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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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བོད
티베트
티베트 국기.png 티베트 국장.png
국기 국장
국가 승리의 노래
수도 라싸
최대도시 라싸
정치
공용어 티베트어
지역어 이어, 몽골어, 기타
정부 형태 대통령중심제
대통령 따시 니마
부통령
역사
독립  
 • 중국에서 독립 1947년
지리
면적 2,237,698㎢ (12위)
시간대 (UTC+6)
인구
2016년 조사 24,668,274명
경제
GDP(PPP) 2017년 어림값
 • 전체 2조 381억
 • 일인당 7만 3,281
명목 1조 6,537억
통화 스랑(srang) (TBS) (화폐 단위:Ȑ}
기타
도메인 .tb, .བོད
국제 전화 +908

티베트(티베트어: བོད 뵈, 영어: Tibet 티베트(티벳))은 남부아시아에 있는 티베트 고원의 지역으로, 토착 티베트인들의 고향이다. 평균 고도는 약 4,900m이며, 지구상의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티베트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 산이다.

개요

러시아는 동쪽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서쪽은 인도와, 남쪽은 인도, 네팔, 부탄과, 북쪽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접해 있다. 민족은 대다수가 티베트계 민족이고 공용어는 티베트어이며 수도는 라싸다.티베트의 종교는 불교가 거의 국교시화 되나 현재 다른 종교들도 많이 유입되었고, 독립 후 티베트의 현재 면적은 2,237,698㎢이다.

국가 상징

국호

티베트라는 국호는 서양에서 부르는 이름이며 아랍어의 투베트/투바트에서 유래했다. 토욕혼 사람들이 튀르크(투르크) - 몽골어 사투리로 ‘토판’/‘토푸트’라 부르던 것이 교역을 통해 아랍으로 전해진 것이다. 중국인들은 고대 티베트 제국을 토번 혹은 투보라고 했다. 티베트어로 티베트는 '뵈'라고 한다.

국기

설산기

설산기는 티베트의 국기이다.

기의 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높이 쌓인 눈에 덮인 산은 티베트의 위대한 나라를 뜻하며 넓게는 티베트를 둘러싸고 있는 눈에 덮인 산을 뜻한다.

어두운 파란 하늘에 펼쳐진 여섯 개의 빨간색 줄무늬는 티베트인의 최초의 조상인 세, 무, 동, 통, 드루, 라 여섯 개의 부족과 열두 명의 자손을 뜻하며 여섯 개의 빨간색 줄무늬와 파란색 줄무늬의 결합은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티베트에 이어져 온 검정색과 빨간색의 수호신의 정신적인 가르침과 세속적인 삶을 보호하는 순결한 업적에 관한 법규을 뜻한다.

눈에 덮인 산 꼭대기에 떠오르는 태양은 모든 티베트인의 나라에 존재하는 자유와 물질적, 정신적인 행복의 존재를 뜻한다.

위아래로 있는 노란색 테는 티베트의 번영을 뜻한다.

국가

승리의 노래

국장

티베트 국장.

설산사자기를 바탕으로 한 문장으로, 히말라야 산맥 위에는 태양과 달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티베트인의 나라 (티베트를 둘러싸고 있는 눈 덮인 산)을 뜻한다.
경사진 산 위에 서 있는 두 마리의 사자는 여덟 개의 살을 가진 법륜을 들고 있는데, 이는 팔정도를 뜻한다.
팔정도 안쪽에는 소용돌이치는 형상을 한 세 가지 색을 가진 보석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열 개의 높은 덕과 열여섯 개의 자비로운 행실을 뜻한다.
문장 아래쪽에 그려져 있는 리본에는 "티베트 정부, 가덴의 궁전, 여러 방향의 목표 달성" ("bod gzhung dga' ldan pho brang phyogs les rnam rgyal") 이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

국화

티베트 국화.

연꽃은 티베트의 국화이다. 인도에서 들어왔으며, 불교의 상징이다.

역사

티베트 신화

먼 옛날 이 설역 고원은 바다였으며, 바람이 일고 파도가 치니 거품이 일어나고 이 거품들이 쌓이고 쌓여 육지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 후 보타낙가산 관음보살이 변종으로 나타난 원숭이를 대륙으로 보내어 살게 했는데, 이들 원숭이는 불도를 지키며 얄룽 계곡의 한 동굴에 살게 되었다. 수컷은 '투' 였고, 암컷은 '초' 였다. 그 후 나찰녀와 원숭이 사이에서 서로 다른 변종의 여섯 자식이 태어났는데, 그들의 후손은 점차 털이 줄고 꼬리가 짧아지면서 결국 사람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2소방

과거 티베트인들은 ‘티베트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7세기 초반에서 9세기 중엽까지 중국 한족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다투었던 티베트 지역의 토번(吐蕃)제국에서 연유한다.

태초에 12소방(十二小邦)이라는 작은 국가들의 연맹체가 있었다. 돈황막고굴에서 출토된 [돈황 고장문 문헌(敦煌古藏文文獻)] 등의 여러 티벳관련 문서와 [현자희연(賢者喜宴)]에 따르면 침율(琛域), 장중(象雄), 냥로죵카, 눕율링구, 냥로샴포, 치리존온, 감솟차나, 올푸방카, 싯율기랄꽁, 공율제나, 냥율남쑴, 닷율주지 라고 부른다. 이들 12소방은 상호간의 치열한 전쟁을 거치면서 오히려 40여개의 소방으로 분열되었다.

통일 토번왕국

토번왕조 전에도 중국과 티베트는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국가간 접촉은 7세기초 토번 왕조의 쏭쳰감포(569∼650)가 티베트 고원을 통일했을 때부터 시작됐다.

