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인

또 하나의 한민족

진인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고, 존재하였던 고구려 유민들을 일컽는 말이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적지 않은 수의 고구려 유민이 신라로 가거나, 당나라로 갔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의 우리 민족은 대조영의 인도 아래 고구려가 세워졌던 터전을 떠나, 숙신의 후예들이 살던 변방에서 대진국(大辰國)을 건국하였다.

진인이라 불리는 이유

옛 조선은 고조선과 진이라고 일컬었는데, 발해가 진왕을 칭하며, 이것이 북부에 사는 발해인들을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 되었다. 신라시대에는 이들을 일컬어, 발해말갈, 또는 그냥 말갈이라고 불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진나라 사람들이라 일컬었다. 그래서 그들을 진인이라고 부르며, 남방의 한인(韓人)들과는 구분하였다. 남방의 한인(韓人)이 스스로를 조선(朝鮮)이라고 부르며, 스스로의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하였던 것 같이, 북방의 진인들도 자신들의 지방 이름을 발해라고 불렀으며, 스스로 자신의 국호를 대진(大辰)으로 불렀다.

진인들의 언어

이들은 남방 계통인 한어(韓語)를 사용하지 않고, 북방 계통인 진어(辰語)를 사용한다. 현재 진어와 한어는 같은 조선어족(朝鮮語族)에 속한 언어들이다. 진어는 한자를 빌려쓰는 보하이문자를 사용하였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에 남아있는 진족은 로마자를 사용하며, 한국(대한제국)에 잔류하는 진족은 한글을 현재 표기문자로 삼고 있다. 진인과 한인은 발해와 신라로 대표되는 남북국 시대 상황에서 서로 경쟁하거나 협력하였으며 이 당시에는 진어와 한어가 서로 통할 정도로 양 국이 서로 가까웠기에, 양측간의 교류가 활발하였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고려 초에는 거란을 “친척의 나라를 멸망시킨 원수놈”이라고 말하였으며, 발해 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발해 멸망 이후의 역사

특히 거란의 침략 속에서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인은 적극적인 항쟁을 전개하였으며,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과 같이 “발해부흥항쟁"과 정도령의 반거란반여진 민족항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였다. 그러나 동단국을 이끌던 발해인과 부흥운동의 주도권을 가진 정씨 가문의 내흉이 있었으며, (정도령은 또한 신라와 중국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살던 고구려인이었다) 진족은 농경파인 남부 진족과 반농경인 북부 진족(말갈족 계통)으로 확실히 나누어지게 되었다.

북부 진족은 고려말과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여진 풍습에 감화하고 몽골에 무릎꿇던 민족이라 일컬으면서 “배신자”라고 낙인찍히는 계기가 된다. 오죽했으면 고려 조정이 요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고 쳐들어온 요나라와 협상할때 강감찬을 보내어 강동 6주를 달라고 할 정도로 고려는 진나라 유민들을 멸시하였으며(이는 민중의 눈에서는 남방 진인과 북방진인은 별로 다르지 않은 민족으로 보여진 것에서 나온 오해이기도 하다), 이러한 풍조는 고려말에 원나라 조정에게 세금을 내고 스스로 변발과 몽골의 풍습, 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심양왕과 여러 분봉왕을 임명받고 고려와는 다른 대우를 원하면서 더 심해진다.

남부 진족은 추후 정씨가문이 되어 쌍성총관부를 다스리게 되며 고려 영토에 정착한다. (추후 고려가 이자춘을 앞세워 쌍성총관부를 침략하였을 때, 정씨 가문은 고려에 적극 협력하였으며 조선의 개국공신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거란과 여진의 지배에 지친 몽골의 지배속에서 오히려 발해지방은 오래간 거란과 여진과의 전쟁에 지친 나머지 일찍 항복하여 몽골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몽골문자를 받아들였으며,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고 세금 감면과 수준 높은 자치권을 요구하였다.

몽골은 보하이 지방을 중심으로 심양왕직을 설치하여 고려왕을 견제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이와같은 진족의 행동은 한인으로 하여금 경멸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당시 문헌을 보면, 조선인들이 진인들을 얼마나 증오하였는지 알 수 있다. 오죽했으면 진인들의 땅을 밟기 싫어 가도를 통해서 명과 교류할 정도로 이들을 싫어하였다. (당연히 대몽항쟁 등으로 몽골제국에 강렬히 저항하던 한인들 입장에선 피꺼솟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당시 고려인들 역시도 몽골의 풍습이 퍼지는등의 몽골화가 진행되었으나, 언어와 민족성마저 바꿔놓을 정도로 막나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같은 뿌리임에도 진인과 한인은 반목과 반목을 거듭하였으며, 청나라때 이후에서는 조선이 유교를 중심으로 받아들인 반면에, 대륙에 존재하던 진족들은 추후 기독교(정교회)를 받아들여 제국 정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태조 정광현은 조선에서 대대로 살았으나, 정씨라는 확실한 남방계 계통의 성씨와, 진인이라는 양 측의 정체성을 모두 갗춘 자였으며, 이러한 정통성을 바탕으로 건국신화를 만들어내어 조선을 안정시키고 천대받던 진족지방인 서북지방의 주권을 회복하였으며, 대청항쟁을 주도하면서 하나의 “조선민족”이라는 개념을 탄생시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