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사정

오고사정

오고사정(2010-2013)은 가상국제연합의 유저이자 사상가이다. 오고사정학파 또는 오가悟家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생애

자세히 알려진바는 없으나 2010년부터 2013년 사이의 가상국가 전성기 기간동안 활동한 유저로 알려져있다. 그에대한 기록은 모두 루첼라이의 전언에 의거하는데 그는 CVN을 거점으로 칼블레이드 기사단에서 주로 활동했고 그는 당시 칼블레이드 기사 단 에서 그 기록문서를 정리하고 보관하며 외부의 기밀문건이나 자료를 수집하는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 그의 가상국가론의 초석을 다진것으로 보여준다. 그러던중 그는 현실에서 문득 곤륜산으로 올라가 수행을 시작하며 모든 소속 된 가상국가 전자정부를 탈퇴하고 얼마뒤 아이디가 japananimelove에서 mylittlepornylove로 바뀌어서 돌아왔다고한다. 곤륜산에서의 수행설화는 그의 뽕이 와전되어 전해진것으로 대다수의 학자들은 추정하나 아이디에대해서는 구전이 지나치게 구체적이라 는 점에서 아이디의 변화가 있었음을 사실로 보기도한다. 그는 이후 그의 가상국가론을 설파하고 이를 책으로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루첼라이는 그의 이론은 당시 횡횡하던 사회실험체론에대한 맹목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는 세컨아이디를 만드는 데 협조하다가 탈뽕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기간 제자들이 존재했던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이론은 후일, 니우훌란트에서 스코투스라는 계승자를 맞이하여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루첼라이 역시 그의 제자로 보기도한다.

사상

그의 사상은 가상국가론,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철학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형이상학

그는 존재와 본질의 구분에대한 논의로부터 그의 고유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축했다. 그는 필멸자는 존재하는것으로서 "존재"하는것으로 정의되기 위해서는 그에대한 전거인 존재인 무한자를 필요로 하다고 보았다. 우리는 어떠한 존재하는것이 말해지기 위해서는 어떤식으로든 "존재"에대해 이해해야하기 때문이다. 무한자는 존재 그 자체로서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 자체는" 존재하는것"이 아니므로 실질적으로는 "무"와 같다. 존재하지 않는것은 어디까지나 "무"이기 때문 이다. 그러면서 그는 노자를 인용한다. "서른 개의 수레바퀴 살이 한 개의 수레바퀴 통으로 모아져 있는데, 그 중간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굴대가 끼워져 수레는 쓰일 수가 있게 된다. 진흙을 반죽하여 그릇을 만들 때, 그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음으로써 그릇은 쓰임새가 생기게 된다. 문과 창을 내어 집을 만들 때, 그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음으로서 집은 쓰임새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이롭게 쓰이게 되는 것은, 없는 것의 쓰임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다. "그러나 무가 존재자체라면 우리는 "무"가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해야한다고 말해야힌. 그렇다면 "무"가 존재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는 즉 무는 언제나 존재자와 불일불이 하게 존재한는거다. 존재자가 필멸자인 한 무와 존재자는 떨어질수 없는 바 이다. 동시에 존재는 언제나 존재하는것의 존재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뒤집어서 존재하는것은 '존재하는 '-것임을 들어 존재하는것은 존재의 주체이며 존재는 언제나 동사로서만 기술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존재의 존재는 언제나 시간 속에서 들어나는 바 ,존재자의 지속은 언제나 시간 속에 있다고 말한다 . 이어서 시간 자체는 언제나' 존재하는'-것을 존재하게 하는 세계임을 들어 시간과 무와 존재자체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인식론과 과학철학

그는 "인식"을 명석판명하고 검증되며 설명가능한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실재에대한 인식은 신경과학적 사실에 따라 실재 자체와 동일시 될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는 인식의 변증법적 운동으로 끊임없이 극복될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그는 학문의 인식에 있어서 권력과 요청이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실제로 학문은 가치중립적이지 아니하며 모든 학문은 정치적이라고 해석한다. 가령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의 발달과 전복에관해 논하는데 그는 이성자체에의해 학문이 발전한것이 아니라 이론의 정합성을 범주로한 학문체계 내에서 학문이 발전한다고 하며 이는 기존 학문의 연구자의 기득권유지와 관련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고대사회의 기술발전을 거론하며 과학의 범위를 구획짓는것이 무이미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이론이 발전할때까지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던지 충분히 기다려야한다고 주장한다.

