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경제국 역사

대경제국의 역사
History of the Korean Empire
大敬帝國史
대경제국.png

개요

본 문서는 대경제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이다.

역사

선사 시대

강청문화권 지도.png
  • 빨간색은 청랑문화권이고, 연노색은 강북문화권이다.
  • 자세한 내용은 강청 문화 문서를 방문하시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 현생 인류가 세계 전역으로 진출할 때인 기원전 70만년경에 강남 반도와 만주, 순지에도 인류가 이주했다. 훗날 이들 중 일부가 계속 이주하여 일본 등으로 이동했다.
빙하가 녹으며 지구의 저지대가 침수되어 현재의 지구의 지형을 갖추었고 이에 따라 강남 반도는 반도로 독립했고 만주와 순지는 초원 지대가 되었다. 이후 기원전 4000년경 중국으로부터 농경 기술이 전파되어 한민족(悍民族) 역사상 최초의 농경 문화인 청랑문화(靑浪文化)가 개막됐다. 청랑문화는 강북에서 개막되어 강남으로 전파되었으며 이에 영향을 받은 북부의 강북문화가 만들어졌다. 농경 사회가 개막하고 빈부격차가 생겨남에 따라 신분 사회가 시작된다. 그리고 여러 단위의 읍락국가(邑絡國家)가 성립되는 계기가 됐다.
강북문화(江北文化)는 기원전 3500년경 시작됐는데 청랑문화와는 다르게 유목이 그 정점에 서있는 형태로 형성되었다.

신석기

대경제국의 신석기는 사량문화(社糧文化)와 경사문화(競使文化)로 대표될 수 있다. 사량문화는 기존 청랑문화에서 분화된 문화인데 기존 청랑문화는 남쪽으로 완전히 중심지가 이동되어 훗날 진국을 세우고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려의 주요 민족이 된 한인(韓人)의 등장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남부로 이동한 청랑문화는 남부에서 세력을 키워 언무늬토기 문화을 형성한다.
청랑문화가 남부로 세력권이 위축되자 요동 지역과 새로이 편입된 요서 지역, 이외 강북 지역에는 새로운 문화인 사량문화가 등장한다. 이들은 흑룡강 이남의 만주 지역과 동부 개마고원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신석기 문화였고 이들의 융성한 문화는 위경에 위치한 앙산 유적지를 통해 알 수 있다.
경사문화는 사량문화권에 있던 읍락국가들의 지속적인 교류를 했고 이에 따라 형성된 문화이기에 사량문화와 비슷한 전통과 사회상을 가졌고 이를 증명하는 아주나 문화유적지라던가 에스포스토카 유적지를 보면 양산 유적지오양-장례 신석기 유적지와 비슷한 점이 한 개 두 개가 아니다.
이후 중국이 전국시대에 접어들고 기원전 850년경부터 기원전 750년경까지 100년 동안 중국에서 사량문화가 퍼져있던 요하강 유역으로 대거 이주하였고 대부분이 기술자 출신이었기에 이들로 하여금 사량문화는 급격히 발전하며 청동기에 접어든다.

