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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목차] == 개요 == 바이에른 인민 공화국의 역사에 관한 글이다. == 역사 == === 고대 === === 로마 시대 === === 프랑크 왕국 === === 바이에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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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
 
=== 고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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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바이에른 지방에 처음 정착한 주민들은 켈트족들로 그들은 기원전 마지막 10년 동안 북쪽의 튜턴족과 남쪽의 로마인들 사이에서 압박을 받았다. 로마 제국은 이 지방을 정복해 남부지역을 라에티아와 노리쿰으로 나누었고, 북쪽 경계를 따라 요새들을 건설해 튜턴족의 남침을 막았다. 아우크스부르크, 켐프텐, 레겐스부르크, 파사우 등의 번영하는 로마 식민지들이 남부에서 생겨났다.
  
=== 로마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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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경 훈족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게르만족들이 대이동하여 로마제국 영토를 침공하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발생했고 이는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물결 속에서 바이에른 땅에도 488~520년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게르만족의 일파인 바이에른족(바바리아족)이 들어와 원거주민인 켈트족, 로마인들과 뒤섞여 정착했다. 바이에른족은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
  
 
=== 프랑크 왕국 ===
 
=== 프랑크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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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경~788년 프랑크족의 아길롤핑 공작 가문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는 바이에른 공작령(Herzogtum Bayern)이라 불린다. 그 사이인 7~8세기에 이곳은 성 보니파시오, 성 코르비니언, 성 엠머람, 성 루퍼트 등과 같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수도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교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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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아길롤핑가의 공작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 공작령을 프랑크 왕국(카롤링거 제국)에 합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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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대제 사후 817년 프랑크 왕국은 분할되었으며, 바이에른 공작령은 루도비쿠스 1세의 차지가 되어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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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동프랑크 왕국은 919년 독일 왕국으로 변모했으며, 바이에른 공국은 독일 왕국을 구성하는 5대 부족 공국(Stem duchy) 중 하나가 되었다(바이에른 부족 공국). 독일 왕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각 5대 부족 공국의 독립성이 더욱 강화된다.
  
 
=== 바이에른 공국 ===
 
=== 바이에른 공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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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마침내 교황의 대관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바이에른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대립하는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얼마 후 황제의 견제와 내부 분열이 겹치면서 976년 오스트리아 변경백국, 케른텐 공국이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되어 나간다. 분리된 2개의 공국은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령으로 통합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을 거쳐 오늘날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는 문화적으로 매우 유사한 배경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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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정적인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으로부터 바이에른 영지를 몰수한 후 팔츠 백작이었던 비텔스바흐 가문(Wittelsbach)의 오토에게 증여하여 바이에른 공국의 오토 1세가 되었다. 이로서 유서깊은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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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현재의 바이에른 남동부 지방만을 비텔스바흐 가문이 소유했고, 나머지는 수많은 제국도시, 수도원 보유지, 기타 가문 소유지들로 조각나 있었다. 14~15세기에 비텔스바흐가 공작들의 세력은 계속되는 집안 싸움으로 약화되었고, 중간에 루트비히 4세가 등장해 이 지역을 통합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선제후직을 그대로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양도해야 했으며, 그의 사망으로 인해 영토 역시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어 14세기 말에는 비텔스바흐가의 여러 분가가 바이에른을 3개의 공작령으로 분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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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 바이에른-뮌헨의 현명공 알베르트 4세가 장자 상속 원칙을 세움으로써 영토의 통합이 시작되었다. 또한 알베르트는 뮌헨을 공작령의 수도로 삼았다. 1517년 루터의 95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 및 종교전쟁이 발생하자 알베르트 4세는 가톨릭 수호의 입장을 취하고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와 함께 반종교개혁 세력(안할트 동맹)의 중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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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 알베르트의 아들 빌헬름 4세는 마침내 이곳을 하나의 공작령으로 재통합할 수 있었다. 빌헬름 4세 역시 종교개혁을 반대했고, 그의 후계자인 알베르트 5세를 거치며 바이에른은 엄격한 로마 가톨릭령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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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1618년~1648년) 때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가의 편에서 싸웠다. 그의 지도력으로 바이에른 공국은 영토를 확장했다. 1623년 막시밀리안 1세는 선제후가 되는 특권을 얻었고 바이에른 공국은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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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와 바이에른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 전쟁들로 인해 줄곧 유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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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년 바이에른의 지배권은 분가였던 팔츠의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에게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바이에른과 팔츠는 통합되었다. 바이에른 계승전쟁(1778~79)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바이에른의 대부분 지방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며 합병하려는 오스트리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 바이에른 왕국 ===
 
=== 바이에른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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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기에 접어들자 바이에른은 프랑스 혁명에 맞선 제1·2차 반프랑스 연합에 가담했다. 그러나 1796년엔 프랑스 혁명군에,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에, 다시 1800년에는 프랑스에 잇따라 점령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다음해에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어 오스트리아를 희생시키며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거의 현재의 경계대로 영토를 얻었다. 이 조약으로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바이에른 왕국으로 격상되었고, 통치자인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가 되었다.
  
