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이후 중국 인민지원군의 대 북한 지원과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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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 내용

북한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에 대 해서 “조중 양국 간에 역사적으로 맺어진 우호 친선의 도리상 관계에 있어서나 또 는 자기 조국의 방위를 튼튼히 하며, 세계의 평화와 안전, 특히 극동의 평화와 안 전을 수호하는데 있어서만 거대한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위대한 사 회주의 10월 혁명의 승리 후 인류 사회에 새로이 형성된 고상한 국제주의의 명백 한 표현으로 된다

국공내전 동안 북한의 지원은 당시 위기에 처해 있던 중국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4)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밀접 했던 양국 간의 관계는 중국인민지원군의 한국전쟁 참전 이후에 더욱 공고해진다.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첫째로 중국인민지원군 이 과연 북한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이다. 중국인민지원군은 정전당시에는 120만 명이 주둔했었고 점차적으로 철수하여 1958년 최종철수 당시에는 25만 명 이었다. 두 번째로, 왜 1958년의 시점에서 철수를 하게 되는지, 그리고 당시 북한 과 중국 양국의 입장은 어떠했는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중국인민지원 군의 북한 주둔 8년의 성과와 영향을 도출해내고자 한다.

[268]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에서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쟁 대비를 했다. 하나는 동북변방군(东北边防军)을 구성해서 직접적인 군사대비태세를 취한 것과 다른 하나는 중국 국내에서 항미원조 운동을 벌인 것이다.

[268] 동북변방군의 조직은 중국 공산당 중앙이 장기적인 전략적 판단에서 결정한 주 도면밀한 대비였다. 이것으로 동북 국경지역을 지킬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 으로도 중국이 능동적으로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269]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중국은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경고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의 강화와 미국의 즉각적 개입은 중국이 참전을 결정하는 중요한 배경적 요인이었고 여기에다 중국 자체의 판단, 북한의 적극적 간청과 소련의 권고가 결합해 중국은 참전을 결정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은 ‘지원군(志愿军)’의 명의로 참전했는데, 이것은 전 쟁이 중국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17) 참전하는 중국군의 명칭 이 검토되고 있던 가운데 처음에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지원군(支援军)’의 명의로 출병할 것을 상의했으나 황옌페이(黃炎培)가 ‘지원군(志愿軍)’의 명칭을 건 의하여 이것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졌다

[270] 중국정부는 전쟁이 시작 되고 나자, 먼저 국내에서 전쟁의 타당성을 설명하고, 항미원조 운동을 벌였다. 마 오쩌둥은 전국적으로 사상동원을 진행하기 위하여 7월 10일 국내에 ‘미국의 타이 완과 조선 침략에 대한 중국인민 반대 운동 위원회(中国人民反对美国侵略台湾, 朝 鲜委员会)’를 조직했다.21) 그리고 7월 14일 ‘미국의 타이완과 조선 침략에 대한 중국인민 반대 운동 위원회’는 ‘전국각지에서 미국의 타이완과 조선에 대한 침략 반대 운동 주간’을 실시했다

이처럼 중국의 참전준비는 군사적인 것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항미원조전 쟁의 의의를 설명하고, 그들의 지지를 받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전쟁에 참가할 지 원자들을 모집하며, 한편으로는 그들 가족에게 특별한 혜택을 줌으로써 운동을 더 욱 광범위하게 진행했다.

[271] 1953년 7월 28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 사령 원 펑더화이에게 조선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한다는 정령을 발표하였고, 10 월 27일에는 중국인민지원군 장병들에 대한 공화국 훈장 수여식을 거행했다

[274] 김일성은 1953년 11월 10일 평양을 출발하여 12일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인민 지원군의 참전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의 복구건설 과정에서 중국이 원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협정에서 중국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말까지의 기간에 북한에 원 조한 모든 물자와 비용을 무상으로 하기로 결정하고 또한 전후 복구 건설을 위하 여 1954년도부터 1957년도까지 4년간에 인민폐로 8조위안(이것은 구화폐, 새로운 인민폐로 환산하면 8억위안)의 원조를 무상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276] 북한의 재건은 중국인민지원군의 노 력과 또 한편으로는 중국 각지에서 보내오는 원조물자로 인해서 성공적으로 이루 어졌다. 중국 측은 이미 1956년도에 북한 경제가 이미 전쟁 전인 1949년 수준으 로 회복되었다고 평가했다

