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요이 시대 (나루히토)

개요

아요이 시대는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후 268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청동기 시대이자 철기 시대다.

역사

기원전 10세기에 건너온 야요이인들이 수도경작·금속도구·등으로 대표되는 대륙 문화를 규슈에 정착하며 보급하자 일본 열도는 농업생산력의 급격한 증대, 잉여농산물 생산에서 발원한 빈부격차의 발생으로 인한 신분제 사회 성립, 금속도구 상용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 등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가장 먼저 대륙 문화를 받아들인 규슈를 넘어 대륙 문화는 세토내해를 거쳐 긴키와 시코쿠를 시작으로 서일본 전역에 널리 알려진다. 이리하여 야요이 문화가 등장하였고 이는 야요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은 조기와 전기로 구분되는데 조기는 기원전 1000년대에서 기원전 900년대, 전기는 기원전 800년대에서 기원전 600년대의 구간을 가지고 있다. 조기와 전기의 기간 동안 야요이 문화는 아세 만까지의 확산을 마무리하고 여러 지역의 관개 시설을 구축하였으며 각 부락들의 삶에 벼농사와 청동기라는 비교적 큰 영향을 준다.[1]

야마타이국의 모습에 관한 추정화(畵)

야요이 시대가 열린 후에도 도래인은 지속적으로 유입되어 기원전 5세기, 수도경작 중심의 생활 체계가 조선 반도의 도래인으로부터 전해지자 서일본 지역은 기간산업을 농업으로 굳히고 농업 사회를 성립시킨다. 이때 서일본 지역에 이어 동일본 지역까지 야요이 문화가 보급됨으로써 일본 전역에서 조몬 시대 후기의 농업 기술인 육도경작이 완전히 몰락하고 수도경작이 공백을 대체한다. 본 당간을 분기로 하여 야요이 시대 초기는 끝을 맺고 비로소 서일본뿐만 아니라 동일본을 포함한 일본 열도 전역이 수전경작 중심의 생활 체계를 근간으로 하는 농업 사회와 노예-평민-귀족-왕으로 구성되는 4신분제의 계급 사회를 구축하여 야요이 시대 중기에 접어든다. 농업 사회가 야요이 시대 전반을 지탱하기 시작하면서 각 마을들은 농촌 운영에 있어 핵심적인 수리권과 농경지를 놓고 대립하게 되었고 대립이 전쟁으로 직결되자 따라서 수많은 전쟁이 일본에서 발생하기 시작한다. 작은 마을들은 통합되며 소국이라는 거대한 집단으로 진전하였는데 약 100여개의 소국들이 생겨난 것으로 현대 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러한 100여 개의 소국들 또한 영토 확장을 하며 통합되어갔고 야요이 문화에 의해 성립된 100여 개의 국가들은 야요이 시대 동안 진행된 수많은 전쟁들로 인해서 히노쿠니(火国), 키비노쿠니(吉備国), 이즈모노쿠니(出雲国), 코니소쿠니(越国), 히타카미노쿠니(日高見国), 등의 30여개 나라들로 통합되게 된다. 100여 개의 국가들이 통합되는 순간들 속에서 수많은 전쟁 끝에 다른 경쟁자들을 밀어내고 규슈 북부의 야마타이국이 빠른 성장을 바탕으로 기타규슈 지역에서 지배권을 확립했다. 야마타이국이 여러 국가들 중 가장 빠른 발전을 이룩한 까닭은 튼튼한 구심점과 높은 원동력이었다. 우선 군주 그 자체가 유력 신앙의 신녀임으로써 야요이인들을 군장으로 모신 다른 나라와는 달리 제정일치의 강력한 통치 정당성을 야마타이국은 부여받았고 이는 야마타이국이 기타규슈를 평정하는 데에 있어 큰 구심점이 돼 주었다. 한 켠으로 야마타이의 이러한 통치 형태를 비추어 보아 조몬 시대에 창시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토속신앙들이 야요이 시대 중기에 이르러서는 나라에 핵심부를 차지할 수 있을 만큼의 입지를 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야마타이의 토속 신앙의 신권이 전성기를 누린 것과는 별개로 오늘날, 일본의 대표 종교로 발돋움하게 될 신토 같은 경우에는 야마토국의 주요 민간 신앙으로써만 자리 잡은 상태였다. 본론으로 돌아와 야마타이국에 또 다른 발전의 힘인 높은 원동력은 나라가 세워진 지역의 특성과 철제무기의 적극적인 사용이었다. 야마타이국이 세워진 기타규슈는 본디 대륙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도래인들이 많이 이주해온 곳이었고 이를 배경으로 기타규슈는 야요이 문화의 영향을 그것도 직접적으로 받은 미나미규슈를 비롯한 다른 지역 중에서도 가장 성대한 번영을 구가한다. 야마타이국은 바로 이 고도의 영화를 누리던 기타규슈에 자리 잡은 나라였으며 게다가 철제무기 생산의 중심지인 '고가'와 '후쿠쓰'를 선제적으로 복속하여 수많은 철제무기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던 환경까지 갖춤에 따라 야마타이국은 국가 운영에 있서 다른 국가보다 우월한 원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무튼 탄탄한 구심점과 높은 원동력을 기반으로 만든 국력을 이용해 기타규슈를 완전히 장악한 야마타이국은 다른 국가들보다 군사력과 경제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또한 외교로도 야마타이국은 앞서 나갔는데 야요이 시대 중기 후반인 57년에 한나라로부터 '왜노국왕'이라는 직위를 하사받고 조공 관계를 맺음으로써 중화 질서에 합류한다. 이후 향상된 국력으로 실시된 야마타이국의 정복 전쟁은 야마타이국의 영토를 xx년까지 오늘날에 야마구치현 일대와 미나미규슈 일부 지역까지 넓히게 된다.

