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왕국/역사

< 뉴질랜드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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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왕국 발견 이전의 역사

뉴질랜드에 사람이 정착한 때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정말 최근으로, 10~11세기 경이다. 가장 처음에 들어온 민족은 마오리족이다. 이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정착에 대해서는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신화와 전설들을 통해서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원래 거주하던 곳은 하와이키(hawaiki)라는 섬이었다. 하와이키에는 여러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전쟁과 부족해진 식량으로 인해 배를 타고 새로운 섬을 찾아 정착하려 하는 부족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하와이키의 대족장인 쿠페(Kupe)는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도중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하지만 쿠페의 아내는 뉴질랜드 남섬 특유의 만년설을 멀리서 보고 "저기는 섬이 아니라 긴 흰구름이에요."라고 말하며 상륙을 말렸다. 하지만 쿠페는 그곳으로 가 보았고,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마오리어로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Aotearoa)라고 하는데, '긴(roa) 흰구름(aotea)'이라는 아내의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섬에는 모아, 하스트수리 같은 거대한 조류들이 서식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이 얼마나 위협적인 종족인지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몇백년 만에 마오리족으로 인해 모두 씨가 말랐다. 마오리족은 고구마를 경작하고, 돼지를 키우며 살았는데, 특히 돼지가 이러한 새들의 알을 잘 파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개체수가 감소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 왕국의 환경에 잘 적응했는데, 이들의 집은 화산섬인 뉴질랜드 왕국의 지열을 이용한 난방효과를 얻기 위해 땅을 파서 지붕을 낮게 올렸으며 구덩이를 파서 고구마와 돼지고기등을 묻고 뜨겁게 달군 자갈돌을 그 위에 덮어놓아서 음식을 요리하는 항이(hangi)라는 요리법을 발달시켰다. 지열난방의 효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눈까지 내리는 남섬에서 마오리족은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뉴질랜드 왕국 대영제국 자치령 시절 역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아벌 타스만이 1642년 12월 13일 유럽에 뉴질랜드의 존재를 알렸다. 동인도회사로부터 호주 인근과 남태평양에서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한 섬을 찾아 보라는 지시를 받았던 아벌 타스만은 호주 남부의 태즈매니아 섬을 찾은 뒤 17일 뒤에 뉴질랜드를 발견한다. 물론 당시에도 섬에 마오리족이 이미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따서, 섬에 니우 제일란트(Nieuw Zeeland·새로운 제일란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네덜란드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섬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해, 마오리족의 호전성을 과장해서 알린다. 실제로도 타스만 일행은 마오리족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선원 4명이 살해당했다. 때문에 이때까지는 섬의 존재만 알려졌을 뿐, 유럽인들의 방문은 없다시피했다.

1769년에 영국의 제임스 쿡이 뉴질랜드 해안을 자세히 탐사한다. 제임스 쿡은 섬의 이름을 영국식인 ‘뉴질랜드’로 고쳐 부른다. 제임스 쿡 선장의 탐사 이후 1800년대 부터, 뉴질랜드에는 선교사와 고래 사냥꾼, 포경선의 발길이 줄을 이으며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본래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부속 영토였지만, 1840년 2월 6일에 와이탕이 조약(The Treaty of Waitangi)이 영국과 원주민 마오리족 사이에 체결되어 뉴질랜드는 1841년부터 공식적으로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와 분리된 대영제국의 왕령식민지가 된다. 마오리족은 영국의 신민이 되었고, 대신 마오리족은 현재까지의 토지 소유를 보장받을 수 있고 영국 정부를 통해 판매할 수 있었다. 본래 마오리족은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 했지만, 프랑스가 뉴질랜드에 집적대는 것을 위협으로 느껴 차라리 영국 정부가 낫다는 생각을 했고, 또 유럽인들이 마구 유입되면서 마오리족과의 충돌이 잦은 등 무법천지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영국의 신민이 되어 영국의 보호를 받겠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영어와 마오리어 조약 원문에 차이가 있어 곧 다시 영국과 마오리족은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1840년 유럽인의 침투에 맞서 마오리족은 마오리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마오리족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유럽인들 역시 큰 피해를 입었기에 마오리족은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여 아메리카 대륙처럼 원주민들이 몰살당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뉴질랜드 왕국 독립 역사

1901년에 이웃 호주에서 호주의 영국 식민지들을 모두 끌어모은 호주 연방이 출범한다. 본래 뉴질랜드 역시 뉴사우스웨일스의 일부였으므로 호주 헌법에서는 뉴질랜드 역시 호주 연방에 가입할 수 있다고 규정했고 실제로 가입을 권유했지만, 뉴질랜드는 거절했다.

이후 독립 과정은 온건하게 진행되었다. 1차대전에 참전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 뉴질랜드는 다른 자치령과 함께 자신들의 권한과 완전 독립의 필요성을 느꼈고, 영연방 가입국이지만 별도의 군주를 세울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 그 결과 영국에서 받아들였고, 1931년 초대 왕으로는 영국의 왕이 직접 임명한 더베리몬드 1세 총독을 왕으로 즉위시켰다.

더베리몬드 1세 왕은 1931년 3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1899년 06월 19일에 태어나서 1960년 11월 30일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더베리몬드 2세는 왕위를 계승했을 당시 1960년에 34세였다.

더베리몬드 2세는 2002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막내 아들 더베리몬드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는 남섬으로 향하던 배에서 사망하였다.

더베리몬드 3세는 당시 29세였다. 첫째아들과 둘째아들 그리고 셋째 딸은 전부 왕위에 오르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막내아들인 더베리몬드 3세가 왕위에 올랐다.

현재 더베리몬드는 45세의 나이로 열심히 일에 집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