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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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본국의 역사
본토 도와군도 산암도
아카토문명 아카사인
홍성
소요인
도래인시대 남백제국 아카사 조성
남북국 남해국
선구왕조
하로성
남해시대 도와왕국 소요국
7사군시대 남해국
호요 정권
 청양성 
(사로신정)
(대정반환)
제국시대 월본제국
(다이치 유신)
제국헌법 제정
도와왕국, 소요국 병합
현대
월본국


아래는 월본국의 설정 상 역사를 서술하였습니다.

개요

고대

고대 월본 열도는 중해와 월본해를 끼고 아카토 문명이 발생하여 아카사인들이 존재했었다. 험한 산지 대신 완만하고 비옥한 유전평야에 집단으로 생활했었다. 유전(有田)이라는 말처럼 농사기술이 발달해 곡식을 주식으로 하였다. 천공단 유적이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아카사인 집단은 정교하고 섬세한 마을을 건설했는데, 중심이 되는 성체 지붕에 붉은 천막을 둘러놓아 홍성이라고 불리었다.

도래인시대ㆍ남북국시대

대륙에서 도래인이 당도하자 외해군란이 일어나 도래인들이 홍성을 점령했다. 홍성이 해체되며 아카사인들은 남안[1]으로 천도하여 세력을 유지하고 하로성을 세웠다. 도래계는 선구왕조를 중심으로한 남해국이 들어선다.

남해시대

남쪽에 있던 산암도의 소요 해적과 남해국간의 잦은 충돌로 피로도가 쌓여갔고 하로성과 도래인-원주민간 신경전도 끊이질 않았다. 이어 외란족도 남해국의 교역에 약탈을 거행하며 불안정한 기류는 계속됬다. 남해국의 군주 선진왕은 아카사와 가다담판[2]에서 통일을 주도하여 관본도 해안선의 무장과 병력을 정비하고 교역에 대한 대비를 강화했다. 통일을 위해 선진왕은 아카사인들에게도 권력을 일부 이양하는 등 지방분권을 조금씩 실행하였고 동북부지방 개척의 권한을 주었다.

사군시대

지방분권에 따라 각 주(州)마다 부성(府城)의 권한이 생겼는데 초기에는 관할 주의 조세만을 관여하였으나 점차 교역에 대해서도 범위를 확장했다. 해안선 특히 무역항이 발달한 지역은 부강했던 반면 내륙산간 지역은 쇠약해져 격차가 생기기도 했다. 각 부성은 부성내에서 최고권력인 성주가 지배적이고 성주의 혈족은 귀족처럼 여겨졌다. 귀족을 호위하는 사군(士軍)이 존재했는데 이들의 권력도 막강했다.

귀족들은 주로 각 부성의 특산품을 서양 열강들과 교류를 통해 금품을 주고 받았다. 남해국 말기, 청양성과 중화국과 교역을 시찰하고 돌아오는 청공가문의 공주일행과 그 교역품을 운반하던 마차 무리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청양성의 청공가문 공주가 피살당하면서 이에 역분한 청양성 성주가 배후로 보이는 삼주성과 전투를 벌인다. 이후 전승을 거둬[3] 관본 전역[4]에 분산됬던 권력을 청양성 청공가문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체계로 왕권을 강화했다. 삼청내란으로 청양성의 독주와 힘을 본 부성들은 순순히 중앙집권에 동의를 했으나 조세권과 무역권을 거둬들이는 것에 몇몇 부성들은 반발하였다. 크고작은 전투를 벌이다가 하로성의 사군들이 청모적의 난을 일으킨다. 계속되는 분난발생과 지방세력들의 횡령 부축적으로 청양성은 산품개혁을 통해 회유하지만 개방적이지 못한 정책에 동력을 잃어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이어 하로성은 스스로 황제(국황)에 의한 통치국가를 선언[5]하며 근대적 국가임을 내세웠다. 이 기세를 몰아 하로성은 청양성[6]로 군사를 보내 고궁을 점거했다. 나락에 빠진 청양성은 결국 다이치 황제대정반환을 단행했다.

제국시대

다이치 국황은 다이치 유신으로 지방의 영주들의 영지와 영민을 국황에 반환하고 지방부성들을 폐지함과 동시에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이어 제국헌법을 제정하고 국호를 전월본제국으로 개칭하여 제국 국가를 표방했다. 제국의 수도도 도번지방[7]으로 천도하여 재정비했다.
개방을 내세워 서구열강의 신문물을 적극 수용하면서 근대화를 이룩했고 해적과 서구열강의 간섭에 맞서 군사력도 증대해왔다. 월중전쟁[8]으로 산암도를 얻어내고 도와왕국[9]를 병합시켰다. 중화국의 해안지역을 점령하여 대륙 진출의 병참기지화를 해내고 도이조약을 통해 청화국의 외교통치권을 가져 식민지화했다. 제1차 세계전쟁을 식민지들을 통해 연합국에 물자지원을 하며 정당성을 확보하였고 동시에 국제적 입지와 국력을 키우는데 일조했다. 한차례 세계전을 거치면서 풍부한 재정을 축적했고 경제성장도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했다.

전후

제2차 세계대전시 전월령 중화지[10] 내부에서 독립운동과 독립전쟁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중해전쟁이 발발했다. 결국 월본제국이 패하면서 중화국 전지역과 청화국은 독립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중화권의 공산화에 우려해 월본국에 제국주의를 제하고 정상화하여 견제권을 준다.

주요 사건


월본 월본 관련문서
역사 지리 정치 외교
경제 기업 방위대 스포츠
교통 인물 문화 관광

주석

  1. 지금의 히도마부 지역
  2. '街茶담판'. 각각 하로성이 있는 남안가와 남해국 중부성이 있는 다마를 의미한다.
  3. 삼청내란에서 청양성과 삼주성은 서로 거리가 멀어 청양성의 군대 무리가 삼주성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길목에 위치한 수개의 부성을 지나야한다. 삼주성과 동맹을 맺은 부성도 길목에 위치하여 본전까지 길고 험난했다.
  4. 여기에는 몇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남해국 선구왕조의 중앙성이 교역을 통해 잘나가는 청양성을 견제하기 위해 삼주성과 결탁했고 이어 삼청내란에서 삼주성을 지원하다가 대패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5. 사로신정, 새로운 정치체계로 하여 통치함.
  6. 지금의 청하부
  7. 지금의 도유지방
  8. 전월본국이 근대식 군대로 전쟁을 치른 첫 전투이다.
  9. 현재의 남양군도
  10. 전월본령 중화국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