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Ocelot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1월 6일 (월) 22:15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가장 고귀한 베네치아 공화국
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Serenìsima Repùblica Vèneta

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Flag of Most Serene Republic of Venice.svg Coat of Arms of the Republic of Venice.svg
국기 국장
표어Pax tibi Marce, evangelista meus
가상 베네치아 공화국 지도.png
수도에라클레아(697년 ~ 742년)
말라모코(742년 ~ 810년)
베네치아(810년 ~ 현재)
최대 도시베네치아
정치
총독
679년 ~ 717년 (초대)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
 
인문
공용어베니토어,라틴어
인구
인구 밀도13/㎢
경제
GDP(PPP)4903억 달러 어림값
 • 일인당37,171 달러
GDP(명목)4903억 달러 어림값
통화베네치아 두카트
베네치아 리라

국명

공식적으로는 가장 고요한 베네치아 공화국(베니토어: Serenìsima Repùblica Vèneta 또는 Repùblica de Venesia)이며, 가장 고귀한 공화국(La Serenissima)이라는 명칭의 예시로 자주 인용된다.

역사

베네치아는 서기 5세기경 훈족의 침공을 피해 피신해온 사람들이 바닷가의 소택지대에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세워졌다.

그로부터 1세기 동안,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동고트 족 ,랑고바르디 족 등 여러 야만족들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입하는 순간에도, 베네치아는 침공을 받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베네치아는 명목상으로서는 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상태였고, 자원도, 재화도 없는 개펄지대에 개척된 도시이기 때문에 이들은 생선, 소금 등을 생산해서 팔아넘기거나, 중개무역을 하는 등의 경제활동으로 경제를 유지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7세기 경 랑고바르디 족들에 쫓긴 피난민들이 베네치아에 이주해오면수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서기 697년 베네치아는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를 초대 도제(Doge, 원수)로 선출하면서 명목상으로도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서기 810년 샤를마뉴 대제의 아버지. 피핀이 이끄는 프랑크군들이 베네치아를 침공하였다.
이들은 처음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프랑크 제국의 지배 아래로 들어올 것을 요구했으며, 이것이 거절당하자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프랑크 군의 대함대가 베네치아의 수도 말라모코로 진격해 오자 베네치아인들은 말라모코에서 철수하였다.
베네치아인들이 철수한 말라모코를 점령한 후 승리에 도취해 있었던 프랑크군은 남아있는 베네치아인들을 섬멸하기 위해서 대함대를 움직였다.
베네치아인들을 추격하던 프랑크군의 대함대는 바닷물이 빠지자 물이 빠진 간석지에 뒤집혀버리고 말았다.
프랑크군이 혼란에 빠진 사이 베네치아군들은 여기저기에서 소형선들을 타고 와 프랑크군을 맹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것이 밀물, 썰물을 이용한 베네치아인들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수천명의 사상자를 낸 프랑크군은 베네치아에서 퇴각하였으며 1년 후 베네치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베네치아인들은 본격적으로 국가재건을 시작하였다. 우선 수도를 방어하기에 유리한 리알토 섬으로 천도하였다. 828년, 트리부노와 루스티코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성 마르코의 유골을 베네치아로 밀반입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991년 도제로 취임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는 해적 퇴치에 직접 나섬으로써 아드리아해에 평화를 가져왔고, 동로마 제국과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보장받았다.

1081년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한 노르만 족들이 동로마 제국을 침공함에 따라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편을 들어 이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노르만 족을 발칸 반도에서 몰아내었다. 이로써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특권을 얻어 완전한 자유통상을 하는 것을 승인받았다.

베네치아는 점점 커져나갔고, 제 4차 십자군 전쟁을 치른 이후에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크레타 섬, 네그로폰테(에비아 섬), 낙소스 섬 등의 주요 무역거점을 얻어내어 진정한 동지중해의 여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1289년 38세의 피에트로 그라데니고가 베네치아 원수로 취임하였다. 그는 공화국 의회에 대규모 개혁을 진행하였고, 10인 위원회를 창설하였다.

10인 위원회는 도제와 그 보좌관 6인, 그리고 임기 1년의 위원 10명으로 구성되는 사실상 베네치아에서의 최고 권력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1355년 베네치아의 도제였던 마리노 팔리에로가 친위 쿠테타를 일으켜 왕정을 세우려는 음모를 세우다 발각되어 처형된 사례에서 10인 위원회의 힘을 알 수 있다.

