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피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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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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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오늘날의 유피스 땅에는 갈리아 켈트로 여겨지는 소위 골족이 터전을 잡고 살았다. 켈트는 방대한 켈트계 제어 사용자 민족 집단들 전체를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켈트 계열 민족들은 아일랜드를 비롯한 브리튼 제도에서 프랑스와 남부 독일 일대는 물론 발칸 반도 북부에서 아나톨리아는 물론 일부는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골족과 근연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측되는 이탈리아 북부의 켈트계 세력은 오랜 기간 이탈리아 반도를 공격해왔고 로마 공화국은 이들과의 대립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지휘관이자 역사적인 명장 중 한 사람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 전쟁을 주도하여 단기간에 갈리아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베르킨게토릭스라는 아르베르니[1] 부족의 수장이 골족을 규합하여 부족연합군을 결성하고 갈리아에 주둔하게된 로마군을 연파하며 갈리아 전역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카이사르는 한 때 패배 직전의 위기에 몰리고 갈리아를 포기할 상황에 처했지만 근성으로 버텨내었고 아바리쿰을 함락시킨 뒤, 알레시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베르킨게토릭스를 항복시키고 갈리아 전역을 재평정하였는데 이후로 갈리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로마화하였다. 갈리아는 이러한 형태로 라틴화되었으며 이것이 현대 유피스인 민족의 라틴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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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르-푸아티에 전투

로마 제국이 서로마, 동로마로 분화되고 서로마의 세력이 차츰 약해지면서 서로마의 영역이었던 갈리아 지역에는 게르만 계열의 민족들이 무수히 거쳐가게 되었다.

갈리아에는 게르만 계열의 민족들 중 하나인 프랑
크인들이 진입하여 정착하였다. 이들은 오늘날의 로렌, 라인란트 등지에서 세력을 확대하다가 클로비스 1세가 프랑크인들을 이끌던 시기에 서로마가 완전히 붕괴하는 틈을 타 갈리아로 진입하여 갈리아의 서로마 주둔군 장군이던 시아그리우스를 수아송 전투(486년)에서 격파하고 시아그리우스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북부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메로빙거 왕조의 실질적인 시작이며 이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은 세력을 급속히 확대하여 남부 갈리아 상당부분을 지배하던 비시고트 왕국을 공격하여 부이예 전투에서 비시고트 군세를 대파하고 승리를 거두며 남부 갈리아에서 비시고트의 세력을 크게 축소시키며 남유피스의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이들은 부르군트 왕국[2]을 멸망시켰으며 부르군트인들은 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어 오랫동안 프랑크인들에게 지배 받아 프랑크에 점진적으로 동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메로빙거 왕조는 장자상속제와 중앙집권화를 시도하였지만 봉건적 질서에 기반하는 지방 세력을 억제하기 어려웠으며 그로 인한 여러 문제들에 의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메로빙거 왕조는 차츰 약화되고 지방 세력들이 강화되어 갔다. 하지만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팽창 정책은 지속되어 세력을 꾸준히 확대하였다.

메로빙거 왕조의 권력이 봉신인 카롤링거 가문에게 차츰 무력화되어가던 시기, 카롤링거 가문을 이끌던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3]은 우마이야 왕조 아랍 이슬람 제국[4]의 군세가 유피스 남부를 공격하자 프랑크 왕국 군세를 규합하여 투르-쿠아티에 전투에서 이를 격퇴시켰다. '기독교 세계를 이교도들로부터 구원하였다'라는 강력한 명분을 기반으로 카롤루스 마르텔의 아들인 피피누스 3세는 메로빙거 왕조를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며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다.

피피누스 3세는 이탈리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롬바르드 왕국을 공격하여 그들을 일시 무력화시키고 교황청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로마냐, 안코나에 해당하는 영토를 기증하면서 교황령의 역사적인 시작을 선사하였으며 이를 '피핀의 기증'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러나 피핀은 독일 방면의 토착 게르만계 민족들, 특히 색슨과의 전쟁 등 다른 전장이 많았기에 이탈리아에 장기 주둔할 수 없어 철수하였으며 이후 롬바르드 세력은 교황청의 교황령 영지를 빼앗고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재확립하였다.

프랑크 왕국을 넘어 유럽의 위인이라 일컬어지는 카롤링거 왕조의 카롤루스 마그누스에 대한 내용은 샤를마뉴를 참조.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막내 아들인 루도비쿠스 1세를 제외한 아들들이 전부 죽었다는 점으로 인해 운 좋게 루도비쿠스에게 장자상속을 시켜 제국을 한 사람에게 몰아 계승시킬 수 있었지만 메로빙거 왕조가 실패했듯이 여전히 카롤링거 왕조 역시 장자상속제를 체계화하기에는 체제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결국 루도비쿠스 1세 사후, 프랑크 제국은 오늘날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서프랑크를 루도비쿠스의 후처 소생인 샤를 2세가, 오늘날의 남프랑스에 해당하는 아키텐을 루도비쿠스의 차남인 피핀이, 오늘날의 독일에 해당하는 동프랑크를 루도비쿠스의 삼남인 루트비히 2세가, 오늘날의 네덜란드, 로렌, 라인란트, 부르고뉴, 북부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로타링기아[5]를 장남인 로타리우스 1세가 분할하여 나눠가지면서 분열되었다.

