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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당일 = 1895년 5월 4일<sub> (조선민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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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명 변경 = 1953년 6월 2일<sub> (공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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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한 정당 = 수구당<sub> 조선의회<sub> 신안동김씨대종회<sub> (1895년 신설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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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sub> (1963년 2월 3일 흡수합당)  
 
자유당<sub> (1963년 2월 3일 흡수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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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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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가 시작할 때부터 매우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던 조선민족당은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던 신안동김씨대종회는 해체되어 각 지의 집성촌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서울 경기의 수구당계도 마지막 남은 수구당계 수장 신유적까지 체포되면서 사실상 와해된다. 그러다보니 지식인단체로 위장해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선의회계가 사실상 당을 주도하게 된다.
 
일제강점기가 시작할 때부터 매우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던 조선민족당은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던 신안동김씨대종회는 해체되어 각 지의 집성촌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서울 경기의 수구당계도 마지막 남은 수구당계 수장 신유적까지 체포되면서 사실상 와해된다. 그러다보니 지식인단체로 위장해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선의회계가 사실상 당을 주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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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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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때 신기진 총재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혁명 말기에 혁명에 가담하게 된다. 이후 민주당과 함께 국회를 양분하게 되며 이승만이 떠난 자유당은 이기붕이 주도하게 되었고, 5대 대선을 앞두고 합당하였다.
 
4.19 혁명 때 신기진 총재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혁명 말기에 혁명에 가담하게 된다. 이후 민주당과 함께 국회를 양분하게 되며 이승만이 떠난 자유당은 이기붕이 주도하게 되었고, 5대 대선을 앞두고 합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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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공명당 당명 변경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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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박정희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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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모든 정치 활동이 금지 되었고, 다양한 야당 세력들이 비밀리에 모여 회담을 갖게 된다. 그 중에서 원래는 조선민족당 출신이었으나 이승만계의 몰락을 예견하고 자유당으로 입당한 이기붕과 당시 조선민족당 총재 신기진은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는 보수 유권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정치 활동이 재개되자마자 6월 2일 합당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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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작업은 당시 이승만의 하와이 도피로 사실상 이기붕 혼자 일하고 있던 자유당을 조선민족당이 흡수합당 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당 분위기 쇄신을 위해 70여 년 만에 당명을 공명당으로 개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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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군정에 반대하는 보수 유권자들, 특히 충청과 PK지역의 유권자들을 많이 끌어모았으며 박정희가 본격적인 정계 진출을 망설이게도 만들었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TK인데, 박정희가 구미 출신인 만큼 박정희가 정식으로 대선에 출마한다면 가장 그를 지지해야할 지역인 TK는 공명당의 최대 표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신안동김씨대종회) 다만 경북지역에서 안동김씨가 유독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던 안동권씨, 안동장씨가 박정희에게 힘을 실을 것을 약속하며 본격적으로 그가 정계에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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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선관위는 불법적 쿠데타의 주동자의 정당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공화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강제 해산시켜 버렸는데, 이미 박정희는 전역을 한 상태였던지라 서둘러 대선 캠프를 마련하지 않으면 권력이 그대로 공중분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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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박정희는 당시 공명당의 비주류 계파였던 유익진에게 도움을 청했고, 내무부 장관직을 약속받은 그는 공명당을 탈당하여 민주공화당을 창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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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당에 입당한 박정희는 그대로 대선 후보로 나섰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공명당, 신민당, 국민의당 등에서 신기진, 김영삼, 김대중이 충청, PK, 호남의 표를 있는대로 끌어왔지만 군부가 투표 조작을 저지르는 바람에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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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5대 대통령이 된 후 야 3당은 합당 논의가 오갔고 가장 규모가 큰 공명당에 무려 10개 당이 흡수합당되;었다. (11당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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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전당대회에서 아주 근소한 차이로 신기진이 김영삼을 누르고 당 총재로 선출되었고, 신기진은 김영삼을 수석최고위원에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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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나가던 공명당은 당시 열린 1979년 재보궐 선거에서 대구 병 선거구의 지역구 당선자를 내는 대이변을 일으켰다. 거기에 경북 안동시까지 당선시키면서 대구경북에서의 기반을 회복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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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전두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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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가 또 독재를 시작하자 총재 신기진과 상임고문 김대중은 사형을 선고받고, 김영삼은 가택연금 된다. 김대중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했지만 신기진은 사형되었고, 오랜 투쟁으로 풀려난 김영삼이 새 총재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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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노태우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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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13대 대선이 되자 김대중이 돌아왔는데, 단일화에 불응하며 당내 지지기반을 이끌고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한다. 이로 인해 노태우에게 권력을 넘겨준 공명당은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흡수합당하여 세력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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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 3년차, 노태우의 민주정의당이 합당제의를 해오며 김영삼이 이에 찬성하지만 당내 반발세력에 의해 합당이 무산되어 결국 본인의 지지 세력을 이끌고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창당, 2주만에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으로 신설 합당하게 된다. 김종필 또한 여기에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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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당은 신기진 전 총재의 아들인 신성민 총재가 이끌게 되었는데, 신성민 후보는 민주자유당의 세를 꺾기 위해 13대 총선에서 지역구였던 인천 을을 떠나 고향이자 김종필의 지역구 충남 부여로 내려갔다. 당시 김종필은 본인의 당선을 확신하며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고, 결국 신성민이 승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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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공명당은 갑자기 부상했고 전국적으로도 98석을 얻어내며 완벽히 재기에 성공한다. 여당은 과반 확보에 실패했고 결국 이합집산으로 분열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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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세력 중 민정계는 대부분 TK가 기반이었으나 공명당에게 전부 빼앗겨 멸망했고, 부산과 경남의 통일민주계는 탈당하여 공명당으로 돌아오게 된다. 김종필계는 탈당하여 독자적으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ref> 그러나 수장인 김종필이 본인의 고향에서 패배한 만큼 그 세력은 매우 약해졌고, 김종필은 지역기반을 충남에서 강원도로 옮기게 되나, 강원도의 의석 수가 워낙 모자랐던 탓에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김종필 본인은 재보궐선거에서 춘천에서 당선되었고 강원도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나 그를 제외하면 모든 기반은 아직 충청에 있었기에 전체적으로 세가 약해진건 맞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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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김영삼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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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시 공명당으로 돌아온 김영삼은 공명당 후보로 김종필과의 단일화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2024년 3월 31일 (일) 23:17 기준 최신판

