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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7일 (토) 16:46 판

신성로마제국
Heiliges Römisches Reich
Holy Roman Empire
신성로마제국국기.png
국기
신성로마제국국장.png
국장
국호신성로마제국
Heiliges Römisches Reich
상징국가황제의 노래
국화매 황제마다 다름
국조쌍두독수리
표어Heiliges Rom, Schutzpatron des Katholizismus(신성 로마이자, 가톨릭의 수호자)
신성로마제국
Timmy Holy Roman Empire map.jpg
자연환경면적(영토)561,983 km²
인문환경인구1002만명
인구밀도인구밀도
공용 언어독일어
정치국체선출군주제
정부형태내각책임제
황제Leopold oldenbrug
총리공석
경제GDP$850억
1인당 GDP$0000
GDP(PPP)$850억
1인당 GDP(PPP)$0000
공식 화폐마르크화
단위
법정연호서력기원
시간대예) UTC +1
ccTLD.he
국가 코드HE, HRE
국제 전화 코드+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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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독일 서부 일부와 벨기에, 프랑스 일부를 포함하는 제국이다. 서기 7, 8세기부터 이어져 왔으며, 국가 표어는 ‘Heiliges Rom, Schutzpatron des Katholizismus‘ 이다.

가톨릭의 수호자 신성로마제국

신성 로마 제국에게 있어서 가톨릭은 단순히 국교 '따위'의 레벨이 아니며 동로마의 정교회처럼 국가 정체성의 한 축을 이루는 핵심 요소다. 오히려 동로마의 경우 나라의 중심이 되는 국교라는 입장일 뿐이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애초에 나라의 시작부터가 교황이 (서)로마 황제관을 준 것이 계기이며, 심지어 이 당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했던 문서가 위조임이 발각되었기에 교황이 없으면 신성 로마 제국이 더 이상 정당한 로마 제국의 후예로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가톨릭과 신성 로마 제국의 관계는 가톨릭이 우위인 관계였다. 현대인의 시각이야 어떻든, 당시 서유럽인의 인식 속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마의 후계자이며, 동방의 정교회 제국인 동로마 제국과 대비되는 서방의 가톨릭 제국이었다. 그리고 개신교가 출현하여 제국의 신앙이 분열되는 순간, 제국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렇듯 신성로마제국에게 가톨릭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제국 그 자체 인 것이다.

합스부르크 공작가

현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Leopold Habsburg Oldenburg, 레오폴드 합스부르크 올덴부르크는 합스부르크 공작가에 속하는 사람이였다.

황제로 선출되기 전에는 합스부르크 공작으로서 존재했고,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멸망하던 그 해, 5월 31일에 독일왕에 선출되었고, 바로 다음 달 27일에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았다.

현재 합스부르크가는 합스부르크 대공국의 군주 가문인 합스부르크 공작가이다.

역사

종교개혁 이전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에는 두 가지 중요한 시점이 있다. 첫 번째는 800년 카롤루스 1세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 대관을 받은 것이며, 두 번째는 962년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황제 대관을 받은 것이었다.

800년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 1세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제국 황제' 대관을 받자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은 로마의 정통 황제는 자신들의 황제뿐이라며 강하게 항의했고 카롤루스 1세 본인도 교황의 대관으로 황제가 되는 것을 내켜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덕분에 카롤루스 1세는 카롤루스 대제가 되고, 프랑크 왕국도 제국이 되었다. 당대의 비잔티움 황제였던 여제 이리니와 카롤루스 1세가 혼인할 뻔한 일도 있었지만 무산되었고, 812년 미하일 1세가 카롤루스 1세를 황제로 승인하면서 유럽에는 두 명의 황제가 공존하게 되었다. 이것을 니키포로스의 평화(Pax Nicephori)라고 부른다.

이 '서로마' 제국은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후엔 로타리우스 1세가 물려받은 중프랑크(이탈리아 왕국)의 왕위를 얻는 자가 황위에 올랐다. 그러다 888년 분열된 영토를 잠시 통일한 카를 3세가 죽으면서 제국의 영토는 다시 쪼개졌고, 이탈리아 왕국에서는 여러 명이 동시에 군주를 자처하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이탈리아의 왕이 황제가 될 수 있으므로 제위도 이에 따라 왕조가 여러 번 교체되는 혼란을 겪다 924년 베렌가리오 1세의 암살로 잠시 끊긴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 문서 참조.)

