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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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wealth of Moronia
모로니아 연방국
모로니아의 국기.png 모로니아의 국장.png
국기 국장
표어To Lead is To Serve
이끌어 주는 것은 봉사하는 것이다
국가"I Vow to Thee, My Country"
(내 조국이여, 나 그대에게 맹세하노라)
모로니아 지도.png
모로니아는 오스트레일리아 동부에 위치한 군도 국가이다.
수도젠시티
최대 도시앵글리아
정치
영국 여왕엘리자베스 2세
총독
총리
국회의장
대법원장
휴 잭맨
제이콥 알리
제프리 맥와일드
제리 마테파라에
역사
독립영국으로부터 독립
 • 연방 성립1903년 1월 1일
 • 웨스트민스터 헌장1931년 11월 11일
 • 제헌절1984년 6월 17일
지리
면적225,853 km2 (83 위)
내수면 비율4.3%
시간대GMT (UTC+11)
인문
공용어영어
시아시아어(소수 언어로 인정)
인구
2016년 어림12,830,200명
2015년 조사12,799,200명 (74위)
경제
GDP(PPP)2016년 어림값
 • 전체5260억 (38위)
 • 일인당40,997$ (28위)
GDP(명목)2016년 어림값
 • 전체4740억 (24위)
HDI0.910 (10위, 2013년 조사)
통화모로니아 달러 (MOD) (MO$)
기타
ISO 3166-1322, MO, MOR
도메인.mo
국제 전화+610

모로니아 연방국 (영어: Commonwealth of Moronia 커먼웰스 오브 모로니아[*]), 줄여서 모로니아 (영어: Moronia 모로니아[*])는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나라로, 모로니아 제도와 기타 속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동쪽에는 바누아투, 그리고 남동쪽에는 루니온과 접해 있다. 국명의 어원은 원주민어인 'Molosium'(몰로시움, 깨끗한 자연)에서 유래하였다.

모로니아는 영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과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으며 국가원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며,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연방 성립 이후 대의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모로니아는 여덞 개의 주와 몇 개의 해외 영토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시화 비율이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다.

모로니아 제도는 1770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나가던 도중 발견하여 유럽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788년 1월 26일부터 모로니아로 죄인들을 수송해 정착시키기 시작하면서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인구는 차츰 늘기 시작했고, 대륙은 계속 탐험되어 다섯개의 자치 식민지가 추가적으로 건설되었다. 1902년 1월 1일, 7개의 식민지가 연합하여 모로니아 연방국을 설립하였다. 모국인 영국과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다른 정체성을 점차 가지게 되었다.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의 적용을 받아 행정적으로 모국과 분리되었으며, 1948년부터 모로니아에 거주하는 대영제국 신민들은 모로니아 국적을 사용하게 되었다. 1984년 모로니아 법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어 영국 의회의 모로니아 내 입법권이 정지되었으며, 사법권도 최고재판소가 런던의 추밀원에서 모로니아 최고재판소로 옮겨짐으로서 영국과의 남은 법적 종속관계를 단절하여 자주국가가 되었다.

모로니아는 GDP가 세계에서 38위로 높고, 1인당 GDP은 28위이며 삶의 질이 높은 선진국이다. 인간 개발 지수에서 10위를 기록한 것을 비롯해, 모로니아는 삶의 질, 건강, 교육, 경제적 자유, 시민적 자유와 권리의 보호 등 다양한 국가간 비교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모로니아는 G20, OECD, WTO, APEC, AMRUS, 국제 연합, 영국연방, 태평양 제도 포럼, FIFA, OFC에 가입되어 있다. 한편, 2012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조사에서는 모로니아가 세계에서 4번째로 살기 좋은 나라로 조사되었다.

역사

유럽인 이전의 원주민사

시아시아족이 남긴 고대 벽화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모로니아 대륙이 인도양의 남쪽에 있는 미지의 대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럽인이 실제로 모로니아에 들어온 것은 17세기부터이다. 모로니아가 유럽인에게 발견되기 전까지는 원주민인 시아시아족이 모로니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폴리네시아계이며 현재까지 혈통을 이어오고 있고, 참신한 전통문화풍습을 가지고 있다. 현재까지 그 풍습을 지켜나가고 있으며,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시아시아족은 선덜랜드에 많이 거주하고 있고,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조각 · 직물 · 음악 · 무용 · 종교 등에서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켜 왔는데, 무용, 음악, 미술등의 예술부문에는 다른 폴리네시아계 부족들보다 뛰어나다. 시아시아족의 가면춤, 달의 노래 등은 시아시아족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시아시아족은 현재 모로니아 인구 중 3.5% 정도의 비율로 남아있다.

유럽인의 발견과 이주

제임스 쿡 선장

모로니아 제도는 1770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나가던 도중 우연히 발견하여 간이 쉼터로 활용하면서 유럽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후 제임스 쿡은 모로니아의 아름다운 환경에 감탄하여 모로니아를 유럽에 알리고, 영국은 정식으로 모로니아를 식민지로 편입한다. 1776년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여 그때까지 미국으로 보내고 있던 죄수를 처리하지 못하게된 영국은 호주와 모로니아 대륙을 새로운 유배지 겸 식민지로 이용하게 되었다. 모로니아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초기 역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788년 1월 30일 11척의 영국 선단이 1030명을 태우고 앵글리아에 도착하였고, 개발의 근거지로서 앵글리아가 건설되었다. 1793년에는 최초의 자유이민 11명이 도착하였다.