독일연방의회문징.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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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의회문징.svg 대한민국의 여당
신용덕 정부
이현수 정부
유현 정부
공명당
(2016.04.11.~2024.10.20.)
자유민주당
(2024.10.20.~2025.09.19.)
민주개혁진보연합
(2025.09.20.~현재)
공명당로고4.png
공명당
원어명
국가 조선-일제강점기 조선-조선인민공화국-미군정-대한민국
약칭
공명
표어
이제는 공명
창당
1895년 5월 4일 (조선민족당)
당명 변경
1961년 6월 2일 (공명당)
이념
조화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 자유보수주의
스펙트럼
중도~보수
대표
신용덕
원내대표
이준영
사무총장
이용연
정책위의장
김병택
국회의원
96석 / 300석 (32%)
광역단체장
6석 / 17석 (35%)
기초단체장
83석 / 226석 (36.7%)
광역의원
366석 / 824석 (44.4%)
기초의원
968석 / 2,927석 (33%)
'
석 / 석 (%)
당색
공명오렌지 (#FFA500)
정책 연구소
공명중앙연구소
후원회
공명당중앙당후원회
국제조직
국제민주연합
학생조직
학생공명당
재산총액
62,523,666,222원

개요

대한민국의 중도 보수 정당

1. 역사

1.1. 조선민족당 시절

1.1.1. 일제강점기 이전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정당들 중 가장 오래된 정당으로, 한반도 최초의 정당 두 개 중 하나인 수구당과 유학파 지식인들의 조선의회, 그리고 신안동김씨대종회가 1895년 신설합당한 조선민족당이 시초이다.

창당 초기에는 창당에 가장 많은 자금을 댄 신안동김씨대종회에서 총재직을 맡았지만 당의 정신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수구당계의 반발로 4대 총재 이영전부터 전국단위 전당대회를 치러 선출하기 시작했다.[1]

을사늑약 당시에는 당 상임고문을 맡고있던 참정대신 한규설만이 반대를 피력했고 찬성했던 평당원 이근택을 당무 집행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제명하며 당 노선을 항일로 설정하였다.

이후 고종의 퇴위를 저지하는 성명을 내게 된다. 항일 행위로 조선민족당 소속들은 내각에서 전부 쫒겨났지만 탄탄한 지역기반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일본의 감시로 인해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졌고 결국 중앙당을 경북도당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1910년까지는 안동과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27일 한일합병이 강제로 진행되자 권성현 총재, 이운근 정책위의장, 정상구 최고위원, 윤근현 최고위원이 광화문 앞에서 집단으로 자결하였다. 본래에는 과격시위 였지만 일본군이 이를 진압하려하자 몸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집단자결하게 된다. 자결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에 의해 저지되어 투옥된 권사룡 사무총장이 옥중에서 총재 권한대행으로 비상상황을 선포하고 을사늑약에 반대했었던 한규설 전 참정대신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내정하며 '국가의 독립만이 당의 유일한 강령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옥중자결하게 된다.

