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달의 역사

아사달의 역사
阿斯達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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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연씨정권 (642-866)

7세기 고려는 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갔으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지휘 하에 3차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결국 당나라는 이민족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탕진해버려 돌궐과 토번 제국이 발흥해 당을 위협하자, 어쩔수 없이 고려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전쟁을 끝내게 된다.
이후 연개소문의 가문은 아들인 연남건을 시작으로 대대로 대막리지직을 세습하며 국왕 대신 실권을 장악하는데, 이 시기를 연씨정권이라고 부른다. 연씨정권은 초기에는 민생을 신경쓰며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것처럼 보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부정부패와 정권 내 권력다툼이 심해져 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워졌다. 결국 866년 지방의 유력 호족인 강현성이 반란을 일으켜 평양성을 점령해 고려는 멸망한다.

진여 쟁패기 (866-890)

강현성은 평양을 점령하고 새로운 왕조 대진을 세웠다. 그러나 강현성은 전국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고, 지방에는 여러 호족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중 북부 지방의 한 유력 호족이 후부여를 세웠고, 요동 지방에도 마지막 국왕의 먼 친척을 왕으로 내세워 정통성을 주장하는 서고려가 있었다. 고려의 마지막 태자는 자신을 따르는 군사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홋카이도로 이주해 현재 쿠로의 시초가 되는 동고려를 세우기도 하였다.
24년의 대립 끝에 후부여와 서고려는 멸망하고 대진이 예북을 통일한다.

진(발해) (891-1234)

진이 한반도 북부를 통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거란족에 의해 요나라가 세워진다. 진은 남쪽을 통일한 마진과 화친하였고 군사를 정비하는 등의 대비를 하였다. 그 결과 4차례에 걸친 요나라의 침입을 막아낼수 있었다.
1125년 송나라와 협공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쪽의 흑수말갈까지 복속시키는등 전성기를 맞았으나, 13세기에 지배층의 내분이 발생하였고, 결국 1234년 몽골제국의 침입을 받고 멸망한다.

오사 (1371-1603)

원나라홍건적의 난 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자, 정진경은 동모산에서 말갈족과 함께 오사국을 세운다. 그러나 명과 예한의 강력한 견제로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를 차지하는데 그쳤다.

대위(1603~1877)

임진왜란으로 오사가 약화된 틈을 타 동북 지역의 만주족을 이끌고 있었던 소초로 민닝은 독자 국가인 대위(大爲)를 건국하였고, 1607년에는 오사를 침공해 멸망시키고 예북 지역을 장악한다. 곧이어 명이 혼란한 틈을 타 요동을 점령하고(1628), 예한을 속국화하는 등(1636)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다. 이를 두려워한 두려워한 양나라는 3차례에 걸쳐 대위를 침략하나 모두 물리친다.

3차례에 걸친 양나라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화되면서 대위는 일시적인 침체에 빠졌지만, 18세기 중후반 00,00의 치세동안 중흥기를 맞는다. 이 시간동안 네덜란드에서 들어온 난학이 발전하였고, 국정에 일부 참고되기도 하였다.

00의 사망 이후 몇몇 유력 가문이 국정을 장악하는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대위은 쇠퇴기에 접어든다. 이로 인한 민란이 끊이지 않던 와중 1851년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가 남진을 위한 포석으로 개항을 요청했고, 러시아의 위협에 무릎을 꿇은 황제는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아사달 제1제국 (1877~1931)

러시아에 의해 개항된 대위는 곧이어 미국, 영국 등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과 국교를 맺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이권들이 서양 열강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 상황 속에서 만주족 황실은 개혁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러시아에 기대어 반대 세력들을 누르고 정권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반발한 현덕주 지역 유력 군벌의 수장인 장영택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고, 만주족 황제를 폐위시킨 뒤 자신이 황제가 되어 아사달 제국을 건국한다.

성화제로 즉위한 장영택은 조현석 대내상을 중심으로 급진개화파 내각을 구성했고, 과거제 폐지와 노비제 철폐와 같은 개혁들을 단행했다(생화개혁). 1879년 특권을 잃어버린 구 만주족 지배층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성화제는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해 반러친영 정책을 펼쳤고, 그 일환으로 1902년 제1차 아영일 삼각동맹이 성립된다. 이로 인한 러시아와의 충돌은 필연적이었고 결국 러시아와 삼각동맹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해 아사달은 국토의 절반이 러시아에 점령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국내 사정으로 인해 전쟁을 계속 이어나갈 수 없었고, 결국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더 이상 아사달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전쟁은 종결되었다.

한편 서양의 문물이 수입되는 과정에서 수도 평경의 백성들의 민권 의식이 신장되었고, 이들은 일부 대신들과 계몽민협회를 조직해 의회 설립을 요구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초기에는 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나, 영국/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이들 국가들이 아사달의 전제군주제를 문제삼았기 때문에 절대권력을 지향하던 황실도 언제까지나 버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계몽민협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1901년 근법 제정과 함께 일본 국회를 본따 귀족원과 민의원으로 이루어진 중선원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중선원은 관선 의원들로 이루어진 귀족원의 권한이 강할 뿐더러 황제가 민의원의 해산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적인 체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초기의 중선원은 귀족들로 이루어진 아사달 유신회와 평민 출신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계몽민협회가 대립하는 양강 체제였다. 1906년 유신회는 보국당이라는 이름의 정식 정당으로 창당하게 되는데, 이듬해인 1907년에 조현석 대내상이 정치계를 떠나고 1910년에는 성화제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이들의 리더쉽에 의존하고 있었던 보국당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건국 초기 아사달의 개혁을 주도했던 이론가들은 모습을 감추고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하는 정치인들만 남자 보국당의 주 지지층이었던 지방 국민들이 등을 돌린 것이다. 1919년 총선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치뤄졌고, 이 선거에서 보국당이 과반을 얻지 못할 것이 확실시되자 당시 대내상이었던 고효원은 대규모 부정선거를 주도한다. 이것이 발각되면서 평경대 학생들의 의거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대내상은 군대에 진압을 명령했으나 불과 1년 전 내각이 주도한 무리한 연해주 수복 시도로 큰 손실을 입은 바 있는 군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들이밀라는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시위대와 동조하려는 모습마저 보였다. 결국 고효원과 보국당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했고, 총선이 다시 치뤄져 보국당에서 갈라진 신민당과 계몽민협회의 후신인 민중당이 각각 원내 1당, 2당을 차지한다.

아사달국과 아사달 망명정부 (1932~1945)

분단 시대 (1945~1990)

아사달 제3제국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