1813년엔 개척자들에 의해 다른 섬들도 발견되었으며 그해부터 양모의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목축업이 시작되었고 모로니아 발전의 제 1기가 시작되었다. 또한 원주민들과 유럽인들은 서로 화합하기 시작했고, 적대심을 점차 완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동으로 모로니아를 개발하기 이르렀고, 원주민 중에서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확산되었다. 1820년대에는 선덜랜드, 훔, 뉴리즈, 젠시티, 로이프, 체브라 등에 새 식민지가 건설되었으며 에스파냐 원산인 메리노종의 양이 도입되고 개량되어 1808년에는 양모가 처음으로 런던에 수출되었다. 1810년에는 아스카 주의 양 사육 수가 늘었다. 이민과 출산율 증가로 인구도 늘어났다. 자유이민이 증가함에 따라 유형을 중지하라는 요구가 높아져서 1833년에는 유형이 중지되었다. 모로니아는 순조로운 발전을 하고 있었으며 개척도 활발히 진행중이였다. 1853년에는 선덜랜드에서 금이 발견되어 선덜랜드에서 금이 발견되어 선들랜드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또 핀치필드 주에서 다시 1862년에는 웨이즈 주에서도 금광이 발견되어 세계 각지에서 이민이 쇄도하였다. 제 2기의 모로니아 개발은 이 금광에 의하여 촉진되었고, 금광 채굴자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밀의 재배 및 기타 농업이 발달하였다. 그후 이 나라의 농업은 영국 본국에 대한 중요한 식량 공급원이 되었으며, 낙농과 더불어 육류가공 냉동업도 발달하였다.

독립과 제1차 세계대전

1901년 오스트레일리아가 독립하였고, 오스트레일리아 소속이였던 모로니아도 독립하였다. 1903년 연방정부가 수립되고, 7개 주가 연합해 연방을 세웠다. 독립 이전부터 계획적으로 건설되던 젠시티를 수도로 하고, 앵글리아, 뉴리프, 선덜랜드를 광역급 도시로 지정했다. 국민들은 국가의 건설을 위해 힘썼으며, 파르투르카를 위시한 원주민들도 건설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파르투르카는 후에 1967년 사망할때까지 원주민의 인권보장등과 모로니아의 발전에 힘을 썼으며, 정부에서는 국가유공자 훈장을 수여하였고, 국립 유공자 묘지에 안장하였다. 대부분의 도시가 깨끗하고 살기 좋게 조성되었고, 산업도 꾸준히 발전 중이었다. 그러던 도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모로니아는 호주, 루니온과 함께 영연방군으로 참전하였으며 12,000명을 보내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이 시기에 연합국을 도우며 군수품을 생산해 수출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다.

이렇게 모로니아는 수출로 많은 돈을 벌고, 산업 발전의 기틀과 경제 재건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번 돈을 기반으로 많은 산업 시설을 건설하고, 정부는 경제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모로니아 역사 상 가장 휼륭한 총리로 불리는 빌 루크도 이 시대에 등장하였다. 빌 루크는 원주민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원주민들이 편히 살고 교육을 받을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모로니아의 경제를 발전시켜 "거지와 도둑이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임기 말년인 1926년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끝내 숨지고 만다. 당시 온 모로니아 국민과 원주민들은 슬퍼했으며, 현재에도 모로니아의 링컨으로 불리며 칭송받고 있다. 1930년대에는 순조로운 발전을 하고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며 모로니아도 상황이 급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조널 댈런 장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모로니아는 호주, 루니온과 함께 영연방군 22,000명을 유럽에 보내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싸웠다. 1942년에는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고 남하를 시작하였고, 모로니아는 오세아니아로 남하하는 일제를 막아내기 위해 3만명을 동원했으나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때 모로니아 역사 상 최고의 장군인 조널 댈런이 나타났다. 그는 모로니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장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훌륭히 지휘하였다.

일제는 1,200기에 달하는 급강하폭격기를 동원하여 젠시티와 앵글리아를 폭격하였고, 많은 시민들이 사망했다. 하지만 조널 댈런의 뛰어난 전술로 막아내는데 성공하고, 두 차례의 교전에서도 승리했지만, 앵글리아, 뉴리프, 젠시티의 주요 건물과 도심이 절반 이상 파괴되었다. 그리고 젠시티가 잠시 점령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조널 댈런과 군사들, 또한 미국에서 파견된 군인들은 최선을 다해 끝내 젠시티를 탈환하는데 성공하고, 6개월 뒤 모로니아의 모든 도시를 탈환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며 모로니아는 일본군을 막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현대

모로니아의 경제 기적을 상징하는 젠시티 스카이타워

태평양전쟁이 끝난 직후의 1945년, 일본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도시를 회복해야 했다. 당시 재임하던 버나드 웰레스 총리는 '여유로운 재건' 이라는 느리고 단계적인 재건사업을 계획했다. 재건사업 이후 노동자의 재방출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것을 기다릴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고 다음해 총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새 수상 조지 러퍼거슨은 전임 총리와는 달리 빠른 재건을 추구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거금을 대출받아 노동자를 대거 고용, 토목공사 등에 투입했다. 1949년 12월부터 1950년 3월까지 노동자들은 임금 15%인상을 요구하는 대규모 파업시위를 벌였다. 노동자들의 대우는 적었고 인플레이션 위기가 확대되어 불안감이 심화되었고, 토목공사로 인한 실업자 수용은 임시방편으로 끝나버린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부는 이 시위를 비롯해 노동조합을 제압했으나 오히려 노동조합은 거대한 세력으로 결속되어 정부는 이들을 위한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11대 총리 토니 애벗은 1950년 집권초부터 산업발전에 집중 착수하여 늘어나는 실업자를 수용하고 인플레이션을 방지하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건축과 토목건설이 발달했으며, 금융업 중심의 업종을 부흥시켰고, 마침 한국전쟁이 터져 제조업이 크게 발전하고 영국을 따라 남한에 파병하면서 정치적으로도 위상이 높아졌다. 게다가 이후로 수출시장이 크게 확대됨에 따라 모로니아는 1950년대 후반부터 세계 7위의 경제부국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이 성장세는 198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으며, 이를 모로니아의 경제 기적(Moronia Economic Miracle)이라고 한다. 전성기였던 1950년대 말~1960년대 말에는 10% 성장을 하던 일도 잦았으며 경제 기적동안의 연 평균 경제 성장률은 6.8%에 달해 일본, 그리스에 이어 3위를 기록하였다. 원주민과 여성이 자발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이 합당하게 받아들여진 것도 이 시기였다. 모로니아의 원주민들은 평화적인 전통을 유지해왔으나, 유럽인들의 이주 이후 유럽인들이 부유하게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해야 함과 존경심, 부러움등을 느껴 점차 유럽인의 도시와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참정권은 이미 1905년부터 보장되어왔으나 실질적으로 그 점이 부각된 것은 60년대이며 70년대에 활발한 여성운동이 일어났다.