이후 샤를 2세가 피핀을 암투 끝에 무너뜨리고 아키텐을 서프랑크로 편입시켰으며 로타링기아도 붕괴되어 이탈리아는 독자적인 이탈리아 왕국으로 분화 되었고 로타링기아가 지배하던 네덜란드 등의 저지대와 라인란트 등은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가 분할하여 차지하였다.[6]

북게르만계 민족 집단인 노르드인들의 약탈 무장 집단인 바이킹의 해상 침공, 피노-우그릭 계열의 민족 집단인 마자르족 등의 침공 등으로 말미암아  동프랑크 모두 제각기의 방위를 위해 쌍무적 계약관계에 기반한 봉건지주기사 체계를 강화하고 농노제에 기반한 국가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지중해 중심 교역 형태도 변화되어 서유럽은 새로운 경제, 사회적 체계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서프랑크의 프랑크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갈로-로만[7], 브르타뉴인[8], 남프랑스에 잔존한 서고트인 등과 융합되면서 오늘날의 유피스어(프랑스어)로 이어지는 오일어(북유피스 중심), 오크어(남유피스 중심)를 사용하게 되고 유피스인(프랑스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구축하는 역사적 진행 방향을 잡게 되었다.

프랑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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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왕(聖王) 루이 9세

7세기 중엽부터 노르드[9]가 스칸디나비아를 벗어나 유럽 전역에 약탈전쟁을 벌이면서 노르드의 약탈전쟁단이라 할 수 있는 바이킹 집단의 공세는 서프랑크에도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루이 3세가 한차례 바이킹들을 크게 대파하였지만 루이 3세는 다소 어이없는 사고사로 급사하였으며 이후 지속되는 바이킹들의 침공과 함께 카롤링거 왕조의 권위는 서프랑크에서 갈수록 약화되었다.

루이 3세 이후 즉위한 샤를로망 2세[10] 역시 급사해버리면서 공석이 된 서프랑크 왕위를 동프랑크 군주인 카를 3세가 잠시 차지하였을 때에는 프랑크가 다시 하나로 합쳐질 가능성도 없지 않았지만 곧 카를 3세는 퇴위당하였으며[11]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의 분열은 이 시점에서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카를 3세가 퇴위당한 상태에서 서프랑크 제후들을 규합하여 파리 공방전에서 노르드 바이킹 대군세를 수적 열세에도 격파하는데 성공한 카페 가문의 외드가 서프랑크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카롤링거 왕조를 대신하여 서프랑크의 왕위에 올랐으며 이것이 역사적인 카페 왕조의 시작이었다. 외드의 모친은 루도비쿠스 1세의 딸인 아델라이드였기에 모계로 카롤링거 혈통을 계승했다는 점 역시 주요하였다.

그러나 외드에게는 친자가 없어 샤를로망 2세의 동생인 샤를 3세가 카롤링거 직계 혈통의 명분으로 서프랑크 왕위 계승을 주장할 때 외드는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결국 외드는 사망할 때에 카페 가문의 친척이 아니라 샤를 3세에게 왕위를 넘겨야 했다.[12]

하지만 서프랑크 내에서 카페 가문의 인기는 여전히 드높은 상태였다. 외드의 동생으로써 마찬가지로 아델라이드의 아들이며 따라서 카롤링거의 혈통을 모계로 이어받은 로베르 1세는 노르드 바이킹들의 침공을 누차 격파하면서 서프랑크 제후들 사이에서 더욱 큰 명망을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샤를 3세에게 도전할 수 있었다.

로베르 1세는 서프랑크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샤를 3세를 밀어내고 왕좌에 올랐지만 샤를 3세 역시 자체 세력을 이끌고 이에 대항하면서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수아송 전투(923년)에서 로베르 1세가 승리하면서 로베르가 서프랑크 왕위를 거의 거머쥐는 듯 했으나 급사하면서[13] 로베르의 사위인 라울(서프랑크)이 왕위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 라울 역시 급사하면서 샤를 3세의 아들인 루이 4세가 서프랑크 왕좌를 되찾으며 카롤링거 왕조가 다시금 복권되었다.

그러나 카페 가문의 서프랑크 내 위세는 여전히 거대했으므로 루이 4세는 치세 내내 카페 가문과 권력 다툼을 벌여야했는데 루이 4세와 그의 아들인 로테르, 로테르의 아들인 루이 5세가 줄줄이 요절하면서 최후까지 잔존한 서프랑크 카롤링거 왕조도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 왕좌에 앉으면서 본격적으로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14]

카페 왕조는 루도비쿠스 1세의 딸인 아델라이드로부터 카롤링거 왕조의 모계 혈통을 이어받았으므로 정통성을 굳힐 수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중세 초기의 지방 제후 세력들을 억제하며 중앙집권화를 이룩하기에는 여전히 힘이 미력하였다. 따라서 위그 카페의 치세에부터 카페 왕조 프랑스 왕국의 7대 국왕인 필리프 2세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200여년 이상 카페 왕조는 자국 내의 제후 세력들과의 권력 분쟁과 왕권 강화에 집중해야했다.