국가의 발흥

언무늬토기 문화가 강남 반도 남부에서 유행하고 강북과 순지에서는 민무늬토기가 빠르게 퍼져나가며 민무늬토기 문화로 경사문화와 사량문화가 통합된다. 사량문화는 청동기의 유래와 함께 신정사회(神政社會)가 구축되었고 좀 더 조직적인 읍락국가들이 생기며 요동 군소 국가 난립기의 말대에 진입한다. 북부 구(久) 경사문화권에 있던 순지와 첼라놉스크 지역에는 연족(衍族)이라는 부족 연합체가 생긴다.
연족은 대족장이 사회의 정점에 있는 유목민족이었으며 연족의 씨족들 중 주도권을 잡고 있던 '우으웅 씨족'은 후리 족장이 재위를 계승하고 본격적인 팽창 정책을 개시, 마침내 연족을 통합한다.
하지만 북방은 여전히 농사를 짓기 어려웠고 가뜩이나 통합되었어도 내부 부족회의는 여러 파벌간 정치 싸움이 만연했다. 이에 후리는 대규모 남하책을 제시했고 부족회의는 이를 만족하였다. 하지만 일부 계층이 이에 반발하여 그대로 순지와 첼라놉스크에 머물렀고 후리를 따른 대다수의 부족민은 남하한다. 이름바 대이주(大移住)였다. 이들은 연북 지역에 정착했고 곧 이어 생존을 위해 웅족과 결탁한다. 이후 웅족과 정략혼인을 통해 기원전 700년경 통일국가인 조선을 건국한다.[1]
조선을 건국한 이는 조선의 제1대왕[2] 태조 기희왕이였다. 기희왕 왕검은 인재 선발제도인 당과제(黨科制)를 실시하고 제3대왕 영종 정양왕은 토지제도인 지정제(支鄭制)를 실시했으며 제4대왕 혜종 고양왕이 세제인 동납법(銅納法)을 실시해서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이러한 시기를 조선 고씨왕조의 중대라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전성기를 바탕으로 성종 유양왕은 기원전 300년경에 칭왕을 하여 왕호를 왕으로 고치고 예법도 왕국에 맞게 바꾸었다. 헌데 고씨왕조도 점차 내분에 시달린다. 왜냐하면 당시 정양왕은 자신의 외동아들인 왕보를 대신해 형제상속제인 형속제(兄屬制)에 따라 동생인 고양왕에게 왕위를 승계시켰으나 이후 왕보의 후계가 다시 이 왕위를 되찾으려는 왕위 쟁탈전을 시작하면서 왕실은 고양왕계와 정양왕계로 나뉜다. 자세한건 조선의 왕사 문서를 참조하시오.
이러한 왕위 쟁탈전에 유명 명문가들이 개입하면서 더욱 심해졌고 기원전 200년경에는 조선의 행정제도인 지정제와 당과제의 문란과 더불어 앞서 말한 유명 명문가들이 지방과 중앙의 요직을 차지하여 개혁파 신료들을 쫒아내고 족벌정치가 개막된다. 이렇듯 왕위 쟁탈전, 지정제와 당과제의 문란, 족벌정치의 '3대악습(三代惡習)'은 조선을 국가 멸망 테크트리에 탑승시켰다.
한편 과거로 돌아가 기원전 270년경, 탁리국이 이전 연족중 순지에 그대로 남았던 이들인 찬나의 분파, 기산족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멸망하자 탁리국의 유민들이 대거 강북으로 유입된다. 이들은 우수한 기술과 융성한 문화를 꽃피웠기에 강북의 토착민들에게 선진 기술과 문화를 전파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강북 지역엔 국가들이 세워졌다. 그리고 부여와 옥저는 소금의 무역권을 놓고 전쟁을 일으켰고 이 전쟁에서 부여가 승리함에 따라 강북의 주도권은 쇠퇴한 조선으로부터 잠시 부여로 이전된다.