모로니아의 1970년대 시작은 평화 선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970년 3월 20일, 훔에서 31세의 남성이 스파이 혐의로 검거된다. 이 남성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왔다고 자백했으며, 모로니아와 기타 국가의 정보를 가져가려고 왔다고 진술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민들은 불안감에 휩싸였으며, 평화적인 이미지도 점차 사라지게 된다. 당시 모로니아 총리였던 데이비드 존스턴은 평화적인 국가라는 건국 모토를 되살리기 위해 평화 선언을 공식적으로 하게 된다. 평화 선언에는 각종 평화정책을 점진적으로 시행하고 모로니아가 세계 평화 사절이 될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권 국가들과 사이가 냉랭해지기도 하였으며 미국은 "소비에트 연방의 추악함이 드러나는 사건"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는 특히 첸 오스틴의 활약이 돋보였다. 그는 기독교 목사였으며,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우연히 가난한 아이들이 얻어 맞는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는 후에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작은 교회의 목사가 되고, 착실히 봉사하고 나누는 삶을 살았다. 또한 가난한 사람의 생활 개선에 큰 노력을 하였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잃기까지 하며 베푼 그의 모습은 모로니아 국민들에게 아주 인상 깊이 남았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였고, 그는 1976년 노벨평화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는 노벨상 상금까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했으며, 1992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했다. 1993년엔 그가 생전 쓰던 말이나 글등을 모아 "사랑하라 하셨다"라는 책을 그의 동생과 친구들이 퍼냈는데, 모로니아는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오랫동안 애송되어 2000만부 이상 팔리기도 하였다. 1980년대는 스포츠와 문학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로니아 사커, 모로니아 베이스볼, 모로니아 럭비등이 연달아 개최되고, 1982년과 1986년 월드컵 본선에 올라 각각 2라운드 (현재의 8강)과 16강에 진출하는 등의 스포츠 돌풍을 일으켰으며 아그네스 카라리나의 등장으로 예술문학도 큰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에는 경제가 계속 성장하고, 1인당 소득이 3만불을 돌파하는등의 성장을 보였으나 1998년 아시아 경제가 하락하자 경제적 타격을 입기도 했다. 2003년~2007년은 세계 호황에 따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2008년엔 미국발 경제 위기로 증시가 -2.31%나 하락했으나 점차 호전되었고 지금은 G20 소속국이자 OECD 가입국인 선진국이다.

정치

모로니아의 국회의사당
모로니아의 국회의사당 내부

모로니아는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모로니아는 영연방에 가입하여 엘리자베스 2세 여왕폐하를 국가원수로 모시고 있다. 또한 여왕폐하가 임명하는 총독이 여왕폐하의 대리자로 있으며, 국가를 관리하는 등의 일을 한다. 정부수반은 다수당의 대표가 임명되는 총리이다. 모로니아는 전석 비례대표제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의석수는 임기 4년인 의원 300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주민인 시아시아족, 기타 속령의 경우에는 소수 의견 배려 차원에서 20석을 배정하여 균형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의회의 다수당 지도자, 즉 연방총리가 국가를 실질적으로 통치한다. 여당진영과 야당진영은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여 서로 정치적으로 견제를 하고 있으나, 중요 국가적 정책사안에서는 긴밀히 협력한다. 의회의 원내교섭단체 구성 가능 의석수는 20석 이상이며, 여러 정당이 연립하여 구성할 수 있다.

1999년, 폴 키팅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영연방 완전독립 지지자들의 요청으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이 나라의 군주제 폐지 및 체제 전환이 논의되었으나, 과반수(약 54%)가 전환에 반대하였다. "영국과의 우호" 및 (독립시 도입할) 정치체제간 갈등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2007년 1월의 여론조사(Newspoll 조사)에서는 45% 대 36%(19%는 무응답)로 공화국 전환에 찬성, 전세가 역전되었다. 1984년에는 1984년 모로니아 법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어 영국 의회의 모로니아 내 입법권이 정지되었으며, 사법권도 최고재판소가 런던의 추밀원에서 독자적 최고법원인 모로니아 대법원으로 이관됨으로서, 기존 영국판례만을 원용하던 사법권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었다. 그 아래에 각 주도마다 고등법원이 위치해있으며, 지역 주요도시들마다 지방법원이 있다.

자연

릴리프 산

오스트레일리아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모로니아는 여러개의 섬들과 속령으로 이루어진 제도 국가이다. 모로니아는 호수가 많고 평야지대가 많은 섬나라이며, 총면적은 모로니아 제도와 그 외 작은 섬들, 속령을 모두 합쳐 225,853㎢로 루니온과 비슷하다. 모로니아는 평야와 호수의 나라로서 그 지형이 매우 아름답다. 모로니아 제도엔 평야지대가 많아 농업이 활발하며, 밀, 쌀, 보리 등이 대표적인 수확물이다. 모로니아 제도엔 호수도 많은데, 산 정상에 있는 호수도 많아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준다.

