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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헝가리-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 국기.png
국명

헝가리-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
대헝가리 연방 공화국

헝가리어

Szlovák Szövetségi Köztársaság, Magyarország
Nagy-Magyar Köztársaság

국가 Himnusz
국화 튤립
국조 까마귀
수도/최대도시 부다페스트
인구 11.915.000
언어 공식언어:헝가리/소수언어:슬로바키아어
종교 재정분리 기독교90%
국가 면적 157.926km2
접경국 체코,오스트리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
총 gdp 3500억 3000만$
1인당 gdp 5.502$
국가원수 오르반 빅토르
정치 체제 공화정 의원내각제
경제 체제 자유경제
표어 하느님 헝가리 슬로바키아 연방를 축복하소서

Isten áldja a Szlovák NemzetközösségEt

개요

헝가리 풍경.jpeg
제 3세계관​ 중부유럽 동남부에 있는 국가로 수도는 부다페스트 이며 면적은 157.926km2 이다

국사 상징

국호

헝가리에서는 자국을 '머저로르사그(Magyarország)'라 부른다. 이는 '머저르인(Magyar)의 나라(Ország)라는 의미이며 '머저르'는 9세기 중반 부족 연합을 이루어 오늘날 헝가리 일대에 정착해 헝가리인의 기원이 된 핀우그로계열의 일곱 부족중 부족 연합의 지도자이자 헝가리의 시조인 아르파드의 부족이었던 '메제르(Megyer)' 부족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ㅓ' 발음은 중세 한국어의 아래아 발음과 유사하다. 2012년 이전에는 '헝가리 공화국(Magyar Köztársaság, 머저르 쾨즈타르셔샤그)'이라고 했다.
한국어에서 사용하는 이름 '헝가리'는 영어 명칭 Hungary에서 유래한 것이다. 훈족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 사학계에서는 거의 부정된다. 진짜 어원은 머저르족과 가장 밀접하게 교류했던 튀르크계 '오노구르족(Onogur-bolgárok)'으로 여겨진다.

국기

헝가리-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 국기.png
가로형으로 된 삼색의 국기인 헝가리 국기와 슬로바키아 국기가 둘다 공존하는 형태로 각 민족의 상징이 들어간다 여기서 하얀색은 민족의 통합을 상징하고 붉은색은 투쟁과 승리 각각 초록색과 파란색은 민족의 상징색으로 비교된다.헝가리 인민 공화국 시기에는 붉은별이 들어간 국장이 국기 정중앙에 새겨졌지만 1989년 민주화 이후로 삭제되었고, 이후 2013년 까지 헝가리 내에서의 사용이 금지되었다가 지금은 해금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유럽 사람들이 공산주의 시절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어 해당 국기에 대한 감정도 나쁜 편이다.

국가

헝가리어 Himnusz, a' Magyar nép zivataros századaiból(찬가, 헝가리인의 휘몰아치는 세기에)
Himnusz는 헝가리의 국가이다. 시인이었던 쾰체이 페렌츠(Kölcsey Feren)가 1823년에 작사했고, 에르켈 페렌츠(Erkel Ferenc)가 1844년에 작곡하였다. 1844년에 헝가리 왕국의 국가로 사실상 제정되었으며, 본래는 8절까지 있으나 공식 석상에서는 1절만 가창한다. 가사의 첫 소절을 따 Isten, áldd meg a magyart(하느님, 헝가리인을 축복하소서)라고도 한다.

공산정권 시절에는 종교색이 짙다 하여 가사가 모두 빠지고 곡만 연주되다가 1989년 민주화 이후 다시 가사 제창이 허용되었다.

가사
하느님, 헝가리 민족을 축복하소서.
그대의 은총과 박애로
그대의 팔로써 보호하시는 선행으로 인하여,
압제자에 대해 투쟁하는 오랜 시간 동안
비탄에 빠진 병든 운명을 지고서
그 것에 의해 조각한 시간의 구호가
민족이 겪은 고통스러운 모든 죄와
과거와 미래를 비나이다!

