포츠 중 하나이다. 농구가 주로 축구 비시즌인 11월 ~ 4월 사이에 리그를 개최하는 관계로, 사실상 축구 비시즌에 축구 팬들이 농구를 본다고 해도 무방하다.[34]

참고 문헌

개괄 및 각종 문단
  • 길봉준 (2011년), 《아키시오의 이해》, 가꿈북스
  • 오덕규 (2009년), 《민족의 용광로 아키시오》, 가꿈북스
사회와 문화 문단
  • 노화득 (2013년), 《나의 맨발 사목기 ― 아키시오》, 방지거출판사

각주

  1. 아키시오 공화국 제56대 총리 취임사, 아키시오 카페 (2016-12-05)
  2. 이 부대는 1946년 아키시오 공군의 모체 아키시오 공중경비대 창건 당시 제1강습기여단으로 재편되었고, 1953년 아키시오 공군 창건과 함께 제1비행단 예하 제101비행전대로 편입되어 지금도 단대 상징으로 신천옹을 쓴다.
  3. 3.0 3.1 3.2 길봉준 (2011년), 9쪽 ~ 11쪽.
  4. <아키시오서 간석기 外 각종 유물 발견...사학계 "충격">, 아키시오 아사히 신문, 2008-02-22
  5. 《그들은 이름만 남기고 사라졌다》, 51쪽, 박미영 (2009), 신다산출판사(북웅파 계열의 출판사이다)
  6. 6.0 6.1 6.2 6.3 길봉준 (2011년), 12쪽 ~ 15쪽.
  7. 동북 (東北)이 아님에 유의하자. 東北이라고 쓰면 일본의 도호쿠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8. 원래 니시오카 시에 있었으나,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임시 이전하였다. 2020년 현청 재이전 예정.
  9. 원래는 군도(群島)와 제도(諸島)라는 명칭이 혼용되었으나, 2013년 국회에서 '제도'로 통일하기로 결정. 히카사 군도는요? <니시아키시오 제도? 군도?, '제도'가 맞다> 후지시로 교민신문, 2013-04-21
  10. "'모토미야'라는 말은 근본이 되는 궁궐이라는 뜻인데, 선불교의 한 종파로 모토미야 산을 본산으로 하는 근선종 승려들이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들은 모토미야 산을 이 땅의 모든 생명이 비롯되는 자궁으로 보았으며, 대지를 돌보는지장보살의 선물이라고도 여겼다." <모토미야 산은 지장보살의 선물…… 근선종의 뿌리를 찾아서>, 아키시오 아사히 신문, 2015-01-22
  11. 빌리 해밀턴 (2004년), 《화산 활동과 지진이 아키시오모토지마 섬에 끼치는 영향》
  12. 12.0 12.1 12.2 12.3 12.4 길봉준 (2011년), 101쪽 ~ 106쪽
  13. 길봉준 (2011년), 51쪽 ~ 52쪽
  14. 《02' 交通年報》, 아키시오 교통청 (2002년). 민간투자로 개통된 수도권 지방의 일부 도로 제외
  15. 오덕규 (2009년), 82쪽 ~ 85쪽
  16. 부속 3조 "아키시오 공화국의 지위" 1~2항. "1. 아키시오 공화국은 미국 혹은 소비에트 연방 양국 중 어느 쪽과도 동맹을 체결하지 않는 무장중립국 지위를 갖는다. 2. 국제 연합 이외의 동맹 체제에 가맹하지 않는다."
  17. 《선교 선조들의 경이로운 역사》, 데일리 뉴크리스천, 2011-10-22
  18. 《포탄이 날아들던 안변 꿈엔들 잊힐리야 ― 한국전쟁 참전용사 변아무개 씨》, 영한일간신문, 2005-06-25일자
  19. 19.0 19.1 길봉준 (2011년), 22쪽.
  20. "...전쟁통에 빨리 자리를 떠야하니 말을 줄여서 해버리는 버릇이 뇌리들에 속속 박혀선, 지난한 전쟁이 끝날 적엔 글로 풀지 않으면 당최 알아듣기 힘들 정도가 되고 말았다." (소설 《군상》(群像)의 17쪽, 후쿠시마 마사토키 (1956년; 이 작품으로 1971년 대첨관문학상 수상), 정소성 번역, 대민출판사 (2014년)
  21. <민중이 외면한 민중의 언어 '벤'(弁)>, 아키시오 아사히 신문, 2015년
  22. 〈우리의 말씨를 찾아서 ― 마츠오카벤>, 미라이 신문, 2015년 3월 21일 보도.