=== 바이마르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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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이에른은 나폴레옹 전쟁 후기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직전에 나폴레옹을 버렸고, 1815년에는 나폴레옹에 대항해 신성 동맹에 가담했다.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진영을 바꿈으로써 바이에른은 빈 회의(1814~15) 후에도 이미 취득한 영토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어, 독일 연방 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이어 3번째로 큰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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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이 종식되고 빈 체제가 들어선 후 막시밀리안 1세의 계속된 치세하에서 1818~19년에는 바이에른 최초의 헌법과 의회가 발족했다.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루트비히 1세 아래에서 지방자치제와 다른 개혁들이 취해졌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여류 모험가인 롤라 몬테즈와 열애에 빠져 왕위를 지킬 수 없게 되자 루트비히는 결국 1848년 퇴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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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루트비히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막시밀리안 2세는 작센, 하노버, 뷔르템베르크 등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목적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대항하는 제3세력으로서 독일 내에 중간 크기의 나라들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바이에른은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나라였다. 바이에른은 그후 프로이센에 반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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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령으로 합치자는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거절하고,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그러나 프로이센 측의 조속한 승리와 바이에른에 대한 그들의 온건한 정책으로 바이에른은 1870년 보불전쟁 때에는 프로이센 편이 되었으며, 그후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의 주도하에 독일 제국을 수립할 때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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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 제국에 가맹했으며 제정된 독일 헌법하에서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의 다른 어떤 구성국보다도 큰 독자성을 얻었다. 외교활동, 군사행정, 우편·전신 업무, 철도 등에서 자치권을 보유했으며 제국내에서 프로이센에 이어 제2위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루트비히 2세는 정신불안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특히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그의 과도한 건설사업들은 바이에른의 국고를 바닥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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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정신이상자로 공포되었고, 왕위는 그의 동생인 오토에게 넘어갔지만 오토 역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오토의 삼촌 루이트폴트가 같은 해에 섭정이 되었고, 1912년 루이트폴트가 죽자 그의 아들 루트비히 3세가 왕이 되었다.
  
 
===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
 
===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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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립 사회주의자인 쿠르트 아이스너가 비텔스바흐 왕조를 무너뜨리고 바이에른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1919년 아이스너를 향한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통치를 확립해 나간 사회당은 독자적인 헌법과 노선을 채택했다. 그리고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뒤 나치당의 대독일주의의 첫 산물로 합병되었고, 당시의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요인들은 대부분 체포당한 뒤 총살당하거나, 아니면 몇몇은 영국, 프랑스 등지도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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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세계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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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 바이에른 공화국 정부]]는 런던에 의탁해서 '소련과는 다르다.' 라는 의사를 표현했고, 결국 [[바이에른군]]을 결성해서 제 11 바이에른 자유 사단이 편성되어 영국군 휘하에서 전쟁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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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오버로드 작전이 성공하고 반공이 시작되자 바이에른 자유 사단은 2개로 늘어났고, 제 11, 12 자유 사단은 영국/미국제 무기와 영국군 군복을 입고 프랑스 등지에서 전전긍긍했으며, 1945년 마침내 뮌헨에 입성, 이내 정통정부 인사들은 뮌헨의 시청사를 점거하고 연합국의 묵인 속에 [[바이에른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과의 외교관계[* 물밑 외교루트는 있었다]를 단절한 후 정식으로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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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의 망명기간 동안의 영향으로 원래 과격하기만 하던 사회당은 유화책과 개혁을 진행하게 되었다.
  
 
=== 바이에른 인민 공화국 ===
 
=== 바이에른 인민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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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바이에른 인민 공화국의 초대 제헌의회가 결성되었다. [[바이에른 사회당]]이 42.7%,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이 32.3%, [[바이에른 민주당]]이 22%, 기타 정당이 3%를 확보하였고, 초대 총리에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선출되었다.
  