전쟁과 화친을 반복한 토번과 당(唐)나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외교 현안은 영토 분쟁이었다. 634년 시작된 토번과 당의 외교관계는 846년 토번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됐다. 토번왕조 때 티베트는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이런 경험은 티베트인들이 중국과 티베트를 대등한 위치에 놓게 한 역사적 배경이 됐다.

토번제국의 붕괴 후 티베트는 400여 년간 분열되었다. 그러는 동안 티베트에는 불교가 가장 중요한 사회구성원리로 자리잡았다. 송(宋)대에 이르러 티베트의 일부 세력은 송조와 책봉조공 관계를 맺었다. 불교와 중국 왕조에의 책봉조공 관계는 이후 티베트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티베트시대

원(元)대에 중국과 티베트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티베트에는 몽골 세력의 지원을 받아 티베트 불교의 유력한 종파인 싸카파 종파에 의한 정교합일 정권이 형성됐고 몽골족은 중원을 통일해 원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원나라와 티베트 사이에 기존의 책봉조공 관계 외에 ‘최왼’ 관계가 나타난다. 티베트 고승과 원나라 황제 사이에 정신적·종교적 지지와 세속적·군사적 원조를 교환하는 ‘최왼(법주-시주, 즉 종교적 지도자-세속적 군주)’ 관계가 맺어진 것. 최왼 관계는 당시 싸카파 종파의 고위 승려인 싸카파디따(薩迦班智達)와 칭기즈 칸의 손자인 고댄 사이에 처음 맺어졌다.

최왼 관계를 통해 몽골은 전쟁 없이 티베트를 몽골 제국에 편입시키고 싸카파 종파는 티베트에서 정교합일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 관계는 싸꺄빤디따를 이어 싸카파 종파를 관장하던 팍빠(八思巴)와 몽골의 쿠빌라이 칸 사이에도 맺어졌다.

이러한 최왼 관계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매우 이례적이고 독특한 것이었다. 티베트 싸카파 종파의 고승들은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유목민족들이 원나라에 순순히 귀순하도록 종교적 영향력을 발휘했고, 원나라는 티베트 싸카파 종파의 정교합일정권을 현실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티베트는 당시 원나라 경영의 한 축을 담당했다. 즉 단순히 원나라의 통치 대상은 아니었던 것. 하지만 원나라는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무너졌다. 원나라 붕괴 후 명(明)나라가 들어섰지만, 티베트에 대한 영향력은 원나라에 비해 훨씬 못미쳤다.

달라이 라마 탄생

명 초기인 1409년 티베트 내부에서 총카파(1357∼1419)가 창립한 겔룩파 종파(黃敎)가 교단의 정화와 계율을 강조하면서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됐다. 겔룩파 종파는 총카파가 사망한 후 활불전세(活佛轉世)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고승이 사망하면 교단에서 어린 전생자(前生者)를 찾아 계보를 잇는 독특한 승직 계승 방식이다. 이는 후에 달라이 라마 제도로 이어진다.
본격적인 달라이 라마 제도는 3대 달라이 라마 쐬남갸초(1543∼88)에서 시작됐다. 정교일치 사회에서 달라이 라마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달라이 라마의 정치적 통치력은 중부 티베트에만 미쳤을 뿐 티베트 전역을 포괄하진 못했다. 하지만 종교적 권위는 티베트를 넘어 몽골과 만주 일원에까지 미쳤다.

겔룩파 종파는 만주에서 청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을 때도 몽골 세력과 최왼 관계를 맺으면서 몽골 부족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교합일정권을 지켜왔다. 명대에 이르러 몽골은 동몽골과 서몽골 연맹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1510년 이후 동몽골 부족들이 부족간 갈등을 겪으면서 칭하이(靑海) 쪽으로 이동해왔다.

몽골인과 티베트인의 접촉 과정은 몽골군의 일방적인 티베트 점령이 아니라 원대 이래의 최왼 관계를 회복하는 형식을 취했다. 동몽골의 지도자 알탄 칸(1543∼82)은 1578년 3대 달라이 라마를 만나 최왼 관계를 맺었다. 이 만남은 몽골인들 사이에 티베트 불교 신앙을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1637년 서몽골 준가르 부족의 일원인 구시칸(?~1656)은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에 들어와 5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6년 후 구시칸은 티베트의 내분을 틈타 티베트 전역을 통일하고 티베트 통치권을 5대 달라이 라마에게 보시했다. 이렇게 하여 티베트인들이 ‘위대한 5대’라고 부르는 5대 달라이 라마 시대가 열렸다.

1653년 5대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을 방문해 청나라 황제를 만났다. 이 만남은 티베트에게는 최왼 관계의 수립을 의미했으나 청조의 입장은 몽골인에 대한 통제에 도움을 받고자 하는 측면이 강했다.

청조는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유목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전략적 고려에 따라 티베트 불교의 최고위 승려인 달라이 라마를 우대했다. 하지만 점차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청조의 티베트 지배의 전제조건은 티베트에서 몽골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나라는 1720년 티베트에서 몽골 세력을 몰아내고 티베트 전역을 장악했다.

청조의 티베트 통제는 이전의 왕조들보다 훨씬 강화된 양상을 보였다. 실제로 1720년 이후 티베트는 청조에 대해 피정복자의 불평등한 위치에 있었다. 티베트 내 청나라 병력 주둔과 1727년 주장대신(駐藏大臣)의 설치, 1792년 달라이 라마에 대한 금병추첨제도(주장대신이 금병 속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전생자로 추정되는 아이의 이름과 생년이 쓰여진 상아편을 뽑아 후대 달라이 라마를 결정하는 의식) 도입 등은 티베트의 종속적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청조는 18세기 후반 티베트 지역을 포함하는 제국 체제를 완성했다. 18세기 청조의 판도는 현대 중국인의 영토 인식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청조는 본부(本部) 18성과 번부(藩部)의 이원 구조로 이뤄져 있었다. 이런 체제 속에서 청조의 변방 민족에 대한 지배는 전례 없이 강한 것이었다. 몽골은 청조의 철저한 ‘분할지배 정책’으로 인해 예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서역도 ‘신장(新疆)’이란 이름으로 청나라에 통합됐다. 또 청조는 동부 티베트인 캄을 쓰촨성 관할 하에 두었고 창두(昌都) 서쪽 땅만 달라이 라마의 관할로 인정했다.

