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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당도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숙청 이후 당수 [[트리 루트]]는 장례를 취소했고, 민생당을 트바트칼란드 제 2제국으로 선포했다.
 
민생당도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숙청 이후 당수 [[트리 루트]]는 장례를 취소했고, 민생당을 트바트칼란드 제 2제국으로 선포했다.
{{인용문1| "트바트칼란드 제 2제국은 트바트칼란드로부터 나왔고, 트바트칼란드가 되었으며, 트바트칼란드와 분리되었습니다." | -민생당 당수 [[트리 루트]]의 트바트칼란드 제 2제국 선언 후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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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트바트칼란드 제 2제국은 활동이 없었다. 영프독과의 [[트리 루트]] 신강 취소를 위해 고객센터에 문의도 하는 등에 활동을 한 것과 기존 트바트칼란드 국가설정을 일부 사용하고 그를 교체한 것<ref>
 
그다지 트바트칼란드 제 2제국은 활동이 없었다. 영프독과의 [[트리 루트]] 신강 취소를 위해 고객센터에 문의도 하는 등에 활동을 한 것과 기존 트바트칼란드 국가설정을 일부 사용하고 그를 교체한 것<ref>
 
[[트리 루트]]는 근데 교통 공지도 만들고 버스 노선도 만들었다.
 
[[트리 루트]]는 근데 교통 공지도 만들고 버스 노선도 만들었다.

2024년 1월 27일 (토) 10:10 판

트바트칼란드 제국 1.26 정국
스파르타쿠스.jpg January 26th situation
일시
2024년 1월 25일 ~ 2024년 1월 27일
장소
트바트칼란드 제국 전역, 독일연합왕국 전역
원인
트리의 실종, 설하의 폭정
교전 세력
정부군반란군
• 트바트칼란드 황제 영프독
• 트바트칼란드 총리 리처드닉슨
• 트바트칼란드 제국군 안톤
• 트바트칼란드 제국군 빅토르 스와베크
• 신트바트칼란드 황제 에스피
• 트바트칼란드 섭정장관 설하
• 트바트칼란드 민생당 트리 루트
• 독일 제2제국 황제 빌헬름 3세
피해
없음주요인물강퇴
결과
1.26 정국 수습
신트바트칼란드 해체
반란군 진압
영향
트바트칼란드 제국 재수립
독일연합왕국 3차 수립

개요

트바트칼란드에서 일어난 1월 25일 ~ 1월 26일 동안 전개된 사건과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전개

트리 황제가 외부의 도움을 받는 조건으로 설하에게 방장직을 넘겼다. 그 후 트리 황제는 남동생 계정으로 가고 여동생 계정으로도 갔다가 여동생 계정 살리려다 자기 계정이 터져버렸고, [1] 그 후 설하는 임시섭정회의를 개최했다.

임시섭정회의 시기

국왕 선출 이전

임시섭정회의에서 투표를 했고, 리처드 닉슨 전 총리를 임시 총리로 임명, 트리 황제를 임시로 내보내고 황제에서 물러나게 한 뒤 사망 처리를 해 장례식을 치르도록 했다.[2]
그리고 투표 결과로 영프독이 국왕에 선출되었다.

국왕과 섭정

설하는 이 결과에 계속해서 반발했고, 영프독을 대상으로 계속해서 재투표를 요구했다. 영프독은 계속 거부했고, 설하는 트리 루트에게 왕위를 주겠다, 차라리 내가 왕하겠다 등등의 발언을 했다.

영프독 황제 시기

트바트칼란드 대숙청

설하는 결국 영프독에게 방장을 넘겼고, 그 후 영프독은 설하의 부방 요구를 무시하고 내보내고, 여러 인물[3]들이 내보내지며 대숙청이 전개되었다.

트바트칼란드 대반란

1월 26일 약 오전 2시 30분경에 일어난 대숙청 사태는 에스피의 트리거를 당기기엔 충분했다. 기존 확고한 세력과 독일 제 2제국의 상원의장이자 빌헬름 3세의 지인인 에스피는 독일 제 2제국의 도움을 받아 트바트칼란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뭐 무튼 여긴 트바트칼란드입니다. 한 내일쯤 되면 건국준비위원회을 해산하고 트바트칼란드 제3 제국 선포하겠습니다.[4]"
긴박했던 26일 당시의 에스피 발언.

이 때가 사실상의 쿠데타와 정부에 대한 반란을 이르킨 시발점이다. 에스피는 건국준비 위원회 하루동안 25명 가까히 성장하며 영프독 왕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5] 내부 사보타주와 궐기로 인해 영프독도 항복을 선언했으며 사실상 성공하고 말았다. 아래는 영프독의 항복선언 전문.

