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공화국

이한 증권 거래소

이한의 자본과 금융 투자관련 법규를 근본으로 하여 이한 거래소를 설립한다.


[ 이한 증권 거래소 ]

  • 조직 *
ㄴ 경영 지원 본부

-경영 지원 본부는 경영 전략, 장기 계획의 방향을 제시하며 유가 증권 거래 시장, 로스닥 시장, 파생 상품 시장 및 시장 감시를 담당하는 여러 본부가 유기적이며 빠르게 연계가 가능하도록 지원한다. 소속 부서로는 기획 관리부, 미래 전략부, 인사부, 총무부, 전략부, 서비스 관리부, 정보부, 산업부가 있다.

ㄴ 유가 증권 시장 본부

-1949년 개설되었으며 이한을 대표하는 한량 전자및 12개 대기업및 ETN, ETF가 상장되어 있다. 유가 증권 시장 본부는 상장 심사, 시장 운영, 상장 기업 공시의 역할을 담당하며 소속 부서로는 주식 시장부, 채권 시장부, 금융상품 시장부, 상장 관리부가 존재한다.

ㄴ 로스피 시장 본부(Lee Han Composite Stock Price Index)

-로스피 시장 본부는 국내에서 생성되는 모든 개별 주가를 총괄로 묶어 전체적인 주가로 나타내며 이를 통해 로스피 200 지수 즉 이한 내의 상위 200개 기업의 시가총액을 나타내는 지수를 형성한다. 로스피 시장 본부는 상장 심사, 시장 운영, 상장 기업 공시 및 상장 폐지의 역할을 맡는다. 소속 부서는 로스피시장부, 상장 관리부, 청산 결제 제도부, 청산 결제 운영부, 일반 상품 시방부, 파생 상품 시장부로 구성된다.

ㄴ 파생상품 시장 본부

-파생 상품 시장 본부는 주가 지수, 금리, 통화, 개별 주식 및 일반상품을 기초로 한 선물, 옵션등을 거래하는 파생 상품 시장을 운영한다. 주요 거래 상품으로는 1994년 도입된 로스피 200 선물, 국채 선물, 미국 달러 선물등이 존재하며 소속 부서로는 파생 상품 제도부, 파생 상품 개발부, 청산 결제 제도 운영부, 연구부가 존재한다.

ㄴ 시장 감시 위원회

-시장 감시 위원회는 유가 증권 시장, 로스피 시장, 파생 상품 시장의 불공정 행위를 예방하고 투자자 혹은 회원끼리의 분쟁을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들은 법률을 통해 시장을 조율한다. 주요 업무는 이상거래 종목적출, 풍문수집, 지분변동신고 접수 등 불공정거래 사전예방활동 및 시장에 대한 상시 감시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며 분쟁 발생시 자문 혹은 상담의 역할도 담당한다. 소속 부서로는 시장감시제도부, 예방감시부, 시장감시부, 심리부, 특별심리부 및 감리부가 존재한다.

ㄴ 국제 사업 관리회

-국제사업단은 해외거래소, 국제기구 및 자본시장 관련기관들과의 협력사업 추진, 정보교환 및 해외홍보 등을 담당하며, 시장시스템의 해외수축, 신흥 증권시장 발전을 위한 지원업무도 수행한다. 소속부서는 국제업무부 및 해외사업부가 존재한다.

ㄴ 사무소

-지방 소재 상장기업을 위하여 상장 및 공시관련 업무를 지원하고 유망기업을 대상으로 한 상장유치, 일반 대중을 위한 증권시장 홍보 및 교육 업무를 담당한다. 현재 다롄사무소와 자무쓰사무소가 설치되어 있다. 한편 해외에는 한국 기업의 상장유치 및 업무지원을 위하여 서울 사무소가 운영되고 있다.

  • 소속 기관 *
ㄴ자무쓰 사무소[자무쓰]
ㄴ다롄 사무소[다롄]
ㄴ서울 사무소[서울]
  • 회원 / 주주 *
ㄴ 회원

-자본시장법에 따라 투자매매업 또는 투자중개업의 인가를 받은 회사가 한국거래소의 회원이 될 수 있다. 회원은 참가하고자 하는 시장 및 매매거래할 수 있는 금융투자상품의 종류에 따라 증권회원, 지분증권전문회원, 채무증권전문회원, 파생상품회원, 주권기초파생상품전문회원으로 구분되고 있다..