역사

헝가리 대공국 이전의 역사

헝가리는 마자르 족부터 역사가 시작된다 마자르족은 유목생활을 하다 농경문화 수용후 정착하여 살게되지만 그러던 750년경, 대헝가리의 마자르인들 중 대부분은 레베디어 라고 불린 돈 강 중류 일대로 이주하였다. 다만 일부는 대헝가리에 남았으며, 13세기까지 문화를 지키며 살다가 몽골 제국에 의해 소멸되었다. 레베디어에서 마자르 부족은 볼가 불가르, 알란 등 다른 부족 출신의 이주민들을 수용하였다. 한편, 9세기 초엽 다른 튀르크계 민족인 페체네그족이 도래하며 하자르 칸국과 수십년간 이어질 전쟁을 벌이자 마자르인들은 재차 서쪽으로 향하였다. 드네프르 강과 드녜스테르 강 사이의 땅(에텔쾨즈)에 정착한 그들은 튀르크계인 카바르 족[5]을 8번째 부족으로 수용, 헝가리 민족을 완성하였다. 이때가 바로 서기 830년경, 마침내 마자르인들은 하자르로부터 독립한 새로운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마자르족이 독립한 830년경 당시 켄데(제사장)는 레베드, 줄러(군사령관)는 알모시였다. 그리고 839년에 마자르 군대가 다뉴브 강 하류에 출몰한 것은 한 세기에 걸쳐 중부 유럽을 뒤흔들 마자르 인의 대이동의 서막이었다. 다만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중심부였던 다뉴브 하류에서 밀려난 마자르 인들은 몰다비아를 넘어 서쪽의 카르파티아 분지에 주목하였다. 그곳은 아바르 칸국의 해체 이후 불가리아와 모라비아의 접경으로 주인이 없었다. 따라서 862년부터 마자르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지금까지의 이동은 소규모였고 조직적이지 못했다. 대규모 이주가 벌어진 것은 894년 오랜 대립 끝에 결국 하자르 칸국에게 패배한 페체네그족이 마자르인의 본거지인 에텔쾨즈를 지나 몰다비아로 향하면서였다.

페체네그에게 위협을 받은 마자르인들은 줄러로 알모시의 아들 아르파드를 선출하곤 본격적으로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트란실바니아 지역으로 집단 이주하였다. 895~896년에 걸쳐 일어난 이 대이동을 'Honfoglalas'라 부른다. 이때 쿠르산을 마지막으로 켄데 직위가 없어지고 줄러, 즉 군사령관 직이 사실상 단독 군주로 행세하게 되어 중앙집권화로 나아가게 되었다. 카르피티아 분지에 정착한 10만 가구의 마자르인들은 산맥을 동쪽 유목민들에 대한 방어선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중부 유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900년경 다뉴브 강 동쪽의 영토를 접수한 마자르인들은 북으로는 발트해, 서로는 도버 해협, 남으론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북부까지 군사 원정을 감행하였다. 프랑크 제국의 분열 이후로 약화되어 있던 서유럽은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마자르 군대는 전투 중 거짓 퇴각 후 반격하는 전술을 주로 사용하여 돌격에만 익숙한 게르만 기사들을 쉽게 격파하였다.

마자르인들은 족장(bo) 휘하에 군대(jobbagy)를 편성했고 그러한 족장 5~6명이 하나의 부대를 모았다. 948년 마자르의 하르카 불추는 948년 직접 동로마 제국령을 방문하여 세례를 받고 오기도 하였다.

