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기 (공동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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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입장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뒤, 제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은 자신들의 식민지를 내려놓기 시작하였다. 이는 식민지를 관리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와 별개로, 세계의 패권을 미국과 소련이 나누어 갖게 되어 단 둘의 초강대국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보았을 때, 미국은 자유주의의 대표주자였고, 소련은 공산주의의 대표주자였다. 미국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폐허가 된 서방국가들이 공산화 될까 두려워, 마셜 플랜으로 재활 비용을 대주었다.
미국의 자유진영에 제국이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고 해서, 절대로 미국의 뜻에 공화국이 끌려간 것은 아니며, 제국의 이익에 맞게 미국과 뜻을 함께한 것이었다.
그 예가 미국과 소련이 서로 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유럽에 핵무기를 발사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원로원과 시민들 모두 이 소식에 분노하였고, 최초의 원자폭탄 소유국이자 최초의 수소폭탄 소유국으로써, 미국과 소련의 행위에 분노하였다. 이 때, 제국 기술로 ICBM 제작 기술이 없어서, 미국과 소련 모두 제국의 핵전력을 무시하였는데, 이 때부터, 제국은 전력을 다하여 ICBM 제작에 성공하게 되고, 미국과 소련 모두 제국의 뜻을 존중하게 하였다.
미국이 지속적으로 제국이 ICBM을 연구하거나 무기를 연구하고, 몇몇 무기들을 제 3세계에 파는 것을 방해하자, 미국 주도의 NATO에서 탈퇴하였으며, 독자적인 군사체제를 구성하고, 독자적인 항법 체제를 연구했다.
또, 미국이 브레튼우즈 체제를 끝내려고 하자, 미국이 소유하고 있던 제국의 보유금을 요구하는 등, 황실에 물질적인 금만 보유하고, 노미스마를 황실이 소유하고 있던 금을 보증으로 찍는 등 미국과 다른 행보를 걸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분명 제국은 소련보다 미국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맞으며, 미국도 이러한 독자 행위로 인해, 제국과 관련된 사안에는 유화책을 제시했다. 이러한 유화책에 대한 것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편에 싸우게 된다.
베트남전에서 참혹한 환경에서 병사들이 싸우게 된 걸 본 시민들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68운동이라는 반체제적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벨 에포크의 예상과 달리 세계 1차 대전, 그리고 인종 학살까지 벌인 세계 2차 대전까지 보게 됨으로써, 세계의 발전에 회의를 느낀데다가 베트남전의 참상까지 보게 되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민들은 미국이라는 권위, 전쟁이 일어나도록 방조한 권위에 대해 반감이 일 수 밖에 없었다.
68운동은 대학생만의 운동으로 시작하였다가 노동자층을 흡수하며 더더욱 세가 커져갔고, 비록 권위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였지만, 제국은 크게 변화되었다.
68운동으로 인해, 페머니즘과 여성 인권의 관념이 제국 전역을 휩쓸게 되었으며 소도미법이나 이러한 법들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범죄(hate crime)의 용납은 68운동 이후로 사라지게 된다.
68운동은 서방 국가들에서는 반기독교적인 성향도 띄었으나, 제국에서는 그 성향을 약했다. 이는 제국의 문화에 교회가 뿌리깊게 자리잡아, 시민들 대다수에게 교회를 부정하기 어려웠기에,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전보다 무교나 무신론자 인구가 68운동 이후로 약간 늘었고, 비기독교인의 공직 진출까지 허용되었다. 68운동 직후에는 교회의 성찬 예배 참가 인원이 약간 줄었지만, 그 이후, 미사 참가 인원은 회복되었고, 현재까지도 75% 이상이 주일 성찬 예배를 참가하고 있다.
하지만, 68 운동이 제일 큰 영향을 끼친 곳은 교육이었다. 대학 교육을 평준화하였으며, 초등학교 때 실업계로 갈 것인지 인문계로 가서 대학을 갈 것인지 정하게 되었다.
냉전은 핵폭탄 등으로 인해 문명의 멸망에 준하는 위협이 계속되었지만, 기술의 발전과 같은 이점도 있었으며, 지금의 사회를 세운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