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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오왕국'이란 국호는 나오특별시에서 따왔으며, 이 국호가 사용되기 시작한것은 1912년에 새워진 나오사회주의인민공화국으로 3년간의 내전으로 통일을 한후 [[나성|나오특별시]]의 이름을 [[나오]]으로 변경한후 [[나오]]를 수도로 삼은후 도시이름에서 따왔다. 나(螺)는 [[무하시만]]에 널려있던 소라껍데기에서, 오(吳)는 국가의 수도로 결정되면서 표기되었다. 사실 [[나성|나오특별시]]은 원래 [[무하시만]]의 해간가를 이르는 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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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오왕국'이란 국호는 나오특별시에서 따왔으며, 이 국호가 사용되기 시작한것은 1912년에 새워진 나오사회주의인민공화국으로 3년간의 내전으로 통일을 한후 [[나오특별시|나성]]의 이름을 [[나오특별시|나오]]으로 변경한후 [[나오특별시|나오]]를 수도로 삼은후 도시이름에서 따왔다. 나(螺)는 [[무하시만]]에 널려있던 소라껍데기에서, 오(吳)는 국가의 수도로 결정되면서 표기되었다. 사실 [[나오특별시|나성]]은 원래 [[무하시만]]의 해간가를 이르는 말이였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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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7일 (수) 20:25 판

나오 왕국(영어: naokingdom, 螺吳王國)은 동해상에 위치한 가상섬에 있으며,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동쪽에는 일본, 서쪽에는 한국, 북쪽에는 러시아가 위치해있다. 수도나오특별시이며, 공용어나오어이다.

나오왕국
螺吳王國
나오왕국 국기.png 나오왕국 국장.png
국기 국장
표어저항으로 이루어진 국가
나오왕국 영토.png
수도나오특별시
최대 도시나오특별시
정치
나오국왕진종
역사
 
 • 나오 왕정 수립1919.03.15
 • 나오왕국 진종정부수립2000.04.07
지리
면적45,465.5km2
시간대KST (UTC+9)
인문
공용어나오어
인구
2017년 어림70,724,618명
2017년 조사70,731,326명
인구 밀도1645.5명/km2
경제
GDP(PPP)2017년 어림값
 • 전체1,800,000,000,000$
 • 일인당30,000$
GDP(명목)2017년 어림값
통화난 (N) (화폐 단위:단, 난, 온}
기타
도메인.na/나오
국제 전화++89

국호

'나오왕국'이란 국호는 나오특별시에서 따왔으며, 이 국호가 사용되기 시작한것은 1912년에 새워진 나오사회주의인민공화국으로 3년간의 내전으로 통일을 한후 나성의 이름을 나오으로 변경한후 나오를 수도로 삼은후 도시이름에서 따왔다. 나(螺)는 무하시만에 널려있던 소라껍데기에서, 오(吳)는 국가의 수도로 결정되면서 표기되었다. 사실 나성은 원래 무하시만의 해간가를 이르는 말이였다.

역사

조완시대

기원전 105년에 현재 조완섬 북부의 해안가에 고조선유민들이 도착한다. 이들은 3한으로 가지 않고 왜로 가다가 배가 난파당해 나오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들의 수는 몇십, 그러나 그들은 도착한 해안가 근처에 작은 마을을 짓는다. 이후 200여년후에는 몇백개의 마을이 생겼고, 그 마을은 각각 국가가된다. 그들은 청동기문명까지 스스로 획득했으나, 조완섬전체를 다스리는 왕은 없었다. 그러다 기원후 81년, 의문의 군대가 나타나, 모든 촌국들을 정리하였다. 그들의 지도자는 최초의 마을을 수도로 삼고, 그 마을을 '조선'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지도자는 조완국을 세우고 왕에 오르는데, 그는 가로왕이다.
그렇게 300여년의 백지였던 조완국의 역사는 407년에 다시 쓰여진다. 당시에 조완국의 11대 왕 통조왕이 즉위하면서 기록이 쓰여진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몇백년 사이에 왕위가 10번이나 바꿨다는것은 왕위쟁탈전이나 내전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어찌됬근 통조왕은 몇 백년의 혼란을 수습하고 왕위에 올라 나오섬 북부해안에 흙성을 건설하고 군대를 늘렸다. 그가 건설한 흙성은 현재도 유지되어있으며, 초단도에 있다. 통조왕이후에는 조오아, 진왕이 차례대로 즉위하였고, 장왕이 50년 동안 즉위하였다. 이 200년 안에 영토는 두배로 늘어났고, '조선'에 나오 최초의 돌성이 건설되는 등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 중립정책을 실시하던 장왕이 죽자 반란이 일어난다. 이 반란은 621년부터 696년까지 70여년에 걸처 계속되었다. 이 사이 왕위는 9번이나 바뀔정도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691년에 고구려가 조완섬을 점령했다. 고구려는 당시 왕이였던 이왕을 죽였고, 백성은 물론 반란군까지 분노하게 했다. 그리고 반란군과 백성들은 이왕을 죽인 고구려군에 저항, 고구려군은 보급중단과 게릴라전투로 696년에 항복한다. 이 사건은 나오역사에서 70년 저항사건이라 부른다. 어찌되었건 그들은 이왕의 동생을 왕으로 옹립, 이왕의 동생은 '조선'에서 조완국의 부활을 선언하고 평왕이 되었다.
이후 평왕에서 중왕까지의 450여년의 시대는 태평성대 였다. 그러나 중왕의 아들들은 왕위 싸움을 계속, 그리고 그 싸움은 대를 이어서 복수극으로 계속된다. 그러다 1274년 여몽연합군이 일본원정도중 나오섬을 발견, 10여척을 파견하였다. 이때 여몽연합군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소왕은 배를 타고 왜로 도피, 조완국은 멸망한다. 그러던중 나오섬도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항복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누군가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 태풍을 불게해 여몽연합군을 박살냈다. 이를 일본에서 가미카제, 나오에서는 '태조의 태풍'이라 부른다.