청조는 ‘은위겸용(恩威兼用)’, 즉 은혜와 위력의 탄력적 활용이라는 일종의 상벌 원리로 제국을 운영했다. 티베트에서도 이러한 논리에 입각한 통제가 이뤄졌다. 그런데 은혜의 개념은 매우 광범위해 주장대신을 파견한 것도 황제의 은혜였고, 책봉행사·조공무역과 같은 불평등한 예속관계도 은혜라고 표현했다. 물론 청조의 병력 배치도 은혜였다. 하지만 청 황제와 달라이 라마가 최왼 관계를 형성했다는 티베트인들의 의식은 변하지 않았다. 이는 티베트인들이 단순히 자신을 청조의 피정복민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티베트인들은 청제국 체제에서도 정신적으로는 자신들을 경영진의 일원으로 인식했다. 청조의 공문서는 황제를 ‘천명 황제’라고 표현했으나, 티베트 공문서는 청조 황제를 ‘문수보살 대황제’라고 인식했다. 즉 청조는 황제가 천명을 받은 최고지도자라고 규정했지만, 티베트인들은 황제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불교적 개념인 ‘문수보살’로 인식했다.

티베트인의 자부심이 어떻든 18세기 티베트는 자립성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청조 군대가 티베트에 출병하면서 1751년 맺어진 ‘서장선후장정(西藏善後章程) 13조’와 1793년 ‘흠정장내선후 장정(欽定藏內善後章程) 29조’는 티베트에 청조의 권위를 확실하게 심어놓으려는 조치였다. 또 이는 달라이 라마의 권위를 종교적인 것에만 한정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관음보살의 화신인 달라이 라마와 청나라 왕인 문수보살 대황제는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즉 1720년부터 1840년대 중반까지 티베트는 공식 문서에 달라이 라마를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내세우지 못했다. 하지만 종교적 자율성은 그다지 훼손되지 않았다. 이는 추후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됐다. 청조에 복속된 다른 지역과는 달리 티베트에는 중앙정부에 해당하는 달라이 라마의 정교일치 권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말부터 청조는 지속적인 이완과 해체의 과정을 겪었다. 특히 1840년 아편전쟁 이후 변방 민족들의 자립 경향이 거세졌고 이는 제국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청조는 서구 나라들과는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지만 자신의 영향권에 있는 변방 민족과는 가능한 한 전통적인 책봉 조공 관계와 지배 종속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1880년 이후 청조는 이전의 본부와 번부라는 ‘이원적 행정체계’를 폐기하고 번부에 본부와 동일한 행성을 설치했다. 청말기에 행성이 설치된 지역은 신장, 대만, 그리고 동삼성(東三省)이다.

본부와 번부의 일원화 정책은 신장에서 먼저 시도됐다. 1864년 회교도 민중의 반란으로 신장 통치가 위협받자, 청조는 양무(洋務) 관료 쭤쫑탕(左宗棠)을 파견해 진압했다. 쭤쫑탕은 청조에 신장에 행성을 설치하자고 건의한다. 이 건의는 1884년 11월17일에 비준을 받는다. 이로써 청조는 행성 설치를 통하여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고 이완된 제국 체제를 재정비하려고 했다. 청말의 행성 설치는 영국, 러시아 등 유럽 열강과 신흥 열강 일본의 중국 침략이라는 국제적 배경과 변방 민족들의 독립 움직임이라는 내부적 배경이 함께 작용한 것이다.

유럽 열강 중에서도 티베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나라는 영국이었다. 티베트가 영국의 ‘소중한’ 식민지였던 인도와 접해있었기 때문이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영국은 두 세기 동안 인도를 통치했다. 영국은 1600년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경제적 이익을 얻다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벵골을 격파한 뒤 1849년에 이르러 인도 전역을 장악했다. 1830년 이후 영국과 러시아는 자국의 세력권을 확대하기 위해 터키,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청의 신장에서 부딪혔고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는 티베트에서 부딪혔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초까지 인도 식민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3개의 완충지대(티베트, 인도양, 아프가니스탄), 2개의 동심원, 1개의 내륙호수(인도양)’라는 전략을 구상했다. 영국인들은 인도양을 ‘브리튼의 호수’로 삼고 아프가니스탄을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주는 완충지대, 티베트를 중국의 위협을 흡수하는 완충지대로 설정했다. 또 두 개의 동심원 중에서 안쪽 동심원은 인도 북부 변경의 네팔, 시킴, 부탄과 아삼이었고 바깥쪽 동심원은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타이, 티베트였다.

문호 개방

제국주의의 폭풍이 몰려오던 19세기말은 티베트에서도 급변의 시기였다. 인도와 네팔 쪽의 국경지대에서는 인도에 대한 직접 통치에 나선 영국이 티베트에 개방과 통상을 요구했다. 티베트가 자신의 세력범위로 생각하고 있던 재중(시킴)과 부탄은 1861년과 1865년에 영국의 세력범위로 편입됐다. 티베트는 영국-티베트 조약을 맺어 달라이 라마는 친영정책을 추진해나갔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여러 곳을 방문하였다. 한편 라싸조약과 영국의 티베트 독립 시도는 청조에 큰 충격을 줬다. 영국은 청조가 라싸조약을 승인하지 않자, 청조와 협상을 벌여 1906년 4월 ‘중영속정장인조약(中英續訂藏印條約)’ 6조를 체결하며 ‘영국과 중국은 티베트의 정치를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했다. 또 영국은 1907년 8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영러 협정’을 체결해 티베트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을 막았다. 영국과 러시아는 티베트에서의 청조의 명목적인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내정에 대한 간섭은 금지한다고 합의했다.

