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카리우스

오토 카리우스.jpg
오토 카리우스
이름오토 카리우스
Otto Carius
생애1922년 5월 27일 ~

독일제국'오토 카리우스 본인만 알고 있음
거주지독일제국'베를린
부모Otto Carius '
??? 오토 카리우스 본인만 알고 있음
형제자매동생 1명 < Otto griss >
신체키가 좀 작고 왜소하며 허약함
직업사업가,SS무장친위대
직위SS 무장친위대 대장
성향중도보수
정당황제친위당
경력 ( 대표적 )現 독일 2 기갑사단장
現 독일 ss 34 보병사단장
現 독일 친위대장
現 독일 친위대 본부 본부장
現 독일 황제친위당 대표
現 독일령 동아시아 총독
現 모게코 외교부 장관
現 모게코 KGB 국장
現 모게코 철도국 국장

前 독일 4 기갑사단장
前 독일 뮌헨 의원
前 독일 보안사령부 부장
前 독일 친위대원
前 독일령 동아시아 부총독
소속세계관카이저라이히
국가독일제국
소속독일제국


그의 인생

성장기 시절

1922년 5월 27일, 그는 독일 팔츠 주 츠바이브르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첼로와 피아노를 좋아하여 음악을 전공하려고 공부하려 했으나, 마음이 바뀌어서 기계공학으로 들어가서 공부하게 된다.

전쟁터에 들어가서 싸우다

1940년, 군인들을 매우 존경하고 동경하여 18세의 나이로 자원입대하였다. 외소한 체격과 허약한 체력으로 인해 2번이나 입대를 거절당했으나 결국 입대되었다. 대전차병을 지원했으나 TO가 비질않아서 보병으로 발탁되어 제 104 보병보충대대에 자대배치되었다.

하지만 동기들에 비하면 나이도 적고 체격이 왜소해 큰 스트레스를 받은 듯 하다. 오죽하면 사내답게 보이기 위해 수염을 기르려 했는데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나서 더 큰 좌절에 빠진 적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행군 중 MG34 기관총을 짊어지고 가다가 체력이 딸려 동료의 부축을 받아 복귀하는 등 보병으로서는 그리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얼마 뒤 중대장이 기갑병과로의 전출을 희망하는 사람을 조사할 때 전출을 희망하여 승무원 교육을 마친 후 제 20 기갑사단 제 21 전차연대에 자대배치되어 독소전쟁에 참여한다.

사단 특성상 어쩔 수 없이 38t 전차의 탄약수로 탑승, 죽을 고비를 몇번 넘기고 치아도 여러개 부러졌으나 무사히 넘겼고,

기본적으로 떨어지는 전차의 성능에도 불구하고 실력과 팀워크로 전과를 달성, 1941년 8월 간부 후보로 추천받아 장교 훈련을 이수 후 1942년 동부 전선에 소대장으로 배치되었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와 장교훈련을 받은 오토 카리우스는 1942년 봄, 다시 21기갑연대에 원대 복귀하여 한동안은 전차의 부족으로 제설 작업에 투입되었다가 새로이 보충차량이 들어오며 자기의 소대를 책임지게 되었다. 하지만 소대장으로서의 보병을 지원하는 첫 임무에서 각 전차의 조종수와 탄약수들이 식사추진을 위해 전차를 비운 사이에 소련군이 공격을 해오자 아군 보병들을 놔둔채 무방비로 당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전차를 직접 몰아 달아났다. 아직 적은 보이지도 않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소대장 전차가 말도 없이 뒤로 움직이자 다른 소대원들도 당시 메뉴얼 그대로 전차에 탑승해 소대장 전차를 따라 연락이 되지않는 상황에서 소대장인 카리우스의 차량을 따라갔다. 그로인해 갑자기 아군 전차들이 후퇴하는 모습을 본 독일군 보병들은 아연실색 했지만 자리를 지켰다. 카리우스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깨달아 다시 전차들을 원위치 시켰지만 보병들이 전차의 도움 없이 소련군의 공격을 격퇴시킨 후 였다. 전투가 끝난 후 카리우스는 그럴 거면 차라리 전차빼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인터뷰에서 말하길 큰 교훈이 된 경험이었다고 한다.

이후 잠시동안 공병소대장으로써 활동하였지만 중전차소대장으로 임명되면서 카리우스의 활약상이 펼쳐졌다.

오토 카리우스가 배치받은 502 중전차대대는 중급장교가 부족하여 소대장이 중대를 이끄는 일도 있었는데 오토 카리우스가 이 경우였다.

오토 카리우스가 활약한 2개 전투가 있는데 나르바 방어전과 마르나파 전투. 마르나파 전투에서 아군 티거 8대를 이끌고 적 전차 22대를 격파 후 전술지도를 노획하여 본대인 28대를 추가 격파.

이 전투에서 본대 발견장소가 지형이 험악하다는 이유로 또따른 전차 에이스인 알베르트 케르셔와 자신이 이끄는 2대의 전차만으로 기습 감행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1943년에는 IL-2가 매일 같은 시간,고도,방향에서 날아오자 매복 후 전차포를 사격, 두번째 탄에 명중하여 격추하였다.

1944년 독일 왕당파가 나치 독일에게 반란을 일으켜 나치 독일이 져서 항복 후 전범 재판을 받았으나 전투에 충실했을 뿐 반인륜적 사항은 없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전후 독일에서의 활약상

전후 고향에 내려와 쉬고 있던 오토 카리우스를 1945년 당시 뛰어난 군 장교가 없었던 독일 제국 군부가 채용에 성공, 기갑사단장에 임명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얼마 뒤 제 4 기갑사단장과 제 34 SS 보병사단장에 추가적으로 임명되며 3개의 사단 지휘권을 획득, 독일 제국에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11월에 차량 상부가 동그란 차량을 보고 영감을 얻고 폭스바겐 사를 창립하였다.

1946년 1월달에는 방위사령부장과 친위대장에 임명됨. 방위사령부장으로써는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했으나 친위대는 다시 복귀를 성공함. 이때 기업 붐으로 GFRS 등의 회사들를 창립하였다.

2월에는 독일이 제정 사회가 재선포 되면서 당시 의원선거 출마자로써의 자격은 박탈되었으나 황제친위당의 대표로 추대되어 제정 사회의 3인자(?)로써 성공함. 또한 여러 회사를 인수 합병하며 회사 규모가 늘어났다.

3월에는 친위대의 제정비를 마치고 군편제에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황제친위당에서도 매주 정기회담 개최를 선언하며 당 활성화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