중국군의 철수

[277] 1955년까지 공개적인 철군을 마치고, 1956~57년 사이에는 공개적인 철군은 이 루어지지 않았다. 중국 측에서는 처음에는 1956년 내에 철군을 완성하려고 준비했 으나, 1956년 폴란드, 헝가리 사건 후,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 분규를 일으킬 것을 걱정해, 지원군 철군이 잠시 정지되었다고 했다

1956년의 시점은 북한 국내적으로 여러 사건이 일어난 시기였다. 1956 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평양에서 개최되고, 여기서 공개적으로 김일성에 게 도전하는 세력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사건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알려지자 소련과 중국은 각각 부수상 미코얀과 국방부장 펑 더화이를 급히 평양으로 파견해서 김일성으로 하여금 8월 전원회의의 결정을 번 복하도록 하였다. 당시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거액의 원조를 받고 있던 김일성으로서 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북한은 1956년에 조선인민군의 병력을 축소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 명에서는 한반도의 평화 유지에 새로운 기여를 하고, 평화적 통일의 보다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1956년 8월 31일까지 8만명을 축소한다고 발표하였 다.52) 그러나 이것은 1956년의 시점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전체가 철수할 수 없다 는 계산 하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58년의 시점은 어떠한가. 1957년 후반기에도 미군이 남한에서 병력 을 철수한다거나 안정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따라서 1958년 당시 시점에서도 철수 는 무리한 것이었다. 북한과 중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미 북한이 경제회복에 성 공을 했고, 북한 정권이 안정기에 돌입했으며, 그와 더불어 한반도에 평화적인 화 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중국인민지원군이 철수한다고 밝혔다. 또한, 동시에 미군도 남한에서 철수하기를 요청했다.

1958년의 중국인민지원군 철수에 관해서는 1957년 말부터 논의가 시작되었다. 1957년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소련을 방문해 10월 혁명 40주년 기념식에 참가했 다. 모스크바 체류 기간 동안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철수시키는 문제를 논의했다.

[278] 2월 7일 중국정부는 성명을 통해서 북한정부의 이러한 제의를 지지한다고 발표 하였다. 그 후로, 저우언라이 총리를 선두로 한 중국 대표단이 1958년 2월 14일부 터 21일까지 북한을 방문했다.

2월 7일 중국정부는 성명을 통해서 북한정부의 이러한 제의를 지지한다고 발표 하였다. 그 후로, 저우언라이 총리를 선두로 한 중국 대표단이 1958년 2월 14일부 터 21일까지 북한을 방문했다

양측은 북한 정부의 1958년 2월 5일 성명 중 제출한 여러 가지 건의가 북한의 평화통일을 희망하는 민족 소망을 반영할 뿐 아니라, 현재의 국제정세하가 시기적으로 현실적이라는데 견해를 일치했다. 지금까지 중국 정부는 한반도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져 왔으며, 1958년 2월 7일자 중국성명은 북한정부의 여러 가지 건의를 지지하며, 이제 북한정부와 협상 후 중국인민지원군 이 자발적으로 철수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했다

[280] 조중 양국 정부는 1958년 2월 19일의 연합성명으로 위와 같은 결정을 선포했다. 현재, 우리는 미국과 유엔 군에 참가했던 다른 국가들이, 조선문제의 평화해결과 동아시아 긴장형세의 완화 를 위해서 자기의 군대를 남한으로부터 전부 철수하는 것을 미루지 않을 것을 요 구한다…만약 미제국주의와 그의 추종자가 조선정전협정의 존엄을 파괴하고 다시 한반도 침략전쟁을 일으킨다면, 북한인민과 북한정부의 요구에 의해서 중국인민은 우수한 자기의 아들딸을 조금도 망설임없이 파병할 것이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조선인민군과 함께 적의 침범을 분쇄하고 공동 투쟁할 것이다

이에 소련정부도 “소련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 인민공화국 양국 의 조치를 완전히 지지하며, 남한에 주둔한 미국과 기타 국가가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들의 군대를 남한으로부터 철수하 고, 동아시아의 정세를 건전하게 하며, 한반도지역에 평화의 공고화 및 한반도의 민족통일을 촉진하기를 희망한다”57)고 밝혔다.