1.1.2.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가 시작할 때부터 매우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던 조선민족당은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던 신안동김씨대종회는 해체되어 각 지의 집성촌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서울 경기의 수구당계도 마지막 남은 수구당계 수장 신유적까지 체포되면서 사실상 와해된다. 그러다보니 지식인단체로 위장해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선의회계가 사실상 당을 주도하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윤형연을 조선민족당 미주지부장으로 임명한 한규설 비대위원장은 상하이로 건너가 3개의 임시정부와 합류논의를 하게 된다. 우선 정당의 성격을 띄고있는 조선민족당은 이승만 집정관의 한성 정부에 참여하여 국무총리를 맡는 등 한성 정부의 제2세력으로 활동 중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일이 잦았고, 여러 단체들 중 유일하게 해외에 규모있는 지부를 둔 점,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수구당) 정통성 등을 들어 준 정부단체 자격으로 초청받았다.

3개 정부가 통합되어 세워진 상하이 임시정부의 의회인 의정원에서 원내 1당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원내대표는 충남 지역구의 이재룡.

그러나 임시정부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이동을 시작할 때에는 불참하였다. 이재룡 등의 조선의회 인사들은 조섬민족당을 탈당하고 임시정부를 따라갔으며 한규설 비대위원장은 충남 온양에서 은거하며 당을 지도했지만 계속해서 조여오는 일제의 감시망에 결국 부산으로 이동하여 최종적으로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향하게 된다. 한규설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비대위만이 당시 한반도 내에서 활동하던 유일한 조선민족당 세력이었으나 이들마저 해외로 가며 한반도 내에서의 조선민족당 세력은 집성촌을 중심으로 한 신안동김씨대종회의 파벌들만이 남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금 등 어려운 상태에 놓인 조선민족당은 미국에서만 활동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임시정부와는 결별하게 된다.

1.1.3. 광복 이후

광복 이후 조선민족당은 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귀국하여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곧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이들은 정식으로 당을 등록했고 남조선과도입법의회에서 원내 2당을 차지하게 된다.

제헌 국회, 2대 및 3대 국회에서도 원내 2당을 차지하였는데 경상북도와 충청남도에서 많은 의석을 얻었고 갈수록 구 수구당계의 지지기반을 회복하고 있었다.

귀국 후 흩어졌던 각 지구당 및 시도당, 집성촌 등을 끌어모으며 세력회복에 나서던 조선민족당은 6.25 전쟁으로 인해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기껏 매매했던 관악구의 중앙당사는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결국 부산으로 남하하였다.

정전 후에는 다시 정치활동을 시작했는데, 이승만 정부와는 실용적 목적을 위해 부분적으로 협력하였으며 민주당의 정권차출을 막아야한다는 명분 아래 3대 대선에서 선거연대를 하게 된다. 대통령 후보 자유당 이승만, 부통령 후보 조선민족당 이기붕.[2]

이후 나라가 안정되자 일제강점기 시작 이후 처음으로 전국단위 전당대회를 치르며 한규설 비상대책위원장 체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새 총재로 선출된 사람이 3대 부통령 경선에서 이기붕에 밀려 떨어진 신기진으로, 훗날 대통령이 되는 신용덕의 조부이다.

4.19 혁명 때 신기진 총재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혁명 말기에 혁명에 가담하게 된다. 이후 민주당과 함께 국회를 양분하게 되며 이승만이 떠난 자유당은 이기붕이 주도하게 되었고, 5대 대선을 앞두고 합당하였다.

1.2. 공명당 당명 변경 이후

1.2.1. 박정희 정부

1961년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모든 정치 활동이 금지 되었고, 다양한 야당 세력들이 비밀리에 모여 회담을 갖게 된다. 그 중에서 원래는 조선민족당 출신이었으나 이승만계의 몰락을 예견하고 자유당으로 입당한 이기붕과 당시 조선민족당 총재 신기진은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는 보수 유권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정치 활동이 재개되자마자 6월 2일 합당을 발표한다.

다만 이 작업은 당시 이승만의 하와이 도피로 사실상 이기붕 혼자 일하고 있던 자유당을 조선민족당이 흡수합당 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당 분위기 쇄신을 위해 70여 년 만에 당명을 공명당으로 개칭하게 된다.

