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공화국/역사

아 역사 언제 다쓰냐

종교 개혁 이전

1444년

작센은 베틴 가문이 끊기고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이 들어선다

1445년

호엔촐레른 가문에서 온 그는
프리드리히 1세는 근대 작센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국가를 잘 운영해 갔으며
그의 통치기간 동안 국민들은 행복하였다

1469년

프리드리히 1세가 죽고 다음 후계자인 빌헬름 1세가 왕위에 오른다
빌헬름 1세 또한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성공하여 아직까지도 기억이 되고 있다

1483년

호엔촐레른 가문이 다스리는 또 하나의 선 제후국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다 이에 빌헬름 1세는 브란덴부르크의 왕위를 주장한다
그리고 빌헬름의 강경책으로 브란덴부르크 내에 빌헬통 합스부르크 가문이었으며 지금 당장 작센의 왕위를 계승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었다.

1500년

모든 사람들이 1500년 새해를 축하하였다 하지만 빌헬름 1세가 병들어 사망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작센-브란덴부르크였으며 지금 당장 작센의 왕위를 계승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었다.

1501년

결국 빌헬름의 섭정 카를 폰 합스부르크는 작센 선 제후국의 왕위를 가져갔다 카를 폰 합스부르크는 작센-브란덴부르크 동군연합을 이끌어가며 왕이 끊긴 보헤미아 선 제후국의 왕위를 요구했고 그 요구는 정당하였다
하지만 황제인 오스트리아는 이것에 반발하였고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보헤미아 왕위 계승 전쟁 1501~1505)
이 전쟁에서 작센 선제후국은 승리하였으며 보헤미아 왕위를 얻게 된다

1509년

작센이 독실한 가톨릭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여 종교개혁은 하지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1510년

작센은 신교 금지령을 내리면서 신교 탄압 정책을 펼쳤다

1512년

카를 폰 합스부르크가 신교도 폭도의 의해 사망하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왕위에 오른다

1512년

작센 선 제후국은 무려 5명의 선제후 지지 덕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른다
황제가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신성로마제국 내 개신교 반대에 힘썼다

151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슐레지엔 재정복을 명분으로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했다
하지만 황제의 현명함과 군사적 재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오히려 패배하여 동부 프로이센 단치히 등 독일 기사 단국의 땅을 신성로마제국 작센의 휘하 속국으로 두면서 신성로마제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한 방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슐레지엔 재정복 전쟁 1519~1519)

1523년

작센은 해안가의 필요성을 느껴 포메른을 공격한다 마침 포메른은 개신교 국가였기 떄문에 명분은 충분했지만
초반 전투에서 밀리고
드레스덴 공성전에서 패배할뻔했지만 기적적이게도 승리하고 반격에 나섰다 이로써 결국엔 작센이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작센은 해안가로 진출하였다
(작센-포메른 전쟁 1523~1524)

1524년~1573년

작센은 북독일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면서 북독일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기 시작함
그와 동시에 북독일 정복을 시작함

1578년

작센의 확장을 두려워한 프랑스가 작센에 선전포고함 작센은 프랑스를 막을 힘이 없었고 결국 드레스덴 공방전에서 항복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자살한다.

그리고 하나의 조약을 맺게 된다
내용은 이러하다

북독일의 서부지역은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에 두면서
남독일 지역 또한 프랑스에 아래로 둔다
마지막으로 작센은 2000천 투캇을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1581년

작센의 새 왕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자신의 아버지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자살한 현장을 본후 자신이 왕이 된다면 아버지같은 꼴을 당하지 말고 위대한 왕이 되자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한 이유 덕분인지 작센은 군대를 먼저 개혁했다 작센이 활대신 총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였다
그러면서 포병의 중요성을 확고히 하고 청동 대포를 많이 생산하였다 그리고 기병대를 축소시켰으며 보병과 포병을 늘렸다

1584년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아버지의 원한을 값기로 결정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한다

1586년

1년 7개월의 준비끝에 마침내 전쟁준비를 끝마쳤으며 프랑스의 독일 내에 영향력 철수 명분으로 프랑스에 선잔포고 이에 빠른 시일내에 프랑스 국왕이 지휘하는 아우슈터리츠 전투에서 격파 프랑스의 국왕이 포로로 잡힘 그 기세로 파리까지 진격하고 파리를 점령하여 전쟁은 7일만에 끝이 남
(7일 전쟁)

1591년

북독일의 지배권을 얻은 작센은 러시아 왕국과 오스트리아 왕국이랑 폴란드 분할을 하기로 결정 리투아니아 지역 대부분을 러시아가 폴란드 지역 반과 리투아니아 지역 극 일부를 독일이 리투아니아 지역 일부와 폴란드 지역을 일부 를 오스트리아가 가져가기로 결정 그리고 실행하여 폴란드는 저항도 못하고 패배하여 폴란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독일 통일전쟁

1600년

작센은 북독일 지배권이 무너질수 있는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의 북독일 영향권 강화,오스트리아의 견제,대영제국의 견제가 그 요인이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를 먼저 꺾고 그다음에 대영제국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상대하기로 한다

1602년

오스트리아는 전쟁으로 무너트렸다.

오스트리아가 무너지며 작센은 남독일의 지배권도 얻었다.