이 상황에서 조선은 간간히 중국의 연나라의 침공을 받았다. 하지만 연나라가 진나라에게 합병되고 이후 이 진나라가 한나라로 교체되는 등 중원은 매우 혼란했다. 이때 많은 중원의 지식인들이 조선과 부여로 이주했고 그 와중에 분서갱유로 파괴된 묵자의 여러 중요 경전의 사본들이 조선으로 유출되고 이후 조선에서 독자적인 묵가 사상인 애가가 만들어졌다.
한편 새로이 중원의 통일왕조로 등극한 한나라 안에서 노관이라는 제후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진압됐는데 한나라 정부는 노관이 반란을 일으킨 연나라 지역에 대대적인 숙청을 실시했다. 이에 연나라 지역에서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고 이들은 근처에 인접한 조선과 부여로 이주했고 그중 위만을 중심으로 한 무리도 조선으로 이주한다. 조선의 조정은 고양왕계의 폐왕 왕부[3]이 죽고 헌왕 왕준[4]이 즉위한다. 헌왕 왕준의 뒤에는 사씨 가문이라는 유력 가문이 있었다. 사씨 가문는 오랫동안 지방의 니계상[5]과 조선상[6]을 독차지 한 유력 가문이었다. 사씨 가문은 자신들의 기반인 요서의 소유(昭裕) 지역에 다른 유력 가문인 강씨 가문의 권력이 침식해오자 이를 막고자 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을 활용하기로 한다. 사씨 가문은 위만을 금흥(昑興)후[7]라는 봉작을 하사하고 한음의 니계상에 임명한다. 위만은 국경을 침범하는 유민족을 막아내고 이들을 교화 시켜 자신의 병력으로 편입한다. 이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그는 중앙 정계로 진출했고 그의 가신들도 중앙 정계에 입문한다. 위만은 여러 관직[8]을 거치며 사 씨 가문에서 떨어져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다. 이때 위만은 부여의 1책 12법을 모방한 16조법을 공포한다.[9] 위만은 영사로 있을 때 백성들에게 선정을 펼쳐 민심을 크게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향후 정변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한다. 위만은 거짓 장계를 헌왕에게 올려 "변경이 지금 한나라의 공격을 받는다"라 보고했고 헌왕은 위만에게 한나라를 막으라고 3만의 군을 주었으나 도리어 위만은 조선의 수도인 아사도(阿斯都)로 상경하여 경국사 최초의 정변인 정미정변을 일으킨다. 조선의 중앙군은 위만과 맞서 싸웠지만, 조선군과는 달리 한나라에서 들여온 철기로 무장한 정변군을 막을 수 없었고 기원전 194년 5월, 아사도가 함락된다. 헌왕은 자결했고 사씨 가문은 강씨 가문과는 반대로 위만의 개선식을 직접 개최하며 위만과 결탁한다.[10] 헌왕의 아들인 세자 왕직이 아사도 인근 장담포에서 남은 고씨왕조의 일파와 항전하다 전사하면서 고씨왕조의 가신과 조정의 신하 대다수가 위만에게 투항했고 투항하지 않은 이들은 고문이나 사형으로 죽고 변경으로 축출된다. 지방을 제외한 모든 반대파를 제거한 위만은 기원전 194년 7월, 왕에 오르면서(태왕 위만) 근 895년간 이어진 고씨왕조가 무너지고 향후 조선을 632년 동안 지배할 위씨왕조가 조선의 집권 왕조로 등극한다.(전기 위씨왕조)
전기 위씨왕조는 기존 3대악습에 대한 개혁과 지방행정구역에서 통치관을 폐지하고 지역을 12개의 향(鄕)으로 나누어 '향'을 향정관(鄕政館)으로 하여 관리하게 했으며 문경당(文經堂)이라는 지방교육기관을 만들어 인재를 길렀고 극악의 인재풀이를 없애보고자 청년 인재들을 등용하고 자신을 따르는 가문의 자제들을 적극 등용하였다. 하지만 태왕 위만의 개혁은 오직 수도인 아사도에만 국한되었고 지방엔 이러한 개혁이 효력을 보지 못하였다. 지방의 유력 가문은 태왕 위만을 '역적(逆賊)'으로 규정하고 고씨왕조의 복고를 수십차례 시도했다. 더군다나 이 지방 유력 가문은 개혁으로 인해 자신들의 지위를 잃을까 봐 이러한 개혁을 단행하는 태왕을 불신하였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한나라의 혜제가 마침내 10만 대군을 일으켜 기원전 191년,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1차 조한전쟁).