신풍국시대

하늘에 제사를 지내 태조의 바람을 일으킨 사람의 이름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는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신풍국을 세우고, 풍영왕조를 연다. 그는 신풍국의 제 1대 왕, 태조다. 그러나 풍영왕조는 100년도 안되 사라졌다. 1324년에 무왕이 집권한 동안 차별받던 문신들과 각종 세금에 짓눌리던 백성들은 1331년에 보가의 시이를 왕으로 옹립하고, 난을 일으켜 무왕을 죽인다. 그렇게 풍영왕조는 사라지고 보왕조의 신이가 왕이 되는데, 그는 평조이다. 평조는 1000년동안 이어오던 수도 '조선'의 이름을 '평경'으로 바꾸었다. 이 평경이라는 이름은 1900년대 초까지도 이어졌다.


1367년에 평조가 죽고, 아들 신종이 왕위에 올랐다. 신종은 무하시산맥까지였던 영토를 진카도, 특진도까지 늘렸으며, 과거제로 관리들을 등용했다. 그리고 신종 다음의 왕인 진종은 조선과 왜에 사신을 파견, 무역을 맺고(물론 조선과는 못하였다), 명에 사신을 파견 그리고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진종 다음왕인 평종이 1479년에 후사가 없이 죽자 보왕조는 사라지고 마 왕조의 신조가 왕이 된다. 그러나 신조가 왕이 된후 명에 사신을 보내기 전에 죽고, 그의 아들인 만종이 왕이된다. 만종은 무하시반도에서 말목장을 만들었고, 왕을 키우게 하였다. 그 말들은 자라서 기병이 되었다. 그러나 만종은 말에게 밟혀 죽었고, 그후 1497년에서 1531년까지 40년 동안 혼란에 휩싸이고, 마 왕조는 대가 끊긴다.


그러던중 1531년에 무왕의 11세손이 재무국을 세워 자신은 신조가 된다. 신조는 몇개월만에 반란군들을 진압하고 신풍국을 통일한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신풍국이 운명을 다하였음을 선언하고, 재무국을 건국한다.

재무국 전기

재무국을 새운 신조가 1546년에 죽고, 그의 아들이 왕이 되는데 그는 문종이다. 문종은 과거시험을 통과하는 자들에게만 관직을 허가하는 개혁을 하였고, 문화수준을 높였다. 그리고 1581년에 문종의 삼촌이 5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그가 노종이다. 노종은 명에 사신을 여러차례 보내 명과의 친선을 유지하였고, 일본에도 여러차례 사신을 보냈다. 노종은 9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1590년에 사망한다. 그리고 노종의 세손인 고종이 왕이 된다. 고종이 왕이 되고 난후 2년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조선의 수군이 물자수송을 막아 조선이 승기를 잡은것을 보고는 해군력을 증가시키기로 하였다. 고종은 그 외에도 농민들을 잘 살수있게 하여, 농업을 발달시켰고 양인들 중에서 부유해진 사람이 증가하였다. 고종은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고, 1617년에 무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무종은 육군을 재정비하였고, 귀족들의 사병을 금지해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 외에도 조선과 후금에 사신을 보냈다.

재무국 중기(무역시대)

재무국 후기

사회주의 시기

나오왕국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