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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아버지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자살한 현장을 본후 자신이 왕이 된다면 아버지같은 꼴을 당하지 말고 위대한 왕이 되자는 바람이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자살한 현장을 본후 자신이 왕이 된다면 아버지같은 꼴을 당하지 말고 위대한 왕이 되자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한 이유 덕분인지 작센은 군대를 먼저 개혁했다 작센이 활대신 총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였다  
 
그러한 이유 덕분인지 작센은 군대를 먼저 개혁했다 작센이 활대신 총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였다  
그러면서 포병의 중요성을 확고히 하고 청동 대포를 많이 생산하였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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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포병의 중요성을 확고히 하고 청동 대포를 많이 생산하였다 그리고 기병대를 축소시켰으며 보병과 포병을 늘렸다
작센은 기병대를 축소시켰으며 보병과 포병을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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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4년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아버지의 원한을 값기로 결정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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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6년 1년 7개월의 준비끝에 마침내 전쟁준비를 끝마쳤으며 프랑스의 독일 내에 영향력 철수 명분으로 프랑스에 선잔포고 이에 빠른 시일내에 프랑스 국왕이 지휘하는 아우슈터리츠 전투에서 격파 프랑스의 국왕이 포로로 잡힘 그 기세로 파리까지 진격하고 파리를 점령하여 전쟁은 7일만에 끝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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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전쟁)
  
 
=== '''종교 전쟁''' ===
 
=== '''종교 전쟁''' ===

2018년 8월 26일 (일) 22:43 판

종교 개혁 이전

1444년 작센은 베팅 가문이 끊기고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이 들어선다

1445년 호엔촐레른 가문에서 온 그는
프리드리히 1세는 근대 작센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국가를 잘 운영해 갔으며
그의 통치기간 동안 국민들은 행복하였다

1469년 프리드리히 1세가 죽고 다음 후계자인 빌헬름 1세가 왕위에 오른다
빌헬름 1세 또한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성공하여 아직까지도 기억이 되고 있다

1483년 호엔촐레른 가문이 다스리는 또 하나의 선 제후국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다 이에 빌헬름 1세는 브란덴부르크의 왕위를 주장한다
그리고 빌헬름의 강경책으로 브란덴부르크 내에 빌헬통 합스부르크 가문이었으며 지금 당장 작센의 왕위를 계승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었다.

1500년
모든 사람들이 1500년 새해를 축하하였다 하지만 빌헬름 1세가 병들어 사망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작센-브란덴부르크였으며 지금 당장 작센의 왕위를 계승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었다.

1501년
결국 빌헬름의 섭정 카를 폰 합스부르크는 작센 선 제후국의 왕위를 가져갔다 카를 폰 합스부르크는 작센-브란덴부르크 동군연합을 이끌어가며 왕이 끊긴 보헤미아 선 제후국의 왕위를 요구했고 그 요구는 정당하였다
하지만 황제인 오스트리아는 이것에 반발하였고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보헤미아 왕위 계승 전쟁 1501~1505)
이 전쟁에서 작센 선제후국은 승리하였으며 보헤미아 왕위를 얻게 된다

1509년 작센이 독실한 가톨릭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여 종교개혁은 하지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1510년 작센은 신교 금지령을 내리면서 신교 탄압 정책을 펼쳤다

1512년 카를 폰 합스부르크가 신교도 폭도의 의해 사망하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왕위에 오른다

1512.1 작센 선 제후국은 무려 5명의 선제후 지지 덕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른다

황제가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신성로마제국 내 개신교 반대에 힘썼다

151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슐레지엔 재정복을 명분으로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했다
하지만 황제의 현명함과 군사적 재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오히려 패배하여 동부 프로이센 단치히 등 독일 기사 단국의 땅을 신성로마제국 작센의 휘하 속국으로 두면서 신성로마제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한 방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슐레지엔 재정복 전쟁 1519~1519)

1523년 작센은 해안가의 필요성을 공성전에서 패배할뻔했지만 기적적이게도 승리하고 반격에 나섰다 이로써 결국엔 작센이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작센은 해안가로 진출하였다(작센-포메른 전쟁 1523~1524)

1524년~1573년
작센은 북독일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면서 북독일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기 시작함
그와 동시에 북독일 정복을 시작함

1578년
작센의 확장을 두려워한 프랑스가 작센에 선전포고함 작센은 프랑스를 막을 힘이 없었고 결국 드레스덴 공방전에서 항복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자살한다.

그리고 하나의 조약을 맺게 된다
내용은 이러하다

북독일의 서부지역은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에 두면서
남독일 지역 또한 프랑스에 아래로 둔다
마지막으로 작센은 2000천 투캇을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1581년 작센의 새 왕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자신의 아버지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자살한 현장을 본후 자신이 왕이 된다면 아버지같은 꼴을 당하지 말고 위대한 왕이 되자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한 이유 덕분인지 작센은 군대를 먼저 개혁했다 작센이 활대신 총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였다
그러면서 포병의 중요성을 확고히 하고 청동 대포를 많이 생산하였다 그리고 기병대를 축소시켰으며 보병과 포병을 늘렸다

1584년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아버지의 원한을 값기로 결정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한다

1586년 1년 7개월의 준비끝에 마침내 전쟁준비를 끝마쳤으며 프랑스의 독일 내에 영향력 철수 명분으로 프랑스에 선잔포고 이에 빠른 시일내에 프랑스 국왕이 지휘하는 아우슈터리츠 전투에서 격파 프랑스의 국왕이 포로로 잡힘 그 기세로 파리까지 진격하고 파리를 점령하여 전쟁은 7일만에 끝이 남
(7일 전쟁)

종교 전쟁

작센의 절대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