중세 초 봉건 체제에 기인한 제후들의 독자적인 행보와 분리독립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필리프 1세 치세에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한 뒤 고드윈슨 왕조를 무너뜨리고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여 윌리엄 1세로서 노르만 왕조를 연 일이다.[15]

필리프 2세 시기에 여러 법제가 개편되면서 왕호 역시 '프랑크인의 왕'에서 '프랑스의 왕'으로 바뀌었고 존 왕과 오토 4세, 페르디낭 부르고뉴 등이 동맹을 맺어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플랑드르 연합군이 결성되어 프랑스에 도전하였으나 필리프 2세는 이를 부빈 전투에서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렇게 카페 왕조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필리프 2세 치세 이후 루이 8세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노리고 잉글랜드를 침공하기도 하였으며 루이 9세 때에는 7차 십자군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필리프 4세 치세의 카페 왕조 프랑스의 국력은 절정에 달하여 플랑드르를 격파하여 사실상 속령화하고 혼란한 상태이던 신성로마제국을 압박하여 동부 영토를 일부 확장하였으며 아비뇽 유수를 일으켜 교황청을 사실상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필리프 4세는 이후 프랑스 내에서 고리대금업 등으로 악명 높던 성전 기사단을 숙청시켜 성전 기사단이 축재한 재산을 국고로 환원시킬 수 있었다. 또한 필리프 2세에서 필리프 4세로 이어지는 시기 동안 남프랑스의 카타리파 이단 기독교 교세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을 일으켜 남프랑스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하게 굳혔다.

그러나 필리프 4세가 급사하고 카페 왕조 국왕들이 계속 요절하였으며 카페 왕조의 직계가 단절되어 필리프 4세의 조카인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가 왕위를 이으면서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에 카페 왕조가 그동안 쌓아놓은 왕권은 급속도로 추락하여 발루아 왕조는 귀족들의 도전에 직면하여야 했다. 필리프 6세는 즉위하자마자 플랑드르프랑세즈의 도전에 맞서 승리를 거두어 국가를 안정화시키는듯 하였지만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모계 상속을 통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백년전쟁이 발발하였다.

프랑스 제 1공화국

프랑스 제 1제국

프랑스 왕국

프랑스 제 2공화국

프랑스 제 2제국

프랑스 제 3공화국

프랑스 왕국

유피스 제국

실제 역사

각주

  1. 분화되어 있던 골족에 속하는 부족들 중 하나
  2. 프로방스, 부르고뉴 일대에서 부르군트족이 세운 국가
  3. 후한의 승상 조조와 비슷한 위치
  4. 우마이야 왕조는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석권했다.
  5. 오늘날의 네덜란드, 로렌, 라인란트, 부르고뉴, 북부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중프랑크
  6.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은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의 공통 역사로 간주되지만 이 분열 시기 이후부터는 서프랑크만이 유피스의 역사, 동프랑크는 독일의 역사로 간주된다.
  7. 로마의 지배 하에 로마화된 갈리아인
  8. 브리튼 제도 출신의 켈트계 민족
  9. 고대ㆍ중세 북유럽에 살던 게르만족 일파 중 하나
  10. 루이 3세의 동생
  11. 카를 3세가 서프랑크 방면을 침공하는 노르드 바이킹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돌려보내자 싸우지도 않고 외적에게 돈을 바치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로 서프랑크 제후들의 전면적인 반란과 봉기 및 마침 동프랑크 왕위를 노리던 조카 아르눌프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12. 샤를 3세가 서프랑크 왕위에 즉위하며 카롤링거 왕조가 복권되었을 시기, 샤를 3세는 서프랑크를 침략하는 노르드 바이킹 무리의 한 일파에게 봉토를 하사하고 그들을 서프랑크 땅에 정착시켜 자신의 부하로 삼아 다른 바이킹 무리들과 싸우게끔 이이제이를 유도하였는데 이것이 서프랑크-프랑스 문화에 동화된 노르드 출신들을 의미하는 노르만족의 역사적인 첫 시작이다. 노르만족이 정착한 장소가 바로 노르망디다.
  13. 샤를 3세에 의한 암살이였다는 설이 존재한다.
  14. 클로비스 1세의 메로빙거 왕조가 유피스 역사의 실질적인 시작이라면 카페 왕조의 시작은 유피스 중세 역사의 실질적 개막이라고 볼 수 있으며 카페 왕조의 부계 직계 혈통은 분가인 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 도를레앙 왕조는 물론 부르고뉴 가문과 부르고뉴 가문의 방계 가문들, 당주 왕조 등으로도 이어지는데다 그러한 카페 왕조의 부계 직계 혈통이 향후 유피스(프랑스)를 천년 가까이 지배하게 되므로 유피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여겨진다.
  15. 이 외에도 노르만족 계열의 제후인 로베르 기스카르가 독자적으로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시칠리아 왕국을 세운 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