베네치아군은 1380년 키오자를 거점으로 베네치아를 포위했던 제노바 공화국의 함대를 무찌름으로써 120년에 걸친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15세기에 오스만 투르크가 동지중해에서 패권을 형성한 결과 오스만 투르크에 쫒긴 그리스의 여러 소국들이 베네치아에 보호를 요청함으로써 베네치아 공화국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키프로스와 에게해의 여러 섬들을 복속하고 이탈리아 본토에 배후지를 차지했으며 달마티아와 알바니아 연안에 베네치아 귀족이 통치하는 속국을 만들었다.

베네치아는 특히 제노바를 무찌른 이후에는 레반트의 여왕이라 불리며 동지중해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여 엄청난 부를 거둬들였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베네치아는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떠오른 한편,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과 경쟁하며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16세기에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났다. 이때에 베네치아에 대항하는 교황 주도의 이탈리아 동맹인 캉브레 동맹이 결성되었고 1508년 캉브레 동맹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이후로는 더 이상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확장은 중단되었다.

그 뒤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넘어 동방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여 베네치아의 동방과의 교역 독점이 끝나게 되자 베네치아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베네치아의 직접적인 쇠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희망봉을 통해서 동방으로 가는 항로는 매우 위험하였고, 포르투갈은 모로코 침공 도중 왕이 사망한 이후 독립성마저 흔들리게 되어 결국 1580년 에스파냐에 합병되고 말았다.

베네치아에 직접적인 쇠퇴를 가져다 준 것은 오스만 제국의 레반트 장악이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이후 바르바리 해적들의 항해기술을 받아들여 해군을 양적, 질적으로 강화시켰다.
베네치아와 에스파냐의 연합 함대는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퇴각하였으며,
1571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하지만 베네치아는 오히려 키프로스를 상실했다. 이후 1606년 교황 바오로 5세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분쟁을 중재하면 서 개신교에 유리하게 중재한 베네치아에게 선전 포고를 하고 베네치아를 파문해 버렸다.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에스파냐가 베네치아에 큰 위협이 되었다. 에스파냐는 1559년 카토 캄브레지 조약을 맺어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었다.
에스파냐가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행세하자 위협을 느낀 베네치아는 에스파냐에 대항하고 있는 사보이아 공작에 금전적인 지원을 줌으로서 경고한 연대성을 구축하였다.

아드리아 해에서는 오스트리아 역시 베네치아의 경쟁자로 떠올랐다. 아드리아 해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던 우스코키 해적들은 세냐를 중심으로 해서 베네치아의 상선을 노략질 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우스코키 해적 토벌을 시작하자, 오스트리아와 베네치아 사이에는 1615년 전쟁이 일어나 1617년까지 싸웠다.

신대륙의 발견과 오스만 투르크의 진출로 이미 무역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베네치아는 이후 수공업을 장려하며 부흥을 꾀했으나 이미 이탈리아 본토의 속주로 주도권과 중심이 옮겨가 베네치아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엄청난 돈을 들여가며 25년간 홀로 버틴 끝에 1669년 크레타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지키기는 성공했지만, 엄청난 예산을 소모하고 말았다.
이후에 일어난 전쟁에서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연계하여 오스만 투르크를 무찌르고, 모레아를 빼앗는데 성공하였지만, 1714년 오스만 제국은 모레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맞선 오스트리아와 베네치아는 결국 오스만 제국을 굴복시키긴 했지만 오스트리아가 많은 영토를 얻은 데 비해 베네치아는 모레아를 잃었다.

18세기말, 베네치아 공화국은 달마티아 내부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팽창하는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1792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비무장의 중립을 선언하지만 1797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오스트리아군을 쫓아 베네치아를 침공했고 결국 베네치아는 나폴레옹에 굴복해 민주정을 받아들이고, 1814년까지 프랑스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1814년 이후 베네치아는 독립을 승인받았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속국으로 존재하였고, 빈 회의에서 베네치아는 베르가모 지역을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할양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각지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베네치아 정부에 대항한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도제였던 아고스티노 모로시니는 사임하였다.

그러나 새로 도제가 된 알비제 모체니고는 베네치아 자유주의를 부정하였고, 급기야 오스트리아의 힘을 빌려 이들을 소탕하는 데에 열을 올리고 말았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베네치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이에 영향을 받은 베네치아의 자유주의자들은 총궐기하여 의회를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라데츠키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혁명 세력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베네치아로 진격하였고, 곧 롬바르디아에서 피에몬테사르데냐군을 이기고 다시 베네치아에 진주하였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에서도 온건파와 강경파의 주장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 내란을 일으킨 강경파가 진압됨에 따라 온건파의 주장이 받아들어져 다니엘레 마닌을 도제로 선출하였다.