933년, 마침내 독일 왕 하인리히 1세가 마자르 군대를 패배시켰고 955년 오토 1세가 아우크스부르크 인근의 레히펠트 전투에서 불추를 전사시키며 마자르인들은 헝가리 평원에서 더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이후 마자르인들은 이전의 훈족, 아바르족, 노르만족 등의 선례들처럼 돌아가거나, 동화되거나, 영지를 얻거나, 혹은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정착하느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헝가리 대공국

10세기 초부터 머저르족은 서유럽 지역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였다. 원정의 목적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침공하여 전리품을 얻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변국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자국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머저르족의 원정은 독자적으로 행해지기도 하고 다른 나라의 용병으로서 행해지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원정 범위는 북으로는 발트 해, 서로는 도버 해협, 서남으로는 이베리아 반도 중부, 남으로는 이탈리아 남단, 동남으로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펠로폰네소스 반도에까지 이르러 유럽 거주민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955년 오토 1세(재위 936-973)에게 아우크스부르크(A의 레히펠트 전투에서 패한 후 헝가리는 더이상 서유럽으로의 원정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헝가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비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에, 주변의 기독교 국가들이 그것을 명분삼아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아르파드의 손자 턱쇼니(Taksony, 재위 955-972)와 그의 아들 게저( 재위 972-997)는 주변국들에게 침략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로마 교회(가톨릭)로 귀의했다. 948년에 동로마에서 주교가 파견되고 제3의 통치자(허르커)였던 불추?-955)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세례를 받기도 했을 정도로 동로마와 관계가 밀접했던 헝가리가 콘스탄티노플 교회(정교회) 대신에 로마 교회로 귀의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955년 아우크스부르크 전투 이후 독일에게 위축되어 심리적 부담감을 느껴 서방교회로 귀의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기독교는 군주의 권위를 부각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지 진정한 기독교 개종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게저의 뒤를 이은 이슈트반 1세(István I, 975~1038, 재위 997-1038)는 1000년에 로마 교회와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아 최초의 헝가리 왕이 되었다

헝가리 왕국

건국

아르파드 공작으로 부터 세습된 헝가리 대공국의 공작 작위가 이슈트반 1세( 재위 997-1038)때인 1000년에 로마 교회와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아 헝가리의 왕으로 되면서, 11세기 헝가리 왕국이 건국 됐다. 또한 1102년에는 헝가리의 칼만 왕이 크로아티아의 왕위에도 오르며 크로아티아-헝가리 연합(1102~1526)으로써 발칸 반도에서도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고, 유럽인들이 십자군 전쟁을 시작한 11~13세기엔 유럽 최강국들 중 하나로 군림했다.
12~13세기는 서방에선 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전성기 시절로, 아직 황제가 서유럽 전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였고, 동방에선 동로마 제국의 콤니노스 왕조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라, 강대한 세력을 동서에 둔 헝가리는 그 영향력을 유럽 전체에 떨치지는 못했다.

특히 헝가리는 동로마 제국의 콤니노스 왕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동로마 내 세르비아인들과 연대하여 제국에 반란을 일으킴으로서 견제를 꾀했지만, 콤니노스 왕조가 하람 전투와 시르미움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하면서 헝가리를 약 30여년간 동로마 제국의 보호국화 시켰다. 당시의 왕이었던 게자 3세가 제국의 봉신으로 거의 10년간 마누일 1세의 궁정에 있었을 수준.

전성기

다만 폴란드와 함께 중부 유럽의 강자로 불리기는 충분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후 동로마 제국이 4차 십자군의 침공으로 몰락하자팀킬때는 이때다 동로마 제국에 적대하지 않겠다는 봉신서약을 깨고, 세력권을 발칸 반도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1241년, 동방에서 쳐들어온 몽골족과 싸워 참패한 후,헝가리 전역이 몽골군의 맹렬한 침략을 받았고, 전염병까지 만연하게 됨에 따라 헝가리의 국력은 일시적으로 크게 쇠퇴하였다. 이 때 헝가리 인구의 약 60%가 사망하였고, 이 인구를 회복하는데 약 300년의 기간이 걸릴 정도였다. 기존에 헝가리인들이 살던 지역은 다른 민족들이 들어오게 돼 20세기까지 이어지는 민족 다툼이 생겼다.
14세기 중반, 1000년 이래 헝가리를 통치한 아르파드 왕가의 대가 끊기고 헝가리의 왕위는 나폴리 왕국을 다스리던 앙주 왕가의 카로이 로베르트에게 넘어간다. 카로이와 그의 아들 러요시의 재위기(1342-1381)에 헝가리는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 때 왈라키아 지방의 바사라브 1세는 오히려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왈라키아 공국을 세운 후, 이를 진압하러 온 카로이 1세를 포사다전투에서 격퇴한다.