ㄴ 주주

-2018년 1월 1일 현재 한국거래소의 납입자본금 100억환을 출자하고 있는 주주는 60개 법인으로 각각 0.05%~4.7%의 지분을 갖는 증권회사 및 선물회사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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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侇瀚共和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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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공화국의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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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이한공화국의 지도
수도신경(장춘)
최대 도시신경(장춘)
정치
대통령남윤호
역사
독립 
 • 1950년2월 22일
지리
면적132만 제곱킬로미터
시간대IST (UTC+9)
인문
공용어중국어
국민어중국어
지역어중국어 / 한국어
인구
2018년년 조사1억 6천만여명
경제
 • 전체4조 1천만달러
HDI0.891
통화환 (LRH)
기타
도메인.lh / 이한

40대 기업

순위. 명칭 / 업종 / 기준 / 회계 년도 / 매출액 / 영업 이익 / 당기 순이익

1. 한량 전자 / IT 전자 / 연결 / 2017년 / 17,569,834 / 5,543,761 / 5,782,366

2. 화월 자동차 / 자동차, 부품 / 연결 / 2017년 / 7,433,672 / 957,382 / 941,638

3. DS 전자 / IT 전자 / 연결 / 2017년 / 6,421,547 / 876,435 / 901,327

4. 루스카 / 철강 / 연결 / 2017년 / 5,673,732 / 764,312 / 753,893

5. 준성 자동차 / 자동차, 부품 / 연결 / 2017년 / 4,741,956 / 611,243 / 613,173

6. 루트 케미컬 / 화학 제품, 석유 화학 / 연결 / 2017년 / 4,497,230 / 503,972 / 502,832

7. 한량 중공업 / 조선,기계 설비 / 연결 / 2017년 / 4,193,774 / 767,234 / 623,897

8. 루트 쇼핑 / 유통 / 연결 / 2017년 / 8,763,897 / 412,347 / 406,432

9. 중산 은행 / 금융, 은행업 / 연결 / 2017년 / 3,324,658 / 445,123 / 378,984

10. 한량 디스플레이어 / IT 전자 기기 / 연결 / 2017년 / 3,172,975 / 397,657 / 390,456

11. DS 케미컬 / 기초 화학 제품 / 연결 / 2017년 / 3,023,729 / 386,982 / 373,984

12. 한량 물산 / 건물, 건자재 / 연결 / 2017년 / 2,989,475 / 378,836 / 362,746

13. DSI / 방위, 정밀 기계, 중화기, 총기 / 연결 / 2017년 / 2,864,951 / 376,679 / 314,987

14. 화월 중공업 / 조선, 기계 설비 / 연결 / 2017년 / 2,833,876 / 401,342 / 392,894

15. 백산 중공업 / 조선, 기계 설비 / 연결 / 2017년 / 2,821,987 / 364,986 / 351,895

16. 한량 생명 / 보험 / 연결 / 2017년 / 2,773,789 / 352,539 / 398,091

17. MI 칼텍스 / 석유 화학 / 연결 / 2017년 / 2,326,543 / 394,374 / 382,986

18 한량 에너지 / 석유 화학 / 연결 / 2017년 / 2,219,342 / 343,452 / 331,384

19. 화문 은행 / 금융, 은행업 / 연결 / 2017년 / 1,987345 / 317,776 / 309,823

20. 이한 가스 공사 / 가스, 에너지 / 연결 / 2017년 / 1,872,376 / 331,562 / 327,382

21. 이산 전자 / 가전 제품, IT 전자 / 연결 / 2017년 / 1,834,652 / 323,908 / 321,675

22. 한량 물산 / 운송 / 연결 / 2017년 / 1,822,974 / 324,563 / 323,458