이후 962년에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교황에게 대관을 받으면서 신성 로마 제위는 부활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오토 1세의 대관(962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으로 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는 카롤루스 1세의 대관식(800년)을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을 보기도 한다. 오토 1세가 대관을 받을 때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를 자처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그러나 카롤루스 1세의 대관이 오토 1세 대관의 중요한 선례가 되기는 했지만, 카롤루스 1세의 대관이 오토 1세에게 직접 이어진 것이기 아니기 때문에 두 제국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우선 카롤루스 대제의 제위가 중간에 단절되었다는 점이다. 카롤루스 대제의 제위는 중프랑크로 계승되다가 924년 완전히 소멸되었다. 게다가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과 오토 대제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을 같은 나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중 하나로 영토상 차이가 있다. 비록 이후에 영토가 분할되었지만, 카롤루스 왕조 때 황제들은 명목상으로나마 프랑크 전역의 황제였다. 그러나 오토 대제 때에는 서프랑크와 아를 왕국은 황제의 영역 밖에 있었다. 아를 왕국은 후에 다시 제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서프랑크는 제국의 영역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또한 황제 선출 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카롤루스 왕조 시절 제위는 순수하게 혈통에 의해 상속되었다. 반면 카롤루스 왕조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제후들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사실상 세습된 경우도 많았지만, 단순히 혈통에 의한 상속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실권이 달랐다. 카롤루스 1세의 제위는 실권이 없는 완전한 명예직이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업적은 전적으로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 힘에 근거한 것이었다. 카룰루스 대제 시절 그의 제국 = 그의 직할 왕국이었으므로 자신의 직할 영지와 제국의 영역이 일치하지 않은 나중의 사례와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손자인 로타르 시절에 시작된다. 즉 로타르는 명목상 중프랑크, 서프랑크, 동프랑크를 아우르는 황제였지만 그의 직할 영지는 중프랑크에 한정된 것이다. 그러나 로타르는 황제로서 전혀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명목상 자신의 제후인 동생들에게 좌우로 발리다가 결국 그의 영토는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에 흡수되었다.

반면 오토 대제와 그의 직계인 작센 왕조 시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역시 명문화된 권한은 없었지만, 황제의 권위를 바탕으로 실제 제후들에게 영토를 빼앗거나 하사하고 작위와 통치권을 하사거나 빼앗는 등 큰 실권을 행사했다. 당장 오토 대제의 아들 오토 2세 때 제국 내 최대의 제후국인 바이에른과 마찰을 일으키다가 결국 바이에른 공국을 쪼개 분할을 명했고 이를 시행에 옮겼다. 또 카롤루스 1세가 '서로마' 대관을 받은 것이라는 점도 거론된다. 이것은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이란 이름도 오토 1세 때부터 확립된 명칭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그 이름을 확립되었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오토 1세의 대관도 카롤루스 왕조 이후 흐지부지 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정통성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카롤루스 1세의 제국을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과 분리하여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궁예가 고구려를, 견훤이 백제를 계승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이들이 같은 나라가 아닌 것처럼 오토 1세가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를 자처했다는 이유만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과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을 지속되는 하나의 연속체(continuum)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란 때문에 서구에서도 카롤루스 1세의 제국을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과 구별하여 '카롤루스 제국(Carolingian Empire)'(800–888)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연속성만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을 설명할 수 없다. 연속성이 끊긴 대공위 시대 이전과 이후의 제국을 완전한 별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이처럼 오토 1세 대관 이전의 공백기도 대공위 시대처럼 일시적인 계승 중단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서로마의 멸망 이후 오도아케르가 동로마 황제에게 서로마 황제의 제관 깃발과 의복 등을 갖다 바치며 자신은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파트리키우스라는 칭호를 받음으로써 명목상 동로마의 신하로 들어갔으며 교황에게는 카롤루스 1세에게 서로마 제위를 수여할 권한 따위는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제를 자칭하다가 동로마와 전쟁을 통해 승인을 받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토 왕조 역시 이와 같은 동로마의 황제로부터 서로마 황제로 인정받았기에 가문의 교체만 있었을 뿐 제위는 그대로였다.