 
[[분류:바이에른 인민 공화국]]
 
[[분류:바이에른 인민 공화국]]

2020년 1월 27일 (월) 17:28 판

개요

바이에른 인민 공화국의 역사에 관한 글이다.

역사

고대

기원전 바이에른 지방에 처음 정착한 주민들은 켈트족들로 그들은 기원전 마지막 10년 동안 북쪽의 튜턴족과 남쪽의 로마인들 사이에서 압박을 받았다. 로마 제국은 이 지방을 정복해 남부지역을 라에티아와 노리쿰으로 나누었고, 북쪽 경계를 따라 요새들을 건설해 튜턴족의 남침을 막았다. 아우크스부르크, 켐프텐, 레겐스부르크, 파사우 등의 번영하는 로마 식민지들이 남부에서 생겨났다.

5세기경 훈족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게르만족들이 대이동하여 로마제국 영토를 침공하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발생했고 이는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물결 속에서 바이에른 땅에도 488~520년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게르만족의 일파인 바이에른족(바바리아족)이 들어와 원거주민인 켈트족, 로마인들과 뒤섞여 정착했다. 바이에른족은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

555경~788년 프랑크족의 아길롤핑 공작 가문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는 바이에른 공작령(Herzogtum Bayern)이라 불린다. 그 사이인 7~8세기에 이곳은 성 보니파시오, 성 코르비니언, 성 엠머람, 성 루퍼트 등과 같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수도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교화되었다.
788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아길롤핑가의 공작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 공작령을 프랑크 왕국(카롤링거 제국)에 합병시켰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817년 프랑크 왕국은 분할되었으며, 바이에른 공작령은 루도비쿠스 1세의 차지가 되어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된다.

이후 동프랑크 왕국은 919년 독일 왕국으로 변모했으며, 바이에른 공국은 독일 왕국을 구성하는 5대 부족 공국(Stem duchy) 중 하나가 되었다(바이에른 부족 공국). 독일 왕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각 5대 부족 공국의 독립성이 더욱 강화된다.

바이에른 공국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마침내 교황의 대관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바이에른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대립하는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얼마 후 황제의 견제와 내부 분열이 겹치면서 976년 오스트리아 변경백국, 케른텐 공국이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되어 나간다. 분리된 2개의 공국은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령으로 통합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을 거쳐 오늘날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는 문화적으로 매우 유사한 배경을 지니게 되었다.

118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정적인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으로부터 바이에른 영지를 몰수한 후 팔츠 백작이었던 비텔스바흐 가문(Wittelsbach)의 오토에게 증여하여 바이에른 공국의 오토 1세가 되었다. 이로서 유서깊은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현재의 바이에른 남동부 지방만을 비텔스바흐 가문이 소유했고, 나머지는 수많은 제국도시, 수도원 보유지, 기타 가문 소유지들로 조각나 있었다. 14~15세기에 비텔스바흐가 공작들의 세력은 계속되는 집안 싸움으로 약화되었고, 중간에 루트비히 4세가 등장해 이 지역을 통합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선제후직을 그대로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양도해야 했으며, 그의 사망으로 인해 영토 역시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어 14세기 말에는 비텔스바흐가의 여러 분가가 바이에른을 3개의 공작령으로 분할했다.

1506년 바이에른-뮌헨의 현명공 알베르트 4세가 장자 상속 원칙을 세움으로써 영토의 통합이 시작되었다. 또한 알베르트는 뮌헨을 공작령의 수도로 삼았다. 1517년 루터의 95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 및 종교전쟁이 발생하자 알베르트 4세는 가톨릭 수호의 입장을 취하고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와 함께 반종교개혁 세력(안할트 동맹)의 중심이 된다.

1545년 알베르트의 아들 빌헬름 4세는 마침내 이곳을 하나의 공작령으로 재통합할 수 있었다. 빌헬름 4세 역시 종교개혁을 반대했고, 그의 후계자인 알베르트 5세를 거치며 바이에른은 엄격한 로마 가톨릭령으로 남게 되었다.

30년 전쟁(1618년~1648년) 때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가의 편에서 싸웠다. 그의 지도력으로 바이에른 공국은 영토를 확장했다. 1623년 막시밀리안 1세는 선제후가 되는 특권을 얻었고 바이에른 공국은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와 바이에른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 전쟁들로 인해 줄곧 유린되었다.