카로이 로베르트의 아들, 러요시 1세는 계속된 정복전쟁으로 방대한 영토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후반기엔 폴란드 왕위까지 겸임하게 됨으로써 일시적으로 헝가리 왕국은 오늘날의 헝가리 전역, 폴란드 대부분, 루마니아의 절반, 세르비아 북부(베오그라드 포함),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전역, 심지어 오스트리아의 일부까지 지배했으며 딸을 결혼시킴으로서, 신성 로마 황제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토록 강력한 대왕국을 일군 헝가리였지만 프랑스와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세우는데는 실패한다. 헝가리는 거대한 영토 때문에 많은 나라들과 접경하고 있었고 폴란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 왈라키아 공국, 세르비아인들과 싸웠으며, 이는 주변 모든 나라가 잠재적 적국이었다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4]또한 상술하다시피 1241년 몽골에게 참패한 여파로 헝가리의 인구가 회복세에 접어들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렸고, 이는 국가 발전의 침해요소로 들어서게 된다.
14세기 말부터 헝가리는 남방의 발칸 반도에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전쟁을 벌이면서 조금씩 국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특히 1444년의 바르나 전투와 1448년의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2세(재위 1421~144)에게 연패한 것이 대표적.

중흥기

하지만 그렇다고 헝가리가 약해진 것은 아니어서 1456년에는 후녀디 야노시의 주도로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베오그라드에서 저지하였으며, 그 아들로 왕위에 오른 한국의 세종대왕과 같은 수준인 마차시(Mátyás) 1세의 시대에 헝가리는 다시 한번 부흥기를 맞이한다. 어렸을 때에 인문주의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덕에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모든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르네상스 문화를 받아들인 나라가 되었으며, 오스만을 제외하면 당시 유럽 최대의 상비군을 두어 군사력 강화를 꾀하기도 했다.

멸망

다만 그가 1490년에 죽고 폴란드의 왕족인 브와디스와프가 울라슬로 2세 (1490 ~ 1516)로 즉위하면서 헝가리는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고, 결국 그의 이후에 왕에 오른 러요시 2세(1516 ~ 1526) 의 통치시기인 1526년 쉴레이만 1세(재위 1520~1566)가 거느린 군대와 모하치 전투에서 교전한 후 2만 대 10만이라는 병력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완패하면서 멸망을 맞는다

이렇게 어이없게 헝가리 왕국이 멸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헝가리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지 못하고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력한 상태였는데, 마차시 1세는 제도적으로 왕권을 강화해나가더니 마침내는 문화 부흥과 국방 강화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면세권을 비롯해 귀족들이 그간 누려 오던 특권들을 모조리 폐지하는 등 전제군주로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귀족들의 입장에서 '저 왕이 언제 죽나' 라고 벼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가 서자만을 남기고 죽자 그를 후계자로 삼는다는 유언을 무시하고 몇 대 전 왕의 머나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브와디스와프를 데려다 앉혀버린 것이다.

게다가 귀족들이 다른 헝가리 왕 후보들을 제치고 그를 옹립한 건, 강인하고 총명하다는 이유가 아닌 띨띨하고 모자라서 '예스맨' 으로 부려먹기 딱 좋겠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울라슬로는 자신 앞에 무슨 서류가 내밀어지든 일단 서명부터 하고 보는 버릇이 있었고, 결국 헝가리는 귀족들의 사유물로 전락하고 만다. 요컨대 마차시 1세가 죽으면서, 그의 군사, 문화적 업적까지 다함께 관짝에 들어간 셈.

