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당"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하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
{{틀:대한민국 연방평의회 원내구성}}
 +
 
{| class="wikitable" style="max-width: 550px; width: 100%;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text-align: center; font-size: 14.4px; border: 2px solid #003478;"
 
{| class="wikitable" style="max-width: 550px; width: 100%;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text-align: center; font-size: 14.4px; border: 2px solid #003478;"
! colspan="5" style="background: #ffffff; color: #000000;" | [[파일:독일연방의회문징.svg|x25px]] 대한민국의 제1야당
+
! colspan="5" style="background: #ffffff; color: #000000;" | [[파일:독일연방의회문징.svg|x25px]] 대한민국의 여당
 
|-
 
|-
 
| style="background: #FF8C00; font-size: 12px; width: 30%;" | <div style="margin: -5px -10px;">{{글씨 색|#FFF|신용덕 정부}}</div>
 
| style="background: #FF8C00; font-size: 12px; width: 30%;" | <div style="margin: -5px -10px;">{{글씨 색|#FFF|신용덕 정부}}</div>

2024년 3월 29일 (금) 00:03 판

독일연방의회문징.svg
[ 펼치기 · 접기 ]
독일연방의회문징.svg 대한민국의 여당
신용덕 정부
이현수 정부
유현 정부
공명당
(2016.04.11.~2024.10.20.)
자유민주당
(2024.10.20.~2025.09.19.)
민주개혁진보연합
(2025.09.20.~현재)
공명당로고4.png
공명당
원어명
국가 조선-일제강점기 조선-조선인민공화국-미군정-대한민국
약칭
공명
표어
이제는 공명
창당
1895년 5월 4일 (조선민족당)
당명 변경
1953년 6월 2일 (공명당)
이념
조화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 자유보수주의
스펙트럼
중도~보수
대표
신용덕
원내대표
이준영
사무총장
이용연
정책위의장
김병택
국회의원
96석 / 300석 (32%)
광역단체장
6석 / 17석 (35%)
기초단체장
83석 / 226석 (36.7%)
광역의원
366석 / 824석 (44.4%)
기초의원
968석 / 2,927석 (33%)
'
석 / 석 (%)
당색
공명오렌지 (#FFA500)
정책 연구소
공명중앙연구소
후원회
공명당중앙당후원회
국제조직
국제민주연합
학생조직
학생공명당
재산총액
62,523,666,222원

개요

대한민국의 중도 보수 정당

1. 역사

1.1. 조선민족당 시절

1.1.1. 일제강점기 이전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정당들 중 가장 오래된 정당으로, 한반도 최초의 정당 두 개 중 하나인 수구당과 유학파 지식인들의 조선의회, 그리고 신안동김씨대종회가 1895년 신설합당한 조선민족당이 시초이다.

창당 초기에는 창당에 가장 많은 자금을 댄 신안동김씨대종회에서 총재직을 맡았지만 당의 정신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수구당계의 반발로 4대 총재 이영전부터 전국단위 전당대회를 치러 선출하기 시작했다.[1]

을사늑약 당시에는 당 상임고문을 맡고있던 참정대신 한규설만이 반대를 피력했고 찬성했던 평당원 이근택을 당무 집행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제명하며 당 노선을 항일로 설정하였다.

이후 고종의 퇴위를 저지하는 성명을 내게 된다. 항일 행위로 조선민족당 소속들은 내각에서 전부 쫒겨났지만 탄탄한 지역기반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일본의 감시로 인해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졌고 결국 중앙당을 경북도당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1910년까지는 안동과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27일 한일합병이 강제로 진행되자 권성현 총재, 이운근 정책위의장, 정상구 최고위원, 윤근현 최고위원이 광화문 앞에서 집단으로 자결하였다. 본래에는 과격시위 였지만 일본군이 이를 진압하려하자 몸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집단자결하게 된다. 자결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에 의해 저지되어 투옥된 권사룡 사무총장이 옥중에서 총재 권한대행으로 비상상황을 선포하고 을사늑약에 반대했었던 한규설 전 참정대신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내정하며 '국가의 독립만이 당의 유일한 강령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옥중자결하게 된다.