야요이 시대에 진행된 전쟁의 모습

기원후 100년대 중엽에 이르러 일본은 야요이 시대 후기에 진입한다. 이때 야마타이국의 영향권은 기원후 100년대 중엽, 야마타이 왕권으로 이행되고 야마타이 왕권은 동쪽으로 끝임없이 팽창해 세토내해 연안 지방을 복속하고 야마토국까지 이르게 되는데 곧 시코쿠 북부를 야마타이 왕권으로 편입한 야마타이국은 시코쿠 북부 편입을 끝으로 정복 활동을 중단, 평화의 시대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야마타이 왕권이 위세를 떨치던 100년대 중엽은 지방 광역 세력이 형성된 시기로 훗날 지방의 광역 세력들은 야마토에 지방호족으로 발전한다. 한편 야마타이의 정복 활동에서 야마타이 왕권의 휘하로 일단 들어간 야마토국은 야마타이 본국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 하에 상공업의 급속한 발달, 농업생산량의 획기적인 증대, 군사력 확충으로 국력을 비축하여 야마타이 왕권의 주도권을 평화에 젖여 국력이 쇠약해진 야마타이국으로부터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이어 야마토국이 야마타이국을 합병함으로써 야마타이국의 헤게모니는 완전히 와해돼버리고 본격적인 야마토의 야마토 왕권이 일본을 섭렵하게 된다. 이때가 야요이 시대 후기 후반인 기원후 268년으로 뒤이어 야마토국은 야마타이국의 헤게모니를 해체시키는 데 도움을 준 구노국까지 정벌하여 확고한 통제권을 야마토 왕권에서 구사하기 시작한다. 곧 이는 왕권의 강화로 이어져 훗날 중앙집권국가 성립에 기틀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한편 제정일치사회도 붕괴되었는데 이는 제정일치사회였던 야마타이국이 몰락하면서 시작된 신권의 약화와 제정분리사회였던 야마토 왕권의 발전이 주요 원인이었으며 야마토 왕권이 들어선 야요이 시대 말기에는 제정분리가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행된다. 또한 야마타이국은 야요이 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그들의 몰락은 곧 야요이 문화의 쇠퇴를 의미했다. 반면 야마토국은 야요이 문화를 수용하기는 했으나 야요이 문화를 전파받는 데에 있어서는 기타규슈보다 더딘 감과 전파량의 차이가 있었고 이는 야요이 문화에서 필요한 것만 받아들여 독창적인 일본 만의 문화를 형성하는 요건을 충족시키게 되는 결과로 직결되어 야요이 문화가 몰락하면서 남긴 공백을 야마토국의 독자적인 문화인 화풍 문화로 채우게 된다. 따라서 야마토 왕권의 확립은 고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였다. 대륙 문화와 연관이 짙은 야요이 문화의 쇠락과 독자적인 일본 화풍 문화의 부상, 그리고 이전보다 강해진 중앙정부와 왕의 권한, 제정분리사회의 시작은 야요이 시대의 문을 닫게 하고 야마토국의 세기인 고훈 시대를 일본 열도에 개막시키게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일본 열도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를 기타규슈에서 긴키로 옮기게 하는 한편 일본의 신앙 사회를 급격히 위축시켜 쇠퇴기를 겪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일본의 신앙 사회는 이내 곧 야마토의 주요 민간 신앙이었던 신토의 주도로 부활하여 고훈 시대에 정신 차리고 입성한다.

야요이 문화

계급

농업

야요이 시대 당간, 쌀을 수확하는 사람들의 모습

야요이 시대의 농업 사회는 수전경작 중심의 생활 체계에 따라 완성돼 고훈 시대로 전승되었다.