윤리학

그는 인간에대한 인식을 크게 두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로 정치적 인간으로 그는 인간이 사회에 내던져 있는 존재로서 어떤 식으로든 타자를 지배하는 욕구와 여러 욕구를 가졌으며 이러한 욕구를 충족하기위햇서는 정치행위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한편으로 그는 고독한 인간을 말했다. 그는 인간이 타자와 세계에의해 "자기자신"이 전적으로 소외되어 있으며 그러한 한 인간은 항상 고독하다고 주장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존재하는-것이지만 인간은 정치행위와 인정투쟁에의해 전적으로 자기자신을 함몰하고 만다. 그는 이러한 상태가 절대자인 하느님에 의존하는것과 자신의 필멸성을 자각하는것으로부터 벗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에따라 함몰되어 그림자와 같이 변한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게되며
더욱 나은 덕을 얻음에 따라 영속적인 행복을 얻을수 있다고 주장한다 . 이는 함몰된 자아에로의 하강이며 동시에 생과사 , 음성과 양성, 무한과 유한의 모든 대립이 절대자 앞에서는 사라짐을 전제한다.

그는 선(good)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지고선으로서 하느님(1)에게 귀속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선을 언제나 현실에 불일치하는것임에도 응당 그렇게 되어야하만하는것으로 존재한다. 그는 말해진 선(good)은 선(good)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선은 언제나 영원한 현재로서 하느님에게 귀속되었기에 특정한 행위,사물의 선함 을 논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 존재하는 선이라고 칭해지는것은 실재로 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윤리에대해서 늘 현실에 저항하는것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며 현실에대한 저항을 강력히 주문했습니다. 그것은 불의한 국가와 ,제도, 행위에대한 저항을 말하는것이다. 한편 그는 선을 아는것은 언제나 신적조명에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

가상국가론

사회실험체론 비판

ㄱ. 기술되는것과 요청되는것 사이

그는 우선 유희론과 사회실험체론의 논리성은 실제로 같다고 주장한다 . <동일한 대상에대한 관찰의 결과가 상이한 결과를 낳았을때 의심해야하는것은 첫째로 어느 한쪽의 근거가 불충분하고 오류라는것이다. 둘째로 관찰의 주체의 정치적 판단이 개입한 경우이다. 테리메논에대한 이리오네스의 승리는 둘째의 경우에 속한다고 할수있다. 이는 당시 이론의 합당성을 검증하는 가운데서 가상국가의 방어를 요구하는 상서성 사람들의 지지가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오네스와 테리메논의 이론은 둘다 논리성은 결여되어있다. (1)충분히 많은 표본을 관찰의 대상으로 했는가? (2) 관찰주체의 선입견이 개입되지 않는가? (3)근거는 가치중립적인것인가? (1)에대하여 두 이론은 각 이론에 유리한 표본만을 대상으로 했다. 한편으로는 이 가운데서 선입견이 개입된것이며 근거는 가치중립적이지 못했다. 가령 이리에노네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가상국가는 사회를 체험하고, 우리가 가상국가를 하며, 국가가 어떻게 발생하고,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발생된다는 점과 모든 사람에게는 권력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있으며, 모든 사람이 국가와 정치체제에 관심이 있다는 "인간의 국가조직성"과 모든 사회 조직에도 국가 행정과 비슷한 행정조직이 조직된다는 조직행정설을 추후 주장하였다 이에 가상국가는 우리가 원하는 이상국가를 대변하며, 따라서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때 가상국가는 단순히 우리가 즐기고 노는 커뮤니티나 게임과는 달리, 엄연한 사회실험체인 것이다 " 그러나 가상국가의 목적에대한 특정인의 생각을 무리하게 일반화했으며 양적으로나 선험적으로나 검증불가능한 사이비명제이다 . 또한 역사적으로 가상국가는 반드시 이상국가만을 주제로 삼지 않았으며 '그저 즐기기위한 국가' '풍자가상국가' 역시 존재했기 때문에 이는 반증되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정치와 체제에 관심있다는 주장 역시 모든 이들의 경험을 일일히 혹은 최소한 통계를 낸것도 아니며 선험적인 검증의 대상도 될수 없다. 한편으로는 테리메논의 명제 역시, 이리오네스와 같이 생각하는 자들을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류를 가지고 있다> - 정가변 상 3장 중 발췌