청조는 장인탕(張蔭棠)을 파견하여 주장대신 롄위(聯預)와 함께 티베트에 정치개혁을 진행하도록 했다. 청조는 티베트인과 영국의 반대로 티베트에 행성을 설치할 수 없었지만 ‘행성의 도’로 재정비해 군사, 교육 등 광범위한 개혁에 나섰다. 이 개혁의 초점은 달라이 라마를 종교 지도자로만 한정하려는 데 있었다. 이렇게 티베트 중심부에서 개혁이 진행될 때, 동부 티베트에서는 변무대신(川?邊務大臣) 자오얼펑(趙爾豊)의 주도로 ‘개토귀류’ 조치, 즉 토사들이 지배하는 지역에 현(縣)을 설치하는 작업이 강력하게 추진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13대 달라이 라마는 광서제와 서태후의 초대를 받아 1908년 8월3일 베이징을 방문했다. 8월20일 황제와 태후를 만난 자리에서 13대 달라이 라마는 5대 달라이 라마의 전례에 따라 주장대신을 거치지 않고 직접 황제에게 상주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또 그는 동부 티베트에서 변무대신 자오얼펑이 추진하고 있는 개토귀류 조치와 중부 티베트에서 장인탕이 추진하는 정치개혁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귀국했다.

1909년 겨울 청조는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완전한 ‘영토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쓰촨의 육군 병력을 라싸로 파병했다. 1910년 2월12일 청군은 라싸에 진주했고 그 날 달라이 라마 일행은 라싸를 떠나 10일 후 국경을 넘어 인도로 갔다. 롄위는 청정부에 주청하여 13대 달라이 라마의 명호를 박탈했다. 겔룩빠 종파에서 달라이 라마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짱 지역을 관할하던 9세 판첸 라마를 라싸로 와 머물도록 했다. 판첸은 이에 응하지 않았으나 이 같은 조치는 달라이 라마의 판첸에 대한 원한과 청조에 대한 이심(離心) 정도를 심하게 했다.

쓰촨군의 티베트 장악은 티베트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궁극적으로 티베트 내 친영파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이런 상황에서 1911년 10월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쓰촨 군 내부에 보급품이 원활하게 지급되지 않았고 라싸의 쌀값이 두 배로 뛰자 봉기가 일어났다. 이러한 내부 봉기와 티베트군의 반격으로 쓰촨군은 티베트에서 축출됐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에 돌아와 한인(漢人)을 모두 축출하고 주장대신도 추방했다.

1912년 2월15일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중화민국 임시약법’을 선포했다. 그중 3조는 “중화민국 영토는 22행성, 내외몽골, 티베트, 칭하이로 한다”고 규정했다. 4월22일에 위안스카이는 “현재의 오족공화(五族共和)는 몽골, 티베트, 회강 각 지방이 함께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라는 명령을 반포하였다. 1912년 6월22일 중국 국무원 회의에서 티베트에 행성을 설치하는 문제가 다시 제기됐다.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 조던은 위안스카이에게 “영국의 입장은 중국정부가 티베트에 대해 종주권이 있을 뿐 주권은 없다는 것이다”라고 전했다. 중국정부가 이에 반발하자 영국은 즉각 티베트 당국이 티베트 독립을 선언하도록 했고 이를 영국이 첫 번째로 승인할 것이라고 표명했다. 티베트 지역에 행성을 설치하려는 계획이 영국과 티베트의 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위안스카이 정부는 1912년 7월 몽장사무국(蒙藏事務局)을 설치해 티베트와 몽골 관련 사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 군대의 내분을 이용해 중부 티베트뿐 아니라 캄(동부 티베트)과 암도(동북부 티베트)에서도 한인(漢人)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다. 이런 목적 아래 1912년 5∼6월 캄으로 진격한 티베트군은 캄의 중심지인 리탕을 함락했다. 이후 티베트 각지에서는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위안스카이 정부가 쓰촨독군 인창헝(尹昌衡)에게 군사를 충원하여 티베트에 들어가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자, 9월에 영국공사 조던은 당시 외교총장 옌후이칭(顔惠慶)을 만나 중국정부가 티베트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에 대해 항의했다. 그는 티베트에서 군사를 철수하지 않으면 중화민국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무력으로 티베트의 독립을 돕겠다고 했다. 이에 중국군은 캄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티베트 정부는 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을 얻음으로서 예상보다는 큰 성과를 얻었다.

1912년 7월 13대 달라이 라마는 다시 티베트에 들어왔고 다음해 1월 라싸로 돌아왔다. 중국정부는 티베트가 중국의 구성부분임을 강조하면서 티베트의 이탈을 방지하려고 노력했다. 티베트는 티베트군을 더욱 많이 양성하고, 영국의 원조를 받아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한 입헌군주제 정부가 결성되었다.

티베트 정부는 영국의 원조로 무기를 구입하고 신군과 총사령부를 설립했다. 영국은 걍쩨에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티베트군 장교를 훈련시켰다.

이렇게 군비가 갖춰진 1917년 가을 리워체 강에 주둔하는 티베트 병사가 풀을 베러 중국과의 경계선을 넘어가자 중국 변방군이 그를 참수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티베트군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진사강(金沙江) 주변 지역과 창두를 점령했다. 이것이 1917∼18년에 벌어진 제2차 캄전쟁이다. 그 후 영국의 조정으로 티베트와 중국은 1918년 8월 창두에서 1년 기한의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티베트와 중국의 국경 분쟁은 1930년에서 1932년 사이에 다시 한번 벌어졌다. 이 분규의 실질적인 내용은 칭하이와 시캉의 군벌세력과 티베트군이 부딪친 것으로, 베리 토사와 다걔 사원의 재산 분쟁에 중국군과 티베트군이 개입하여 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1930년 3명의 티베트군 고위장교와 4000명의 기병이 캄을 점령하고 칭하이까지 전선을 확대했다. 티베트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나갔지만, 중국 변방군에게 걸려 좀 후퇴를 했다.

