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역사

영국 역사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성립 이후부터 현재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에 이르는 브리튼 제도의 역사다. 현재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로 이루어져 있다.

1707년 연합법에 의해 웨일즈 및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으며, 1800년 연합법으로 아일랜드 왕국이 연합되어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되었다. 이후 1922년,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결과 아일랜드 공화국이 독립하여 북아일랜드만이 영국에 속하게 됨으로써 현재의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되었다. 약어는 United Kingdom 또는 UK가 흔히 쓰이며 대한민국에서는 흔히 영국으로 표기한다.

연합왕국 성립 이전

현생 인류는 대략 3만 년 전쯤부터 영국 지역에 살기 시작하였다. 선사시대가 끝나갈 무렵, 이들은 켈트족이라는 민족을 구성하며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켜나갔고, 브리튼 섬에는 브리튼인이, 아일랜드에는 게일인이 등장하였다. 그러던 중 기원후 43년부터 로마인들이 브리튼 섬을 침공하였고, 이들이 약 400여 년 동안 브리튼 섬 남부를 지배하며 브리튼인들을 로마화시켰다. 이후에는 게르만계의 앵글로 색슨족이 쳐들어왔고, 본래 섬에 거주하던 브리튼인들을 웨일스 지방으로 몰아낸 후에 섬의 주 지역들을 대신 차지하였다. 앵글로색슨족은 약 10세기 경 잉글랜드 왕국으로 통합되었고, 5세기 경 아일랜드에서부터 이주해와 브리튼 섬 북서부에 살고 있던 일부 게일인들은 픽트인과 통합되어 9세기 경에 스코틀랜드 왕국을 건국하였다.

1066년, 노르만족이 프랑스 북부에서 건너와 잉글랜드를 침공하였고, 웨일스, 아일랜드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며 이후에는 스코틀랜드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스코틀랜드에 자리를 틀며 프랑스식의 봉건제를 지역에 정착시켜나갔고, 본래 있던 앵글로색슨 지배계층들과 교류하며 섬의 엘리트층으로 떠올랐다. 이후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의 왕들은 웨일스 지방을 정복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스코틀랜드를 합병하는 데에는 실패하여 1320년에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반강제적으로 인정하기도 하였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1700년대에 합병될 때까지 시시건건 잉글랜드와의 충돌을 반복하게 된다.

잉글랜드의 역대 국왕들은 결혼과 전쟁 등을 반복하여 프랑스 본토 내에도 상당한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고, 게다가 프랑스 왕위계승권도 가지고 있었기에 프랑스 내에서 일어나는 정치 다툼에 깊이 휘말려들 수 밖에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와 벌인 백년 전쟁으로, 이때 스코틀랜드의 왕들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에 대항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유럽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 구 가톨릭과 신교 간의 싸움이 치열해지자, 잉글랜드는 새로운 국교인 성공회를 조직하고 가톨릭 교회들이 갖고 있던 토지들을 몰수하고 왕권 강화에 활용하였다. 이때즈음에 이르자 웨일스는 완전히 잉글랜드 왕국에 편입되었고,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왕위 하에 하나의 왕국으로 성립되었다. 한편 잉글랜드 왕국은 현재의 북아일랜드 지방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토지들을 몰수하여 근왕파 귀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603년,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위를 물려받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왕국은 하나로 통합되게 되었다. 제임스 6세는 그의 궁정을 에든버러에서 런던으로 옮겼으나, 여전히 각각의 왕국들은 따로 노는 성향이 강했으며 정치적, 법적, 종교적으로는 제각각으로 활동했다. 17세기 중반에는 이 3개의 왕국들 모두가 내전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때 잠시 왕정이 폐지되었으며 국왕 찰스 1가 참수당했고 잠시동안 커먼웰스가 세워지며 단명한 공화국이 창설되기도 했다. 또한 17세기, 18세기에는 섬이라는 영국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영국 출신의 수많은 해적들이 활동하며 유럽과 캐리비안 해의 상선들을 약탈하여 악명을 떨쳤다.