박정희 군정에 반대하는 보수 유권자들, 특히 충청과 PK지역의 유권자들을 많이 끌어모았으며 박정희가 본격적인 정계 진출을 망설이게도 만들었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TK인데, 박정희가 구미 출신인 만큼 박정희가 정식으로 대선에 출마한다면 가장 그를 지지해야할 지역인 TK는 공명당의 최대 표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신안동김씨대종회) 다만 경북지역에서 안동김씨가 유독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던 안동권씨, 안동장씨가 박정희에게 힘을 실을 것을 약속하며 본격적으로 그가 정계에 나오게 된다.

그러나 당시 선관위는 불법적 쿠데타의 주동자의 정당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공화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강제 해산시켜 버렸는데, 이미 박정희는 전역을 한 상태였던지라 서둘러 대선 캠프를 마련하지 않으면 권력이 그대로 공중분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박정희는 당시 공명당의 비주류 계파였던 유익진에게 도움을 청했고, 내무부 장관직을 약속받은 그는 공명당을 탈당하여 민주공화당을 창당한다.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박정희는 그대로 대선 후보로 나섰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공명당, 신민당, 국민의당 등에서 신기진, 김영삼, 김대중이 충청, PK, 호남의 표를 있는대로 끌어왔지만 군부가 투표 조작을 저지르는 바람에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박정희가 5대 대통령이 된 후 야 3당은 합당 논의가 오갔고 가장 규모가 큰 공명당에 무려 10개 당이 흡수합당되;었다. (11당 합당)
초대 전당대회에서 아주 근소한 차이로 신기진이 김영삼을 누르고 당 총재로 선출되었고, 신기진은 김영삼을 수석최고위원에 임명했다.

계속해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나가던 공명당은 당시 열린 1979년 재보궐 선거에서 대구 병 선거구의 지역구 당선자를 내는 대이변을 일으켰다. 거기에 경북 안동시까지 당선시키면서 대구경북에서의 기반을 회복한 모습을 보였다.

1.2.2. 전두환 정부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가 또 독재를 시작하자 총재 신기진과 상임고문 김대중은 사형을 선고받고, 김영삼은 가택연금 된다. 김대중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했지만 신기진은 사형되었고, 오랜 투쟁으로 풀려난 김영삼이 새 총재에 오르게 된다.

1.2.3. 노태우 정부

이윽고 13대 대선이 되자 김대중이 돌아왔는데, 단일화에 불응하며 당내 지지기반을 이끌고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한다. 이로 인해 노태우에게 권력을 넘겨준 공명당은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흡수합당하여 세력을 유지하였다.

노태우 정부 3년차, 노태우의 민주정의당이 합당제의를 해오며 김영삼이 이에 찬성하지만 당내 반발세력에 의해 합당이 무산되어 결국 본인의 지지 세력을 이끌고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창당, 2주만에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으로 신설 합당하게 된다. 김종필 또한 여기에 동참한다.

결국 당은 신기진 전 총재의 아들인 신성민 총재가 이끌게 되었는데, 신성민 후보는 민주자유당의 세를 꺾기 위해 13대 총선에서 지역구였던 인천 을을 떠나 고향이자 김종필의 지역구 충남 부여로 내려갔다. 당시 김종필은 본인의 당선을 확신하며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고, 결국 신성민이 승리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공명당은 갑자기 부상했고 전국적으로도 98석을 얻어내며 완벽히 재기에 성공한다. 여당은 과반 확보에 실패했고 결국 이합집산으로 분열되게 된다.

분열세력 중 민정계는 대부분 TK가 기반이었으나 공명당에게 전부 빼앗겨 멸망했고, 부산과 경남의 통일민주계는 탈당하여 공명당으로 돌아오게 된다. 김종필계는 탈당하여 독자적으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3]

1.2.4. 김영삼 정부

결국 다시 공명당으로 돌아온 김영삼은 공명당 후보로 김종필과의 단일화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1. 조선~대한제국기에 전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정당이었다. 조선의회는 대학교수나 변호사들 같은 유학파 지식인 위주였기에 지역기반이 있을리 만무했고, 수구당의 서울/경기 기반과 신안동김씨대종회의 경상북도 기반을 합쳐 창당되었고, 이후는 서울경기와 경북의 대립으로 나뉘다가 3대 총재 김영도의 지역확장 정책으로 다양한 지방의 당원이 유입되며 당내 지역대립은 약화되게 되었다.
  2. 당선 이후 이기붕은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긴다.
  3. 그러나 수장인 김종필이 본인의 고향에서 패배한 만큼 그 세력은 매우 약해졌고, 김종필은 지역기반을 충남에서 강원도로 옮기게 되나, 강원도의 의석 수가 워낙 모자랐던 탓에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김종필 본인은 재보궐선거에서 춘천에서 당선되었고 강원도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나 그를 제외하면 모든 기반은 아직 충청에 있었기에 전체적으로 세가 약해진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