1602년

그다음 대영제국을 견제한다
대영제국은 해군 경쟁으로 견제를 하였다
작센은 해군을 대폭 늘려서 무역분쟁과 견제를 하였고 결국 대영제국은 해군 경쟁 에서 패배한다

1604년

마지막으로 프랑스이다 작센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북독일을 다시 잡았다
프랑스 와의 전쟁전 작센은 또한번의 군대를 계혁한다
작센은 철제 대포를 도입했으며
보병무기를 세롭개 계혁했다
그다음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1개월 만에 프랑스는 항복한다

이로써 작센은 2년에 걸친 독일통일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갔다며

북독일 전체를 작센의 땅으로 만드는것에 성공하면서
남독일 까지 작센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왔다

1607년

작센은 남독일 전체를 아무 방해 없이 합병하여 작센은 독일의 통일을 이루었다

작센의 절대주의

1608년

통일을 이륙하자마자 합스부르크의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죽자 작센 내에 합스부르크의 대가 끊기게 된다
이때 브란덴부르크 대공인 카를 폰 호엔촐레른 그러니까 카를 대공이 작센의 왕을 점하고 합스부르크와 대립한다.

1611년

합스부르크 왕가는 다시 작센의 왕위를 얻기 위해 작센에
연맹 제 결성 명분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만약 이 전쟁에서
작센이 진다면 작센은 그대로 오스트리아의 동군연합 당하는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작센이 진다면 작센은 그대로 오스트리아의 동군연합 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를 폰 호엔촐레른은 호엔촐레른가의 군사적 재능을 이용해 가볍게 막아내며 오히려 오스트리아 제국 발칸 연방의 빈을 점령하고
배상금과 여러 조약들을 맺고 오스트리아 제국 발칸 연방이
폴란드 분할 때 가져간 땅 일부를 획득함

그리고 마침내 완전한 통일을 이루어낸 작센 왕국은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고 작센 제국으로 승격된다

그러면서 절대주의가 들어오면서
작센의 황금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1612년

작센은 3번째 군사 개혁을 실시한다
우선 메치락 머스킷을 계랑 할 방법을 찾는 거였다
카를 폰 호엔촐레른은 메치락 계량을 우선시하였다
그러고부터 1달 후 플린트락이라는 머스킷이 개발되었고 이런저런 성능 테스트 끝에 도입하기로 결정한다.

1612년~1700년

아무일도 없이 평화로움

1657년

카를 폰 호엔촐레른이 사망
마리아 폰 호엔촐레른이 즉위

1700년

1700신년이 오자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였으며
18세기가 왔음을 알리는 해가 떠오름

1709년

18세기 초 작센은 오스트리아와 다시 전쟁의 위기에 처했다
그 이유는 바로 동맹의 역전 때문이다
작센, 스웨덴, 프랑스, 베네룩스 3국 vs 오스트리아, 러시아, 대영제국, 이탈리아 도시국가
이런 판도가
작센, 대영제국, 스웨덴, 이탈리아 도시국가, 베네룩스 3국 vs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나폴리, 스페인이 되었기 때문

1710년

결국엔 전쟁이 발발하였다
마리아 폰 호엔촐레른의 사촌인 프리드리히는 장군의로 싸웠으며 노이 마르크 전투에서 수적 열세 애도 불구하며 전투를 오스트리아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기적적인 전술을 보여주었으며 노이 마르크 전투는 작센의 압승으로 승리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작센의 상황은 나빠졌으며
스웨덴의 군사적 지원 영국의 해군 지원에도 부족한 상황이 벌어졌다 더욱더 안 좋은 소식은 베네룩스 3국(벨기에 제외)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나폴리에 항복하고 전향하였으며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만 간다.

마리아 폰 호엔촐레른은
스웨덴에 군사를 더욱더 보네라 하고 이에 분노한 스웨덴은 결국 적들과 평화협정을 하고 전쟁에서 빠진다

결국 작센은 게릴라 전투로 돌아설수 밖에 없었다

작센은 게릴라 전투로 4년을 버텼으며
러시아의 차르가 죽고 러시아는 내부 안정화를 하기 위해 전쟁에서 잠깐 빠질때 프리드리히는 군사를 모으고 나와 오스트리아를 상대하고 프리드리히는 노이마르크 전투때 처럼 대승을 거둔다. 그다음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대영제국의 군사지원을 받고 파리 근교에 마른강에서 아쉽게 패배한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평화 협졍을 할 이유가 생겼다
마른강 전투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는 작센에게 평화협정을 제안하였다 마리아 폰 호엔촐레른은 승낙하였고 프랑스는 전쟁에서 빠지게 된다 프랑스와 프랑스가 빠지자 프리드리히는 빈으로 행군하였다 그리고 마침네 빈공성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빈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또다시 작센의 굴욕을 받고 눈물을 머금고 종전해야만 했다 이때가 1707년이였다.
(7년전쟁)

1714년

마리아 폰 호엔촐레른이 사망한다
그의 장례행렬은 길게 널어졌으며
그의 아들 카를 2세의 제위를 알렸다

1718년

카를 2세는 지난 7년전쟁 동안
황폐해진 작센을 고쳐놓는데 힘썼다
그는 우선 행정구역을 개편(후에 작센 공화국의 행정구역이 됬기도 한다)그다음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였다 그는 우선
사법 제판소를 개편하고 백성의 요청을 들어주는 청원청등
많은 행정적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행정군주였지만 그는 작센에서 식민주의를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먼저 네덜란드와 대립해서 인도네시아의 일부 그리고 실론섬을 얻었으며 포르투칼과의 식민지 경쟁으론 동티모르 그리고 고아 지역을 얻었다
그리고 대영제국으로 부터 호주에 테즈메이니아 섬과 뉴기니 지역 일부를 얻었으며 마지막으론 청나라에선 칭다오지역을 얻었다

1723년

카를 2세의 영향으로 작센엔 행정군주들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카를 2세의 유일한 아들인 웨스트 폰 호엔촐레른은
아버지 카를 2세의 영향으로 행정적 능력이 아버지를 능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