1.1.2.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가 시작할 때부터 매우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던 조선민족당은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던 신안동김씨대종회는 해체되어 각 지의 집성촌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서울 경기의 수구당계도 마지막 남은 수구당계 수장 신유적까지 체포되면서 사실상 와해된다. 그러다보니 지식인단체로 위장해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선의회계가 사실상 당을 주도하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윤형연을 조선민족당 미주지부장으로 임명한 한규설 비대위원장은 상하이로 건너가 3개의 임시정부와 합류논의를 하게 된다. 우선 정당의 성격을 띄고있는 조선민족당은 이승만 집정관의 한성 정부에 참여하여 국무총리를 맡는 등 한성 정부의 제2세력으로 활동 중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일이 잦았고, 여러 단체들 중 유일하게 해외에 규모있는 지부를 둔 점,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수구당) 정통성 등을 들어 준 정부단체 자격으로 초청받았다.

3개 정부가 통합되어 세워진 상하이 임시정부의 의회인 의정원에서 원내 1당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원내대표는 충남 지역구의 이재룡.

그러나 임시정부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이동을 시작할 때에는 불참하였다. 이재룡 등의 조선의회 인사들은 조섬민족당을 탈당하고 임시정부를 따라갔으며 한규설 비대위원장은 충남 온양에서 은거하며 당을 지도했지만 계속해서 조여오는 일제의 감시망에 결국 부산으로 이동하여 최종적으로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향하게 된다. 한규설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비대위만이 당시 한반도 내에서 활동하던 유일한 조선민족당 세력이었으나 이들마저 해외로 가며 한반도 내에서의 조선민족당 세력은 집성촌을 중심으로 한 신안동김씨대종회의 파벌들만이 남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금 등 어려운 상태에 놓인 조선민족당은 미국에서만 활동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임시정부와는 결별하게 된다.

1.1.3. 광복 이후

광복 이후 조선민족당은 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귀국하여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곧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이들은 정식으로 당을 등록했고 남조선과도입법의회에서 원내 2당을 차지하게 된다.

제헌 국회, 2대 및 3대 국회에서도 원내 2당을 차지하였는데 경상북도와 충청남도에서 많은 의석을 얻었고 갈수록 구 수구당계의 지지기반을 회복하고 있었다.

귀국 후 흩어졌던 각 지구당 및 시도당, 집성촌 등을 끌어모으며 세력회복에 나서던 조선민족당은 6.25 전쟁으로 인해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기껏 매매했던 관악구의 중앙당사는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결국 부산으로 남하하였다.

정전 후에는 다시 정치활동을 시작했는데, 이승만 정부와는 실용적 목적을 위해 부분적으로 협력하였으며 민주당의 정권차출을 막아야한다는 명분 아래 3대 대선에서 선거연대를 하게 된다. 대통령 후보 자유당 이승만, 부통령 후보 조선민족당 이기붕.[2]

이후 나라가 안정되자 일제강점기 시작 이후 처음으로 전국단위 전당대회를 치르며 한규설 비상대책위원장 체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새 총재로 선출된 사람이 3대 부통령 경선에서 이기붕에 밀려 떨어진 신기진으로, 훗날 대통령이 되는 신용덕의 조부이다.

4.19 혁명 때 신기진 총재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혁명 말기에 혁명에 가담하게 된다. 이후 민주당과 함께 국회를 양분하게 되며 이승만이 떠난 자유당은 이기붕이 주도하게 되었고, 5대 대선을 앞두고 합당하였다.

  1. 조선~대한제국기에 전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정당이었다. 조선의회는 대학교수나 변호사들 같은 유학파 지식인 위주였기에 지역기반이 있을리 만무했고, 수구당의 서울/경기 기반과 신안동김씨대종회의 경상북도 기반을 합쳐 창당되었고, 이후는 서울경기와 경북의 대립으로 나뉘다가 3대 총재 김영도의 지역확장 정책으로 다양한 지방의 당원이 유입되며 당내 지역대립은 약화되게 되었다.
  2. 당선 이후 이기붕은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