23. 화월 건설 / 건물, 건자재 / 연결 / 2017년 / 1,817,276 / 354,677 / 353,568

24. DS 손해 보험 / 보험 / 연결 / 2017년 / 1,810,784 / 332,767 / 333,436

25. 준성 화학 / 석유 화학 / 연결 / 2017년 / 1,809,733 / 321,566 / 301,036

26. 상명 은행 / 금융 / 연결 / 2017년 / 1,802,394 / 344,563 / 327,348

27. 한성 화월 / 상사 / 연결 / 2017년 / 1,762,775 / 293,848 / 295,569

28. 화월 글로버스 / 운송 / 연결 / 2017년 / 1,743,657 / 286,663 / 290,376

29. HL 마트 / 유통 / 연결 / 2017년 / 1,739,652 / 301,132 / 297,763

30. 한량 제철 / 제철 / 연결 / 2017년 / 1,692,437 / 282,367 / 281,255

31. 창월 조선 해양 / 조선, 기계, 설비 / 연결 / 2017년 / 1655,517 / 279,636 / 277,793

32. MI 텔레콤 / 통신 / 연결 / 2017년 / 1,649,987 / 313,219 / 309,273

33. 창월 해상 / 보험 / 연결 / 2017년 / 1,593,672 / 269,742 / 256,784

34. 인스트로하이네스 / 상사 / 연결 / 2017년 / 1,573,667 / 252,876 / 263,607

35. 이한 토지 주택 회사 / 공기업 / 연결 / 2017년 / 1,542,436 / 267,172 / 234,112

36. 왕저 은행 / 금융 / 연결 / 2017년 / 1,533,378 / 283,545 / 276,869

37. 창월 케미컬 / 석유 화학 / 연결 / 2017년 / 1,474,763 / 299,765 / 273,547

38. 미준 케피탈 / 이신 금융 / 연결 / 2017년 / 1,463,787 / 265,179 / 254,188

39. 백산 상사 / 상사 / 연결 / 2017년 / 1,462,541 / 277,162 / 289,346

40. DS 자동차 / 자동차, 부품 / 연결 / 2017년 / 1,329,566 / 245,982 / 243,726

역사

2차 북벌전쟁 당시 봉천군벌 장쭤린의 안국군은 장제스의 북벌군과 대치했다. 일본은 친일 군벌인 봉천군벌에 개입하려 하고 있었다. 한편 장쭤린의 안국군 산둥전선 장쭝창은 근대전에 미숙했으며, 자신만 넘쳤다. 장쭤린은 그의 실력보다는 인의로서 그 직책을 유지시켰고, 그것은 큰 참패로 이어졌다. 장쭝창은 그동안의 설욕을 씻기 위해 무모하게 북벌군에 반격했다가 전선이 총체적으로 붕괴되었다. 장쭝창의 전선이 붕괴된 것을 시작으로 전선을 걷잡을 수 없자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의 정예군이 그를 도우러 남진했다. 하지만, 북벌군은 이 기세를 노리고 순식간의 산동을 타고 올랐으며, 전 전선에서 공격이 시작되면서 안국군의 전선은 총체적으로 붕괴되었다. 그리고 장쉐량마저 그의 군대가 포위되면서 붙잡히고 말았다. 일본군은 2차 산동간섭이 북벌군의 도달로 실패하자 즉각적으로 군사적 개입에 돌입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관동군이 행동을 실시하여 봉천군벌의 수도 봉천(심양)을 무단으로 진출했다. 한편 중국군벌의 강경파 일각에서 기세가 매우 등등하고 진군속도가 매우 빠르니 일본의 개입이 이루어지기 전에 전진하여 만주를 장악할 것이 건의되었다. 장제스는 일본의 개입이 매우 우려어 고민하던 상황이었는데, 관동군의 무력 개입을 피해 장쭤린이 장제스와 회담을 요청했다.

장쭤린은 친일군벌이었으나, 그것은 다른 군벌과 마찬가지로 단지 이해관계에 의한 협력자에 불과했다. 그는 만주가 일본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장제스에게 항복했다. 자신의 만주 이권을 더 이상 사수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하자 차라리 장제스에 만주를 넘긴 것이다. 북벌군은 산해관을 넘을 분명한 명분이 생겼다. 일본은 만주의 무단 무력개입에 비난받게 되었다. 일본군과 북벌군이 정면으로 대치하게 되고 서로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육군 내부의 반발에 밀려 관동군 처벌이 흐지부지되자 일왕 덴노가 그를 외면했다. 결국 다나카 내각은 해산되고, 하마구치 내각이 들어서 관동군을 철병시켰다.