단명한 공화정이 폐지된 이후 왕정이 복고되었으나, 전제군주정은 다시는 부활하지 못했다. 또한 가톨릭교도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법이 통과되면서 로마 교황의 간섭도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하여 훨씬 뜸해졌고, 권리장전 등 국왕의 권력을 제약하고 의회의 힘을 강화하는 법들이 연이어 통과되며 이후 영국은 의회제도와 입헌군주정에 기반한 국가로 도약하게 된다. 한편 1660년에는 왕립위원회가 창설되며 과학계에 대한 후원이 대폭 증가하였고,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해군력이 크게 증강되었으며 해외 식민지 탐사에 눈을 뜨게 되며 북아메리카와 캐리비안 지역에 대대적인 식민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연합 왕국의 성립과 18세기의 영국

1707년 연합법의 공표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연합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되던 당시에 웨일스는 이미 1535년 웨일스 법에 의해 잉글랜드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아일랜드 역시 1536년 잉글랜드에 의해 다시 정복되어 아일랜드 왕국의 군주를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가 겸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만이 별개의 왕국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면서 두 왕국이 한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명예혁명과 재커바이트의 반란

제임스 2세의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전제 정치는 결국 영국 의회의 반발을 가져왔다. 1688년 네덜란드의 총독이자 메리 공주의 남편이었던 오렌지공 윌리엄이 영국 의회의 지원을 받아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는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이 후 영국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게 된다.

그러나, 스튜어트 왕가의 본향인 스코틀랜드와 가톨릭 교도가 다수인 아일랜드에서는 스튜어트 왕가의 복귀를 요구하는 재커바이트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1688년과 1745년에 두 차례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으나 결국 1746년 완전히 진압당하였다.

대영 제국

1756년,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유럽, 북아메리카, 인도, 서인도 제도의 여러 나라와 식민지가 참여한 최초의 세계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 176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와 인도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후 영국은 제국주의 정책과 식민지 건설을 지속하게 된다.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생하였으며 그 결과 미국의 독립으로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잃게 되었으나,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식민정책은 계속 이어졌다. 1770년 제임스 쿡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였으며 그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식민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1671년 무굴 제국으로부터 인도에서의 통상권을 획득하였다. 그 후 프랑스의 프랑스 동인도 회사와 아시아 지역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세 차례의 카르나티크 전쟁의 결과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인도는 점차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1803년 경 영국은 인도의 거의 전역을 식민 통치하였다.

경제의 발전

18세기 중엽 영국에서는 대량 생산을 위한 공장의 건설이 이루어지는 등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석탄, 철강, 방직과 같은 새로운 산업은 영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1765년 제임스 와트는 증기 기관을 발명하였으며 이후 대량 생산이 도입되어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데이비드 흄, 데이비드 리카르도, 애덤 스미스와 같은 많은 고전경제학 학자들이 경제학 이론의 기초를 닦았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자본주의가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은 엔클로저 운동에 의한 농민 계층의 몰락과 불결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하는 빈민층의 확대, 아동 노동, 공해와 같은 여러가지 문제도 함께 가져왔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과 같이 기계를 파괴하는 과격한 노동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세기

1800년 연합법과 아일랜드 합병

연합왕국으로서 영국의 두 번째 단계는 1800년 연합법을 통해 1801년 1월 1일부터 아일랜드 왕국을 연합왕국의 일부로서 합병한 것이었다. 이로써 영국의 정식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되었으며, 이후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결과 아일랜드가 독립할 때까지 이 체제가 지속되었다.

아일랜드 왕국의 합병은 1170년 노르만 왕조이래 지속되어 온 잉글랜드의 왕의 아일랜드 침공 및 정복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노르만 왕조의 정복 후 잉글랜드의 왕은 아일랜드를 통치하였으며, 새로운 연합왕국이 된 영국의 국왕 역시 이미 17세기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개신교 교도를 얼스터 지역에 이주시켰다. 이들 개신교도들은 아일랜드 주민의 로마 가톨릭 신앙뿐 아니라 아일랜드 고유의 문화와 적잖은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1800년 연합법에 의한 아일랜드 합병은 정치, 법률적으로도 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 지방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1641년 아일랜드 봉기 이후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아일랜드 의회에 대한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하였다. 아일랜드의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개신교 이주민들은 종종 개신교 패권주의로 불렸다. 18세기에 이르러서도 가톨릭 교도에 대한 정치 참여의 금지는 지속되었으며 영국 성공회의 신자가 아닌 이른바 "비국교도" 전체로 정치 참여 금지가 확대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의 이러한 조치에 맞서 아일랜드 단결 협회등을 만들어 저항하였으며 결국 1798년 아일랜드 봉기가 발생하게 되었다.

1798년 아일랜드 봉기는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미국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에 고무받은 것이었으나 영국에 의해 진압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공회 교도만으로 이루어진 아일랜드 의회는 영국과의 합병에 동의하고 영국은 1800년 연합법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를 환영하는 아일랜드 주민은 극소수였다.