멸망 이후

신하국인 트란실바니아 공국과 고지 헝가리 공국, 오스만 직할령으로 나뉘었다.
이후 헝가리의 국토는 삼분되어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동부의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제외하면 중심부는 오스만 제국의 최북단 영토로서 1699년까지 무려 170년이나 통치를 받아야 했으며, 서북부는 최후의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의 누나와 결혼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의 잔존 세력에 의해 선출되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이 시대는 헝가리인의 민족적 치부로 남았다. 발칸 민족들은 거의 다 그렇지만.

한편 그 사이 헝가리는 문화적으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합스부르크령 헝가리를 제외하고 상당수 백성들이 칼뱅교로 개종하였다. 이로 인해 헝가리도 체코처럼 가톨릭 이외에 개신교 문화유산이 건재하게 되었다. 최근의 비종교화는 일단 생략하자.

1683년, 2차 빈 공방전에서 빈 함락에 실패한 오스만은 오스트리아-헝가리-베네치아-러시아가 엮인 신성 동맹 군대의 공격을 받고 참패해 헝가리의 잔존 영토를 오스트리아에 할양했다. 헝가리 전역은 중세에 그렇게 날을 세웠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이 통치는 1867년까지 이어졌다. 이로서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할령이 되었다.

대타협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이 퍼뜨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헝가리인들은 수백년 동안 헝가리를 지배해 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격렬한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848년 오스트리아에서 '빈 체제'에 항거한 3월 혁명이 일어나고 새 황제가 즉위하자 헝가리인들의 저항은 더욱 고조되어 코슈트 러요시의 주도 아래 부다페스트와 데브레첸에서 반 오스트리아 혁명을 일으켰다. 이 때 헝가리 혁명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연달아 격파하며 독립에 거의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등 헝가리 내부의 소수민족과의 갈등과 자국내 분리주의 운동의 확산을 우려한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인해 헝가리 혁명은 실패하고 만다.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고 난 후 오스트리아 당국은 보복으로 헝가리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트란실바니아와 크로아티아 등 소수민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을 분리한 후 헝가리어의 교육을 금지하고 독일인을 이주시키는 등 헝가리 지역의 독일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이런한 강압적인 통치 방식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를 맞게 되었다. 결국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뒤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 연방에서 축출당하며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사실상 배제된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스트리아 정부는 방침을 전환해 제국 내 제2의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헝가리인들에게 공동의 제국을 제안했다. 대타협[11]의 결과 헝가리인들은 헝가리 왕국을 건국하고 독립적인 정부와 의회 등을 구성하는 대가로 오래 전에 헝가리 공주와 결혼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머나먼 후손인 현재의 황제(당시의 황제는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왕으로 인정하여 이중 제국이 출현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등장했고 이렇게 헝가리인들은 비록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왕으로 모셨지만 분리된 왕국을 만들었다.

1867년부터 헝가리인들은 오스트리아 독일인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트란실바니아 등 트란스라이타니아 지역의 다른 민족들[12]을 탄압했다. 이 중 가톨릭 교도가 아닌 정교회 신자였던 루마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은 더 많은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1878년 이후에는 제국 바깥에 루마니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소수 민족 탄압은 루마니아, 세르비아의 반감과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발칸 반도에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입지를 좁히게 되었다. 1868년 크로아티아-헝가리 타협으로 크로아티아계는 트란스라이타니아 내에서 대폭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았고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이 수립되어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면서 헝가리 왕국도 소멸되었다.