모로니아는 온대 지역에 속하지만 지역에 따라 기후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젠시티는 연중 따뜻하며 눈을 보기 힘들다. 반면에 플레인포트는 겨울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기온의 교차는 작으며, 연평균 기온은 북부의 젠시티에선 15℃ , 남부의 카멜턴에선 10 ℃안팎이다. 지구 온난화로 만년설이 녹아내린다. 남부의 경우엔 대체로 온화하나, 두 계절이 있다. 6월부터 9월까지는 선선하고(한랭기), 11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는 덥다(온난기). 한랭기에는 수온이 섭씨 21도까지 내려가고 평균 기온은 대체적으로 낮에는 섭씨 24도, 밤에는 섭씨 15도 정도이다. 해변에서 여유롭게 보내려는 여행객들은 이 냉기를 피해야 하나, 도보 여행자들에게는 이 시기가 남부를 방문하기에 좋은 때이다.

경제

앵글리아
젠시티

모로니아는 수정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모로니아는 빈부격차가 적은편이며 지니계수도 24.0로 적은 편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경제가 저출산 고학력화와 고령화 등의 문제로 악화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또한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로 증시가 폭락하는 피해를 입었었다. 모로니아 정부는 2011년부터 경제자유무역도시를 개발하기 시작하고 여러 나라들과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등의 해결책등을 사용하고 있다. 모로니아는 20세기 초기까지 수출의 70%는 영국 본국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마다 대영 의존도는 감소하여 1970년대에는 4% 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수입국에 있어서도 영국으로부터의 수입이 수입 총액의 40∼50%를 차지하였으나 1970년대에 23%로 떨어졌고, 최근에는 3% 이하로 그 비중이 크게 낮아졌다. 이에 대신하여 미국, 일본, 독일로부터의 수입이 증가하였고 EU 국가와 캐나다로부터의 수입도 늘었다. 이후로는 아시아태평양 국가와의 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증하여 2009년에는 중국, 일본, 대한민국이 가장 중요한 수출 상대국이기도 하였다.

모로니아를 대표하는 산업은 농목이라고 할 수 있다. 목양은 모로니아의 주력 산업으로서 양은 북부에 40%, 남부에 60%의 비율로 분포한다. 양모의 수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농산물을 중심으로 하는 1차산품이 수출의 55%를 차지한다. 그외 육류·유제품은 양모에 버금가는 수출품이다. 낙농지역은 남부에 집중하며, 양모에 비하여 훨씬 집약적으로 경영된다. 북부의 동쪽 및 남쪽 연안에는 혼합농업 지역이 발달하여, 목초 등과 윤작을 하면서 곡류의 생산이 활발하다. 또한 제조업과 IT도 발전해 모로니아에선 품질이 좋은 전자제품이 생산된다. 또한 모로니아제 의약품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모로니아의 쉬운 기업 설립 절차로 인해 모로니아에서는 다른 국가보다 기업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며 이 기업들이 모로니아가 무세금, 높은 사회 복지를 국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게 하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모로니아는 보호무역에서 자유무역을 꾀함으로서 다른 국가가 좀 더 용이하게 모로니아산 물건들을 수입해 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모로니아 정부는 2011년부터 모로니아의 공업이 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각 시 중에 발달한 시를 뽑아 '경제자유무역도시'로 개발하는 정책을 시작하였으며 경제자유무역도시의 이점인 무관세와 자유로운 상품판매로 모로니아의 국민들이 좀 더 원활하게 질이 좋고 값 싼 공산품들을 얻어 낼 수 있게 하고 있다. 정부는 현재 "공업 발전과 생산력 증대, 그리고 나아가 모로니아의 밝은 공업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문구로 경제자유무역도시 정책을 펼쳐 나가고 있다. 정부에서도 발벗고 나서서 우리나라의 경제자유무역도시를 홍보하여 외국의 공장 유치를 시도하고 있다.

사회

이오니아 광장
시아시아족

모로니아 인종은 영국 및 아일랜드계(67%)·기타 유럽계(19%)·아시아계(12%)·원주민인 시아시아족 및 기타(2%) 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외주택의 정원에는 수영장이 사파이어처럼 반짝이고 있고, 요트들이 항만을 가로질러 미끄러져가고 있으며, 도로는 자동차로 붐빈다. 영국계 주민이 많고, 영연방의 하나인 탓에 생활양식이 영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모로니아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된 복지사회이다. 모로니아는 영국 의료보험 제도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를 운영하고 있다. 국가에서 의료를 전담하며(대부분의 병원은 국가에서 운영) 의료비는 전액 무상이다. 이 제도는 1940년대부터 시행되었고 당시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모로니아와 그 외의 식민지들도 대부분 시행되어왔던 의료 보험이다. 고등학교(High School)까지 무상교육제도(의무교육연령은 7~19세)가 실시중이다. 일부 특정 사립 학교의 교복 등을 제외하곤 모두 국가에서 무료 제공하고 있다. 모로니아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된 복지사회이다. 사회보장제도는 고령자·신체장애자 등에 대한 연금과, 실업자·병약자·자녀가 있는 가정에 대한 수당 등이 있다. 그 밖에 여러 복지단체에 대해서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또한 주택정책이 잘 되어 있어 2018년 현재 모로니아의 주택 보급률은 70%를 조금 웃돌아 세대의 약 25%의 정도는 임대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모로니아의 공용어는 영어이다. 2011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80%는 가정에서 영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영어는 현재 국제 공용 언어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언어로써,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어학연수, 유학, 워킹 홀리데이 등의 형태로 모로니아에 온다. 모로니아는 영국의 식민지로써 영국식 발음을 사용한다. 주변국인 호주와 루니온(뉴질랜드)와는 다르게 언어가 변질되지 않고 영국 본토 발음 그대로 유지되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모로니아의 영어는 영국식 영어와 마찬가지로 미국식 영어와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단어나 표현뿐만 아니라 같은 단어마저도 다르게 읽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모로니아도 글로벌 시대에 맞춰 중등교육부터 외국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치기도한다. UN 공식언어인 불어,중국어,스페인어,러시아어,아랍어 중 하나를 택하여 수업을 듣는다. 하지만 별개로 한국어, 일본어, 인도네시아어, 태국어 등 학교마다 있는 외국어 중 자신이 원하는 언어를 제 2외국어로 선택하여 수업을 들을 수 있다. 또한 이민 1세대나 2세대의 상당수는 두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베트남계 이주민은 베트남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영어 구사자도 있다. 일례로 동남아시아에 온 주민은 베트남에서 온 주민처럼 고향 언어를 사용하는 점이랑 영어를 같이 구사하는 점도 있는 편이다. 처음 유럽인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약 100에서 200개의 토착 언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약 50개 정도만 살아남아 있으며, 그중에 20 개는 사멸 위기에 놓여 있다.