나폴레옹 전쟁

1806년 11월 21일 프랑스 제국의 통치자였던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선포하고 영국의 무역을 봉쇄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후 대륙봉쇄령을 중심으로 한 나폴레옹 전쟁이 발생하자 영국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의 중심국가가 되었고 수차례의 전쟁이 벌어졌다. 1815년 영국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은 7년 전쟁 이후 두 번째로 유럽 전역과 세계 각지를 무대로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빅토리아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기간인 1837년부터 1901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의 영국은 산업 혁명을 거쳐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세계 곳곳을 자국의 식민지로 점령하여 대영 제국의 절정기를 맞게 된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흔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다.

한편, 1832년 선거법의 개정으로 투표권이 중산층에게까지 확대되었으나 여전히 투표권을 획득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난다.

아편 전쟁

19세기 영국의 주요 무역 중 하나는 청나라에 대한 아편 판매였으며, 아편 금수 조치를 단행한 청나라와 두차례에 걸친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아편 전쟁의 결과 영국은 청나라와 난징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898년 홍콩을 포함한 신지에를 할양받게 된다. 홍콩은 2차 대전 이후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

20세기 초반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함으로써 빅토리아 시대 역시 막을 내렸다. 20세기 초, 대영 제국은 여전히 세계 제 1의 제국으로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1921년 당시에는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넘기는 4억 5천8백만 명 이상, 지구 육지 면적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3,670만 제곱 킬로미터의 영토를 차지했다.

20세기 초반은 두차례의 세계대전이 있었던 전쟁의 시대였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이 있었으며 이 전쟁에서 영국은 사상 최초의 국가 총력전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역사상 최초로 공중전과 탱크, 화학 무기가 등장한 전쟁이었다. 1922년 아일랜드 공화국이 독립함으로써 영국의 정식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이 된다. 영국은 1939년에서 1945년에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에 승리하였으나 그 피해 또한 극심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함으로써 시작되었으나 그 이면에는 민족주의, 제국주의와 같은 정치 경제적 갈등이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영국은 처음부터 전쟁에 참전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독일 제국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참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 기관총, 화학무기, 야간 폭격, 탱크 등 이전의 전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참혹한 전쟁이었으며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917년에 이르러 동맹국은 차례 차례 항복하기 시작하였고 1918년 독일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전쟁 이후 영국은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요르단과 잔지바르를 자국의 식민지로 편입하였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라크를 식민지로 편입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를 오스만 제국에서 분리시켜 보호국으로 삼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27년, 이라크는 1932년에 독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립에 대한 약속 때문에 영국을 도왔던 인도는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독립운동이 거세졌다.

아일랜드 독립

1918년 아일랜드는 영국 의회와 분리된 별도의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1919년 아일랜드 의회는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이로 인해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결과 1921년 아일랜드는 대영 제국 하에 자치를 인정 받는 조건으로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약은 완전한 독립을 원하는 아일랜드 내부의 요구와 충돌하였고 결국 아일랜드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던 아일랜드 공화국군, 옛 IRA는 패배하였으며 아일랜드는 영국내 자치국으로 남게된다. 1949년 아일랜드는 영연방을 탈퇴하여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으며, 이후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신 IRA가 결성되었으며 1969년 PIRA가 분리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PIRA는 2005년 무장 투쟁의 중단을 선언했다.

제 2차 세계대전

1939년 영국과 영국령 인도와 같은 영국의 식민지들은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1년에는 제국의 아시아 식민지를 침공한 일본에도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5년 추축국 세력은 연합군 세력에게 패배하였고, 전쟁은 끝이 났다.

20세기 후반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인도를 비롯한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하였다. 그러나,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많은 나라들이 여전히 영연방에 속해 있다. 1950년대 집권 노동당은 복지 국가를 내세워 대대적인 사회 복지 정책을 실시하였다. 당시 복지 정책은 흔히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으로 대변된다. 1980년대 집권에 성공한 마거릿 대처의 보수정권은 사회 복지를 대폭 후퇴시키고 많은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등 대처리즘에 입각한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정책은 신자유주의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식민지의 독립과 영연방

1947년 인도, 파키스탄 등 다른 문화권의 나라들이 독립하여 영연방에 가입함으로써 영연방은 문화적 다원주의로의 체제 개혁이 불가피해졌다. 1950년 영연방 총회는 성명을 발표하고 '영국 국왕은 영연방의 수장(首長)이며 자유로운 결합의 상징'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의 서약은 사실상 필요 없게 되었다. 2003년 짐바브웨의 탈퇴로 2006년 기준으로 총 53개의 독립국가(52개의 정회원, 1개국은 특별회원)가 회원국이다. 현재 영연방의 주요 회원국은 영국, 유소프, 오세아니아, 캐나다, 인도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