  23. 23.0 23.1 23.2 길봉준 (2011년), 93쪽 ~ 96쪽
  24. <전쟁의 흑막 - 아삼복의 "환민교" 그들은 누구인가>, 영한신문, 2001-04-22
  25. 아키시오 국가통계청, <2009년 공화국민 종교 성향 조사> (2009년)
  26. 아키시오 아사히 신문, <국민당, 불심(佛心)이 표심(票心)>, 1982년 3월 10일자
  27. 27.0 27.1 길봉준 (2011년), 130 ~ 132쪽
  28. <제3공화국 헌법>이 노동절을 쉬고 1997년 5월 2일 발효.
  29. 신페이 내전 개전일. (1985년 10월 16일)
  30. 신페이 내전 종전일. (1992년 12월 24일)
  31. 길봉준 (2011년), 130쪽 ~ 131쪽.
  32. 안승운 (2010년), 《축구 강국 아키시오》
  33. 1999년 11월 2일, 아키시오 방송 네트워크 (ABN) 자체 집계.
  34. 길봉준 (2011), 132쪽 ~ 133쪽.

주해

  1. 로마자 표기: Respublika Akisio
  2. 신진국의 시작이었던 원래의 신진제도는 아키시오 섬 북쪽에 따로 존재하였으나, 2012년 이후에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처리되었다. 무효화
  3. 홀로세 직전에 있었던 최종빙기 시기에 대규모 화산 활동과 지각 변동으로 북태평양을 구성하는 여러 섬들이 갈라져나간 현상이다. 이 지각대변동 당시 아키시오, 크라스나야 외에 이 근방에 있던 여러 섬나라들도 지금의 모습으로 분리되었다.
  4. 시바우라 방향 해안에서 카나우라 방향 해안까지의 성곽 중 5곳의 주요 거점에 방어탑을 건설하였는데 철검대 시대에 조선식 성곽으로 증축되면서 봉수대를 겸하게 되었다. 수원 화성의 공심돈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며, 다섯 개의 별과 같다 하여 오성곽(五星廓, 고세이카쿠)이라 부르게 되었다. 닛초 전쟁 중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1970년대에 복원하였고, 신시가지가 형성된 오늘날에도 성곽은 도로를 뚫기 위한 여러 형태의 마개조(..)를 거치며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5. 절의 주지를 겸하고 있어서 법명으로 '원법'(元法)을 사용.
  6. 감이 온 사람도 있겠지만,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그 전국칠웅에서 따온 말이다. 물론 원조 전국칠웅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7. 다케다 신겐의 그 다케다(武田)이 아닌, 대나무 밭 출신이라는 데서 죽전(竹田). 대나무가 상징이었다.
  8. 앞서 말했듯 시라노 국과 후지시로 성은 미치노쿠 씨가 선점했었으나, 1559년 미치노쿠 카츠노리가 후사를 못 정하고 죽은 뒤 집안 싸움으로 풍비박산이 난다. 그 후 가신 출신이었던 이케다 마사아키라가 다른 가신들을 규합해 미치노쿠 씨를 몰아내고 시라노 국을 장악.
  9. 이 '빈 집'은 후일 '디아스의 집'으로 이름이 붙었다. 디아스의 집 뒤쪽에 1902년 후지시로 히카리가오카 대성당(가톨릭 후지시로 대교구 제1주교좌 성당. 제2주교좌 성당은 후지시로 카마가와 대성당(2002년)이다.)이 들어서서, 이 대성당에서 소성당 겸 기념관의 용도로 관리 중이다.
  10. 대놓고 지원하지는 못한 것이 사찰의 세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몇몇 강성한 대형 사찰들은 가톨릭 교회가 교세를 넓혀가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성당을 찾아 위협하거나 항의하기도 하였다. 가톨릭 교회 측도 "이교도들의 박해"를 운운하며 맞섰고. 석가탄신일과 성탄절에 서로 정겹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11. 前不知. 니시오카 현 해안선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약 43km) 절벽 단층. 높이는 해발 30m에서 최대 400m까지(카모미사키 곶 일대) 올라간다. 이름대로 앞을 알 수 없을만큼 가파르며 안개가 짙게 끼여있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니시오카 현이 피해가 적었던 이유가 마에시라즈 절벽이 해일을 막아서라고. 이 해안선 절벽을 따라 질주하는 마라톤 대회도 있다. 마침 마라톤 풀 코스인 42.195km 수준이고
  12. 아무도 자기 영지를 버리고 정벌에 나서려 들지 않던 상황에서 갑툭튀해 정벌대장을 자청했다. 듣보잡 하타모토 출신의 무장으로 정벌에 성공할 시 약속된 후지시로의 곡창 지대에 혹해 정벌에 나섰다.
  13. 이후 항복을 했던 시바우라 일대의 지방관으로 임명되는데 군관으로서는 답이 없었지만 행정가로선 꽤 유능했다. 도시 이름이 시바우라에서 우라소에(浦添)로 바뀐 것은 주민들이 그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청원한 것이다. 이상 《우라소에 시지》(浦添市志, 2015년) 참조.