1933년 영국에게 원조를 얻으면서 대통령제로서의 기반을 굳혀갔다. 티베트 내각은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국을 선포했다. 물론 중국은 인정하지 않았다.

1943년 여름에는 까샤에 외교국을 설립했고 1947년에는 티베트 대표단이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범아시아 회의’에 참석했다.

독립

1946년 1월 국민투표 결과 티베트국민의 독립의지가 확인됨에 따라 중국(국민당정부)으로부터 정식으로 분리·독립을 인정받아 국제적 지위가 확립되었다.

1953년 티베트에서는 본격적인 국가의 틀을 만드는데 집중되었고, 달라이 라마는 모든 권력을 스스로 포기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티베트와 중국의 관계도 더욱 나빠졌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완화돼, 1986년에는 티베트와 중국 사이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언어와 문자

티베트에서는 표준 티베트어인 중부티베트어가 사용되나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다른 언어도 있다. 티베트어의 경우 암도 방언캄 방언이 있다. 소수민족의 언어로는 이어, 몽골어, 위구르어 등이 있다.

지리

티베트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


티베트는 지구상 최대.최고의 고원인 티베트고원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고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 4천m가 넘어 파미르 고원과 함께 `세계의 지붕‘이라 불린다. 고원의 주위에는 높은 습곡산맥이 뻗어있고 빙하가 발달하여 다른 지역과의 경계를 이룬다.

고원의 남쪽 가장자리를 달리고 있는 히말라야 산맥은 전장 2400Km, 평균 고도6000m가 넘고 에베레스트 봉을 비롯한 7000m가 넘는 봉우리도 40개를 헤아릴 수 있다.
북쪽 가장자리는 쿤룬산맥, 약간 남쪽에는 쿤룬의 지맥인 탕그라산맥, 탕그라산맥의 동반부는 청해성과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티벳의 중부에는 카일라스산맥이 동서 방향으로 뻗어 창뻬이고원과 창난곡지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쿤륜산맥 이외의 습곡산맥은 티베트 동부 지역으로 몰렸다가 갑자기 방향을 남북으로 바꾸고 거기에서 여러 개의 높은 산맥과 깊은 협곡으로 엇갈리면서 고산협곡지역로를 형성하는데 이것을 횡단 산맥이라고 부른다. 티베트의 내부도 복잡한 지형을 나타내며 카일라스 산맥의 북쪽과 쿤륜산맥과 남쪽은 창뻬이고원이라고 불리는 5000m급 전후의 광할한 고원을 이룬다.

이 고원은 비교적 완만한 산지와 분지로 구성되며 분지 안에는 많은 함수호가 형성되어 있다.
카일라스산맥과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는 길고 큰 종곡이 동서방향으로 뻗어 있고 인더스강 상류와 얄루창포강(브라마푸트라강)이 이곳에서 발원한다. 대부분의 지역이 표고4000m전후인데 얄루창포강이 남쪽으로 유로를 바꾸는 동쪽끝 지역에서는 표고 3000m로 낮아진다.

자치구 내의 주요 하천은 얄루창포강이나 동쪽 끝에는 진사강을 비롯하여 샐원강과 메콩강의 상류가 깊은 협곡을 이루면서 흐르고 있다. 호수는 모두 빙하의 침식과 퇴적으로 형성된 것인데 대부분이 함수호이고 그 중 나무호가 가장 크다.
티벳은 북위 27도-37도 사이에 위치하여 위도 상으로는 별로 높지 않지만 지형이 높고 험준한데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한랭 건조한 기후를 나타낸다.

1월 평균기온은 0℃ 이하이며 7월에도 대부분의 지역이 20℃를 넘지 않는다.또한 일교차도 크고 세찬 바람이 부는 날이 많다. 특히 창뻬이고원은 연평균 기온이 -5℃안팎이고 연평균 강수량도 200mm가 안된다.
창난곡지는 동부의 얄루창포강 골짜기 어귀로부터 계절풍이 불어오기 때문에 연평균 기온 10℃안팎을 나타내고 연평균 수량도 1000mm가 넘는 지역이 많다.

지하 자원

티베트는 세계에서 광물자원이 풍부한 국가 중 하나이며 철, 구리, 납, 아연, 금, 은, 석탄, 흑연, 붕사(硼砂)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며, 역대급의 우라늄 광맥도 존재한다.

정치

티베트의 정치는 민주 공화정을 바탕으로 하며, 국가원수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다. 또한 입법부와 사법부의 독립이 명시되어 있으며, 권력분립의 원칙이 헌법으로 보장된다. 이러한 기본 원칙은 대체적으로 다른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티베트 현대사의 특수한 전개 과정 속에서 형성된 정치 구조에서 티베트만의 특징을 가지게 되기도 하였다. 대통령제의 기본 요소에 의원 내각제의 요소를 가미한 것 등이 그것이다.

입법

티베트에서 입법부 역할을 하는 국회는 국민이 선출하는 의원들로 구성된 회의제 기관으로, 티베트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이다. 또한 국민 주권의 원리에 따라 국회의원들이 국정의 근간이 되는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 기관이다. 국민을 대표하여 국정 운영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국정 통제 기관 역할도 수행한다.

행정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여, 부통령은 대통령을 보좌하여 행정각부를 통할하고, 장관은 해당 부처를 지휘·감독하여 입법부에서 법률로 정한 사안들을 집행한다.

