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의 역사

고대

티베트 고원은 인도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이 충돌하며 만들어진 히말라야 산맥과 함께 만들어졌으며, 최초로 발견된 인간의 흔적이 50만년전 이지만 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되며,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만년전이라고 학계에선 추정하고 있다. 이때 이들이 원시적인 국가를 형성했다고 추측되지만 기록에서 확인할 방법은 전무하다.

토번 제국

고대 티베트는 라싸 남동의 얄룽을 기점으로 근처의 여러 부족을 흡수해 세력을 불려나갔다. 약 570년경 남리룬첸이 즉위하게 되는데 토번은 이 때부터 연대 고증이 가능하다. 이 시기부터 토번은 비로소 주변 경쟁 세력들을 능가하는 국력을 갖추는가 하면 중앙 집권화에 대한 준비에도 들어갔다. 그러나 지나친 확장에 대한 반발로 619년, 남리송첸이 독살되고 속국들이 다시 독립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 손챈감포가 불과 13세의 나이로 그 모든 것을 평정하고 통일 티베트를 만들었다. 633년, 손챈감포는 스키타이 계열 유목민을 평정하는 한편 티베트 일대를 통일한 후, 수도를 라싸로 정하고 토번 왕국을 건설한다.


634년, 손챈감포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물을 교환하고 토번의 남쪽에 위치하는 네팔의 릿체비 왕조에 사자를 보내, 브리쿠티 데비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636년, 당태종에게 당나라의 황녀를 왕비로 맞기 위해 사신을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송첸감포는 20만의 군사를 일으켜서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을 정벌하여 멸망시켰고, 백란 등의 강족 마을도 공략한 후, 송주를 내놓으라고 당나라에 요구했지만 당군에 패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당태종에게 특사 가르통첸을 보내, 금 5천 령을 납폐로서 주었고, 당나라는 토번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641년 문성공주를 왕비로 보냈다. 그 이후 손챈감포는 친당 정책을 펼치며 당나라와 많은 교역을 했다.

하지만 손챈감포 사후 토번 왕국은 669년 안서 4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면서 양국은 적대관계로 돌아서 버렸다.

당나라는 당연히 반격을 가했지만, 이미 토번 왕조는 대외적인 제도 정비에 성공하고 군사력 또한 증가되어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699년 치둑송첸의 대숙청으로 가르친링이 제거되고 710년 금성공주의 혼인으로 일시적으로 화평했지만, 715년경부터 당나라가 토번에 대공세를 가해 토번의 영향력을 점차 조금씩 줄였고, 당의 명장이었던 고선지의 원정으로 그 성과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고선지 역시 탈라스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당나라의 빈자리는 다시 토번이 차지하게 된다. 당나라는 토번에 매년 공물을 바치며 이들을 달래고자 했다.

하지만 토번의 정복 활동은 계속되어 왕국의 힘은 8세기 후반 더욱 확장되었다. 토번은 파키스탄 북부와 네팔, 인도 북부와 벵골과 방글라데시는 물론 중국의 간쑤성과 쓰촨성 서부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실크로드를 장악, 거대한 국가로 발돋움하였고 763년 당이 안녹산의 대란으로 혼란에 빠지자 공물을 보내지 않았음을 빌미로 삼아 20만 대군을 몰아 당군과의 수차례에 걸쳐서 정면 대결을 시도, 여기서도 승리를 거두며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했고 자신들이 당의 황제를 마음대로 세울 정도로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791년 서역 전역에서 위구르에게 패하면서 조금씩 영향력이 줄어들더니 800년대 초반부터는 남조 왕국에서까지 견제를 받았다. 결정적으로 아바스 왕조와의 대결에 국력을 소모하고 당, 위구르와의 전쟁에서도 큰 성과를 얻지 못해 결국 당과 화친했다. 이것이 토번 제국의 절정기였다.

중세

그 후 티베트는 다른 민족들에게 중앙아시아 지역을 빼앗겼으며, 토착종교 뵌교와 외래 종교 불교 간의 대립, 불교 내의 파벌 간 다툼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분열된 시대를 맞이했다. 그리고 티베트는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며 주변 강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했다.

몽골과 티베트의 첫 조우는 1236년인데, 당시 소규모 부족의 족장이 몽골에게 투항하고 금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기록이 시작된다. 1240년, 몽골 제국은 티베트를 제압하기 위해 항복한 탕구트 계열 장군에게 30,000명의 군사를 준 뒤 티베트를 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인 까담빠 종파의 절 2개가 불에 타고 승려들이 학살 당하는 등, 잔인한 결과가 많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세력 하나하나가 작아서 그런지 몽골의 다른 전쟁들보다는 훨씬 덜 피 튀기는 싸움이었다. 티베트를 완전히 흡수한 뒤 종교 지도자를 대리 통치인으로 선택해 티베트 불교 샤꺄파(홍모파)의 쌰꺄틴진을 식민 정책의 동반자로 삼았다. 홍모파의 승려 팍빠는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샤머니즘, 경교, 이슬람 등 온갖 종교가 각축을 벌이던 몽골에 티베트 불교를 전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