  14. 사실 2차 정벌대가 출발할 무렵에 이에미츠는 이미 큰 병이 들어, 아들 이에츠나에게 일의 대부분을 맡기던 상태였다. 다만 이 경우는 위독하다는 소문이 (정벌대의 전의를 꺾으려는 철검대의 계략으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남긴 기록인 <마츠다이라 정벌지>에 따르면 승하 소식을 받아 철수한 것은 3월 경으로 추정되나, 이에미츠는 6월에 들어서야 죽었다. 이상 루벤 발데스 (2005년), 《가톨릭 교회와 아키시오》, 예수회 산하 쿄쿠토 출판사.
  15. 다만 카미가와를 비롯한 이러한 다이묘들은 당시 일본에서는 거의 듣보잡이었다. (영지는 도합 1,000석 미만) 역사학자 형태만은 이것을 두고 이들이 도쿠가와가 싫었다기보다, 아키시오에 관한 소문을 듣고 일확천금을 노리며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16. 조정의 적. 즉 역적을 말한다.
  17. 다만 흔하다고 해도 한자로 표기하면 달라진다. 立花도 있고 橘도 있고 立華도 있고.
  18. 당초 이들이 체포되었을 당시, 철검대에서는 반역죄에 준하여 구족(九族)을 멸한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친척, 외척, 인척을 포함하여 타치바나의 피가 섞인 사람은 죄다 사형에 처하는 것.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은 하느님의 몫이며 사람의 손으로 생명을 쳐서는 안 됩니다."라는 가톨릭 교회 측의 맹렬한 반대가 있었고, 결정적으로 당시 철검대장 이케다 노부모토의 외조모가 타치바나 가문에서 정략결혼으로 시집을 왔었던 배경이 컸다.구족을 멸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부터 죽여야 할 상황 사실 가톨릭 교회의 맹렬한 반대라는 것은 이율배반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시의적절했던 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19. 키츠네는 일본어로 여우라는 뜻.
  20. 한 소대장이 미처 피난하지 못한 부녀자를 겁탈하려는 것을 보자 차고있던 일본도를 꺼내어 즉결 처형했다. 문제는 그 소대장(소위)이 육사 엘리트 출신으로 도조 히데키가 신임하던 후배 장교였다는 것. 이로 인해 안 그래도 사병 출신이라고 마츠이를 깔보던 도조에게 제대로 눈밖에 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21. 아키시오 국립언어원 제정(2008) <일본어의 한국어 번역 지침> 中 '자연지명 번역에 관한 세칙'에 따르면, 지명이 하나의 한자이고 뒤에 강, 산, 호, 섬 등이 붙어있을 경우, 혹은 두개 이상의 한자이나 ヶ, ノ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 '강', '산', '호', '섬' 등은 한번 음역 후 겹쳐 적는다. 반면 인공물을 가리키는 경우(예: ~驛, ~市 등)는 원어를 중복으로 밝혀 쓰지 않는다. (藤城驛: 후지시로에키 역(x) 후지시로 역 (o))
  22. 다른 장관이 총리의 인선을 받는 것과는 달리 외무부, 국방부 장관의 인선은 대통령이 담당한다. 물론 둘 다 국회가 승인하지 않으면 얄짤없다.
  23. 가까스로 제1정당을 유지하며 총리를 계속 내놓았지만 제1야당인 공산당, 제2야당인 사회당과 의석 수가 근소하게 차이가 나서, 사실상 야당 의석 수를 합치면 여당을 압도하는 여소야대 상태가 이어졌다.
  24. 이것은 여러 성향을 가진 공산주의 계파들이 탄압을 모면코자 임시방편으로 뭉쳐있던, 아키시오 공산당의 당시 조직이 드러낸 한계였다. 집권당을 떡실신시킨건 좋았는데 아키시오 적군파·일본 적군파 문제, 구멍을 드러내는 공산주의 체제 자체를 두고 계파들끼리 박터지게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카르네트-무장혁명파 성향의 당원들과 일본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제도권 정치를 최대한 활용하여 사민주의 개혁을 펼치려던 사민파, 유럽식 공산주의를 표방하던 유럽파(대부분이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유학을 다녀왔기에 파스타파, 스파게티파 등으로 불렸다), 그리고 비중은 적지만 아나코신디칼리즘을 표방하던 히라무네 가즈오의 생디칼리즘파가 대립하며 단체 탈당 사태가 벌어지는 등 개판 5분 전이었고, 이러한 모습들이 생중계되면서 민심을 잃고 말았다. 1976년 총선 이후 카르네트파는 아키시오 카르네트 혁명당을 세워 신페이 내전에서 반군 조직인 이라 소비에트를 지원했으나 이라 소비에트의 해체로 반정부 조직으로 찍혀 매장당했고, 생디칼리즘파도 탈당하여 아키시오 아나키당을 설립했지만 원외 정당으로 분류되며 해체와 재창립을 반복하며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사민파도 "이 당에는 답이 없다"며 개혁당, 사회당으로 거의 다 이적해서, 유럽파가 중심으로 남은게 현재 공산당.