현재 모로니아에 국교는 없으나 크리스트교가 사실상의 국교 역할을 하고 있다. 영연방 국가인 것과 영국에서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 현재에 이르게 되었으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크리스트교를 믿고있다. 하지만 이들중 대다수는 종료응답만 크리스트교라고 답할뿐 실제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그마저도 40대 이상이 대다수이고 젊은층에서는 교회를 정기적으로 다니는 사람은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드물게 있다.

교육

초등 교육

초등학교는 6년의 동안 교육을 받는다. 영어,수학,사회,과학 등의 다양한 과목을 의무적으로 배운다. 등교 시간은 주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8시 40분부터 9시까지 이고 하교 시간은 오후 3시부터 3시 30분까지이다. 학년은 보통 2월경에 시작해서 11월 중하순에 끝난다. 방학은 각 계절별로 있고 봄과 가을은 아주 짧은 2주간의 방학이 있다.

중등 교육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따로 있지 않고 한 학교이며 이를 High School 이라고 부른다. 7학년부터 10학년까지는 중학생이고 11학년과 12학년은 고등학생으로 구분된다. 한 교실에서 수업을 모두 하지않고 필수적인 영어, 수학, 과학, 역사를 제외하곤 선택으로 하여 수업을 듣기 때문에 매 시간 교실을 옮겨다녀야된다. 외국어 과목은 학교마다 다르지만 약 20여개의 언어들이 있으면 이 중 가장 인기 있는 언어는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인도네시아어, 태국어 정도이다. 최근들어 IT 열풍이 불면서 소프트웨어 개발과 정보보호 등의 컴퓨터 관련 과목들을 이수하면 보너스 점수를 주는 몇몇 국립학교들이 있다.

고등 교육

외국에서 모로니아로 오는 유학생들은 IELTS를나 TOEFL을 치러야 모로니아 대학에 올 수 있다. 단, 유학생이라도 모로니아 중/고등학교에서 몇년간 정규교육을 받는다면 공인영어시험 점수 없이 모로니아 현지 학생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대입시험을 보고 대학에 올 수 있다.

모로니아는 영국식 학제를 받아들여 학사학위는 보통 3년제로 운영되며, 석사 학위도 코스웍의 경우 1~2년까지 다양하다. 아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중국,한국,말레이시아,인도,필리핀과 심지어 이웃 나라인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매우 많은 나라에서 유학을 온다.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대학으로는 젠 시티 대학교(QS 대학순위 32위), 앵글랜드 대학교(QS 대학순위 190위), 선덜랜드 예술대학교(QS 대학순위 651-700위), 로이프 과학기술원(QS 대학순위 301-350위) 등이 있다.

문화

시아시아족의 축제

모로니아는 수백 개의 국립공원만큼이나 다채로운 축제와 행사가 벌어지는데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마디그라 축제, 패션축제, 앵글리아 예술축제, 젠시티 꽃축제, 포도축제를 비롯하여 요트경기·자동차 경주·경마경기 등이 사랑을 받고 있다. 유명한 축제로는 매년 2월에 개최되는 드로우캔디(Throw Candy) 축제가 있다. 모로니아를 개척하던 죄수들이 심심함과 배고픔을 다루기 위해서 서로에게 사탕을 던져주던 놀이가 현재까지 내려온것으로, 현재는 국민들이 젠시티에 와서 서로에게 사탕을 던져주며 모은 사탕을 다같이 먹으며 담소를 나눈다. 참고로 축제 후 정리정돈은 잘되고 있는 편이다. 원주민인 시아시아족들의 문화도 현재 보존되고 있다. 시아시아족은 모로니아의 원주민으로써, 폴리네시아계이다. 그들은 현재까지 혈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참신한 전통문화풍습이 큰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그들은 조각 · 직물 · 음악 · 무용 · 종교 등에서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켜 왔는데, 무용,음악,미술등의 예술부문에는 다른 폴리네시아계 부족들보다 뛰어나다. 시아시아족의 가면춤, 달의 노래등은 시아시아족을 대표한다.

문예로 모로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아그네스 카라리나(1933~1999)가 있다. 모로니아 최고 예술가로, 화가와, 소설가를 함께 하였다. 또한 1978년 나의 집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여받았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나의 집(소설), 수(소설), 달의 울림(그림), 예술은 하늘에(그림) 등이 있다. 모로니아는 인터넷이 최근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터넷 사이트로는 호주, 루니온와 공동으로 홈페이지를 사용하는 야후!7과 토종 검색엔진인 하이드가 있다. 또한 대한민국과 함께 IT가 발달하여 IT강국이라고 불리며, 현재 인터넷 속도는 대한민국을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하고 있다. SNS도 활발하여 SNS를 통한 정치 참여나 사회 문제 제기도 활발히 이루어진다.