티베트의 행정체계는 다음과 같은 부서를 가지고 있다.
 

행정 구역

티베트의 행정 구역은 13개의 시(市)[3], 3개의 자치주(自治州)로 구성된다.

시(市)
  • 아리시(མངའ་རིས་གྲོང་ཁྱེར།)
  • 나그추시(ནག་ཆུ་གྲོང་ཁྱེར།)
  • 시가체시(གཞིས་ཀ་རྩེ་གྲོང་ཁྱེར།)
  • 라싸시(ལྷ་ས་གྲོང་ཁྱེར།)
  • 로카시(ལྷོ་ཁ་གྲོང་ཁྱེར།)
  • 린즈시(ཉིང་ཁྲི་གྲོང་ཁྱེར།)
  • 창도시(ཆབ་མདོ་གྲོང་ཁྱེར།)
  • 초눕로시(མཚོ་ནུབ་ལྷོ་གྲོང་ཁྱེར།)
  • 위수시(ཡུས་ཧྲུའུ་གྲོང་ཁྱེར།)
  • 고로그시(མགོ་ལོག་གྲོང་ཁྱེར།)
  • 초로시(མཚོ་ལྷོ་གྲོང་ཁྱེར།)
  • 마로시(རྨ་ལྷོ་གྲོང་ཁྱེར།)
  • 초장시(མཚོ་བཡྣང་གྲོང་ཁྱེར།)
자치주(自治州)

사법

대법원장을 포함하여 14인의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의 심판권은 대법관 전원의 3분의 2 이상으로 구성되고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되는 전원합의체에서 이를 행사하나, 일정한 경우에는 대법관 3인 이상으로 구성되는 부에서도 재판할 수 있다. 다만 대법관 중 법원행정처장으로 임명된 1인은 재판에 관여하지 아니한다. 사법행정상의 최고의결기관으로 대법관회의가 있다.

경제

티베트는 수많은 지하자원으로 수익을 올려 2006년부터 해서 2011년까지 평균 6.1%의 경제성장률을 보여주었다.

산업

1950년대엔 농업이 주 산업이였고, 국민들의 대부분이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1960~70년대부터 경공업에 대한 발전이 이루어졌고 80년대에는 중공업도 조금씩 성장해왔다. 티베트 설역 아래 수많은 지하자원들이 매장되어있다는 보고가 이루어진지 오래, 지하자원들을 채굴해서 큰 수익을 올리고 현재도 지하자원이 티베트 경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농업·목축업

정착생활과 함께 반농반목(半農半牧)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경작지역은 주로 라싸·르카쩌·장쯔 부근 등 브라마푸트라강 상류와 중류의 곡저평야에 집중되어 있고 창두[昌都] 부근 헝돤산맥의 하곡에서도 좁은 평지를 중심으로 농사를 짓는다. 짱베이 고원은 목축지대이고 짱난 곡지와 동부지역에서는 농업 외에 반농반목 지대도 볼 수 있다.

기후가 한랭건조하기 때문에 내한(耐寒)·조생종(早生種) 라이보리가 주요 곡물이고 봄밀·완두콩 등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 채소로는 원근(圓根)이라고 불리는 둥근 무가 많다. 또 유채·누에콩·메밀 등이 재배되고 복숭아·배·사과 등 과일이 산출된다. 브라마푸트라강 하곡의 남동부는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고온다습하기 때문에 쌀·바나나·차가 산출되고 약간의 겨울 작물도 재배된다. 목축의 중심지는 짱베이 고원이다. 기후가 한랭하나 단초초원(短草草原)이 전개되어 양과 야크 사육이 성행한다. 야크는 운반용으로 이용될 뿐만 아니라 가죽·털·내장·젖 등이 모두 이용되며 분뇨는 연료로 쓰이는 유용한 동물이다. 농경지대에서는 황소나 당나귀가 사육되고 있다.

옛날에는 농업이나 목축이 모두 조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라이보리나 원근 외에 다른 작물은 거의 없었으나 농업기술의 개선과 함께 새로운 작물이 도입되어 4,000m가 넘는 높은 지대에서도 라이보리 재배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가축의 위생에도 힘을 기울여 전염병 발생률이 매우 낮아졌다. 한편 서(西)히말라야와 동부지역에는 삼나무·낙엽송 산림이 있고 모피수(毛皮獸)나 약초 생산량도 많다.

자원

  • 금·은 - 티베트가 위치한 히말라야 산맥은 신기조산대로, 석유나 천연가스 등이 풍부하나, 암도 지역의 경우 고기조산대로 금광이 풍부하다. 또한 히말라야 산맥 일부 지역에서도 금광이 존재한다.
  • 석탄 - 티베트에는 대량의 석탄이 매장되어있다.
  • 석유·천연가스 - 히말라야 산맥은 신기조산대로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우 풍부하며 2016년 티베트의 석유 매장량이 1억 톤을 초과했다고 발표됬다. 티베트의 유전의 평균 깊이는 4,600미터 이상으로 채굴이 어렵기로 유명한 지역으로 지난 30년 간 석유 채굴에 있어서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티베트에는 일 생산량이 1천 톤 이상인 유전들이 있다.티베트는 일평균 생산량이 200톤 이상으로 전 티베트에 거대한 경제적인 효익을 창출할 것이라고 한다. 석유 매장량은 40억 톤 이상으로 알려져있으며, 티베트의 천연가스 매장량은 1,000,000,000,000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 전력 - 2016년 티베트의 전력은 80% 이상이 태양열 발전소에 의지하고 있다. 티베트는 태양열 발전 최상의 조건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외에 20%는 대부분 석유가 주를 이루고 있다.