헝가리 왕국

문화, 종교, 언어등에 있어 가까웠던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1918년 오헝 패전으로 함께 독립하려 하였으나 협상국(1머전승전국)에대한 헝가리 고위층의 로비와 오헝제국내에서도 영향력이 크던 헝가리가 무력으로 슬로바키아인의 입을 다물게 함으로서 슬로바키아는 헝가리에 의하여 흡수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슬로바키아 국민의 일부는 헝가리에 반감이 남아있다 그 이후 헝가리의 역사는 고난과 굴욕으로 점철되었다. 1918~19년 사이 쿤 벨러, 거르버이 샨도르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러시아 혁명에 자극받아 세운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은, 헝가리 보수파들과 이들과 연합한 루마니아군의 침공으로 붕괴되었다. 이후 헝가리에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국가가 세워졌고,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다스린 이 나라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에도 호의적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인 1940년 11월에는 과거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독일과 동맹을 맺고 추축국에 가담했다. 헝가리는 독일의 소련 침공 및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적극 참여했다. 독일이 우세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 로부터 옛 영토를 조금 뜯어내고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영토를 뜯어내는 등 1차대전 때의 패배를 되갚는 듯 했다. 그러나 1944년 전세가 불리해지자, 호르티 치하의 헝가리는 소련과 단독으로 강화를 맺으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를 파악한 독일은 1944년 3월 마가레타 작전을 시행해 헝가리를 사실상 점령했다. 이에 호르티는 새 총리를 임명하지만, 독일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독일군과 친독 인사인 살러시 페렌츠가 이끄는 화살십자당의 합동 작전인 판처파우스트 작전으로 호르티는 섭정 지위를 잃게 되었고, 슈츠슈타펠 대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독일로 호송된다. 살러시 페렌츠의 쿠데타는 성공하여 국민단결정부 수립을 선언하며 총리로 취임한다. 살러시 페렌츠의 국민단결정부는 파시즘적 통치를 하고, 엄연한 준메이저 추축국이던 이전과 달리 독일에 거의 종속된 모습을 보여주었다.그러나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고 소련에 점령(1945년 4월)당하였다.

이후 헝가리에는 제2공화국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철의 장막' 안쪽으로 편입되었고, 영토도 다시 트리아농 조약을 기준으로 한 영토(슬로바키아 지역 포함)로 되돌아간다.

헝가리 인민 공화국 시절

소련에게 점령당란후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건국된다 사회주의 국가이다 헝가리인들은 민주화를 위하여 열심히 투쟁하다가 소련이 멸망한다

현제

그후 대 헝가리 공화국이 건국된다 이 공화국은 민주정부로 유지 되다 최근 헝가리-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으로 국명을 바꾸며 독립하려는 슬로바키아 인들을 억제하고 있다

지리

위쪽 슬로바키아 지방에 산맥이 높이 있고 헝가리 지방은 산이 조금 있고 평지가 대부분이다

경제

인구:11.915.000 명

경제 규모(명목 GDP) 3000억 달러(약 325조 원)

경제 규모(PPP) 5229억 달러(약 600조 원)

1인당 명목 GDP 18.718 달러

1인당 PPP 40.000 달러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 90%

경제성장률 1%

고용률 67%

중앙은행 기준급리:3%

화폐 포린트

미국 1달러당 294.31포린트

영국 1파운드당 395.80 포린트

중국 1위안당 45.14 포린트

대헝가리 경제.jpeg

헝가리의 산업 구조,

파란색이 제조

붉은색이 건설자재,

분홍색이 의료-약학-화학-플라스틱산업,

진한 갈색이 철강 등의 제철업,

노랑색이 농업,

초록색이 의류업,

연갈색은 식품업,

흑색에 가까운 고동색은 석유 관련 산업,

갈색은 광산업,

회색은 기타 미분류이다

여기서 광산업과 임업은 슬로바키아 산맥지방에서 주로 일어나고 헝가리 산맥은 비중이 적고 농업은 헝가리쪽 평지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추축국과 공산당 체제를 지나서 철강 제조업이 예전부터 강했으며 현제도 명맥을 유지중이다

분홍색 부분과 의류는 중부유럽 최대 부다페스트가 중심이기에 자연스럽게 발생하였고 특히 이탈리아와 독일 근처의 영향을 받았을걸로 예측된다

헝가리 경제의 미래

3차산업과 미래 4차산업 위주의 투자가 필수적이다

문화

수렵채집, 목축, 유목 및 방목으로 살았던 우랄계 마자르족(헝가리인)은 유럽에 정착한 이후 게르만, 슬라브 등 주변 민족들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마자르 고유의 문화를 간직하기도 했고, 훗날 헝가리가 되었다.
때문이다.