1777년 바이에른의 지배권은 분가였던 팔츠의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에게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바이에른과 팔츠는 통합되었다. 바이에른 계승전쟁(1778~79)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바이에른의 대부분 지방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며 합병하려는 오스트리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바이에른 왕국

프랑스 혁명기에 접어들자 바이에른은 프랑스 혁명에 맞선 제1·2차 반프랑스 연합에 가담했다. 그러나 1796년엔 프랑스 혁명군에,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에, 다시 1800년에는 프랑스에 잇따라 점령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다음해에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어 오스트리아를 희생시키며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거의 현재의 경계대로 영토를 얻었다. 이 조약으로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바이에른 왕국으로 격상되었고, 통치자인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가 되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은 나폴레옹 전쟁 후기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직전에 나폴레옹을 버렸고, 1815년에는 나폴레옹에 대항해 신성 동맹에 가담했다.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진영을 바꿈으로써 바이에른은 빈 회의(1814~15) 후에도 이미 취득한 영토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어, 독일 연방 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이어 3번째로 큰 국가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종식되고 빈 체제가 들어선 후 막시밀리안 1세의 계속된 치세하에서 1818~19년에는 바이에른 최초의 헌법과 의회가 발족했다.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루트비히 1세 아래에서 지방자치제와 다른 개혁들이 취해졌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여류 모험가인 롤라 몬테즈와 열애에 빠져 왕위를 지킬 수 없게 되자 루트비히는 결국 1848년 퇴위했다.

1850년 루트비히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막시밀리안 2세는 작센, 하노버, 뷔르템베르크 등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목적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대항하는 제3세력으로서 독일 내에 중간 크기의 나라들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바이에른은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나라였다. 바이에른은 그후 프로이센에 반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지했다.

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령으로 합치자는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거절하고,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그러나 프로이센 측의 조속한 승리와 바이에른에 대한 그들의 온건한 정책으로 바이에른은 1870년 보불전쟁 때에는 프로이센 편이 되었으며, 그후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의 주도하에 독일 제국을 수립할 때 도움을 주었다.

1871년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 제국에 가맹했으며 제정된 독일 헌법하에서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의 다른 어떤 구성국보다도 큰 독자성을 얻었다. 외교활동, 군사행정, 우편·전신 업무, 철도 등에서 자치권을 보유했으며 제국내에서 프로이센에 이어 제2위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루트비히 2세는 정신불안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특히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그의 과도한 건설사업들은 바이에른의 국고를 바닥냈다.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정신이상자로 공포되었고, 왕위는 그의 동생인 오토에게 넘어갔지만 오토 역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오토의 삼촌 루이트폴트가 같은 해에 섭정이 되었고, 1912년 루이트폴트가 죽자 그의 아들 루트비히 3세가 왕이 되었다.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립 사회주의자인 쿠르트 아이스너가 비텔스바흐 왕조를 무너뜨리고 바이에른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1919년 아이스너를 향한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통치를 확립해 나간 사회당은 독자적인 헌법과 노선을 채택했다. 그리고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뒤 나치당의 대독일주의의 첫 산물로 합병되었고, 당시의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요인들은 대부분 체포당한 뒤 총살당하거나, 아니면 몇몇은 영국, 프랑스 등지도 도망쳤다.

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 바이에른 공화국 정부는 런던에 의탁해서 '소련과는 다르다.' 라는 의사를 표현했고, 결국 바이에른군을 결성해서 제 11 바이에른 자유 사단이 편성되어 영국군 휘하에서 전쟁에 참가했다.

1944년, 오버로드 작전이 성공하고 반공이 시작되자 바이에른 자유 사단은 2개로 늘어났고, 제 11, 12 자유 사단은 영국/미국제 무기와 영국군 군복을 입고 프랑스 등지에서 전전긍긍했으며, 1945년 마침내 뮌헨에 입성, 이내 정통정부 인사들은 뮌헨의 시청사를 점거하고 연합국의 묵인 속에 바이에른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과의 외교관계[1]를 단절한 후 정식으로 국가가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망명기간 동안의 영향으로 원래 과격하기만 하던 사회당은 유화책과 개혁을 진행하게 되었다.

바이에른 인민 공화국

1946년, 바이에른 인민 공화국의 초대 제헌의회가 결성되었다. 바이에른 사회당이 42.7%,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이 32.3%, 바이에른 민주당이 22%, 기타 정당이 3%를 확보하였고, 초대 총리에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선출되었다.

  1. 물밑 외교루트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