다니엘레 마닌이 있는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와 현상을 맺어 철수시킨 후 자유주의적인 정치 개혁을 추구하였다.
일단 베네치아 원로원이 폐지되었고, 국민들을 중심으로 한 의회가 세워져 그 기능을 대신하였다. 또한 10인 위원회의 권력이 대폭 축소되어 사법권으로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1859년 피에몬테 사르데냐 왕국이 오스트리아 소유의 롬바르디아를 공격하자 오스트리아군은 롬바르디아로 가는 길목을 지나간다는 터무늬없는 명분 하에 베네치아 공화국 영내를 침입하였다. 이들은 베네치아 영내를 통과한 뒤 롬바르디아로 가서 피에몬테군과 전투를 벌였다.
마젠타와 솔페리노에서 피에몬테군에 대패한 오스트리아군은 베네토로 도주해와 함부로 베네치아 영토에 주둔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피에몬테와 동맹을 맺고, 대 오스트리아 전쟁을 선언한 것이다.
도제 프란체스코 모로시니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은 아퀼레이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패퇴시켰고, 오스트리아의 공업 지역인 티롤로와 트리에스테를 덤으로 빼앗았다.

1860년 3월. 베네치아, 피에몬테, 오스트리아 3국은 프랑스의 중재로 전쟁을 종결하였다. 이 결과 피에몬테는 토스카나와 나폴리 등을 합병하여 이탈리아를 통일하였고, 베네치아 역시 전쟁 도중 오스트리아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승인받았다.

1860년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은 평화 속에서 발전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비록, 중세시대의 상업대국까지는 아니었어도, 상공업 육성을 통한 베네치아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영국과 연계해 수에즈 운하의 지분 일부를 얻었고, 베를린 회의에 참여하여 키프로스섬을 얻는 등 대외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와의 중립 외교로 전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고, 이탈리아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1929년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이 불어닥쳤다. 여기에 베네치아 경제력은 큰 타격을 받았고, 이후 베네치아 경제는 자유 방임주의에서 수정 자본주의로 전향해 지금까지 채택하고 있다.

1929년 경제가 마저 회복되기 전에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완전한 통일을 요구하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군과 알토 아디제 지역을 수복한다고 주장하는 히틀러의 독일군, 달마치아를 탐내는 우스타샤정권 주도의 크로아티아등 추축국들이 베네치아에 전쟁을 선언하였다.

베네치아군은 이탈리아군을 막아내는 데에는 어느정도 성공하였지만, 독일에서 대군이 밀려내려오자 크게 패배하고 수도를 내어주게 되었다.

이무렵 도제가 되었던 파올로 아나페스토는 크레타에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대독일 전면 투쟁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크레타는 동지중해의 항공모함이라고 불릴 만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에 독일군의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영국 베네치아 해군은 카니아 앞바다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에 크레타가 독일에 함락됨에 따라 베네치아 임시정부는 런던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고, 그로부터 5년 후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해방함에 따라 베네치아는 옛 영토를 되찾게 되었다.

1960년 키프로스가 베네치아로부터 독립하였다. 이 국가는 그리스인과 터키인 사이에 분쟁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터키의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냉전기에 베네치아는 미국, 소련 등의 강국으로부터 중립을 선언하였다.
베네치아는 나토 가입을 거부하였고,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와 연계해 유럽에서 제 3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1995년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스웨덴, 핀란드 와 함께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이후 2008년 총선에서 온건 우파 공화당이 승리하면서 현재로 이어진다.

지리

베네치아 시는 해안가 소택지대에 위치한 수많은 석호와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섬과 섬 사이에는 수로가 연결되어 있어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베네치아를 '물의 도시' 라 부릅니다. 대안의 메스트레 지역과는 교량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네치아의 한가운데에는 S자 모양의 대운하가 있습니다. 이는 석호들간 물의 흐름을 원활하기 위해 존재하는 필수적인 존재로, 리알토 다리가 동쪽과 서쪽을 연결합니다.

알프스 산맥으로부터 크레타 섬에 이르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는 비연속적인 영토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주로 아드리아 해에 넓은 해안선을 영유하고 있으며, 달마치아 해안에서는수많은 섬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본토에 해당하는 베네토 지역은 북쪽에서 알프스 산맥과 맞닿습니다. 알프스 산맥은 곡선을 그리며 베네치아의 북쪽 경계를 형성합니다. 알프스 남쪽에는 충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파다나 평원이 있습니다. 피에몬테 서쪽에서 시작하여 베네치아 영내로 들어와 아드리아해까지 흐르는 포 강은 알프스, 아펜니노 , 돌로미티 산맥 등에서 흘러내리는 수많은 지류로 흘러듭니다.

