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식민지배가 남긴 유산들

Admin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9월 11일 (일) 13:01 판

한국의 성장에 대한 수많은 지론들이 있고, 그 중에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의도치 않게 한국의 경제발전과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필자는 한국의 성공비결중 하나가 일제의 식민통치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한국의 경제발전의 원인중 하나가 일본이 “서울”을 식민지 조선의 수도로 선택한 것이 한국의 경제발전의 원인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수도를 서울로 정하면서, 구 조선왕조의 관료집단과 향촌집단을 흡수하며 조선인이 식민지 경영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 글의 주요 논지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긍정하거나 정당화하는 글이라기보다는, 서울을 식민지 행정의 중심으로 낙점한 일제의 선택이 다른 피식민지배국들과 한국의 운명을 갈라놓은 이유중 하나라고 주장 하는 글입니다. 혹여나 오해가 있을까봐 쓰는 글입니다.

구미 국가들의 식민지 경영 방식

통상적으로 서구 열강등은 구 봉건왕조의 수도보다는, 식민지 경영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본국에서 이주한 사람은 소수인데 비해 지배할 민족이 많았으며 이들의 전통적인 경쟁관계와 갈등의 당사자가 되지 않으려 했으며, 본국에서 들어오는 물류를 빠르게 수령하고, 본국 주민들을 이주시켜 식민지 정치의 여론을 장악하며,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하여 근대 행정을 쉽게 도입하기 위해서였죠. 인도든 아프리카든 아메리카든, 서구 열강은 본국에 체제와 똑같은 체계를 가진 근대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도로망을 구축해 가면서, 압도적인 경제의 힘으로 지방들을 개편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인도의 도시인 캘커타(콜카타)인데, 원래는 작은 마을이었던 이 곳을 1690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이곳에 상관을 세우면서 도시로 발전되었으며, 또 1772년에는 영국령 인도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후 영국령 인도의 수도로써 엄청난 발전을 구가했고, 인도 제국이 세워진 후에도 인도 제국의 수도이자 인도 제 1의 도시로 기능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죠

구미 열강들이 길과 인프라를 새로운 신도시를 중심으로 구축해 나가는 것과 별개로, 구미 식민제국은 기존에 존재하던 지방의 봉건 세력들의 지배력과 통치를 일부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대신 협조를 얻는 식의 정치적인 협상을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식민지배 초기 영국인들은 인도인의 생활과 종교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인도는 단순히 경제적 이용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중적 구조에서는 피지배 민족이 근대 관료체계에 편입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특히 인도의 봉건 체제는 영국의 식민 행정과 공존했습니다. 영국의 통치 아래에서는 인도 아대륙의 거의 1/3을 구성하는 약 560개의 소왕국들이 분포되어 있었고 그들은 독자적 법과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주들의 크기는 상당한 수익을 창출하는 큰 영토부터 작은 주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영국의 통치 아래에서 그 왕국들은 위계적으로 배열되었고, 병사들 수가 이들의 위계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게다가 인도라는 거대 시장의 매력을 알아가게 된 영국인들이 인도인들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통치하고 인도인을 서구화하기 위해 인도 고유의 종교와 문화를 무시하기 시작했을때, 영국 정부는 인도인들의 격렬한 무장투쟁(세포이 항쟁등)에 부딪치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영국은 인도에 대한 서구화 정책을 버리고 인도인의 관습을 존중한다는 명목 하에 내부의 종교라는 차이를 활용해 교묘히 인도인들을 스스로 갈등하고 대립하도록 부추키기까지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서구 식민제국의 대다수는 근대적 사회와 봉건 사회가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고, 서로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던 조심스러운 관계였습니다. 개척민 중심의 식민지가 아닌 피지배-지배층이 나누어져있었던 서구 식민제국의 대다수에서는 봉건 세력과, 근대 관료세력은 서로를 포섭하거나 굳이 통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가면 오히려 간섭이나 통제, 흡수보다는, 민족과 종교그룹의 자치권을 인정하면서 이들을 이간하여 분열시켜,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 하기까지 했습니다.

서구와는 달랐던 일제의 식민지 경영 방식

일본도 처음에는 구미를 본받아 부산에 일본인을 대거 유치시키고, 부산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며 식민지의 중심지로서 염두했던것 같습니다, 아니면 일본 자체의 수도를 조선으로 옮기는것등을 고려한듯 하지만, 이와 같은 시도는 3.1운동 이후에 쏙 들어가게 되었는데, 조선은 향촌 시스템이 500년간 잘 구축된 나라였으며, 인도와 같은 분열된 식민지와 달리, 중앙의 지시가 의외로 산골 구석구석까지 전달되는 사회였던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서울에서 일어난 3.1 운동이 향촌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을 어떻게 뒤집어놓는지 직접 체감하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오죽하면, 조선에 어떠한 정책을 추진할때마다, 3.1 폭동을 잊엊느냐고 일본 내부에서도 반발이 나올 정도로 말입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행정체계를 새로 구축하기보다는 조선의 시스템을 근대식으로 다듬어 쓰는 노선을 확정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일제는 서울의 여론을 장악하고, 식민지 경제와 행정을 망라할 도시를 구축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