스포츠

모로니아의 야구 리그
2010년 월드컵에서의 이탈리아와 모로니아의 축구 경기

모로니아의 스포츠는 오세아니아에서 호주 다음으로 발달했으며, 축구, 야구, 럭비, 소프트볼, 크리켓 등이 대표적인 스포츠이다. 영국인들의 DNA를 물려받아서인지 스포츠의 대한 열정과 승부욕이 매우 강하다. 가장 인기있는 종목은 축구이고 오세아니아의 대표 스포츠 크라켓과 소프트볼, 럭비 등 다양하게 인기있다. 올림픽에도 소규모지만 나가는 편이다. 하계 올림픽에서는 육상, 요트, 카누/카약 등에서 주로 메달을 획득한다. 하지만 세계적인 스포츠 인물을 많이 배출하진 못했다. 축구와 럭비, 크리켓을 제외하면 손에 손꼽을 만큼 매우 적다. 또한 양궁, 야구, 테니스 같은 스포츠들은 약한 편이다.

모로니아인들의 스포츠 열광은 대단하지만 스포츠 산업은 타국에 비해 매우 규모가 작다. 정부에서는 점차 늘린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언제 늘릴지는 미지수이다. 스포츠 국내 리그가 있지만 프로축구 리그와 프로야구 리그, 크라켓 리그, 소프트볼 리그가 전부이다. 그래서 모로니아 내에서는 모로니아의 스포츠 시장이 적다는 비판이 나오며 각 협회의 적극적인 홍보와 정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축구의 경우 1977년 정식 리그가 출범하였으며 리그 이름은 모로니아 국왕컵 축구리그(M리그)이다. 모로니아 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최근 우승팀은 AS 앵글리아(17/18컵 기준)이다. 월드컵에는 1982년 처음 출전했으며 1982년과 1986년 각각 2라운드(현재의 8강)과 16강에 가는 전성기를 누렸다. 모로니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에 총 7번 참가(1982, 1986, 1998, 2002, 2006, 2010, 2018)했으며 이 중 2라운드(현재의 8강) 1회(1982), 16강 3회(1986, 2002, 2006)를 기록하였다. 1998년에는 강팀 유고슬라비아, 독일을 상대로 패배했으나 선전하고 미국에게 2대1로 승리했다. 2010년에는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에게 1대1로 비기고 파라과이, 슬로바키아에게도 무승부를 기록한 뒤 3무로 무패탈락하여 화제가 되었다. 2018년에는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페루를 2대0으로 이기고 프랑스, 덴마크, 호주와 같은 조(C조)가 되었다. 프랑스와 덴마크에 패배하였으나 호주와의 "오세아니아 더비"에서 2대0 승리를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크리켓의 경우 인기도 많으며 투자나 리그 규모도 잘 자리잡았고 그만큼 국대 크리켓 실력도 세계적인 강호다. 매년 12월 26일 개막하는 전통이 있으며 이듬해 8월 중순에 폐막한다. 크리켓 월드컵에서도 강호이며 2007년, 2011년 크리켓 월드컵 우승과 2013년 준우승을 거둘 정도로 경쟁력이 있다.

야구의 경우 1980년 실업리그를 운영하는 모로니아야구협회(MBF)가 설립되었으며 기업에서 후원하는 실업야구팀으로 구성된 실업리그에는 초창기엔 4개 구단만 참가하였으나 2개 구단이 더 참가해 6개 구단이 리그를 진행하였다. 1995년 실업야구가 정식 야구리그로 승인받고, 프로야구로 격상된다. 이에 따라 1996년 10월 프로야구협회가 설립되었다. 현재는 8개의 구단이 참가중이며 북군과 남군으로 나누어 경기를 치루고 있다. 모로니아의 야구 실력은 국제적으로 중위권이다. WBC에는 매번 참가했으나 2009년 2라운드를 제외하면 모두 1라운드 탈락하였다. 2015 프리미어12에는 순위 11위로 참가하였으나 1라운드 탈락하였다.

럭비의 경우 뉴질랜드보다는 이미지가 약하지만 호주와 함께 강국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유니폼 색깔에 맞추어 "블루 보이즈(Blue Boys)"라는 별명을 보유하고 있으며, 1980년대 이후 융화 정책을 통해 사모아, 통가 등의 타 오세아니아 국가 출신 귀화 선수를 영입하며 전력 상승을 이뤄냈다. 2015년 럭비 월드컵에서는 4강까지 갔으나 준결승에서 호주와의 분전 끝에 패배하였다.

외교

2010년 가브리엘 게이츠 모로니아 총리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만남

모로니아는 전통적인 외교 강국으로, 영연방 소속국으로서 호주, 루니온, 영국 등과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과도 중요한 파트너이며 비NATO(非-NATO), OECD, 오세아니아 경제 공동기구의 회원국이다.

영국과의 관계

모로니아는 1901년까지 '영국령 오스트레일리아 부속 모로니아' 로 영국의 직접관할이 아닌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부속지역으로 관리되었다. 그런데 오스트레일리아가 1901년 독립국이 되면서 '영국령 모로니아' 로 본국이 직접 관리하는 식민지가 되었지만 1903년에 독립했다. 모로니아는 영국의 요구에 따라 19세기 보어 전쟁, 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 파병해 함께 싸웠다. 그런데 1945년, 영국이 국제연합 가입으로 식민지 정책을 완전히 포기함으로 모로니아는 공식적으로 영국의 자치국이 아닌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뒤 모로니아는 1931년 영국 하원에서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비준하였다. 그 후 영국과 모로니아는 같은 영연방 국가로써 유대감을 이어갔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영-모로니아의 연대관계는 풀리기 시작했다. 이미 50년대부터 유럽공동체(EC) 가맹을 고민해온 영국은 모로니아의 갖은 런던 로비에도 불구하고 1만 km나 떨어져 있었다. 1973년 영국의 EC 가입은 모로니아로선 영국과 유럽의 시장이 멀어지는 것이고 오세아니아 지역에 고립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영 수출비율은 1940년 80%에서 1971년 10%미만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국민의 탈식민지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특히, 당시는 글로벌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탈식민지를 부추기는 데에 앞장섰다. TV, 국제전신전화, 80년대 컴퓨터와 IT기술 등의 발달은 영국뿐만이 아니라 세계화와 자주독립으로 이끌었다.