태왕 위만은 니계상 을 영통사(營統使)에 봉하여 1만의 군을 주어 군사 요충지인 흠령(欽岺)과 주례(周禮)에 진을 치게 하고 세자 위정양으로 하여금 태선장군(太善將軍)[11]과 이영사(理領事)[12]에 임명하고 소유에 파견해서 소유에서의 징집을 명한다. 한나라혜제는 군을 남군과 북군으로 나누어 남군은 자신이 친정을 하고 북군은 대장군 이성이 지휘케 했다. 남군이 주례 지역을 공격하자 주례를 지키던 도부통사(導副統使)[13] 수인(收人)은 한나라군을 향해 항전하다 전사했고 주례가 함락된다. 하지만 북군은 대장군 이성을 중심으로 한 파벌과 혜제의 어머니인 고황후 여씨의 수족, 여록의 파벌로 나뉘어 서로 당쟁을 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군의 사기가 매우 떨어졌다. 이러한 상태로 북군이 흠령을 공격하자 흠령을 지휘하던 니계상 삼의 군에 격파되어 여기 저기 패잔병이 흩어진다. 남군은 그대로 진군하여 흠령을 점령한 북군과 함께 협공하여 소유를 점령하려 했으나 북군이 흠령을 못 점령하자 이에 길을 우회하여 창례(創禮)와 방백(方白)을 점령하고 소유를 공격한다. 하지만 소유에는 니계상 삼의 군과 증원군으로 온 도부통사 군락한의 군에게 패배한다. 하지만 혜제는 소유를 재공격하는 대신 요서의 주요 지역을 공격해 약탈했고 조선측도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니 화친을 요청했고 한나라가 조선이 소유를 제외한 요서 지역을 한나라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면서 제1차 조한전쟁은 끝이 난다.
전쟁 당시 위만은 전시를 이유로 지방의 유력 가문에 사병을 인수했고 이를 다시 유력 가문에 돌려주지 않는 방식을 취한다. 이에 지방의 유력 가문들이 태왕 위만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중앙군에게 대패하고 태왕 위만은 지방의 유력 가문을 축출한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반대파를 제거한 위만은 국가의 기틀을 더욱 다졌는데 인재 선발 제도인 '정삼팔성제(正三八性制)'와 조세 제도인 '기입세(基入稅, 토지세)'와 '교세(敎稅, 학비)', '정세(程稅, 인두세)'와 토지 제도인 두창제(竇廠制)를 실시하고 민심 안정책으로 세금을 경감하고 군역과 공역을 1년 동안 면제해주었다. 그리고 태왕 위만은 국경과 가까운 아사도를 대신할 새로운 수도인 왕검성을 짓고 그 곳으로 천도한다(왕검성 천도).
태왕 위만의 안정적인 치세 이후 기원전 178년, 정양왕이 즉위한다. 정양왕은 상공업을 부양시키고 통치 기구를 정비했으며 난잡했던 관제를 개혁해 필요 없는 관직은 처분했다. 또한 공신세력인 사씨 가문에게 토지를 주어 그들을 포섭하는 포섭책을 사용했다. 이들 의 안정적 통치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는 계속 반란이 일어났는데 기원전 180년에는 남도성(南都城)에서 일어난 진세의 난과 기원전 178년 정양왕 즉위 원년에 일어난 도북상(都北相)[14] 사수이 있었고 사수의 반란군이 한동안 도읍인 왕검성을 점령하는 등 초기 위씨왕조는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시기에 철인군주 우거왕이 즉위한다. 기원전 150년에 즉위한 우거왕은 우선 군제를 3복 30사제(三服三十使制)로 개편했고 군비를 대규모 증강하는 한편 도로망을 재정비했다. 우거왕은 기원전 143년, 강북 중계 무역의 요충지였던 강북의 성읍국가들을 조선의 영향권에 두기 위해 부여와의 전쟁을 일으켰고(조부전쟁) 비류국의 도읍인 간지에서 결정적으로 조선군이 부여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며 전쟁은 조선이 승리한다[15]. 우거왕은 봉건제를 실시하여 지방 제후들에게 지방의 땅을 주어 관리하게 했고 기존 행정제도인 도양제와 향정관을 폐지한다. 재건된 국가와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우거왕은 자신에게 충성을 하지 않는 남부의 한인의 나라인 진국 원정에 나서서 한동안 훗날의 마한땅을 관할했으나 군량미가 떨어지자 철군하기도 했다. 이 우거왕의 치세 동안 조선의 위씨왕조는 전성기를 맞는다. 한편 한나라의 무제가 '조선이 조공국(진국, 부여, 북옥저, 남옥저, 등등)과의 조공무역을 방해한다.'라는 명분을 들어 조선을 침략한다.