예술

미술, 건축, 음악
헝가리의 미술품과 건축물은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아르누보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음악에 있어서는 프란츠 리스트, 버르토크 벨러, 리게티 죄르지, 치프라 죄르지, 에르뇌 도흐나니, 페렌츠 에르켈 등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있다.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시절, 일련의 록 밴드들이 영미권의 펑크 운동에 자극받아 공산당 정부의 검열과 압박을 버텨가며 나름대로의 펑크 음악을 발전시킨 적이 있다. 대표적인 밴드로는 Atilla Grandpierre의 Vágtázó Halottkémek이 있으며, 샤머니즘적인 요소를 펑크 음악에 결합해 독특한 공연을 펼쳐 헝가리 청년들의 인기를 끌었다.
문학
문학은 허세 부리는 송가, 자유를 갈망하는 시, 대담한 리얼리즘 이야기, 귀에 거슬리는 논쟁 등이 알려져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임레 케르테스와 현대의 고전으로 불리는 <방문객>의 콘라드 죄르지 등의 작가가 유명하다.

독특한 농촌 문화 때문에, 농촌 문학이 유달리 발달한 곳으로 유명하다.
대표적.

의복

헝가리의 전통의상은 지역마다 조금씩 무늬와 특징이 다르다. 하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헝가리의 전통의상은 화려한 색체로 옷에 수놓아져 있는 꽃문양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 의상은 크게 백성층과 왕족 및 귀족층의 의상으로 나뉘는데, 흔하게 볼 수 있는 전통의상의 대부분은 백성층의 의상이라고 보면 된다. 한복이나 치파오처럼 전통의상 자체를 칭하는 단어는 없고 특정 지역 명칭 다음에 헝가리어로 전통 의상을 뜻하는 NÉPVISELET(네프비셸레트)를 붙인다.

요리

와인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화이트 디저트 와인인 토카이 아수(Tokaji Aszú) 와인이 있는데, 당도에 따라 별 3개에서 6개(정확히는 사용된 Putton의 양)로 등급을 나눈다. 별이 많을수록 달고 비싸다. 별 6개보다 높은 등급은 Aszú-Eszencia와 Eszencia가 있으며, Eszencia가 최상급이다.

레드 와인으로는 에그리 비커베르(Egri Bikavér)가 유명하다. 뜻을 직역하면 Bull's Blood.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가 헝가리를 정복하기 위해 침공했을 당시, Eger 성에서 공성전을 벌일 때 오스만 제국 병사들 사이에 헝가리 병사들이 마시는 와인에 황소의 피가 섞여있어서 지치지 않고 저항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헝가리 장병들은 이 와인을 얼굴에 바르고 싸웠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Eger 성이 함락되었고, 헝가리는 정복당했지만, 당시 대 제국에 저항해 맞서 싸웠던 조상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와인에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 밖에 팔린커(Pálinka) 라는 술 또한 유명하다. 알콜도수는 40도에서 70도까지 다양하며, 과실주를 증류해서 만든 브랜디의 일종이다. 살구, 사과, 자두, 체리 등의 과일향이 첨가되어 있으며, 특징은 고량주와 같이 독하면서 금방 술이 오르지만, 금방 깬다. 고량주와 차이점은 뒷맛이 고량주와 같은 독특한 향이 없고 깔끔하다. 유럽의 알아주는 주당 헝가리 사람들이 매우 인기있는 술이며, 토커이 어수는 한국에 수입이 되지만 팔린커는 수입해서 파는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헝가리를 갈 일이 있으면 꼭 마셔볼 것을 추천한다.