외부적으로 영국의 힘이 약해졌고, 미국과의 동맹, 오스트레일리아와 루니온 등과의 연결도 주 원인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국의 요청으로 파병했고, 1951년 태평양안보 차원에서 오스트레일리아-모로니아-리오스트리아(당시 루니온)-미국의 AMRUS 동맹을 맺었다. 중동오일을 잡기 위해 영국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병했으나 영국이 결국 중동주둔군을 철수시키자 모로니아도 전력공급에 차질이 생겼고, 영국에 대한 실망도 커졌다. 1960년의 베트남 전쟁은 영국의 주도가 아닌 미국의 전쟁이었는데, 이 전쟁에 모로니아는 해병대를 파병했다.

오세아니아 국가들과의 관계

모로니아는 1903년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독립한 이후 오세아니아 국가들과 연대를 강화하는 데에도 중점적으로 노력해왔다. 오스트레일리아와는 가장 먼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으며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모로니아군 1만 5천여 명이 터키의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해 연합군과 함께 싸웠는데, 8천 명이 전사하고 7,000명이 부상당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루니온의 리오스트리아와는 1909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는데, 리오스트리아의 아니크 세이시 황제가 패도정치로 급변하자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와 함께 강력하게 규탄해왔다. 리오스트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모로니아는 '모로니아-리오스트리아 상호방위조약' 을 철회했고 신생 정부 리아트리스에게 지지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모로니아와 루니온의 본토 일부가 일본군에 점령당하자 오스트레일리아의 지원군 파병으로 연합군이 결성되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모로니아, 루니온은 매년 4월 25일 'AMRAC Day(Australia-Moronia-Runion Army Corps)' 를 공휴일로 지정하고 전쟁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행사를 연다.

1960년대 모로니아는 경제 기적으로 인한 풍요로 색깔론과 같은 극단적 반공성향이 집권당에 퍼져, 미국의 지지하에 리아트리스를 강력히 차단했고 많은 제재를 가했다. 과거에는 리오스트리아를 제재하고 신생독립정부 리아트리스를 지지했으나, 그 당시에는 세계대전과 추축국 세력만이 적대와 경계의 대상이었지 사회주의,공산주의의 확산에 경계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따라서 모로니아 정부의 대외행동도 정반대로 변했다. 사회주의 국가가 된 리아트리스가 자유주의 리오스트리아를 분리시키자 리오스트리아를 가장 빠르게 정식 정부로 인정했다. 1972년 리아트리스 해군함정이 북섬에 출현했을 때는 군함을 파견했다가 그해 2월 21일 리처드 닉슨 미국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자 이틀만에 복귀하였다. 이외에도 모로니아는 1950년대부터 남태평양의 여러 국가들에서 내전이 발생할 때마다 중재역할을 도맡아 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영국령 식민지 시절 행정구역의 범위로 시비가 붙은 '영토확장론' 이 있을 때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솔로몬 등 주변 국가들과 싸늘한 관계가 생기기도 했다.

영토 분쟁

모로니아에서는 1950년대 중반부터 국민당 피터 리처드슨을 중심으로 한 일부 정치인들은 모로니아의 부속 관할지역에 주변국가의 섬을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AMRUS 조약의 영향으로 인해 대부분 묵살되었다. 그러나 제조업과 농업 중심으로 수출량이 증가하고 국내경제가 크게 발전하자 우익 정당들이 정세를 장악함으로 영토확장 주장은 힘있게 커져나갔다. 1961년, 국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고 퍼슬린 루크 총리가 재직하기 시작한 것은 구체적인 전환점이었다. 퍼슬린 루크 총리는 10월 3일 솔로몬의 일부 섬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내포한 연설을 했다. 1962년에는 솔로몬 정부에 공식적으로 데니 섬(Ndeni Island)을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가 오세아니아에서 비난의 중심에 섰고 1964년 선거철에는 또다시 영토발언을 꺼내기도 했다. 우익 인사들과 기득권층에서는 루크 내각을 옹호했지만 주변 국가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경제 호황속에 퍼슬린 루크의 국민당은 보수층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으며 다음 선거에서도 또다시 승리했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루크 내각의 영토욕심 행동은 계속되었고 더욱 노골화되었다. 1968년, 국민당 라이언 캠벨 의원이 오스트레일리아령 노퍽섬까지도 모로니아의 행정구역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의회연설을 하자 모로니아-오스트레일리아 간의 외교관계는 역사상 처음으로 싸늘해졌다. 결국 캠벨이 공식 사과함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이 사건은 이후로 두고두고 비난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은 잘 수그러들지 않아 1970년대 초반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1971년 노동당(현 좌익민주당) 앤디 셰인 내각이 들어서면서 주변국과의 관계개선에 박차를 가했고, 마침 세계정세도 우파가 수그러드는 분위기라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60년대의 영토시비는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측면만 보여주었을 뿐 모로니아와 우파 정당들에게 돌아간 이득은 없었다.