애초에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와 관련 있거나 승인을 받았어야지 교회는 그 다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대로라면 오토 1세나 카롤루스나 동로마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연속성을 논하기 이전에 신성 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이 아니게 된다는 문제가 생긴다. 동로마 제국이 카롤루스를 황제로 인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프랑크의 황제로써이지 서로마의 황제로써가 아니다. 동로마 황제의 관점에서 오토 1세는 황제가 아니라 왕이었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843년 프랑크 왕국은 3분할되었다. 그중 독일 지역은 동프랑크 왕국이 차지하였다. 911년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4세(유아왕 루트비히)가 후사없이 죽으면서 카롤루스 왕조의 대가 끊기자 귀족들은 루트비히의 친척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재위 911~918)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콘라트 1세 역시 후사없이 죽었고, 후계자로 당시 가장 유력한 세력을 보유했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를 지명했다. 그러나 5대 공작령 중 슈바벤과 바이에른이 하인리히 1세의 선출에 반대했기 때문에 한동안 하인리히 1세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정치적 협상을 통해서 슈바벤과 바이에른도 하인리히 1세를 국왕으로 인정했다. 일반적으로 하인리히 1세 시절부터 독일 왕국(Kingdom of Germany)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된 이후 독일왕국의 왕들은 5대 공작령 대표들의 선출에 의해 왕위를 물러받게 된다. 콘라트 1세와 하인리히 1세의 경우 이전 왕들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라 치더라도,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인 오토 1세 역시 선출을 통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전통은 고대 게르만족으로 부터 이어온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은 오토 1세부터 시작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선출하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귀족들이 선출한 것은 독일왕(로마왕)이며, 독일왕(로마왕)으로 선출된 이후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야 정식으로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 교황이 대관하는 절차를 없애고, 선제후들의 선출만으로 바로 황제위에 오르게 된 것은 1493년 막시밀리안 1세 황제 때 부터다.

하인리히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오토 1세(재위 936~973)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1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슬라브족과 마자르족의 침입을 격퇴했으며 이탈리아 왕국을 정벌했다. 이러한 공로로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게 되었다(962년). 교황 입장에서는 명목상으로나마 유럽 세계 전체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권위로써 누군가를 내세워야 하는 판이었는데, 이때 큰 활약을 보이는 오토 대제를 (서)로마의 황제(정확히는, '로마인의 왕')로 내세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토 1세 때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 혹은 로마 제국이라는 칭호보다는 그냥 "제국(Imperium)"으로 불렸다. 이후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2세(973~983. 사실 967부터 아버지와 공동황제)때부터 로마 제국이라 칭했고, 로마 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왕위를 받아낸 오토 3세(왕위 983~1002, 제위 996~1002)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이라 불리게 된다. 오토 1세가 황제의 대관을 받은 후 제위는 (중간에 끊긴 적도 많았지만) 대대로 계승되어갔다. 하인리히 공에 의해서 시작된 작센 왕조는 오토 1세부터 이어지다 잘리어(Salian) 왕조로 계승되었고 잘리어 왕조는 다시 호엔슈타우펜 왕조로 계승되었다.