일본은 이후 재정상황이 좋지 못했다. 일본은 쇼와대공황으로 허덕였고, 하마구치 내각은 공황을 성공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런던해군군축조약에 참여하고 공무원 봉급을 축소하려 했다. 이 때문에 육군의 강한 반발에 직면했다. 하지만 과거 3.1운동이 간도 임시정부의 성립과 이들이 배후로 조직화된 3.1운동을 총지해 장기화된 소요사태로 인해 조선에 군을 증강배치한데 이어 경찰의 수를 대폭 늘인 여파는 일본의 빈약한 재정을 더욱 압박해 오고 있었다. 1929년의 일본 누계적자는 14억엔을 돌파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중원대전이 일어났다. 반장세력들이 규합된 군벌들은 장제스를 몰아내기 위해 내전을 일으켰으나, 장제스는 만주의 안국군 전력들을 규합하여 질적, 숫적, 규율적 우위를 달성하여 중원대전을 승리했다. 그러나 그 동안 일본 관동군 제 2사단은 계속해서 간도에 도발을 감행하였고, 조선총독도 만주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를 방관했다. 군사 개입 명문을 만들어 만주를 침공하려 했던 것이다. 한편 중국과 독일은 수교를 맺어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루덴도르프의 작전참모이던 막스 바우어가 중국의 산업발전과 군 정예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그는 다양한 방면에 능했는데, 공병능력에도 뛰어났다. 그는 압록강 방면에 '바우어라인'이라 부르는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장개석 직계 중앙군이 일본군의 진격에 대비하여 여전히 남아있었다.

일본 관동군은 남만주철도의 이권을 잃고 다급해져 있었고, 황급히 만주를 진출하다가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 이 방어전에서 간도에서 독자적 무장세력을 구성하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동전선을 주장했다. 3.1운동을 총괄하고 다양한 국내 의거활동을 지휘한 조직으로서 한인 독립운동세력을 총괄한 임시정부는 장제스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지휘권을 장개석에게 넘기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미의병 당시 북한 연합의병조직인 북한창의대가 신민회와 합작한 이후 고종의 사망 이후 완전히 공화주의로 돌아섰으며, 일본의 극동 개입당시 연해주 독립단체를 외면하면서 좌익과의 관계도 중도 좌익을 제외하고 사이가 나빠져 있었다. 소련과의 관계를 유지해 존재를 존속했지만, 일본의 만주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그들의 세력을 유지학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합작이 필수가 되었다.

일본 조선군과 관동군은 계속해서 조선을 침공했으나, 장개석의 중앙군이 계속 집결하면서 그 시도는 무산되었다. 일본군 사단 몇개로는 더 이상 만주를 탈환할 수 없게 되었으며 하마구치 내각은 군 증편계획을 무산시켰다. 그러나 하마구치는 일왕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계속해서 연임했고 군부는 잠시 후퇴했다. 이대로 군부를 축소시키고 경제를 안정화하려 했으나 군부는 계속된 내각의 행보에 분노하여 계속해서 내각을 압박하고 관료에 대한 스탠들을 폭로하며 내각을 흔들었다. 내각은 다행히 오랜 기간 유지되었으나 육군 황도파 장교들이 도쿄를 봉쇄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내각이 전복되었다. 1935년 일본은 통제불능에 빠졌다.

1935년 대만군 사령부의 정보장교과 복건성 사건을 벌여 대만군 2개 연대가 파견되었으나 무마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상해주재 일본 영사관에서 자작극을 벌여 상해사변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중국에 어떻게든 개입할 명분을 찾고 있었고, 여기에 제 2파견함대와 육전대가 파견되었다. 완전한 기습이었다. 어떠한 방어선도 없었던 상황에서 대만군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중앙군 사단 몇개가 상해를 방어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저지되었다. 상해는 제 1파견함대와 제 3파견함대가 집결되어 사태는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만주를 통한 침공이 어려워지자 선택된 일본 군부의 차선책이었다. 단숨에 난징을 장악해 난징정부를 제압하고 중국의 굴복을 받아내는 계획이었다.