인구 통계

인종과 언어

네치아는 라틴계인 이탈리아인과 슬라브계인 크로아티아인, 게르만계인 독일인, 그리스인 등 다민족이 주류를 형성하는 본질적인 다민족 국가입니다.


베네치아는 공식적인 언어로 이탈리아어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베네치아 지역의 방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쓰이는 표준 이탈리아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소수 언어집단도 있는데 가장 큰 소수집단은 크레타와 이오니아 제도의 그리스어 사용 인구로, 또, 이스트리아와 달마치아 근교의 크로아티아어,슬로베니아어 사용 인구역시 소수 언어집단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종교

전통적으로 베네치아는 로마 카톨릭 인구가 많지만, 타종교에 대한 배려를 이유로 1950년 카톨릭교가 국교에서 해제되었습니다. 하지만 베네치아의 90%이상이 가톨릭 신자이며, 그 밖에 크레타 섬, 이오니아 제도 등지에는 다수의 그리스 정교 신자들이 존재합니다.

출산율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2013현재 1.93 명입니다. 합계 출산율은 1990년 1.18로 바닥을 친 이래 복지 정책의 영향으로, 조금씩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2013년 현재 천명당출산율은 10.5명, 천명당사망율은 10.4명이어서 인구상의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치

베네치아 공화국은 입헌 군주정의 모습을 약간 띄고 있는 공화국으로, 국가원수로는 도제(우리나라말로 원수, 총독 등 다양하게 번역되죠.)가 있습니다.

도제는 사실상 정치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세할 수 없고, 국가원수라는 형식적인 칭호만을 갖고 있습니다.

도제는 종신직이라는 점에서 군주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세습제가 아닌 선거를 통한 선출제라는 점에서 군주와 큰 차이가 납니다. 사실상 베네치아 공화국은 의회 정치를 기반으로 한 공화국이죠.

베네치아 공화국은 의원내각제, 그중에서도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의회 정치는 건국 이후에 있었던 원로원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850년 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원로원이 폐쇄되고, 근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의회가 새로 신설되었습니다.

14세기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에 설립된 10인 위원회는 도제와 보좌관 6인, 각부장관이 구성하는 기관으로, 과거에는 엄청난 권력을 가졌으나(친위 쿠테타를 일으키려다 10인 위원회에 발각되어 사형당한 도제도 있습니다.)현재는 그저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었습니다.

현재 베네치아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갖고 있는 정당은 공화당이고, 이외에 좌익연합,디페자 당 등의 야당이 존재합니다

행정구역

15개의 현(베네토, 베로나, 파도바, 브레시아, 아퀼레이아, 트렌토, 우디네, 고리치아, 트리에스테, 파렌초, 풀라, 자라, 스팔라토, 세베니코, 라구사)와 4개의 자치주로(이오니아, 칸디아, 크리아나, 알토 아디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제

네치아 공화국은 수정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이는 대기업의 독주를 어쩔수 없이 묵인할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와 국가가 모든 경제를 관리하는 공산주의 사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베네치아의 수정 자본주의 경제 구조는 수많은 중소기업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서유럽의 인근 나라들과 비교해 봐도 중소 기업의 수가 많습니다. 이는 중세시대부터 유래된 경제 정책으로, 대기업의 독주를 막는 안티 히어로 경제정책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베네치아의 경제는 농업, 상공업, 관광업 등 다양화된 산업 경제로 프랑스,영국과 총생산과 1인당 생산이 비슷합니다.

산업에 필요한 대부분의 원자재와 에너지 필요량의 75%는 수입에 의존하며, 베네치아의 경제실적은 다른 EU 나라들에 비해 안정적입니다. 현 정부는 유로화의 도입을 거부하였고, 정부와 시장과의 균형적인 경제 정책으로 2010년 2008년 미국발 경제대공황, 2010년 그리스발 유로존 경제위기 등에 휘말리는 것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농업은 올리브,포도,토마토,밀,감자등을 생산하는 지중해성 농업이 발달해있다.발폴리첼라 등지에서 생산되는 포도주가 유명하며 공업은 북부의 밀라노,토리노,제노바 삼각지를 중심으로 기계,섬유,자동차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가난하던 남부에서도 최근에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포 강 유역에는 소량의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있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독일,프랑스,네덜란드,미국,영국 등입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실용적으로 제조되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조선업 등으로 유명합니다.

중세시대부터 시작된 조선업은 17세기 이후 약간 뒤쳐진 적은 있지만 여전히 세계적으로는 명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면직물을 근거로 한 의류산업도 매우 발달했으며, 패션 브랜드에서도 파워가 엄청나다.비록 최근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게 1위 자리를 내주기는 했어도, 베네치아 길드를 중심으로 한 베네치아의 면직 공업은 직물 공업의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