우거왕은 좌문관(左紊官)[16] 진중공 사원에게 군을 주어 소유를 방어케 했고 해로를 통한 상륙을 염두하여 낙랑후 진천갈사후 이신, 시액후 감준으로 하여금 연합군을 편성하여 패수(청천강)과 왕검성 일대의 방어를 맡겼고 장군 성기를 영통사(營統事)에 임명해서 이들을 지원하게 하였다(기원전 110년). 성기는 패수로 상륙을 시도한 한나라군 2만명을 격파했고 곧이어 상륙해오는 한나라 증원군 3만명도 추가로 격파한다. 하지만 한나라 주군(主軍) 12만명이 있던 소유에서는 무리하게 평원에서 전투하던 조선군이 한나라의 전차부대에 격파되면서 조선군은 소유를 버리기로 하고 소유내 곡창과 금문(禁文)[17]를 처분하고 소유에서 철군한다. 하지만 한나라군도 점령 과정에서 희생자가 많이 나오고 막상 소유를 점령했지만 소유에는 마땅한 보급을 취할 것이 없었고 피로스의 승리를 한 셈이다. 하지만 무제는 요하 방어선을 구축한 조선군을 격파하는 것보다는 해로를 통해 조선의 도읍인 평양 왕검성으로의 상륙을 결정, 최소의 수비군만 요하와 소유에 배치하고 나머지 8만의 군과 증원군 3만이 합세하여 11만의 대군이 왕검성에 상륙한다. 성기는 막아보았지만 몇몇 전투에서 물량의 차이와 성기의 무관세력 성장을 견제하는 지역 제후들과 조정 관리들의 지원이 늦어지면서 성기는 평양 왕검성의 앞마당인 왕음성을 한나라군에게 뺏긴다. 곧이어 한나라군이 무제의 지휘하에 사기가 올라 왕검성을 향한 대규모 공성전을 진행한다. 수적열세에 밀린 왕검성의 수비군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조정내에서 항복이 논의된다. 허나 갈사후 이신과 서안평후 정용륭과 이외 제후 3명[18]의 연합군 2만명이 한나라군의 허를 찌르게 된다. 무제는 질서정렬히 군을 이동시키며 반격을 시도했지만, 조선군의 기습공격으로 군내 사기가 떨어지자 패배를 직감하고 누선장군 정복으로 하여 군의 철수를 맡기고 자신은 결사대를 조직해 조선의 추격군을 막다가 마저 철수한다. 무제는 하는 수 없이 조선이 강화 사절단을 보냈고 조선이 소유를 한나라에 넘기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는다.
하지만 우거왕이 제2차 조한전쟁에서 얻은 상처에서 병을 얻어 이만 병사한다. 그의 뒤를 이은 장항왕이 아버지의 죽음 후 방황하는 지방 세력들을 통제하지 못하자 지방 제후들과 위경의 요가(曜家)들이 대거 득세하였고 조선은 이제부터 '제후국들의 시대'가 열린다(多國時代, 다국시대).

다국 시대의 개막

기원전 108년, 진국의 왕인 오천이 반역자 배세에게 죽임을 당하고 배세는 진국의 장로인 유신(柳臣)에 있던 기준을 왕에 추대하여 삼한을 건국한다. 하지만 삼한 건국에 지방의 세력가들이 반발하여 마주[19]와 진주[20]가 자신들의 왕을 옹립하였고 천군(天君)을 비롯한 소도의 신신(神臣)들이 기준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기준왕의 세력은 변주[21]와 조주(晁州)에만 행정력이 미치게 된다.
한편 29대 조선왕인 장항왕은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고 전제왕권을 수립시키기 위해 사실상 독립하여 떨어져 나간 제후국을 다시 복속해나갔다. 먼저 남해의 사씨 가문의 제후국을 병탄했는데 그러자 남해의 소국들이 일제히 장항왕에게 투항한다. 장항왕의 뒤를 이은 승예왕요동후를 세력권에 편입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장인어른, 신통공(臣統公) 장인렬을 숙청하여 외척에게 넘겨진 정권을 다시 조선왕에게 가져온다.
기원전 82년, 진한의 핍박을 받던 북부의 예주(濊州)가 독립을 하여 동예가 되었다.
조선이 제후국들의 난립으로 혼란이 일어나자 일부 조선의 지식인들이 삼한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들은 낙후되있던 삼한에 여러 선진 문물들을 전해주면서 삼한의 발전을 안겨다 준다. 그 중 가장 빠르게 이런 변화를 받아드린건 서라벌에 건국된 신흥국인 사로국이었다.
잠시 사로국의 건국 이야기로 넘어가보면 서라벌에 있던 6부의 수장이 부족장인 공세소를 축출하고 6부의 대표인 주흥공(州興公) 혁거세에게 박씨라는 성을 상납하고 거서간에 옹립하면서 사로국이 건국됐다.
부여에선 해수리왕 사후, 그의 장남인 해모수왕이 즉위했지만 그를 지지하던 저가세력이 구가-마가 연합군에게 실각당하고 해모수왕도 폐위됐으며 구가와 혼인동맹을 맺었던 해부루가 그 뒤를 이었으나 마가가 이번에 반발하여 자신의 사위인 해금와를 추대하는 쿠데타를 일으킨다(예성의 변). 옥원의 변 사건으로 구가와 저가가 지방으로 쫒겨나고 그들의 공백을 우가가 채워넣는다. 옥원의 변 이후로는 마가가 조정을 주도하고 우가가 이에 참여하는 형태로 중앙정부가 유지되었다. 이후 우가가 권력을 잡으려 정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우가가 내세운 왕위후보, 해주몽은 어쩔수 없이 자신을 따르는 우가의 잔당들을 이끌고 동부여로 귀부하며 동부여의 아신태왕은 이들을 환대했지만 그의 아들인 아태이신과 아방상소는 동부여로의 입조 후, 점차 커져가는 해주몽의 세력을 경계했고 아신태왕이 죽어 아태이신이 왕으로 즉위하면서(아태이신왕) 해주몽의 세력과 동부여 토착 세력간에 갈등이 폭발한다. 아태이신왕은 아우인 아방상소를 대장군에 임명하여 해주몽 세력을 축출할 것을 명했고 결국 해주몽은 고태보라는 동부여 원로의 도움으로 이전에 같이 온 부여 잔당을 데리고 겨우 동부여를 탈출한다. 해주몽은 고태보의 양아들로 입적했었던 적이 있어 이후 고주몽으로 불렸으나 그 이전에 태어난 고주몽의 아들인 해유리는 성씨를 개명치 않아 후에 궁중 암투의 원인이 된다.나비효과란 이런걸 말하는 것이지 동부여를 탈출한 고주몽은 졸본국에 정착하여 이 곳의 토착 세력과 결탁하기 위한 목적으로 졸본국 군장 연타발의 딸인 연소서노와 정략혼인을 하며 졸본국을 흡수한다. 이윽고 고주몽은 흡수한 졸본국 위에 고구려를 건국한다(동명성왕).