중원대선, 일본 조선군과 관동군의 침공으로 인해 계속해서 지연된 중국 공산당 토벌계획은 중국공산당이 끝없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홍군은 1931년 12월 12만명의 병력을 구성하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했으며, 1932년엔 20만명의 병력을 이끌었다. 이들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인근 중심도시를 공격하다가 큰 낭패를 입었지만 1934년에 이르어 제 3차 초공전쟁이 발발하자 마오쩌둥의 위상은 커질대로 커져 매우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초공군을 저지했다. 1935년에 이르어 중국 공산당을 제거하기 위해 장제스는 90만명의 대군을 편성해 제 4차 초공전을 준비했으나 일본군의 상해 침공으로 인해 초공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황이 급박해지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공합작을 체결했다.

1936년 난징은 함락되었고, 일본군은 지나방면군을 편성하여 전쟁을 확대했다. 남경괴뢰정부를 구성하고 중국군의 공세를 저지했으며 만주에서도 공격을 진행하고 병력을 충원하여 양면전을 이끌었다. 일본군은 우월한 항공능력을 이용하여 중국의 전쟁수행능력을 파괴시켰지만, 만주방면은 독일 군사고문단이 추가로 건설한 '젝트라인'과 산둥우회를 저지하기 위해 구축한 '팔켄하우젠 라인'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조선에는 7개 사단이 배치되었다.

1937년 일본은 강남과 만주 두 전선에 양면전선을 실시했고, 결국 난징을 넘어 우한 함락을 성사시켰지만, 사실상 공세종말점에 직면했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주력을 섬멸하지 못하고 단지 밀어내고 있었으며 계속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또한 중국군 잔존부대와 유격대들이 일본군 후방을 게속 교란했고,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일본군 전투력은 소모되었다. 일본의 통제력이 가장 강한 상해, 남경 등 양자강 하류지역 역시 치안이 악화되었다. 1938년 일본은 단기간에 중국 전토를 장악하겠다는 목표를 포기하고 중국의 해상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한 지구전략으로 변경하여 중국의 해상보급로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광주를 공략해 광주, 홍콩루트를 차단했다. 그러자 중국은 하노이와 버마루트를 개척해 군수물자를 확충했다.

1939년 일본군은 해남도 공략작전인 대륙명 265호를 발령했고 대만혼성여단과 해군육전대, 신편 함대인 제 5함대를 파견해 뇌주반도를 통해 해남도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곳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게 실질적인 위협으로 당면했고 남방침략에 대한 의심을 받게 되면서 미, 영, 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3억 프랑의 자금을 통하여 대중원조루트 차단을 해제하고 중국을 지원했다.

1940년에 이르어 일본의 특출한 신형 전투기들이 배치되면서 중국은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1940년 초부터 일본은 극심한 노동력 부족으로 경제가 쇠퇴했으며, 청강 및 중유의 생산은 1939년을 기점으로 감소했다. 일본의 기초전쟁수행능력이 떨어졌다.

1940년에 진행한 제 2차 대륙타동작전은 중국 남부를 파괴했지만, 산둥산륙, 다롄 상륙에도 불구하고 만주방어선은 굳건했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남방침략을 게시패 네덩란드령 동인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국령 말레이를 공격했다. 1941년 7월이 되면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모두 장악했다.

1935년 미국은 1차 중립법을 통과했고 고립주의 노선을 추구했지만,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1936년 일본의 침략을 맹비난하고 침략국 억제를 주장하며 나섰다. 국민들과 의회의 다수는 전통적인 고립주의였으나 1937년 1월 일본의 태평양진출 저지를 위해 해군확장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때에 미 국방예산은 일본의 65%에 지나지 않았다.

