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족주의

한국에서 민족은 국가의 대체물로 탄생했고,ㅜ 민족론은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길 무렵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즉 민족이란 말은 1900년 이후에 만들어지거나 일본에서 들어온 말로 생각되는데, 1896년부터 1899년 사이에 발행된 ‘독립신문’에도 민족이란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분위기로 보아 민족이란 말이 수없이 쓰였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때는 조선이란 국체가 여전히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05년 무렵, 즉 을사조약으로 국가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민족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한다. 1904년부터 1910년의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민족이란 단어를 177건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 병탄된 후에는 민족이란 말이 일상용어로 자리 잡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족이 국가를 대신했다. 민족의 장래를 위해 실력도 기르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도 하고, 심지어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이 찾아왔어도 민족이란 개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국가 수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광복은 되었으나 건국이 이룩되지 않았기에 민족이 맹위를 떨쳤다. 국가 수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삼팔선에 의한 분단은 민족 개념을 더 뜨겁게 달구었다. 건국이 되었어도 민족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분단으로 인해 온전한 국가 수립이 좌절됐기 때문이었다. 분단 없이 국가 수립이 완료되었다면 아마도 민족이란 개념은 힘을 잃고 국가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국가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통일이 되지 않았기에 민족주의도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다.

민족주의는 힘이 있지만 국가라는 현실적인 공동체 속에서 작동한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국가가 건국 후 어떤 단계를 거쳐 발전했느냐에 따라 성격을 달리했다.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즉 ‘생존’ ‘생활’ ‘행복’ ‘의미’의 시대를 거쳤다. 생존의 시대는 조선의 몰락부터 1961년의 쿠데타까지라고 볼 수 있다. 크게 보자면 국가 세우기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국가 세우기도 생존의 울타리로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왕조의 몰락은 새로운 국가 설립을 절실하게 요구했지만 식민지, 분단, 전쟁 등으로 인해 좌절을 겪었다. 전쟁 후에 수립된 국가는 불행히도 무능했다. 국가적 과제를 처리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삶에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가 이승만 정권의 마지막 선거에서 큰 호응을 얻게 된다. 국가 설립이 긴요한 과제였으나 국가가 설립된 후에 국민에게 가장 필수적인 것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자가 알아서, 그야말로 요령껏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다. 다 함께 잘살기보다는 나 먼저 살고 보기가 일반화된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