공업

  • 철강업 - 티베트엔 철이 매우 풍부해 철강업을 꾸준히 발전시키고 있다. 대체로 암도 서부 지역에 철강업을 종사하는 공장들이 많이 있다.
  • 화학 공업 - 티베트에는 석유·가스·석탄·인회석(燐灰石)·칼리·유황 그 밖의 화학 공업 원료가 풍부하며 이 부분이 크게 발달하고 있다. 최근 화학 공업은 캄 지역에서도 발전하기 시작했으나, 대부분 중부 티베트 지역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
  • 비철 금속 공업 - 티베트는 구리·납·아연·니켈·보리프람·보크사이트·수은 등의 확정 매장량으로 보아서는 세계 굴지이다. 주요한 비철금속 공업 지역은 암도 극서부와 캄 동부에 위치해 있다.
  • 기계 제작 공업 - 기계 제작 공업은 중공업의 핵심이다. 중요 기계 공업 지역은 라싸와 로카(전기기계·정밀기계·차량), 암도 북서부(전기기계·정밀기계·차량), 캄 동부(중기계) 등이다.
  • 목재 공업 - 티베트는 설역 고원 위에 있어 목재 공업이 많이 부족하다. 캄 동부지역 일부 고원 하에서 목재를 충당하거나 외국에서 들여온다.
  • 섬유 공업 - 과거 티베트인 토번국은,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서, 비단 생산을 당나라의 문성공주로부터 배워 직접 비단을 생산했다. 화학섬유보단 직접 생산하는게 60%에 육박하며, 대체로 티베트의 전통 문양과 옷 등을 생산, 주로 아리나 시가체 등에서 이루어진다.
  • 식품 공업 - 차·쌀·보리·수수 등이 티베트에서 주로 발달한 식품공업이다. 티베트의 식품공업은 전통 방식에서 현대적 방식으로 바뀌었으며, 전통과 잘 융합되어 안전성이 보장된다.
  • 첨단 공업 - IT가 발달된 인도를 성장 모델로 삼고 1990년대부터 꾸준히 발전중이다. 주로 컴퓨터나 TV등을 생산하며 라싸 등에서 이루어진다.

국토 종합 개발

티베트 정부는 광대하고 높은 설역에 미개발 지역들을 개발하려고 여러 계획 등을 실행해왔었다. 102종의 지하 자원을 캐내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암도 지역이 많이 개발되었다. 1970년대부터 많은 공장들이 들어섰으며, 2006년에는 대규모 태양광 발전소를 설치해 현재 전력의 대부분이 태양광으로 유지되는데 이유가 되었다.

교통

티베트는 거의 전 지역이 도로로 연결되어있으며, 2004년 라싸 취수르에 취수르국제공항이 개항되었다. 2007년 티베트의 시가체에서 네팔의 카트만두까지 가는 철도가 뚤렸으며, 2013년에는 아리에서 인도 뉴델리까지의 기차선이 뚤렸다. 현재는 인도 잠무 카슈미르에서부터 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러시아 루트를 통해 유럽까지 갈 수 있는 철도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티베트는 석유 및 천연가스 수송을 위하여 수송관을 설치 운영하고 있는데, 가스 수송관은 가스 산지(産地)에서 라싸나 그 주변 지역과 암도 지역에 집중되어있다.

에너지

티베트는 자원의 보고(寶庫)로 불리우며,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자국 내에서 충족중이며, 남은 에너지를 수출함에 있어 큰 수익을 올리고 있다.

사회

티베트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불교 신자이며, 전통적으로 본교와 불교같은 종교들을 믿었기에 각자의 종교 교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많고 대체로 종교가 티베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보이고 있으나, 종교 분란 등의 문제가 가끔 발생한다. 티베트에서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나, 여성의 권리가 남성을 압도하는 모계사회가 예전부터 구축되어있어 가끔 논란이 되고 있으며, 그 외에 사람들이 농업을 중요시 생각하는 성향이 없지 않다.

민족

주민의 대부분은 티베트족이다. 티베트의 신화에서는 세, 무, 동, 통, 드루, 라의 여섯 부족이 동화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소수 민족은 몽골족, 회족(후이족), 먼바족, 한족, 기타가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고유의 문화와 언어, 역사,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티베트 민족구성(2016년)
민족  %
티베트족 80.4
몽골족 7.3
회족(후이족) 5.2
먼바족 3.2
한족 2.1
기타 1.8

주요 민족

티베트 민족 구성의 총 80.4%를 차지하는 주요 민족은 티베트족이다. 티베트족 이외의 민족은 티베트에선 전부 소수민족으로 간주한다.

소수 민족

티베트에서 공식적으로 분류한 소수민족은 몽골족, 회족(후이족), 먼바족, 한족이다. 이 외에도 많은 소수민족이 있으며, 한국인도 있다.

인구

2016년 티베트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24,668,274명이다. 세계에서 54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이며, 인구 밀도는 평방미터당 900명이다.불교 신자가 미약하게나마 줄어듬에 따라 중생에게 금기되던 결혼을 하는 사람이 조금 늘어나 출생률이 조금 늘어나게 되었고, 의학의 발달로 인해 평균 수명이 늘어나 1994년부터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2006년까지 12년 동안 티베트의 인구는 약 200만 명이 증가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티베트의 인구는 다시 감소하기 시작했으나, 2015년부터 다시 증가가 시작되었다.

