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 술탄국/역사

역사별 소속국 년도
믈라카 술탄국 15 ~ 16세기
해협 식민지 1826–1941; 1945–1946
일본 점령기 1942–1945
해협 보호령 1945–1971
플라우 - 페낭 술탄국 1971 - 현재

페낭은 15,16세기 말라카 술탄국의 일부였다가 포르투갈이 소수의 콘키스타도르들을 동원해 말라카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포르투갈이 아예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포르투갈로 넘어간다. 나중에는 포르투갈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말라카가 네덜란드인들에 넘어가자 네덜란드로 넘어갔다.

그러다가 1826년에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를 한데 묶어 '해협 식민지(Straits Settlements)'를 만들기에 이르나, 이 때까지의 영국의 관심은 무역로 장악이었을 뿐이고, 특히 중요한 것은 '중국으로의 길' 이었다. 해로상의 거점을 장악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당시까지는 말레이 반도에서 수익성 높은 자원이 생산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해협식민지나 영국령 말레이의 주요 거점중 하나였던 페낭은 지금 서말레이시아인 말라야 지역의 타 지역에 비해 상당히 영국스러운 지역이 되었다. 이때 사실상 말레이어보단 당연히 영어가 우대되었으며 지금도 영어는 말레이어, 중국어와 같이 페낭의 3대공용어로 지정되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에서 남방 푸젠성과 광동성, 하이난성 사람들이 대거 쿨리신분으로 건너오면서 중국계 이주민이 늘어났다. 이들은 나중에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의 조상이되며 현재까지 페낭의 주 문제인 말레이 - 중국계 대립의 시발점이 된다.

19세기부터 영국은 말레이 반도 그 자체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해상무역로에만 집착하던 영국이 갑작스레 말레이반도에 투자하던 가장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말레이시아에서 엄청나게 많이 생산되는 주석 때문이었다. 주석을 이용한 함석 제조 기술이 발전하고 수요가 증대함으로써 말레이 반도의 주석 광산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페낭과 시티아완등 서부 해안가 주석생산지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며 조지타운이나 시티아완 두 도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룬다.

이후, 1948년 2월 1일에 말라야 연방이 수립되긴 했으나 말레이 공산당은 1948년부터 좌익혁명을 일으켜 공산화를 시도했다. 파업부터 시자갷서 무장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영국은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모든 집회/시위와 공산당 활동을 억눌렀으며, 이를 '말레이시아 비상사태'라고 표현한다.

1957년 8월 31일에는 UMNO와 MCA, MIC 3개 정당을 주축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1960년에 비상조치가 해제된 후 1963년 9월 16일에 영국 보호령인 브루나이가 불참한 가운데 말레이시아 정부가 수립됐으나, 여전히 석탄이나 주석등을 생산해내고, 동남아의 관문으로서 아주 큰 역할을 해내고 있었던 패낭과 시티아완은 아직도 '영국령 해협보호자치령'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자치령으로 남았다.

1971년 4월 5일, 영국의 보호령에서 시티아완 주와 페낭 주를 중심으로 "플라우-페낭 술탄국"이 수립되며 드디어 독립을 맞이한다. 본래 영국은 말라야 연방에 참여 시킬 생각이었지만, 페낭의 중국 화교 비율이 50%에, 인도 화교 12%, 시암화교가 4%, 비말레이인 타민족 화교가 4%, 비말레이계 이민족이 페낭 전체 인구의 60% 가까이를 차지하기에 말라야 연합이 받아주기 싫어했다는 견해도 있다. 중국계가 절대 다수인 싱가포르를 축출 한것처럼. 어차피 영국도 페낭 지역에 대한 할양 조치는 미지근하게 응했고, 이민족 계열도 60%를 넘어가니 차라리 안받는게 낫다고 생각한것 같다. 그래도 최근엔 양국간 4번 연방국도나 국경완전개방 협의등 상호화합을 통한 평화를 이뤄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