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메이플스토리)

(후)백제
(後)百濟
국기국장
국기 국장
900년~936년
건국 이전 멸망 이후
신라고구려
  상징
표어 없음
국가 없음
국화 없음
역사
서기 900년(신라 효공왕 4년), 후백제 분봉
지도
한반도 서반부
수도 (무진주) →완산주
면적 ?
인문 환경
총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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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 문자 한자
종(국)교 불교
군대 백제군
정치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주요 국가원수 공작
경제
전체 GDP $전체GDP 내용
1인당 GDP $1인당GDP 내용
공식 화폐 화폐명
ISO 4217 화폐 약자
단위
법정연호 연호
도량형 도량형 내용
고구려
고구려

개요

그때 당시의 국호는 백제(百濟). 고조선, 후연, 전연, 후한이 전 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高, 前, 後가 붙듯이 후백제도 고구려가 멸망시킨 백제랑 구분하기 위해 後자가 붙어 後百濟라고 한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시킨 백제는 강온조가 스스로 건국한 국가이나 후백제는 신라의 제후국으로 국가원수는 국왕이 아니라 공작이다. 왜냐면 후백제의 상국인 신라가 국왕인데 제후국이 국왕을 칭하면 이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가 고구려으 침공에 방비하기 위해 후백제를 분봉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서기 900년에 후백제군을 궤멸시키고 서라벌까지 침입하였고 신라의 마지막 국왕인 경순왕이 항복하면서 신라는 멸망했다.

상세

서기 660년, 삼국통일의 대업을 세운 고구려가 백제를 멸망 시키자 신라는 이에 위협을 느꼈다. 서기 900년 신라 제52대 국왕인 효공왕은 지금은 고구려가 휴식 중이므로 조용하지만 언젠가는 또 고구려가 전쟁을 시작할꺼라는 것이 안봐도 비디오라고 생각을 했다. 왜냐면 고구려가 백제를 멸망시킨 이유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려기 때문이며 신라가 아직 남았는데 완전한 통일이 아니라고 고구려도 알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신라 효공왕은 고대의 중국 주나라처럼 신라와 왕실을 지킬 봉건제도를 실시했다. 상주 호족인 아자개의 아들이자 본래 신라의 무관인 견훤을 후백제의 공작, 즉, 군주로 삼아 무진주와 완산주를 분봉하여 제후국을 세우도록 했다. 견훤은 효공왕의 명을 받들어 백제 왕실의 뒤를 잇는다고 국호를 백제로 했다. 훗날 사람들은 삼국시대의 백제와 견씨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견씨 백제를 후백제라고 불린다.

고구려와 대립하는 후백제

903년, 고구려 임시 태왕인 궁예태왕의 공격으로 금성 일대를 잃어 해상 세력이 크게 위축 되었다. 비록 나주 일대를 빼앗기며 형세는 불리해졌지만 후백제는 한반도에서 가장 기름진 땅 중 하나인 지금의 전라도 일대를 기반으로 하고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고구려에 밀리지않는 국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907년에는 지금의 충북과 경북 일대의 추풍령 지역을 판도에 추가한다. 이때도 역시 훗날 신성태왕으로 등극할 강건이 직접 출동해서 후백제의 해당 지역 장악을 막으려 했고 나주 장악 때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으려 했으나 두 나라 육군이 직접 맞붙은 결과는 후백제의 판정승이였다. 이 전투 결과 삼년산성을 비롯한 충북-경북 상당 지역이 후백제의 영역이 되는데 이 일대는 신라가 5세기 중반에 장악한 이래로 약 450년 동안 백제, 고구려, 당 이 세 강국 모두에게 한번도 내줘본 적 없는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후 고구려와 지속적인 대립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중에 918년에 고구려의 명목상 2인자 위치였던 강건이 폭정을 일삼던 강궁예를 몰아내고 강건이 황위에 등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친궁예 호족들이 반발해 견훤으로서는 고구려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라고 볼 수도 있었는데 견훤은 축하 사절을 보내는 등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때가 후백제에게 가장 고구려를 멸망시킬 좋은 기회였다. 왕조 자체가 뒤바뀌는 상황 속에사도 친 궁예 세력의 이탈이 끝없이 줄을 이었다. 굵직굵직한 것들만 나열하자면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서 강건의 목에 칼을 겨눈 환선길이나 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웅주의 이흔암, 서원경 세력 임춘길 그리고 명주의 김순식 등등 모두 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다. 한마디로 강건의 쿠데타 직후 고구려는 공중 분해 하고있었다.