  25. 아카보즈(赤坊主)는 종래 '빨갱이'라는 의미로 쓰이던 아카(赤)에 '꼬마 아이'를 가리키는 단어 '보우즈'(坊子)를 합성한 단어로, 공산주의자의 멸칭이어서 당시에는 "빨갱이 새끼"라는 욕설의 의미로 쓰였으나, 현재는 흑인들끼리 서로 "Niggas", 가상국가 유저들끼리 서로 "가뽕"이라 부르듯이 공산당원들끼리, 혹은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친근감의 표시로 쓰이는 단어로 변했다. 단어를 널리 알려버린 호토리 총리의 영향인듯
  26. 다만 예외도 있는데 공산당 내각 때는 당 대표는 말 그대로 당을 대표하는 일만 맡고, 다른 사람이 총리를 맡았다.
  27. 자민당이 안보투쟁에서 기민하게 대응해 이를 불식시킨데 자극을 받은 대다수의 지도자들이 일본으로 넘어가 자민당 거물들에게 지도를 받았다. 누구 말씀마따나 사실상 "아들 정당"이라고 해도 무방하며, 예의 네거티브 선전으로 선거를 뒤집은 호토리 시로 총리는 다나카 가쿠에이 밑에서 수학했다. 총리로 지낸 햇수보다 실세와 흑막으로 지낸 햇수가 많다는 것도 똑같다
  28. 개혁당 출신으로 일명 "밀레니엄 연립 내각"을 이끌며 IMF 광풍을 불식시켰다. "총리를 지내면 대통령은 하지 않는다."는 암묵의 룰을 깨고 201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29. 사실 국민당은 기존 국민당에 난립하던 우파 정당들을 흡수통합시키면서 커온 정당이라 스펙트럼이 넓어서 신자유주의자부터 파시스트로 의심받는 사람들까지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새누리당?
  30. 이름이 신칸센인 이유는 신칸센과 기초 설계 및 설비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31. 이 밖에 태평양 경유 선박들의 네임드 경유지로는 홍콩(마카오), 요코하마 등이 있었다.
  32. 한국군의 간부 레스텔을 생각하면 될 듯. 이런 처우도 인구와 군대 규모가 예산에 비해 크지 않기에 가능한 것이다. 거기다 취사나 각종 부대관리 작업 등은 민간 시설에 맡겨서 하기 때문에,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온전히 교육훈련에 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있다.
  33.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넘어온 경우도 있어서 아즈치계라고도 한다.
  34. 단적인 예로 귀화하지 않는 한국계는 일반 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조선학교라는 곳에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35. 성사를 공유하는 등 서로에게는 우호적이어서 딱히 문제삼지 않는 듯 하다.
  36. 이것은 친미반소 노선을 택한 1970년대~80년대 국민당 정부의 정책의 영향이다. 반소 감정을 활용하여 영어를 제1외국어 교육 명목으로 보급하였던 것이다. 물론 소련의 눈치를 보느라 제2국어로서의 러시아어 교육은 계속 했지만.
  37. 개신교 선교사들은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게 했듯이 선교를 목적으로 학교나 병원들을 세웠는데 그 흔적이 후지시로 제3대학(구 세이토(聖徒) 대학), 만제원(萬濟院, 만세이인) 등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기존의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의 등쌀에 뿌리깊게 정착하지 못해서 이러한 학교나 병원들은 전후 타 종파의 재단에서 사들이거나 국유화되었다.
  38. 카를로스 데 디아스 몬테로(Carlos de Diaz Montero, 1588~1651).
  39. 음독으로 '토조니진구'(とうじょうにじんぐう)라고 읽기도 한다.
  40. 전술했던 예비군 훈련도 이 졸시와 겹치면 연기가 가능하다. 대신 내년에 두번 받는거지 뭐
  41. 이전에 사립 대학교였으나 국유화된 학교들도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국공립 대학교들은 대개 OO(지명) 제1대학, 제2대학과 같은 식으로 특색이 희석된 채 설립 년도 순서대로 이름이 정해진다. 국공립 대학교 간의 서열화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42. 요아케는 일본어로 '새벽'이라는 뜻으로, 국회의원들과 좌, 우파 지식인 등 500명이 국회에서 29시간에 걸친 릴레이 토론 끝에 새벽 5시가 되어서야 결의안을 발효한 데서 나왔다. 아키시오 아사히 신문에서 처음으로 사용.
  43. 대통령궁 및 정부 시설의 경비는 수도경시청으로 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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