오토 1세는 늘 분열의 위험성을 안고 있던 제국을 안정시키고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황제가 성직자를 영주로 임명하는 소위 "제국교회정책"을 시행하였다. 황제가 임명하는 고위 성직자가 각 지역의 영주를 겸하는 구조로서 이는 황제가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서임권을 전제로 한 구조였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독일 왕위 : 1056~1084, 제위 1084~1105)와 서임권 분쟁에 들어가고 뒤이어 카노사의 굴욕(1077) 사건이 일어난다. 서임권 논쟁으로 촉발된 분쟁은 보름스 협약(1122)으로 수습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의 각 지역 영주들과 도시들이 각자의 영지의 지배권을 강화하여 분열의 길로 나아갔다. 이를 영방국가 체제라 부른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슈타우펜 왕조, 1138~1254)가 들어선 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와 프리드리히 2세는 황권의 강화를 시도했고, 진정한 로마 제국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호엔슈타우펜 황제들의 이러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황권의 약화와 제국의 분권화를 촉진시켰고 결국 대공위 시대를 야기하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1152년 즉위, 제위 1155~1190)는 "신성 제국"을 칭하며, 황제이면서 동시에 남독일을 중심으로 영지를 확장하는 황제영방국가 정책을 취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프리드리히 1세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아 도리어 황권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바르바로사는 이탈리아 정벌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패주하면서 망신을 당하고 명성에 먹칠을 하기도 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획득한 시칠리아에서 태어난 프리드리히 2세(왕위 1212~1220, 제위 1220~1250)는 시칠리아에 자신의 궁궐을 가지고, 신성 로마 제국의 역대 그 어떤 황제보다도 이탈리아 경략에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토대로 황권을 강화를 시도했으나 교황과의 잦은 대립으로 여러 차례 파문을 당하고 이에 따른 각지의 반란에 직면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사후 1254년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되고, 대공위 시대(1254~1273)의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1256년 대립왕 홀란트 백작 빌헬름(재위 1247~1256)이 죽자 제국의 정세가 불안해지게 된다. 라인 지방의 영주들은 영국왕 헨리 3세의 영향으로 핸리 3세의 동생인 콘월 공작 리처드(재위 1257~1272)를 황제로 추대했고, 다른 세력은 프랑스왕의 지지 아래 카스티야왕 알폰소(재위 1257~1275)를 옹립하여, 제위가 비는 사태가 발생한다. 대공위시대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요청으로 열린 프랑크푸르트 선제후 회의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제위 1273~1291)를 황제로 뽑음으로써 종식된다.

대공위시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영주들의 투표에 의해 뽑히게 되었고 황제는 자기 영지 외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돼버린다. 특히 1356년 카를 4세(1346년 즉위, 제위 1355~1378)에 의해 공포된 "금인칙서(Goldene Bulle, 금인장으로 내린 칙서)"는 황제를 투표에 의해 선출하고, 선제후(選帝侯. 쾰른 대주교,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궁중백,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왕(카를 4세의 것이었다)들에게 사실상 자신의 영지를 독립국가처럼 다스릴 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했는데, 선제후들에게 부여된 특권은 나중에 가서는 모든 영주들과 도시들에게 적용되어 결정적으로 독일의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15세기 중반에 가서는 여러 행운들이 겹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위를 계속 이어받는다. 막시밀리안 1세의 혼인동맹정책의 결과 최전성기인 16세기의 신성 로마 제국의 판도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반도까지 포괄하며 역대 최대를 자랑하였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이건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이 넓어진 건 아니다. 카를 5세는 황제위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작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카를 5세랑 합스부르크의 땅이 늘었을 뿐. 그래서 카를 5세 사후에 황제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해외 식민지나 스페인 왕위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 제국은 다시 찢어진다. 하여튼 카를 5세 시절 황제의 권위는 대단해서 사코 디 로마 등의 수난으로 인해 교황조차 그 권위 밑에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였다. 동시에 이때부터 독일 정체성이 성립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1450년 무렵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이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여 유럽의 많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450년 무렵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 일대의 4개의 공작령을 보유했던 신성 로마 제국 내 잘나가는 여러 제후 중 하나에 불과했으나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 정책이 연거푸 대박을 터트려 네덜란드 저지대 지역, 부르고뉴의 일부, 스페인, 이탈리아의 상당한 지역 등 막대한 영토를 상속받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인 카를 5세과 페르디난트 1세는 현명한 할아버지(막시밀리안 1세)를 둔 덕분에 막대한 영토를 상속받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카를 5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융성은 근세 독일 통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면도 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시작으로 붉어진 개신교 문제는 제국에 곧바로 중대한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이어서 당연한 일이지만, 결국 1520년에 루터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다음해 신성로마제국 제국의회는 루터를 불러 신앙 검증을 요구한다. 그 곳에서도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의회는 루터를 제국 밖으로 쫓아내도록 결의한다. 이는 당시의 황제였던 카를 5세가 가톨릭을 수호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비록 카를 5세의 시대에는 제국의 황제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를 초월한 지 오래였지만,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명목상의 정통성은 당시의 시점에서도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국 밖으로 쫓겨나던 루터는 잠깐 한 마을의 여관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때 카를 5세가 보낸 암살자가 루터를 암살한다.