또한 그는 사회실험체론의 합리성과 목적의식이 사실은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요청되는것 이라고 주장한다. < 가상국가에대한 관찰의 결과에서 우리는 가상국가라고 자칭하는 여러 커뮤니티가 존재함을 깨닫게된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 상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실험체론자는 가상국가의 특성을 오직 사회실험체론으로 환원하여 다른 모든 가상국가를 비-정상화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가상국가의 정의에 따른 이들 만이 오직 가상국가라 호명될 권리를 가지게되었고 다시 이들을 관찰한 결과가 종래의 이론을 보충하게된다. 가상국가론은 처음부터 확정편향적이며 관찰의 결과는 이론에 의존하는것이었다 . 그러나 이는 오직 합리성과 특유의 목적의식(2)에만 해당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외에 특성 , 관습성,조직성,사회성이 실제로 관찰되는것임에 동의할것이다. 그러나 합리성과 목적의식은 실제로 관찰되는것인지 의문일 따름이다. 그것은 이론이 요구하는 당위에 가까울 따름이다. 그것은 실제를 기술하는것이 아니라 요청하는것이다. 그런의미에서 그것은 가상국가에대하여 구속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의 헤게모니로서 강제되는것이 아니라 하나의 캠패인으로서 존재해야했다. 그러므로 가상국가가 사회실험체이다 라는 명제는 잘못되었다. "우리는 사회실험체인 가상국가를 원합니다" 이것이 가장 솔직한 명제이다 >

관찰이 이론에 의존한다면 중립적 사실이나 관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관찰은 그것이 발생하는 이론적 맥락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험과 관찰에 근거하여 경쟁이론들을 평가하는 일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두 이론의 근본원리가 본질적 측면에서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한 이론의 개념을 다른 이론의 개념으로 나타내는 것 조차 가능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는 두 이론은 어떠한 관찰명제도 공유하지 않는다 . 이는 가국학에서는 이레오네스의 교설과 테리메논의 교설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수있다. 분명 동일한 대상에대한 관찰임에도 극단적인 입장차가 나타난것은 전제자체가 달랐음을 함의하며 이리오네스의 학설이 채택된것은 다분히 정치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이론은 고정적이고 전제적이고 진보를 저해할 위험성을 가진다.(실제로 그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국이런간 소통불가능성을 인정하고 다른 이론의 존재를 승인해야한다.
< 그러므로 이리오네스의 아들들은 테리메논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 정가변,상,12장,1절

ㄴ. 절박함과 설정과 활동 , 정치철학의 실현의 장은 실재하는가?

그는 가상국가의 침체원인을 목적의 상실로 파악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가상국가를 즐기지도 못하며 , 그렇다고 의미있는 활동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상국가는 정치철학의 실현의 장이라는 매우 가치있는 장소이다.(대다수인 사회실험체론자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히고 왜? 가상국가의 목적은 상실된것인가.. 그는 이를 설정과 활동의 불일치에서 찾았다. 왜냐하면 정치철학의 실현은 필연적으로 설정에서의 국가의 문제가 실제활동과 결합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 가상국가는 이것이 부족했다.