헝가리의 전통 수프인 굴라쉬는 유럽 전역에서 유명한 요리다. 어째선지 한국에서는 육개장과 비슷한 맛이 나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굴라쉬 외에 파프리카가 잔뜩 들어간 수프로는 헐라슬레(halászlé)가 있으며 특히 버여(Baja)란 마을에서 즐겨먹는다고 한다. 재료나 조리법에서 매운탕이 연상되지만 당연히 덜 맵다.

또한 윈터 살라미를 비롯한 돼지고기도 알음알음 알려져 있다. 헝가리에서는 멍걸리처라는 품종의 돼지를 기르는데, 일반적인 돼지와 다르게 털이 북실북실한 것이 특징이다.

헝가리는 질 좋은 식재료가 풍부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기 때문에 단순한 고기나 감자 요리도 재료맛으로만 먹을 수 있을 정도이며, 실제 과일 맛이 나는 과일 주스나 셔벗도 굉장히 다양하다. 헝가리에 가면 꼭 치즈나 유제품으로 만든 디저트, 고기를 먹어보도록 하자. 그런데 헝가리 음식들은 어째서인지 엄청난 소금간
때문에 조금 먹기가 괴롭다. 현지인들이 가는 레스토랑 중에서는 1인분에 징그럽게 많은 양을 주는 곳도 꽤 있다. 헝가리인들은 그 정도 먹는듯.

스포츠

축구를 좋아한다

정치

총 200석
헝가리 시민동맹(피데스)--사회보수주의 연립여당
30석
전 헝가리 인민 공화국 때 부터 있었던 조직으로 그때 당시는 반 사회주의 운동을 전계했던 정당이다 공산주의를 매우 혐오하며 사회민주주의 사회 자유주의도 같은 공산주의 라며 매우 혐오한다
현제는 더 나은 헝가리를 위한 운동과 협업하지만 여기도 포퓰리즘 정상이라고 싫어하기는 한다

더 나은 헝가리를 위한 운동---극우정당 우파 포퓰리즘 연립여당
70석
헝가리 공화국 때 창설된 정당으로 칭년층의 지지를 받는다 극우정당으로 과도한 포퓰리즘 정당이다

기독인민당--기독교보수주의
10석 연립여당
헝가리 인민 공화국 때 있었던 조직으로 역시 기독교주의 자를 중심으로 반공운동을 펼쳤으며 시민동맹과 같이 연합하기도 했다 아직도 피데스와 우호적인 관계로 같이 연립을 자주한다

무소속 1석

헝가리 사회당---사회민주주의
58석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지만 현 상황때문에 복지를 축소 시키고 있다 하지만 최종목표는 복지사회의 건설이다

헝가리 민주연합---사회자유주의
10석
연립여당이고 사회자유주의를 주장하지만 중립성향이 강하기에 사회자유주의 이념을 포기하고 중도주의 정당으로 가자는 의견이 많다 또 하나는 중도연합 국민의 연합 무소속 의원과 통합해서 세로운 정당으로 나가자는 말이 많다

또 다른 정치---녹색주의 진보주의
2석
녹색주의 진보주의등 전형적인 진보정당이다 여기는 진보세가 강한의원들이 사회당과 통합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녹색주의 성향이 강한 의원들이 거부하고 있다

헝가리 노동당--마르크스 주의 극좌
20석
헝가리 사회당과 같은 뿌리인 헝가리 사회노동당에서 갈라져서 나온 정당이다 헝가리 사회당과 사이는 좋지 않다 극좌로 급진적인 정당으로 최종적으로 공산주의 정권운 세우는 것이

군사

1개의 사단은 1만명으로 되어있다
제 1 기계화사단/제 2 보병사단 체코 국경
제 3 보병사단 루마니아
제 4 보병사단 유고
제 5 보병사단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제 1 기계화여단/제 76 기계화여단/제 89 보병여단-오스트리아
제 10 기계화여단/제 7 기계화여단-다르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