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트제국

아바노프 황제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5월 7일 (월) 19:00 판 (빈트제국 1차 정보 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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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명:빈트제국

국기:


국장:


정치체제:전제군주제

경제체제:계획경제체제

대략적인 역사:1917년 10월 25일 볼셰비키 정부군인 적군과 반혁명군인 백군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시베리아 토볼스키에 있던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전쟁이 발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함께 은밀히 토볼스키를 탈출하여 백군의 수장을 만나러 간다. 초반 백군은 전쟁에서 승승장구를 하였지만, 병력에 차이가 너무 심해서 전쟁에서 우위를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니콜라이 2세는 1918년 2월 14일에 공식적으로 세상 속으로 드러났고, 니콜라이 2세가 지난 자신의 일을 반성하는 연설문과 앞으로의 러시아제국이 펼칠 정책들을 외신 기자들을 통해 발표하였다. 국민들은 이러한 황제의 모습에 손을 들어주었고, 점점 백군의 수는 늘어났고 곧 이는 전쟁에서 우위를 잡게 되었다. 더불어 다양한 국가에서 백군을 지원하고 있어, 점점 적군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1921년 3월 27일 카잔에서 백군은 "카잔 대첩"을 성공시킴으로써, 적군의 주요 인사를 포함하여 적군의 다수를 몰살시켜 마침내 황제는 다시 모스크바에 입성을 성공하였다. 니콜라이 2세는 모스크바에 입성하자마자 국민들을 위한 정치 정책을 제공하였고, 모든 국민은 황제의 달라진 모습에 감동하며 "적군은 물러나라"라고 제창했다. 1923년 11월 9일에 적백내전은 실질적으로 마무리했고, 백군은 적군의 잔당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에 성공했다. 황제는 이 날에 황실의 자산을 이용하여, 모스크바 인근에 백성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였다. 이는 다시는 백성들을 무시하지 않겠다는 황제의 의지가 들어난 사건이었다.

1928년 7월 2일 니콜라이 2세는 6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곧 국가에서는 대규모 장례가 치뤄졌다. 장례가 끝나는 데로 알렉세이 황제는 24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알렉세이 황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사치 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고 대외 순방과 국내 정치 안정을 위해 힘썼다. 더불어 모스크바 출신의 귀족 집안인 "빈트귀족"의 인사를 차례로 등용하여, 러시아 제국의 번창을 위해 힘썼다. 그 결과 러시아 제국은 점차 안정을 되 찾았고, 황실과 국민의 조화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빈트귀족"에 힘이 컸으며, "빈트귀족"을 지원해주고 믿어준 알렉세이 황제의 역할 또한 컸다.

1937년 황제는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으며, 죽음의 이유는 혈우병이였다. 혈우병을 어렸을 때부터 앓고 있었던 알렉세이는 결국 장수를 하지 못했다. 알렉세이 황제가 죽은 후 러시아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알렉세이 황제에게는 딸 밖에 없었으며, 알렉세이에게는 누나들 밖에 없었다. 결국 러시아제국은 빈트귀족을 주축으로 소집된 "대책마련위원기구"를 설립하였고, 빈트귀족은 알렉세이의 딸을 여왕으로 초대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알렉세이의 딸이 아직 7살이라는 점에서 반대를 하였고, 알렉세이의 첫째 누나인 올가의 남편을 왕으로 초대하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빈트제국은 이에 동의를 하였고, 올가의 남편을 왕으로 초대하여 다시 러시아제국에는 안정이 찾아왔다. 그러나 얼마 후 1939년에 체결된 러시아-독일과의 불가침 조약을 깬 독일 나치군이 러시아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초반에 엄청 깨지기 시작하면서, 1941년 모스크바를 독일 나치군에게 내주게 되었다. 그 후 러시아제국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뼈를 갈면서, 대규모 전차부대와 보병부대를 양성하여, 소치에서 대규모 전투를 진행하였다. 이 때 아군 및 적군의 사상자는 100만명을 넘길 정도로, 엄청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제국은 나치군을 크게 격퇴하였고, 이 과정을 통해 러시아제국이 다시 우위를 잡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러시아제국은 모스크바를 되찾았았고, 동유럽을 향해 진격하여 복수의 혈전을 시작하였다. 전쟁은 1945년 베를린 전투를 끝으로 마무리 되었고, 독일의 동쪽은 러시아제국의 군대가, 서쪽은 연합국의 군대가 배치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은 동독과 서독을 만드는데 이바지 하였다. 세계 2차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러시아 제국은 한동안 미국과 양대산맥을 이루어 냉전시대를 시작하였다. 미국과 러시아제국은 서로의 국방과 항공관련 기술을 자랑하며, 정치적인 선동에 이용하였다.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던 러시아제국에는 1987년에 갑자기 큰 위기가 찾아왔다. 황제가 90살이 넘도록 장수하자, 황태자가 자신의 아버지인 황제를 탄핵시키고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황태자는 스탈린그라드를 기반으로 반란군을 조직하였고, 황제는 이러한 황태자의 모습에 화가 나 계엄령을 선포하고 본격적인 전쟁에 나섰다. 초반 다수의 외신과 국내의 여론은 황제가 황태자를 손쉽게 진압할 거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황태자는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의 독립을 약속하면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간청했고, 곧 이는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지역의 민족이 황태자를 도와 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러시아제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독립을 주창하였고, 황실의 권위는 갈수록 바닥을 쳤다. 이 때 "빈트귀족"은 모스크바에서 빈트혁명당을 조직하였고, 내부 안정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는 시간이 갈수록 효과가 없었고, "빈트귀족"은 이대로는 안되겠다라고 생각하면서 혁명을 준비하였다. "빈트귀족"은 당시 모스크바에 위치하고 있던 친위대와 군인들을 설득하여 비교적 빠르게 자신의 편을 구축하였고, 그 동안 쌓아놓았던 부를 베풀면서 국민들에게 "빈트혁명당"을 우호적인 정당으로 인식될 수 있게 도왔다. 혁명은 4년에 걸쳐 준비되었고, 1992년에 마침 황제가 100살에 가까운 나이로 자연사를 하였고, 혁명은 바로 실시 되었다. 황태자는 황제가 죽자 자신의 세력을 모스크바로 이동시키며 자신의 즉위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빈트혁명당"소속 부대인 "혁명특수군"은 황태자를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황태자를 암살하였고, 황태자의 세력은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혁명을 성공시킨 "빈트귀족"은 국민들의 지지속에서 러시아 제국이라는 이름을 빈트제국이라고 개칭하였고, "빈트귀족"의 수장인 이바노프는 국민과 귀족에 열혈한 지지속에서 빈트제국의 제 1대 황제가 되었다. 이바노프 황제는 현 황제의 실제 이름이며, 제 1대 빈트제국 황제이다.

이바노프 황제는 그동안 문제가 많았던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의 독립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총독부를 설치하는 조건으로 다양한 왕국과 공국을 설립해주었고, 이 국가를 지원해주었다. 이로써 점점 빈트제국은 전제군주제의 기반을 잡아가며, 안정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안정을 토대로 지금까지 빈트제국은 큰 문제 없이 잘 운영이 되오고 있다.

GDP: 2조 5693억 달러

1인당 GDP: 7,506 달러

대략적인 병력 수(육, 해, 공): 총 병력 155만 (육군 105만, 해군 30만, 공군 20만)

외교방침:전략적인 서방과의 협력적 경쟁

국가:빈트제국 국가

국화:해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