<이러한 (설정과 활동)모순이 있다면 가상국가의 목적은 불가능하다. 물론 아주 좋게도 보편가상국가를 비롯한 수준 높은 가상국가들은 입법과 같은 것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마져도 뛰어난 소수뿐이었다. 대부분은 설정 자체를 읽는것을 귀찮아 했으며 , 한 가상국가에서 가장 뜨거웠던 싸움은 역시 설정에 있는 것이아니었다는 점에서 잘 들어난다. 설정을 잘 숙지했다면 논쟁은 그것이 현실설정이던 가상설정이던 설정에서 더 일어나야한다. 하지만 가상국가에서의 정치는 인맥싸움으로만 변질되어갔고, 패거리 싸움이 탁상공론 같은 의정활동 보다 재밌으니 자연스래 의정활동은 축소되었다. 이러면서 설정과 활동간 유기적 관계 는 사라져갔다. 설정과 활동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모순되지 않아야만 가상국가의 목적이 가능한데 말이다.>-정가변 3장 중

그는 우선적으로 설정이 와닿지 않기 때문에 가상국가의 실제 활동은 설정 상의 존재하는 국가의 문제를 처리하는것이 아니라 친목질과 계파싸움에 국한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리고 설정이 와닿지 않는 이유를 설정은 설정이다 라고 정리한다. 그리고 나아가 설정의 와닿지 않음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생존 혹은 즐거움이 아닌 이상 몰입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설정 내에서 미시적인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철학의 실현의 장으로서는 매우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설정에 미시적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미시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아니하고 거대한 정책만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장에서 정치철학을 실현하는것은 대체 어떤 효용을 가지는것인가 이상적인 사회의 구축 , 인간이 어떻게 복되게 하는가? 이러한 탐구는 지난 가상국가 역사상 미시적 구조의 부재로 무용지물이다. 과연 거시적인것만으로 그것을 달성할수있는지는 생각해봐야할 부분이다. 이념의 구현은 거시적인 것만으로 완벽한가? 미시적 개인이 존재했다고 반문할수있지만 과연 어떠한 세밀한 과정이 존재했냐고 물으면 미시적 구조의 부재를 인정해야만 할것이다. 가령 "쓰레기매립지를 국가에서 건설하는데 시민들이 반발한다" 이에 관해서 어떠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정책을 집행할것인가? 이러한 과정을 간과하면서 정치철학을 진정 실현 가능한가? >정가변 5장 중

<쥐는 먹는것이 절박하여 먹고 새는 나는것이 절박하여 나니라 항산없이 뜻을 행하는건 이름 난 선비 뿐이다. 결코 설정이 피부로 와닿지 않는것은그들의 탓이 아니라 본연의 정 때문이다. 한 농부의 가족이 있었는데 어느날 모든 가족이죽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위로하지 않았다 이거 소설이거든> 가상국가는 결국 정치철학 혹은 이상국가의 실현이 아닌 정치철학에대한 재사유, 이상국가에대한 재사유만으로 남을 뿐이다.

대안

ㄱ.가상국가는 가상국가이다.

그는 가상국가에대한 누구나 알수있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목적, 내용을 그 어떤 억압자의 개입없이 행위주체들이 스스로 결정할것을 요구한다. 그는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것은 어떠한 특징을 가진것을 가상국가라고 호명하는것 뿐이다 "
<이것이 가국이고 저것이 가국이라 하지마라 고르는건 사람들이다. >

ㄴ. 설정근본주의

이는 반-가국련 세력을 칭하는것과는 다른 의미로서 설정을 본으로하는 활동 즉 설정과 활동의 유기성을 최대한 확보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예를들어 한 가국의 "원자력발전소 가동 중단을 놓고 국론이 분열되었다"와 같은 설정이 있다면 이를 살려서 활동 하도록 노력해야한다는것이다. 그러나 오고사정에의하면 이러함에도 설정과활동의 모순과 미시적 공간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럼에도 끝없이 시도해야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