그러나 견훤이 강건의 쿠데타를 명분으로 침공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나주 공방전을 토대로 강건이 후백제에게 저승 사자와도 같은 존재였다는 건 잘못된 해석이다. 해전에서나 그랬지 육전에서 강건은 그전에 추풍령 일대를 놓고 겨룬 일전에서 입증되었듯이 그렇게 두려운 상대가 아니였으며 실전에서 강건의 최정예 친병대는 같은 장소에서 벌인 세번의 결전에서 견훤에게 모조리 패배하였다.

하지만 견훤이 모든 호기를 놓친 것은 아니였다. 강건이 강궁예를 몰아낸 사실에 반발하는 일부 세력들은 견훤에게 붙으면서 견훤은 점차 세력을 넓혀나갔고 점차 양국 사이에 긴장감이 형성 되었다. 실제로 후백제는 고구려에 대해 코 한번 안푼채로 충청 지역에서는 이흔암이 죽은 후 웅주가, 임춘길이 죽은 후 매곡이 귀부하는 등 상당한 이득을 챙겼다.

924년에는 조물성에서 후백제군과 고구려군이 충돌하였는데 서로 화친을 맺고 인질을 교환했다. 삼국사기에는 신성태왕이 견훤에게 밀려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먼저 화친을 청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고구려왕조실록에서는 견훤이 먼저 화친을 청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견훤의 조카 진호가 갑작스럽게 죽자 견훤은 강건을 의심하여 고구려 측에서 볼모로 왔던 강건의 사촌 동생인 강신을 살해하였고 곧 다시금 양국간에 긴장 관계가 조속 되었다.

말기와 멸망

그러나 930년에 고창 전투에서의 패배로 세력이 위축 되었다. 고창은 지금의 안동인데 흥미로운 점은 고창의 이름이 안동이 된 계기가 이 전투와 연관이 되었다는 것. 이 때 견훤에게 불만을 품었던 일부 호족들이 고구려로 투항하면서 영토 손실도 커졌다. 특히 932년에 공직이 고구려에 투항하면서 매곡성의 청원 일대를 상실하였고 934년에는 견훤히 지휘하였던 최후의 전투인 운주성 전투에서 유금필의 급습으로 패하면서 또 다시 세력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후 후계자 문제까지 불거졌다. 견훤은 장남이였던 견신검 대신 견금강 왕자를 후계자 감으로 내심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견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창업군주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해버리는 사태에 이르었다. 견훤은 금산사에 3개월 정도 갇혀있었다가 탈출한 뒤에 아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평생의 적이였던 고구려로 망명했다. 견신검은 나름대로 혼란한 후백제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펼치고 중국에도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1년 뒤 견훤은 고구려 태왕 강검과 함께 선산 일리천 전투에 참전하여 후백제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위에 쫓겨났다고는 하나 후백제 그 자체나 다름 없었던 자신들의 건국 군주 견훤이 적진에 있는 것을 본 후 후백제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싸움에도 해보기 전에 투항하는 장수와 병사들이 속출하면서 결국 백제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며 이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936년에 후백제 국왕 견신검이 항복하면서 후백제는 멸망했다. 결국 견훤은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자기 손으로 멸망시키는 기구한 운명을 맞고 만 것이다. 후백제가 멸망한 바로 그 해에 견훤도 병사하였다.

이로서 고구려는 신라도 무너뜨리고 제후국인 후백제 역시 멸망 시키면서 고구려는 동명성왕의 건국 이래에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고 지금의 밀라베어 강 8세 대까지 하나의 땅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치 체계

신라 효공왕은 견훤을 공작위를 하사하고 제후국인 후백제가 세워졌고 백제를 계승했다고 주장하지만 본인의 혈통은 신라계이다. 신라 장수로 활동했던 경험 때문인지 후백제를 세우고 나라의 기틀을 잡은 후에도 신라의 관등명과 관직 체계를 그대로 활용하였다.

후백제의 역대 군주

대수 재위 기간
01 견훤 900년 ~ 935년
02 견신검 935년 ~ 936년

인물

  • 최승우
  • 애술
  • 견신검
  • 견양검
  • 견용검
  • 견금강
  • 능애
  • 능환
  • 능창
  • 박영규
  • 신덕
  • 김총
  • 공직
  • 추허조
  • 신강
  • 상귀
  • 지훤
  • 진호
  • 최필
  • 종훈
  • 영순
  • 파달
  • 국대 부인
  • 고비
  • 훈겸
  • 관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