1939년 상해에서 일어난 친일파 살해사건으로 영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미국은 이에 대하여 1911년부터 유래된 미일통상항해조약에 연장불가를 통보했다. 1940년 7월 27일 일본은 대동아신질서의 건설을 통해 대동아공영권을 공식화했고, 1940년 9월 24일 일본은 북부인도차이나에 진입, 27일 3국 추축동맹을 결성했다. 미국은 일본의 국책요강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고, 미국은 이에 맞서 영-중-네덜란드와 연대한 ABCD포위망으로 일본을 고립시키고 경제제재와 금수조치를 실행해 자산을 미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시키고 해외무역과 석유수출을 제한했다. 일본 경제는 마비되었고 1940년 미국은 평시징병법을 통과했다. 1941년 1월 미일간 협상은 결열되었다. 일본 대본영은 미국의 조선수용을 고려했으나, 일본 내 주전파들의 주도로 전면전이 주도되었고 도조 히데키 내각이 결성되었다. 일본이 군사적 행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하자 함호해독기 '매직'을 통해 동중국해에서 일본이 육해군 군사행동을 취하려는 것을 파악하고 루즈벨트는 초강경 태세를 지시했다.

1941년 12월 1일 일본은 개전명령이 하달되었고 12월 2일 진주만 공습이 실시되었다. 진주만 공습 다음날 미 의회는 대일선전포고를 결의했고 중국 국민정부는 일본과 추축국에 선전을 포고했다. 이에 따라 사변의 성격이던 양상은 전쟁으로 변했다. 중국은 워싱탄 4개국 공동선언에서 4대 강국으로 인정되었고 태국과 인도지나를 포함한 중국전구의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루즈벨트는 중국에 5억달러의 차관을 얻었다. 장개석은 중국전구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자 그의 참모장으로 미 육군 고위장성 파견을 요청했고 미 장군 스틸웰이 도착했다. 스틸웰은 행정, 신병 훈련에 뛰어났지만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없었으나 자신의 주도로 일본군을 몰아내겠다는 야심이 있었고 언론에서 자신을 돋보이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스틸웰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 지휘권이 없자 불만을 토로하며 중국인을 멸시하고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행동했으며, 장개석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계속 충돌했다. 1941년부터 일본군은 대부분의 항공력을 태평양전쟁에 집중하면서 일본군의 폭격은 축소되었다. 중국 공군은 공군 자문 센놀트에 의해 미 항공대로부터 병력을 구성했다. 중국에 전개된 미 육군 제 23전투비행단은 미 1944년에 제 14공군으로 확대되어 제공권을 역전했다. 1943년 중국은 미국을 통하여 훈련되고 무장한 정예 직할군 X, Y군을 편성했지만 극심한 흉년으로 인해 공세는 지연되었다. 1944년에 이르어서야 남지나방면군과 북지나방면군에 대한 반격을 이후로 다시 교착되었다.

1943년 11월 22일 스틸웰은 장개석을 따라 카이로회담에 참가하여 루즈벨트에게 중국이 엉망이며 장제스를 대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면서 제 2차세계대전은 종식되었고, 한국에는 미군정이 들어섰다. 중국 강남지역에는 중공이 크게 잠식하여 수백만의 전력을 확보해 있었다. 일본군은 팽덕회의 이름으로 공산당의 항복요구를 거부하고 장개석에게 항복했다. 소련은 장개석에게 제공하던 철도를 차단했으며, 미 육군 신호정보 전문가와 전략사무국(OSS)가 중국에 큰 폭으로 증가되었다.

장개석을 반대하던 국민당 내 세력중 일부는 미국에 결탁하여 그를 몰아내기 위한 비밀협상에 들어갔다. 8월 28일 모택동은 주은래, 헐리와 함께 북경에 도착해 회의를 했지만 성과가 없었고, 미 국무부와 한국 미군정은 중화민국 정부를 교체하고자 했다. 미군정은 장제스에게 대량의 무기와 보급품 제공을 약속했다.

