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당

수상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3월 26일 (화) 22:51 판
독일연방의회문징.svg 대한민국의 제1야당
신용덕 내각
이현수 내각
유현 내각
공명당
(2016.04.11.~2024.10.20.)
자유민주당
(2024.10.20.~2025.09.19.)
민주개혁진보연합
(2025.09.20.~현재)
공명당로고4.png
공명당
원어명
국가 조선-일제강점기 조선-조선인민공화국-미군정-대한민국
약칭
공명
표어
이제는 공명
창당
1895년 5월 4일 (조선민족당)
당명 변경
1953년 6월 2일 (공명당)
이념
조화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 자유보수주의
스펙트럼
중도~보수
대표
신용덕
원내대표
이준영
사무총장
이용연
정책위의장
김병택
국회의원
96석 / 300석 (32%)
광역단체장
6석 / 17석 (35%)
기초단체장
83석 / 226석 (36.7%)
광역의원
366석 / 824석 (44.4%)
기초의원
968석 / 2,927석 (33%)
'
석 / 석 (%)
당색
공명오렌지 (#FFA500)
정책 연구소
공명중앙연구소
후원회
공명당중앙당후원회
국제조직
국제민주연합
학생조직
학생공명당
재산총액
62,523,666,222원

개요

대한민국의 중도 보수 정당

1. 역사

1.1. 일제강점기 이전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정당들 중 가장 오래된 정당으로, 한반도 최초의 정당 두 개 중 하나인 수구당과 유학파 지식인들의 조선의회, 그리고 신안동김씨대종회가 1895년 신설합당한 조선민족당이 시초이다.

창당 초기에는 창당에 가장 많은 자금을 댄 신안동김씨대종회에서 총재직을 맡았지만 당의 정신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수구당계의 반발로 4대 총재 이영전부터 전국단위 전당대회를 치러 선출하기 시작했다.[1]

을사늑약 당시에는 당 상임고문을 맡고있던 참정대신 한규설만이 반대를 피력했고 찬성했던 평당원 이근택을 당무 집행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제명하며 당 노선을 항일로 설정하였다.

이후 고종의 퇴위를 저지하는 성명을 내게 된다. 항일 행위로 조선민족당 소속들은 내각에서 전부 쫒겨났지만 탄탄한 지역기반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일본의 감시로 인해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졌고 결국 중앙당을 경북도당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1910년까지는 안동과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27일 한일합병이 강제로 진행되자 권성현 총재, 이운근 정책위의장, 정상구 최고위원, 윤근현 최고위원이 광화문 앞에서 집단으로 자결하였다. 본래에는 과격시위 였지만 일본군이 이를 진압하려하자 몸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집단자결하게 된다. 자결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에 의해 저지되어 투옥된 권사룡 사무총장이 옥중에서 총재 권한대행으로 비상상황을 선포하고 을사늑약에 반대했었던 한규설 전 참정대신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내정하며 '국가의 독립만이 당의 유일한 강령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옥중자결하게 된다.

  1. 조선~대한제국기에 전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정당이었다. 조선의회는 대학교수나 변호사들 같은 유학파 지식인 위주였기에 지역기반이 있을리 만무했고, 수구당의 서울/경기 기반과 신안동김씨대종회의 경상북도 기반을 합쳐 창당되었고, 이후는 서울경기와 경북의 대립으로 나뉘다가 3대 총재 김영도의 지역확장 정책으로 다양한 지방의 당원이 유입되며 당내 지역대립은 약화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