대한민국과의 관계

2011년 가브리엘 게이츠 모로니아 총리와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의 만남

모로니아와 한국과의 관계는 좋은 관계이다.1950년 6.25 전쟁 당시 모로니아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오세아니아에서 호주 다음으로 두 번째로 참여한 국가이다. 포병 1개 대대와 호위함 4척, 육군 장병 4,000여명을 파병했다. 경기도 가평 일대에서 영국, 호주, 루니온(뉴질랜드), 캐나다 등과 함께 영연방군 일원으로 북한군, 중공군과 가평 전투를 통해 교전을 벌였던 적도 있었다. 현재 가평에 영연방 5국군 참전 기념비가 있다.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 후 최우선 수교대상국으로 지정해 1963년 수교했다.

현재까지도 무역교류 등에서 한국과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모로니아의 아시아계 중 중국인 다음으로 많은 인종이 한국인과 일본인이며 한국에서 유학과 워킹홀리데이, 관광을 많이 오는 국가 중 하나가 모로니아이다.

일본과의 관계

일본은 1909년 당시 일본 제국과 모로니아의 수교로 국교성립이 이뤄졌으나 제2차 세계전쟁 당시의 전투로 좋지 않은 감정이 많았다. 당시 일본은 동남아를 점령한 뒤 남하를 시작하였고, 모로니아는 조널 댈런의 지휘 하래 젠시티와 앵글리아 폭격과 많은 무고한 시민들의 사망을 이겨내고 모로니아의 모든 도시를 지켜냈다. 1945년 전쟁이 끝나며 모로니아는 국가를 막아내는데에는 성공했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로 인하여 모로니아는 일본과 단교하였으며 이후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후인 1957년 재수교하였다.

이후 모로니아와 일본은 전략적 동반자적 지위를 통해 서로를 각각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서 중요한 파트너로 여겼다. 일본의 기업들이 모로니아에 다수 진출하였고, 모로니아에서 생산한 가공품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7년 아소 다로 당시 일본 외무장관의 "그때 모로니아와의 전투는 그곳의 아시아인이나 원주민을 해방하기 위한 성격도 있었다" 발언 이후로 사이가 급격히 냉랭해졌다. 이후 모로니아는 아시아에서 일본 대신 한국이나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외교 노선을 변경했을 정도이며, 일본이 수습과 사과 등에 나서 2019년 현재는 상당히 관계가 개선되었으며 젊은이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전통 문화, 음식을 즐기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고연령층은 일본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와는 별개로, 모로니아에는 다수의 일본계 모로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일본계 모로니아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 모로니아"로부터 의심스러운 눈총을 받게 되었으며, 결백과 모로니아 국민으로서의 애국심을 증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하여 "156 부대"(초창기 부대원들의 숫자에서 따옴)를 조직하였다. 156 부대는 용맹함으로 유명해졌으며 젠시티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참전용사로 대우받은 일본계 모로니아인들은 엄연한 모로니아 국민으로 인식되기 시작해 발언권을 높여갔으며 현재는 소수민족 중에서도 고소득층으로 자리잡았다.

북한과의 관계

모로니아는 제1세계 국가였던 만큼 미국과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며 북한과의 수교를 맺지 않았다. 또한 한국을 한반도의 단일 합법 정부로 지지하였다. 또한 1970년 평화 선언 사태 이후 공산권 국가들과 사이가 냉랭해지자 동시에 북한과도 사이가 더욱 악화되어 교류가 아예 없었다. 그 이후 1990년대부터 남북한의 UN 동시가입과 정상회담 등 평화적인 분위기가 보이자 모로니아도 1999년 북한과 수교하며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 북한이 핵무기 개발과 자국민 탄압을 계속 하자 이에 대해서 모로니아는 강도높게 비판하였으며, 미국의 대북제재안을 지지하게 되면서 다시 사이가 냉랭해졌다. 한편 북한이 모로니아에서 첩보활동과 금융 비리 활동을 한 사실이 2010년 적발되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현재 모로니아 국민들은 북한에 대해 매우 불신하고 있다.

UVS와의 관계

모로니아는 UVS 가입국이였으나 2010년 UVS의 과도한 간섭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UVS 탈퇴설까지 나왔을 정도로 UVS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화해하고 레이 스미스(빨간리본) 사건에서 UVS의 도움을 받았으며 UVS 은행시스템 참관 등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UVS 해체 이후로는 UVS 자료 수집에 적극적인 협조와 주도를 하며 UVS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2017년 모로니아 선언을 통해 합법적인 유일한 UVS계 국가들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국방

모로니아 육군 병사
모로니아 해군
모로니아 공군

모로니아군은 오세아니아에서 호주군 다음가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총 병력은 50,500명이며, 모병제로 병력을 충원하고 있다. 군에 대한 인식과 대우가 좋아 군으로 입대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군사력에 대한 투자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소수정예로 양성되고 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침략을 받은 경험이 있어 전진방어 개념으로 공군력과 해군력에 투자하고 있다. 모로니아는 영국이 참전하거나 관련된 전쟁에는 전통적으로 거의 대부분 참여하곤 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모로니아를 공격한 것이 모로니아 건국사상 첫 외국 군대의 공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연방의 일원으로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호주와 루니온과 함께 주력 부대를 아프리카 전선에 파병하여 전투를 수행하였고 또한 일본군의 공격에 대항하였는데 주력 정규여단들을 이미 아프리카에 파병하였기에 나중에 발발한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남진을 시간제 예비부대에 해당하는 민병대를 투입하여 일본의 침공을 저지하였다. 이들 민병부대에 대해 모로니아 정부마저도 전투력에 우려를 표했지만 같이 싸운 미군이나 나중에 돌아온 호주 정규부대에 비해서도 떨어지지 않는 전투력을 보이면서 훌륭히 싸우기도 하였다. 현재 모로니아군은 국방개혁 2030을 토대로 정예화된 군사를 양성할 계획이며 해군과 공군에 투자하고 있으며 육군은 본토를 방위하는 개념으로 육성하고 있다. 현재 모로니아에는 주모로니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인원은 약 2,000명(2017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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