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총독부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쿠바의 독립 투쟁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19세기 초 아메리카대륙에서 일어난 미국독립혁명의 영향을 받아, 1820년대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 제국의 다른 지역들이 봉기하여 독립 국가를 형성했을 때, 쿠바에도 파급되어 쿠바에도 1812년에는 아폰테의 지도 아래 대규모 흑인반란이 일어나는 등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쿠바는 스페인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였고, 이로 인해 스페인 황실은 쿠바에게 "La Siempre Fidelisima Isla"(항상 가장 충성스러운 섬)이라는 모토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충성심은 쿠바가 스페인과 무역 의존도가 높았고, 스페인이 해적·노예의 봉기로부터의 쿠바를 보호하고 있었던 데에서도 기인하고 쿠바가 스페인의 지배를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미국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 때문이기도 하다. 1810년에서 1825년까지 시몬 볼리바르가 남미에서 펼친 혁명 활동 이후에 서반구에서 스페인 식민지로 남게 된 나라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뿐이었다. 스페인 충성파는 예전 식민지를 떠나 쿠바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쿠바와 미국간의 긴밀성은 쿠바의 역사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스페인이 내부적인 자치권을 얻으려는 크리올 사회를 달래는 동안 미국은 이 식민지를 병합하려고 준비중이었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미국 남부 출신의 정치인들은 미국 내 흑인 노예제도 옹호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쿠바를 합병할 음모를 세웠고, 그러는 동안 일단의 쿠바 반란군이 미국으로 망명해 스페인 식민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시작했다. 1848년 친(親)합병 폭동이 진압되었고, 플로리다로부터 쿠바를 침입하여 합병하려는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다. 또한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구입하려고 하는 제안도 있었다. 그 후 노예제도 폐지, 농민혹사 금지와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이 점차 확대되었다. 1868년 10월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가 이끈 반란은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독립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리엔테 지방의 부유한 변호사이자 크리올 농장주였으며, 그의 노예들을 해방해 주었다. 그는 전쟁을 선포하고 "무장 쿠바 공화국"의 수장이 되었다. 이것은 독립을 위한 세력과 지방의 지지를 받는 스페인군 간의 십년전쟁(1868∼1878년)이라 불리는 긴 투쟁을 낳았다. 이 독립전쟁 기간 중 공화제 헌법이 공포되고 세스페데스의 공화정권이 수립되었고, 10년 동안 200,000명이 죽었지만 결국은 반란군은 모든 힘을 다 써버렸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면을 보장하는 조약인 1878년의 산혼 조약(Paz de Zanjón)은 이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스페인이 쿠바에 좀 더 많은 자치권을 인정하고 정치·경제의 개혁과 노예해방을 약속한 것이었다.

이 투쟁 이후 독립 운동은 잠시 숨죽였다. 1879년부터 1880년까지, 쿠바의 애국자 칼릭스토 가르시아(Calixto García)는 또 다른 전쟁(La Guerra Chiquita)을 시도하였으나,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산혼조약에서 스페인이 한 경제 재건 약속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는데, 다만 미국의 압력도 일부분 영향을 미쳐, 노예제도는 1886년에 폐지되었다. 1893년에는 형식적으로 시민의 평등권이 보장되었으나, 아프리카 출신의 후손인 소수인종은 사회적·경제적으로 억압이 지속되었다. 1868년의 스페인 혁명으로 스페인 농촌이 곤궁해지자, 그 여파로 더 많은 스페인사람들이 쿠바로 이주해 왔다. 1890년대에는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이것은 스페인이 쿠바에 대한 무역제한 조치에 대한 분노, 스페인의 쿠바에 대한 갈수록 심해지는 압박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쿠바 정부의 무능함으로 촉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