[282] 북한측에서 대외문화 연락협회 위원장이던 허정숙이 이 협상의 책임을 맡아 조선인민 대표단 과 함께 중국 내무부를 방문하여 고아들의 귀국에 관한 초보적 계획을 토의했 다.67) 이들은 전쟁 고아들과 상봉했으며,68) 그들의 학원을 방문했다. 중국측은 이 들 전쟁 고아들을 위해 모든 비용을 지불했으며, 이후 북한은 고아들을 위한 귀국 준비를 추진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인 민군에게 넘겨준 각종 물자는 총가치가 인민폐로 1억 5,700만 위안에 달했다.71) 또한 철군과정중 각 부대는 모두 인수인계 규정에 따라 병영, 병영도구, 대량의 물 자와 병원설비를 북한에 무상으로 인계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을 환송하기 위해서 북한 내각은 김일성이 직접 철군하는 중국 인민지원군 부대를 전송했고, 조중우호기념뺏지를 제작하여 기념품으로 주었다. 그리고 각 방면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의 철군임무를 도와주었다. 북한의 기차운전사 는 대량의 열차로 부대를 운송해주고, 각지의 북한인들은 자발적으로 다리를 놓고 길을 포장하여 군사 차량의 통행을 도와주었다

[285]
중국에서는 항미원조 전쟁 승리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제적인 명망을 제고시켰으며 아시아와 국제 사회에서 신중국 의 중요한 지위를 굳건하게 했다. 둘째, 미국의 불패신화를 깨뜨렸다. 셋째, 중국 이 평화건설을 추진할 환경을 만들어 주었으며 동시에 중국 인민들의 생산의 적극 성을 극대화시켰다. 넷째, 중국인민지원군이 현대화 전쟁의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했다. 다섯째, 중국인민들은 이 전쟁을 통해 위대한 항미원조 정신을 창조했다. 항 미원조 정신은 아주 고귀한 민족정신이며 중화민족의 전통적인 미덕을 보여주었 고, 나중에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에 아주 커다란 역할을 했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칭송되고 있다

김용현은 중국인민지원군 철군의 실제 배경은 중국 내부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 했다.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건설은 실질적으로 한국전쟁 정전 직후부터 시작되었 고, 그 과정에서 중국은 40만 이상의 병력을 북한의 지원 없이 주둔시키면서 발생 하는 장기간의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86] 대약진으로 전국이 휩쓸려 들어가면서 상당 기간 지연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시점에서 양국간 완전철군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국은 자체적으로 철군을 희망했으며, 동시에 북한에서도 이것을 바라고 있었 다. 전후 재건사업을 마친 북한은 이제 중국과 소련 양국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 고, 독자적으로 그리고 다른 사회주의국가들과의 다변화된 협력체제를 희망했다.

1957년 9월 20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1차 회의에서 김일성은 “대외정책분야 에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쏘련, 중화인민공화국을 비롯한 사회주의진영 나 라들과의 국제주의적 친선과 단결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라고 했다.85) 그리하여 1950년대 중반이후의 북한은 소련이나 중국 어느 한쪽에 의지하지 않고 다른 사 회주의 나라들과의 국제주의적 친선과 단결을 더욱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남한과 미국 측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 했다. “첫째, 자유세계에게 잘못된 안정감을 주려는 것이며, 둘째, 유엔군이 남한 에서 철수하도록 압력을 가하려는 것이다. 셋째, 이렇게 하여 남한이 약화된 틈을 타서 공산 측에 승리를 가져올 조건에 입각하여 분단된 반도를 통일시키자는 것이 다. 특히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에서 철수하였다 하여도 그것은 북한과 만주사이에 있는 압록강하나 사이다. 그들은 순식간이면 되돌아 올 수 있지만, 유엔군이 철 수한다면 그것은 무려 수만리 밖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한반도에 사건이 생긴다면 미처 막으러 올 사이도 없는 위험성이 내포하고 있다 고 경계했다

[288] 또한 북한의 군사비를 북한 국내의 재 건사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중국 당국은 무상 원조와 중국의 기 술자들을 직접 북한으로 파견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재건사업을 도와주었다. 만 약 정전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협조와 중국의 경제 원조가 없었다면, 북한의 재 건사업은 그렇게 빠른 시간내에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북한과 중국 양국은 더 이상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에 주둔하기를 바라 지 않았고, 이러한 양국의 속셈이 표출되어 중국인민지원군의 철군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에 대해서 남한과 미국은 특별한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남한과 미국은 중국의 실질적인 군사력 철수보다는 그들이 전쟁이 개시 되었을 때 다시 참전할 가능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정전 이후 5년 동안이나 북한에 너 무 많은 인력과 경제적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국내에서도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시점에서 이제 중국은 더 이상 그들의 군사력을 북한에 잔류시킬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