삼국으로 정립되다

기원전 31년, 52대 조선왕인 가령왕이 남옥저를 향한 공격을 가하다 전사하고 그의 아들인 위진령은 복수를 위해 남옥저의 북부를 장악한 고구려와 손을 잡고 남옥저를 공격, 남옥저는 고구려-조선 연합군에게 항복한다. 조선은 남옥저에 대대적인 약탈을 행한다. 남옥저의 영토는 고구려가 합병했는데 고구려는 남옥저에 자치소(自治所)를 설치하여 자치권을 준다. 이외에 고구려는 인근 제후국들을 합병해 나가며 영토를 확장했다. 기원전 19년에 유리명왕이 즉위하자 틈을 노려 남옥저의 '산맥임'과 옥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된다. 한편 고구려 안에서 궁중 권력 암투가 일어나고 암투에서 밀려난 연소서노와 그의 아들인 온조와 비류는 졸본의 토착 세력과 함께 남하하여 마한의 가맹국인 위례국을 점거, 그 터에 십제라는 나라를 세운다. 하지만 비류는 온조의 세력에서 벗어나 위례국의 서쪽에 있던 현재의 인천인 비추홀국을 공격, 비추홀국의 왕에 오른다. 이후 비류가 군을 이끌고 십제의 수도인 위례성을 공격했으나 온조에게 대패하고 본국인 비추홀국마저 십제군의 공격을 받자 비류는 자결 하고 십제는 비추홀국을 복속한다. 이렇게 세력을 넓인 십제는 국호를 백제로 바꾸고 온조는 왕에 오른다(고조 경정왕). 고조는 백제의 관제를 만들고 한강 유역의 마한에 가맹국인 금환국(金幻國), 제빈국(制斌國), 골성국(骨聖國), 보언국(補言國), 편송국(扁悚國)을 복속하며 백제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한편 고구려의 유리명왕은 계루부 고씨가 이미 장악한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해서 연노부 해씨의 권력을 강화한다.
기원후 2년, 변주자사겸 금관국왕을 겸하던 김과품이 죽고 시개왕 김수로가 즉위한다. 시개왕 김수로는 목지국을 공격하여 조주를 탈환하였고 병풍으로있던 변주왕 기태를 폐위시키고 가야 연맹을 창건, 가야 연맹의 1대 왕에 오른다.
고구려에 유리명왕이 죽고 대무신왕이 즉위한다. 훗날 무종이라는 묘호를 받게 될 대무신왕은 대대적인 영토 확장을 실시하여 고구려 부근 제후국인 구다국, 개마국, 갈사국, 조나국, 주나국, 반약국, 시액국를 복속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조선의 주용왕이 인근 제후국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간평 평원에서 고구려와 격돌했으나고구려의 재상인 을두지의 술책으로 연합군은 고구려군에게 대패한다. 여기서 조선은 군을 철군하는데 병력 손실을 최소화했으나 조나국, 주나국, 갈사국의 군은 고구려에게 완파되어 훗날 속수무책으로 고구려에 합병되버리는 원인을 제공해버린다. 하지만 고구려는 많은 정복 전쟁으로 전비를 많이 차출해버렸고 국고가 바닥을 들어내자 대무신왕은 과세를 실시한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여기저기서 민란을 일으켰고 대무신왕은 말년을 이러한 민란을 진압하는데 사용했다. 연노부 해씨의 백성들에 지지가 바닥을 들어내자 틈을 노린 계루부 고씨가 대무신왕이 죽은 틈을 타 고해색주를 왕위에 옹립하는데 성공한다(민중왕). 하지만 연노부 해씨의 강경파였던 '해애루'가 정변을 일으켜 집권한다(모본왕). 집권하게 된 모본왕은 백성을 향해 고강도 탄압책을 적용했고 계루부 고씨를 조정에서 축출한다(금환의 해). 허나 계루부 고씨는 자신들을 죽일 듯이 탄압하는 모본왕으로부터 민심이 떨어질 때로 떨어진 민중들과 연합하여 국내성을 공격, 모본왕을 비롯한 연노부 해씨의 세력이 급격하게 축소되고 모본왕이 폐위되게 된다(국내성의 변). 