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3 군사 쿠데타 (아라시아)

7.23 군사정변
七二三軍事政變
7.23 Military Coup d'état
일시1972년 7월 23일
장소아라시아 공화국 타이쿄도
원인이와키 카즈타카 육군대장을 위시한 쿠데타 세력의 권력 찬탈 의도
교전세력아라시아 국방군
(진압군)
국민혁명위원회
(쿠데타군)
지휘관무라세 카이타 대통령
토미츠 카이지 부통령
타니가이 케이센 국무총리
우츠모토 무츠요시 국방장관
아와네 쿠니무네 국방군최고사령관 (원수)
오이스기 아케모리 검찰총장
제임스 퍼싱 주아미군 사령관
스미 카즈야스 제1군 사령관 (대장)
야마키타 라이토 육군대학 총장 (중장)
시모나카 슈시로 수도경비사령관 (중장)
이와키 카즈타카 육군참모총장 (대장)
사사야마 게이이치 제2군단장 (중장)
하즈카 히로나오 국방군특수전사령부 (중장)
아지사카 카즈유키 제1항공군 사령관 (중장)
카기누시 카츠키 제2항공군 사령관 (중장)
오시타 유우키 해군육전대 사령관 (소장)
나자와 노부토키 제5군단장 (중장)
병력국방군최고사령부
주아미군 사령부
제1군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수도기계화군단
제6보병사단 소속 제65보병연대
32사단
제43기계화보병사단
제1공군전투사단
제5공군전투사단
제3해군육전대
제5해군육전대
피해23명 사망
123명 중경상
12명 사망
78명 중경상
결과쿠데타 성공
영향제1공화국의 몰락과 군사정권의 등장

개요

1972년 7월 23일에 이와키 카즈타카 육군대장을 비롯한 아라시아 국방군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결국 이 쿠데타의 영향으로 제1공화국은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다가 무너졌고, 이와키 카즈타카를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권이 시작되었다.

쿠데타 세력들은 수도권 지역을 방어하는 제1군 소속 제2군단, 5군단 병력과 공수부대 및 해군육전대 등을 동원하여 1972년 7월 23일 새벽 타이쿄를 비롯 대도시 등의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였다. 이들은 주아미군과 주아미국대사관의 진압 준비와 공식적인 반대 성명에도 불구하고 타이쿄 시민을 비롯한 국민을 인질로 삼고 아라시아 국방군최고사령관 아와네 쿠니무네과 통수권자 대통령 무라세 카이타을 회유함으로써 쿠테타 40여시간 끝에 아라시아 제1공화국을 빈사상태로 만들어 행정부, 국회, 대법원의 역할을 포함한 아라시아 공화국의 전권을 국민혁명위원회로 가져온다.

쿠데타 직후 이와키 카즈타카국민혁명위원회를 자신을 의장으로 하는 국민최고회의로 개편하였으며, 쿠데타 발생 10일 이후로 전국의 모든 정치인 활동을 일체 불법화하고 언론 사전 검열을 실시함은 물론 정기 간행물 1,200여 종을 모두 폐간시킨 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본인이 당선된 직후까지 대의민주주의를 벗어난 군부 독재를 실시했다.

2000년 이전까지는 이 사건이 군사혁명(2000년 국민을 위한 대국민 담화 이전 군부 보수계 세력), 군사반란(민주화 및 진보계 세력), 군사정변을 비롯한 여러 이름으로 통했다. 7.23 주체세력이 정권을 잡고서부터 2000년 국민을 위한 대국민 담화 이전까지는 정권 차원에서 7.23 군사혁명으로 포장했지만, 2000년 1월 1일 이와키 카즈타카의 장남이며 정권을 이어받은 이와키 코자부로2000년 국민을 위한 대국민 담화로 과거에 대한 대국민 사죄를 하면서 7.23 군사정변이 공식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배경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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