1946년 소련은 연해주에 병력을 증강시켰고, 인민해방군은 내분을 정리했다. 그해 4월 국공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장제스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도청에 들어갔고, 미군정의 보급을 인질삼아 중국에 대한 통제를 실시했다. 장제스는 국민당 내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여러 정치적 행보를 보여왔으며 대대적인 숙군, 숙청사업을 실시해 미국의 개입을 벗어나려 했다. 반장세력이 미국과 결탁해 자신을 끌어내리려 하는 것을 파악하고 탄압을 시작했다. 6월 장제스를 교체하기 위한 계획인 흰수염고래 계획이 완성되었고 반장세력들은 미국이 요구하는 조건을 무조건 수락했다. 그것은 중화주의를 거부하고 분명한 친미노선을 걸어 소련의 극동견제를 위해 활동한다는 것이었다. 이 합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국민당 내 세력과 지역주의 세력과 결부되어 사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1947년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린이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장제스를 미국이 지원하는데 큰 힘이 되주었던 쑹메이린의 손실은 매우 컸다. 장제스의 무리한 숙군작업으로 인해 군과 장제스간 갈등이 심화되었고 전선은 정체되고 분산되었다. 결국 전 전선에 걸쳐 패전하게 된 국민혁명군을 미군정이 병참기지 운용권을 앞세워 지휘권을 박탈했고, 병력들은 만주방면으로 축차 철수하게 되었다. 1947년 7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과도한 피난민에 대한 무책임한 수용, 가혹한 숙청으로 인해 7.23 반장시위가 전개되었다. 장개석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가 미군정에게 저지되었다. 1948년 1월 3일 장개석이 자진 하야를 선언한 뒤 자신의 힘을 통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복직하는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하지만 장개석이 하야를 선언한 직후 반장세력이 장개석 반대선언을 선포했다. 그리고 미군정 내 헌병을 투입하여 당시 국민정부가 위치한 봉천을 심양으로 개명하고 장춘을 신경으로 추대하고 수도를 선포했다. 1949년 1월 중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병력들을 편성하여 만주 방어선을 뚫기 위한 춘계공세를 실시했으나 북경에 전개된 팔켄하우젠 방어선에 저지되었다. 1949년 계속된 소모 끝에 미소 양국의 합의 끝에 중공을 압박하여 휴전이 조인되었다. 1950년 미국을 위시한 만주 공화국인 이한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50년대 이전 미국은 온건파가 강세였기 때문에 애치슨 라인 선언과 함께 미국은 유럽과 일본, 한국 이상을 방어해 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치슨 선언 이후 미 국무부 대소 온건파 조지 캐넌이 은퇴하고 대소 강경파 폴 니츠가 들어섰다. 폴 니츠는 소련이 세계 공산화 정책을 꾀하고 괴뢰국을 이용해 미국의 동맹국에 침략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국무부 극동 정책팀에 참여한 덜레스와 딘 러스크 역시 미 대통령 트루먼에게 이한과 일본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안전보장의사외에서 수립한 NSC-68에서는 대소봉쇄를 강화하고 소련의 도발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규정했고 트루먼행정부는 경제불황으로 인해 150억 달러만이 국방비로 가용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경제 담당자들의 변동으로 400~50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해 군비를 증강토록 했다.

미국 CIA는 연해주를 도청하면서 소련의 무력개입 의혹을 제시했고, 이에 미국은 소련이 이한을 침공하려는 호전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소련은 미국이 연해주를 포위해 세력을 약화시키려 한다고 의심했다. 1951년 미군이 이한의 군제 개혁을 위해 증파되자 소련은 미국이 연해주에 무력개입할 수 있다고 의심했다.

소련은 연해주를 만일 포위할 경우 소련의 극동영향력을 보전할 수 없다고 보고 극동함대를 강화했고 이에 미국은 공산진영의 태평양 진출의지가 명확하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이한을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돌출부로 인식했다.

소련의 해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에 해군을 파견한 미국에 대해 중국은 미국이 상해를 상륙하여 친미 중국을 건설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소련과 중국은 이한을 미국의 괴뢰국으로 평가했고, 공산중국도 미국과 대결해 패전하면 이와 같은 기로를 가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한편 미국이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전쟁에 지원을 시작했고, 이곳에 잔존한 국민혁명군 병력과 프랑스군이 미군과 합작할 경우 20만명 이상이 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침공이 직면할 것이라는 우려는 더욱 커졌다.

소련과 중공은 비밀리에 합작을 체결하고 이한을 침공하려 했고, 미국은 이한에 대대적인 원조와 군사적 지원을 실시했다. 이한 외무부는 미국의 이해를 파악하여 이-미 상호방위조약을 채결했고, 친한 인사들을 통해 한국 내 독립운동가들과 접선하여 이-한동맹을 채결했다.