다시금 정권을 잡은 계루부 고씨는 '고궁'을 왕에 옹립하고(태조대왕) 부여태후 순노씨에게 섭정을 맡긴다. 부여태후 순노씨는 고구려에 내전이 일어난 틈을 타 침공한(제2차 조고전쟁) 조선군을 간평에서 막아내고(제2차 간평 전투) 계루부 고씨의 권력을 정립하는데 노력한다. 어머니가 권력의 기반을 마련하자 태조대왕은 그에 보답하듯 대규모 영토 확장을 시작하고 동시에 내정을 가꾸기 시작한다. 그는 힘이 약화된 갈사국, 조나국, 주나국을 합병하는 한편 지방관인 욕살을 전국에 파견하여 지방통제력을 강화했다. 세유법(稅油法)을 실시해서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동본위제를 확립하여 화폐를 제정하였고 농업과 상업의 발전을 장려, 군사 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춘다. 재정적 여유가 생긴 태조대왕은 대대적인 군비 확장을 통해 고구려군을 강화해나가 훗날 고국천왕의 정복 전쟁때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조선의 왕권 다툼에 개입하여(제3차 조고전쟁) 조선의 남해 지방과 구(舊)도읍지인 왕검성을 고구려에 편입시켜 고구려의 영토를 더욱 확장시킨다. 기원후 122년, 태조대왕이 생애 마지막으로 전쟁을 일으켜 조선의 수도인 위경을 공격했으나(제4차 조고전쟁) 무리한 공격으로 패배한다. 이후 이 전쟁에서 후유증을 얻은 태조대왕은 전쟁터에서 사망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고구려가 혼란해지자 고구려는 신속히 차대왕을 옹립하여 위기를 모면한다. 옹립된 차대왕은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펴, 선정을 펼쳤으나 점차 사치와 향락에 빠져 폭정을 일삼았고 이에 좌보 명림답부가 난을 일으켜(마격원의 변) 차대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에 신대왕을 추대한다. 신대왕은 차대왕 때문에 망가져버린 고구려에 활력을 불어 넣어 재상직을 성문화 시켜 재상을 국상이라 하여 국상을 설치하고 진대법의 기초가 되는 대미법(貸米法)을 전국적으로 보급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중앙정치기구와 지방정부를 정비한다. 신대왕 이후 즉위한 고국천왕은 신대왕이 수습한 고구려를 다시금 재정비 강화하기 시작한다. 고국천왕은 국상에 을파소를 등용하는 한편 흉년일때 백성을 양곡을 대여해 백성을 구제하고 풍년일때 이를 다시 회수하는 내용에 진대법을 실시해서 백성을 구제했다. 정치적으로는 5부 연맹왕국 체제를 동·서·남·북·중의 방위명으로 하는 지방행정제도로 개편하여 지방통제력과 왕권을 강화하였고 계루부, 순노부, 연노부, 절노부, 관노부의 군장과 수뇌부를 중앙귀족으로 편입시킨다. 교육제도를 바꾸어 지방교육기관으로 향당(鄕堂), 중앙교육기관에 대자감(大子監)을 설치하여 교육에도 힘쓴다. 그리고 태조대왕때 만들어진 군대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다시 운용 가능케 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기원후 191년, 1만 7000명의 군을 동원해서 조선을 침공, 간평에서 조선군 2만명을 완파시켜 조선 중앙군을 괴멸시켰고 곧이어 위경을 공격한다(위경 공방전). 결국 위경은 고구려군에게 수적열세, 질적열세에 못 이겨 패퇴, 위경이 고구려의 손에 떨어진다. 사실상 가망이 사라진 조선은 제66대 조선왕 덕경왕이 조선왕의 직위와 조선의 이름만은 남기기 위해 고국천왕에게 딜을 제안,[22] 조선왕의 직위를 고국천왕에게 선양한다(조선 외인왕조). 이로서 385년 동안 이어지던 위씨왕조(전기 위씨왕조)는 당분간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조선의 왕위를 양위 받은 고국천왕은 조선의 제후국을 정리하여 삼주국[23], 대주국, 요동공국만 남기고 모두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시킨다.