야요이 시대 조기(작성중)

상공업

수렵·채집

어획

도구

석기 도구

타제석기
마제석기

금속 도구

야요이 시대의 제구와 청동기의 모습

야요이 시대의 금속기(金属器), 즉 금속 도구는 현대에 '야요이지다이노킨조쿠키(弥生時代の金属器, 야요이 시대의 금속기)'로 불리우며 야요이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유물로써 전해져 오고 있다.

야요이 시대는 청동기와 철기가 혼용되던 시대로 야요이인들에 의해 전파된 금속 기술이 배경으로써 작용했다. 먼저 야요이 시대에 통용되던 청동기는 내구성과 예리함이 좋지 않아 주로 무기보다는 제구의 쓰임새를 가졌고 청동 거울 '동탁'이 대표적인 예시다. 그러나 철기가 발달하기 이전, 즉 야요이 시대 조기·전기에는 검이나 철부같은 무기의 용도로도 청동기는 사용됐으리라 보고 있다. 이후 철기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된 야요이 시대 중기부터는 청동보다 더 강력한 강철을 사용한 검, 창, 철부가 전쟁 수단으로 사용됐으며 이런 철제무기를 일부 국가들이 적극 사용해 다른 국가들을 효과적으로 무너트렸는데 이런 나라들 중 대표적인 나라가 야마타이국과 후에 제철 기술을 확립한 야마토국이었다. 특히 야마타이국은 국내에 질 좋은 철광석을 풍부하게 지닌 철광산이 많았고 제철에 박학했던 야요이인들이 지리상 가장 많이 이주했던 지역으로써 일본의 철제 수공업을 선도하였다. 가히 일본 제철업의 종주국으로 불리우게 된 야마타이는 과연 야요이인들로부터 전수받은 제철 기술을 응용해서 기존 철기 도구보다 더욱 뛰어난 여러 철제 무기와 철제 농기구들을 개발하였고 분명히 이는 제철 기술 조차도 제대로 못 받아들인 다른 나라들보다 앞선 발전이었다. 그러나 야요이 시대 중기 전반까지 성장만 거듭했던 야마타이의 제철 능력이 점차 태보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야마타이 왕권이 출범하면서 찾아온 평화가 야마타이국의 철제 무기 수요의 감소를 일으키자 야마타이 철제 수공업의 종사자들이 평화에 젖어 수익성이 낮아진 야마타이를 대신해 에미시의 지속적인 침공으로 평화라는 단어는 찾기 힘들었던 야마토국으로 이동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야마타이국의 철제 무기는 도태되는데 야마토국은 나날히 새롭고 향상된 철제 무기를 사용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야마타이국이 야마토국과의 향후 전쟁에서 패망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아무튼 야마타이에서 야마토까지 이르게 된 철제 무기는 지속적으로 새롭게 향상되어가며 야요이 시대 중기에 사용되던 강철 검의 칼날이 예리하지 않고 내구도가 빈약했던 점에 비하여 야요이 시대 후기 시절의 강철 검은 이보다 훨씬 날카롭고 강해졌다. 후대인 오늘의 역사학자들은 야요이 시대 중기의 강철 검을 '후헨노야요이카타나(不変の弥生刀)'라 명명하고 야요이 시대 후기의 강철 검을 '우츠노야요이카타나(うつの弥生刀)'이라 명명하였으며 우츠노야요이카타의 강철 검은 훗날 고훈 시대 강철 검의 모태가 될 정도로 성능이 강했으리라 추정돼 오고 있다. 우츠노야요이카타나으로 대표되는 야요이 문화 때 생성된 금속 도구들은 시간이 좀 지나 고훈 시대에 입성하며 2세대 도래인들이 가지고 온 기술들과 융합하여 야요이 시절 금속 도구와는 성능부터 외형까지 판이하게 달라지게 되고 이로써 야요이 문화 시기 만들어진 야요이 세대의 금속 도구들은 대부분 맥이 끊긴다. 금속기는 명맥이 끊어졌지만 제철업은 야요이 시대보다 더 개선된 작업 환경과 증설된 제철 시설, 생산성이 향상된 철광들을 바탕으로 계속 발전하였다.

야요이 시대 중반의 강철 검인 후헨노야요이카타나는
철제 무기를 사용하기 이전인 야요이 시대 초기의 널리 사용되던 청동제 무기, '야요이노세이도카타나(弥生の青銅刀)'는 / 한편 야요이 시대 중반으로 넘어가며 제구로 성격이 완전히 바뀐 청동기는 그 변화답게 여러 청동제 제구들로 재탄생되었고 야요이 시대 초기보다 더 아름다운 청동 장신구가 나오게 되는데 그중 (작성중)

토기

매장 풍습

신토

민족

시대 구분

교과서에서

대중매채에서

관련 문서

각주

  1. 전기 같은 경우에는 기원전 500년대 초반까지 구간을 확장시키는 경우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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