극동의 위기는 점차 확대되고 있었고, 마오쩌둥은 전국적인 전쟁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미국과의 역량차이가 너무나 크고 전쟁준비와 작전능력이 부족해 중앙군사위원회는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 매우 부정했다. 마오쩌둥은 그럼에도 매우 호전적으로 전쟁을 준비했다. 1955년 상황이 극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이한의 외무부는 소련에 외교관을 파견해 양 측 중재에 들어갔다. 이한 외교부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는 마오쩌둥의 독선 등으로 악화되고 있었고 소련은 극동보다는 유럽전선에 집중하고 싶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이한은 중국으로의 계승과 상임이사국 논란에 대해 완전한 포기를 선언함으로서 일부 논란을 종식시켰다. 주이미군은 소련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계속 주둔했지만 중공은 계속 국경지대에서 이한에 대한 포격전을 벌이며 도발을 감행했다. UN의 보호가 없는 휴전조약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한이 맺은 동맹조약은 중국의 전면전 의지를 꺾게 했다. 이한과 한국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지원과 함께 더욱 공고히 되었으며 이한과 한국의 경제적 갈등과 경쟁양상에 대한 관계를 진척시켜 나아갔다.

1960년대 이후 이한은 한국과의 무역협정을 체결하여 원산항 조차권한을 획득하고 보호무역에 대한 상호협정을 수립했다. 50년대 이한의 자본가들은 한국 자본보다 우열했기 때문에 한국은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수동적으로 나아가야 했다. 한편 자주적인 무역통로를 얻고 대일 무역을 가지기를 희망했던 이한 정부는 한국의 원산항 이용에 눈독을 들였다. 1957년에 발견된 다칭유전은 이한과 한국의 무역관계에 중대한 한 획을 그었다. 연간 수천만톤이 추출되는 대량의 석유들은 산업발전에 중요한 자원들이었다. 한국은 이한의 농업과 공업원료에 대한 협약을 맺어 경제협력을 강화하도록 했다. 1969년 미 닉슨독트린의 발휘로 인해 이한은 독자적인 방어능력을 확보하기고자 했고 1970년대 초에는 대흠도에 중국 육전대 상륙이 시도된 발해만 해전이 전개되어 동북아 반중기조는 강화되었다. 이한은 중국과의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주이미군의 증파를 요구했으나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미군은 오히려 군을 빼내려 했다. 이 때 발생한 발해만 해전은 미군 철수를 막는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한은 1950년대부터 꾸준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며 해외 자본을 유치해 나아갔다. 1970년대에 연이어 발생한 오일쇼크는 이한에 필요한 경재성장요소를 한국으로부터 양보받는데 공헌했다. 1980년대 이한은 대기업 중심 경제체제를 완비했으나, 재무부장관의 경고에 따라 시행한 재무구조 평가는 심각했다. 기업들을 성장하기 위해 실시한 여러 독점적인 지원과 사업, 법적 완화는 기업들을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재무구조를 부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다.

이한은 한국으로부터 경제적 재무구조 조정협정에 들어가 경제개편을 돌입하고 해외유동자산에 대한 대비태세에 들어갔다. 한편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일본과의 수교 이후 이한은 많은 자본을 일본에 잠식시켜 일본경제를 침식해 나아갔다. 일본은 전쟁 이후 꾸준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전후 일본은 발전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했고 오히려 맥아더에 의해 개발이 방해받기까지 했었다. 1990년대 호황의 끝을 달리던 중 다시한번 재무부 비상권고로 인해 재무구조조정에 돌입하던 중 1997년 태국에서 시작되어 동남아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는 동북아시아를 강타하여 아시아 금융위기가 몰아쳤다. 이한은 소련 해체를 빌미로 동부군을 대거 감축하고 동부야전군을 해체하고 동부작전사령부로 변경했다. 중국과 진행하던 우주개발경쟁도 중단되었고 이한-한국간 경제대응 회의를 열었다. 이한은 경제위험을 완화시킬 수 있었지만 중국은 급속히 성장하여 이한의 안보를 강하게 위협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이한과 한국의 저지로 인해 다소 늦어졌지만 경이로운 잠재력을 바탕으로 기술력과 경제력을 끌어올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90년대부터 시작된 반중기도에 따른 한국의 군수정책은 2000년대 이후 신냉전 구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군사

이한공화국 국방백서 링크:

2016: http://cafe.naver.com/leehanre/book4767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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