전체 인구의 약 80%를 티베트족이 차지하고 있고, 약 10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30개 이상의 기타 종교 등의 신도도 적지 않다. 티베트인의 이름에는 성과 이름이 따로 구분되지 않고 앞뒤를 신경쓰지 않으며, 평소에 본인이 많이 쓰던 쪽을 이름으로 사용한다. (이름)+(이름)

교육

초중등교육

유치원 과정을 마친 후의 과정, 1~5학년의 초등교육과정과 6~10학년의 중학 과정으로 구분한다. 초등학교의 하급생들은 주로 기본적인 언어(영어)의 구사능력 향상과 쓰기, 셈하기, 기초적인 산수, 사회, 체육 그리고 창의력을 기르는 활동 과목과 같은 교육에 기본을 둔다. 상급학급으로 올라 갈수록 학생들은 영어, 수학, 사회, 체육 및 과학 그리고 기술 과목을 배우며 음악 및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10학년이 되면 초중등교육 가정의 수료를 인정하는 시험을 보게 되는 데 합격을 해야만 대학예비 과정인 11, 12학년 과정을 이수할 수 있다.
사립학교/국제학교의 교과 과정은 개인의 지성, 사회상, 예술성 그리고 작업능력에 관련된 학생들의 잠재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 걸쳐 골고루 반영하며 노력하고 있다.

고등교육

11~12학년에 실시하는 고등학교 과정으로 2년의 대학 예비과정을 포함시켜 실시하고 있다. 고등학교 진학 후 학생들은 희망 대학과 전공과에 따라 대학에서 요구하는 관련 과목을 선택하여야 한다.

종교

티베트의 종교는 대부분이 불교이나 다른 종교들도 많이 유입되어 다양하다.
각 종교 비율은 불교(라마교) 83.2% , 힌두교 3.7% , 이슬람교 2.1%, 개신교 2%, 시크교 1.5%, 기타 5.5%로 2016년 티베트 통계청 조사 기준에 따른 결과이다.

티베트 불교

석가모니 축제에 참가한 수많은 티베트인들

불교는 인도로부터 전래되어 7세기에 국교의 자리로 차지하였다. 이 불교가 티베트의 특유의 문화인 티베트 불교로 발전한다. 티베트 불교는 바하라야나(Varjrayana)의 독특한 형식을 따른다. 티베트의 불교는 티베트에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몽골, 네팔, 부탄, 라다크 등의 국가들에서도 행해진다.

기타 종교

티베트에는 토속 종교인 뵌교(본교)와 밀교,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종교들도 많다. 티베트 정부는 소수 종교들과 기타 종교를 존중한다고 발표했다.

치안

티베트는 부처님의 자비라는 명목 하에 치안이 매우 낮은 국가로 유명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범죄행위에 못이겨 1980년대 이후 치안이 매우 높아졌다. 1990년대부터 조금씩 하향되었고, 지금과 같은 치안을 가지게 되었으며, 티베트의 치안은 좋은 편 이다.

사회 문제

티베트는 현재 일부 종교 대립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문화

티베트의 상징 포탈라 궁

문학

티베트의 문학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문학작품들이 꽤 존재한다. 유구한 역사 방대한 작품 완숙한 창작기법, 선명하고 독특한 예술적 격조 면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티베트문학은 세계 문단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고 말한다. 대서사시 ‘게싸르 대왕 전기’를 비롯, ‘롭쌍 왕자’ 같은 작품들은 세계 문학사에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음악

춤과 노래와 음악은 문화 대국인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티베트의 음악이 고유의 색깔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설역고원의 가무와 음악은 개성이 넘친다. 그 이유는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사랑하는 티베트 민족의 풍류 기질이 독자적인 예술형태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민속음악은 무용 · 연극과 직결한 민요나 거리의 연예 등이 있으며, 악기는 찰현악기인 다냥(sgra-snyan), 발현악기인 피반, 큰북 등이 사용된다. 5음 음계를 바탕으로 하며, 비음적(鼻音的) 발성이나 점차적인 템포 변화 등이 특징이다. 종교음악은 토착 종교인 본교와 전래한 불교가 융합한 라마교의 기악 앙상블과 불경이다. 극단적으로 낮고 좁은 음역이 되도록 낭창(朗唱)하는 선율에서는 물결이나 원을 묘사하는 듯한 미묘한 음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으며, 사실 전통적인 그래픽 기보법에서는 그러한 곡선이 적혀 있다. 악기는 드로운 나팔인 잔둔, 틀북인 라그나, 흔드는 북인 다마르(사람의 두개골로 만든다), 더블 리드로 된 기엘린 등이 사용된다. 목소리만의 부분, 악기 반주의 목소리 부분, 순 기악 앙상블(큰 음량) 등이 음악 형식적으로 명확히 구별되어 있다.

건축

전통과 현대가 공전하는 티베트 도시들의 집들은 돌과 진흙을 이용하여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지어진 집들이 많다. 내실(內室)에는 사람이 거주하고, 집안 뜰은 주로 가축을 사육하는 장소로 쓰인다. 조금 더 현대화된 집들은 3층 이상인데, 돌로 담을 쌓고, 대들보와 대들보를 받치는 나무 기둥의 구조로 지어졌다. 중간은 정원(庭園)이며, 사면(四面)은 담으로 둘러 싸였는데, 어떤 집은 아주 두껍게 담장을 쌓아 찬 바람과 혹한(酷寒)을 막는다. 이런 종류의 집들은 2,3층은 사람이 거주하고, 1층은 주로 창고(倉庫)로 사용한다.

티베트의 건물들

전통 천막은 자유롭게 이동하는 유목민에게 적합하며, 몽고 파오와 비슷하지만, 구조가 비교적 간단하고 크기도 작은데, 양모나 야크 털로 만든 모포로, 장방형(長方形,직사각형)의 천막을 만들며, 천막 중간에 나무 기둥을 세운 후, 천막 바깥 사방(四方)으로 줄을 당겨, 땅에 박아둔 팩(대못)에 묶는다.
티벳인들은 천막(帳縫)안에서 음식을 하기 때문에,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천장 한가운데는 냄비 크기 정도로 뚫려 있고, 비가 많이 오면 손을 뻗어 덮개로 덮을 수 있게 되어있다.

티베트 정부는 현재 친환경 도시들을 계획중이며, 여러 현대식 건축법을 들여와 전통과 혼합하여 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