이렇게 개신교세는 사실상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몇몇 개신교 개혁가들이 개혁에 몸담았지만, 스페인 반란을 생각보다 손쉽게(반란군 내의 내부 분열로 인해서) 제압한 카를 5세는 곧바로 그들에게 대처함으로서 제국 신앙의 붕괴를 막아낸다.

그 결과, 영국, 북유럽 등은 그대로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게 되었다.

결국 1547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영국의 헨리 8세가 연달아 세상을 떠났고, 오스만 투르크와 잠시 평화협정이 맺어지자 황제 카를 5세는 중앙집권화를 추친한다.

그런데, 루터파는 박멸되었지만, 칼뱅파는 아직 남아있었다.

그러자 신교 제후, 신교도와 제국 간의 전쟁이 30년간 지속되자 종교 전쟁 때문에 독일 제후들과 자유도시 시민들은 신교, 구교할 것 없이 지쳐버렸고, 비록 30년 내내 제국 측이 우세하게 전쟁을 이끌어 갔지만, '배교자는 사형, 제후는 봉토 몰수, 작위 박탈' 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싸우다 보니 아무리 열세여도 신교도 측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제국은 지쳐 버렸다.

그리고는 또 다시 발생한 종교의 문제로 30년 전쟁을 거치며, 신성로마제국 영토는 다시 황폐화 되었다. 독일 지역에서만 1500년에 인구 12,000,000명에 달했지만, 이후 증가하던 인구도 지속적으로 조금 줄어들기 시작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 전쟁 초반에 종교를 일원화하는데 성공하고, 중앙집권 정책 역시 빛을 보기 시작하여 제국은 전쟁에서 이기지는 못하지만 지지도 않았고, 결국은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등 참전국 다 비용 대비 효과에 매우 안좋은 결과를 내비친 전쟁이였다.

비록 신교도세가 거의 약해졌지만, 결국 영국은 성공회로 국교를 바꾸어 버렸고, 프로이센 역시 개신교세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30년 전쟁의 끝에 강화를 맺은 신성로마제국은 이때부터 중앙집권화를 추진한다.

이 중앙집권 정책은 그동안 주어졌던 제후들의 자치권을 상당수 빼앗아 버리는 정책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다행인지는 몰라도, 많은 제후들이 그동안 큰 피해를 봐 오다 보니 반발을 할 힘조차 없었고, 결국 이 정책은 시행된다.

프로이센의 성장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해진 독일 영방 제후국은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본래 발트인의 땅이었으나 수백년에 걸친 동방식민운동으로 독일인이 많이 살게 되었다. 프로이센은 제후국이면서도 제국 밖에 영토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확장이 용이하였고, 통치자가 '왕'의 칭호를 받는 것에 대해 용인받을 수 있었다. 또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대왕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가 적극적으로 군국주의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절대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중부 유럽의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지역은 경제적으로 크게 발달한 곳은 아니었다. 독일에서 경제적으로 발달한 곳은 오히려 엘베강 서쪽이었고, 프로이센은 그렇게 발달한 지역이라고 보기 어렵다. 서유럽에서는 농노제가 거의 폐지되어 가고 있었는데 엘베강 동부는 재판농노제라 하여 오히려 농노제가 강화되었다. 그 지역의 영주들을 일컫는 명칭이 융커였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상공업을 천시하였지만,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영지의 경영에 적극적인 이윤을 추구하였다. 프로이센은 산업의 발달은 늦었고 시민 계급은 미약했다.

나폴레옹 전쟁기

신성로마제국의 해외 식민지

1차 세계대전기

2차 세계대전기

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