"트바트칼란드의 황제 영프독은 트리 루트와 에스피의 강퇴에 대해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고 그들이 큰 피해를 본것에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다신 돌아올수 없는 에스피와 루트라는 인재를 매우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트바트칼란드의 황제가 너무 과격한 대처를 한것이라고

생각되고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일어나지 않도록 황제의 권한을 줄일것을 약속합니다

다시 한번 위 사항으로 피해를 보신 에스피님과 트리 루트님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6]"

영프독의 트바트칼란드 황제 공식 사과문 전문.

민생당도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숙청 이후 당수 트리 루트는 장례를 취소했고, 민생당을 트바트칼란드 제 2제국으로 선포했다.

"트바트칼란드 제 2제국은 트바트칼란드로부터 나왔고, 트바트칼란드가 되었으며, 트바트칼란드와 분리되었습니다."
-민생당 당수 트리 루트의 트바트칼란드 제 2제국 선언 후 발언-

그다지 트바트칼란드 제 2제국은 활동이 없었다. 영프독과의 트리 루트 신강 취소를 위해 고객센터에 문의도 하는 등에 활동을 한 것과 기존 트바트칼란드 국가설정을 일부 사용하고 그를 교체한 것[7] 밖에는 없었다. 그 후 트바트칼란드 제 2제국은 정말 무언가가 없었고 부당수와 당원 1명이 개인사유로 이탈하며 트바트칼란드 제 2제국은 망하는 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8]

트리의 복귀

이때 트리는 다른 계정으로 복귀했고, 국가재건위원회를 창설하며 트바트칼란드의 본진을 옮겼다. 그러나 트리 복귀 이후 에스피의 건국준비위원회는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에스피는 이에 독일연합왕국을 선포하기 이르면서 짦았던 트바트칼란드 제3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트리는 모두 사면하기로 결정했으며 영프독과 군인들 등등은 복귀했고, 에스피, 트리 루트 등의 반란의 중심들도 복귀했다.

누구의 잘못인가?

사실 엄밀히 말하기 어렵다. 정부군의 영프독과 설하 간 권력투쟁, 정부군의 일방적 신고강퇴조치 등이 잘못이여도, 1.26 정국에서 진행했던 독일 제2 제국 트바트칼란드 개입 안건[9]이라던지 정치적 압박[10], 그리고 신트바트칼란드 선포[11]등 그 문제를 확산시키고 문제를 야기 시킨건 또 반란군의 잘못이다. 그러나 각자 행할려는 정의가 있었고 기조가 존재했으며 결과가 잘못됬을 뿐이지 취지는 좋았다.[12]트리가 확실하게 " 이새끼가 잘못했어요! " 하지않는 한 이는 누구가 더 잘못했냐 따지기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각주


  1. 1.26 편집하고 있는 트리 루트도 과거 경력이 있다.

  2. 상주는 리처드 닉슨 임시 총리와 트리 루트 민생당 당수였다.

  3. 트리 루트, 에스피 등등이 있다.

  4. 공교롭게도 이렇게 말하고 나서 2시간 뒤에 트리가 복귀한다.

  5. 순탄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섭정장관인 설하와의 기싸움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6. 저러고는 조금있다 임시위원회가 끝까지 싸워갈것이라며 선포했다.

  7. 트리 루트는 근데 교통 공지도 만들고 버스 노선도 만들었다.

  8. 트바트칼란드 제 2제국의 황제였던 트리 루트는 솔직히 트바트칼란드 영프독 왕권이 우리를 신강시켜서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9. 에스피가 이르킨 가장 큰 국면 중 하나이다. 그녀가 독일과의 연이 깊은 이유는 이름만 봐도 알듯싶다.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루이제 폰 프로이센이 풀네임이다.

  10. 영프독이 황제로 있어도 반란군은 끝까지 협박과 부방요구 권력요구들을 해오며 압박해왔다.

  11. 이것도 에스피가 이르킨 국면, 빌헬름 3세와 결탁해 건국시켰다. 그의 영향력과 빌헬름 3세의 추진력으로 순식간에 규모를 키우며 영프독을 압박해왔다.

  12. 정부군은 트리의 의지를 이어, 자유주의과 민주정 수호였고, 설하는 트바트칼란드에 대한 충성과 권위를 위해서였고, 반란군은 트리의 의지를 이어 트리 실종 이후의 사태에 불만을 품어 트리의 의지를 잇겠다라는 명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