고구려가 북방 지역을 장악하는 사이, 백제는 마한을 잠식해 들어갔다. 근초고왕은 한강 유역의 5개국[24]을 병합하며 영토를 넓혔다. 하지만 백제의 팽창 정책에 불만을 제기한 말갈국이 항장국(抗長國), 규잔국(規殘國), 희신국(熙新國)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백제군에게 패배하며 항장국(抗長國), 규잔국(規殘國), 희신국(熙新國)이 백제에게 합병되버린다. 백제는 234년에 즉위한 고이왕의 치세 시기에 국가의 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고이왕은 말갈국을 완전히 복속시키는 한편 지방행정조직을 정비해 기존 6촌 연맹 왕국이었던 백제의 정체(政體)를 지방은 10주, 중앙은 6향으로 나누어 '주'에는 자사를, '향'에는 향주라는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관등·관직 체계를 재정비하고 관복에 대한 복색과 율령을 제정하여 관료제를 대폭 정비·강화한다. 하지만 고이왕의 뒤를 이은 백제의 9대왕, 책계왕이 고구려의 후원을 받은 동예의 침공을 친정으로 막아내다가 전사해버려, 백제에 혼란이 왔고 그의 뒤를 이어 298년에 즉위한 분서왕 치세에는 더욱 혼란기에 접어든다. 분서왕은 군사 조직을 개편해 군사적 행동을 통하여 이 혼란기를 타개하고자 시도했지만 오히려 외국[25]의 후원을 받은 초고왕계열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이후 고구려의 지지를 받은 초고왕계의 부여비류가 고구려의 압력으로 백제의 왕에 즉위한다(비류왕). 집권한 비류왕은 재상, 진담에 조언을 수용하여 3품20사법을 제정해서 인재 등용 제도를 창설하여 인재 등용을 효율적이게 하는 한편 상공업의 번창을 지원하고 군비 증강을 시도하며 국력 증강에 열을 올렸다. 백제는 비류왕 시기 다시 활력을 되찾아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마한의 주도국인 목지국을 합병하였고 전국적으로 기반 시설들을 확대시켜 나갔다. 허나 이전에 초고왕계가 보냈던 자객에게 암살당한 분서왕의 아들, '부여계'가 쿠데타를 일으켜(경서성의 변) 정권을 장악한 후 비류왕을 폐위시키고 초고왕계를 축출시킨 다음 왕에 오른다(계왕). 하지만 비류왕의 아들이었던 '부여구'가 다시금 초고왕계를 모아 계왕이 죽어 고이왕계가 혼란해진 틈을 타서 쿠데타를 일으키고(정월궁의 변) 정권을 회복하고 주변의 추대를 받아 왕에 오른다(근초고왕). 이후 근초고왕이 남부의 마한 잔당을 향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재개, 파죽지세로 마한의 가맹국들을 정리해 나갔으며 결국 일부 남부 해안 마한 가맹국들이 백제에 충성을 맹세하며(유훈각서) 백제는 마한을 사실상 합병한다.
사로국은 6부의 연맹 왕국으로 6부의 대표들이 모여 소집한 '화백회의'가 선출한 '최고화백'이 재상으로 있는 재상 중심의 정체를 구축했다. 사로국은 진한의 가맹국들을 합병하며 세력권을 넓여 나갔는데 196년, 내해 이사금이 신라의 왕(이사금)에 오르면서 영토 확장에 열이 오른다. 신라(사로국)은 가야 연맹에서 일어난 포상팔국의 난에 개입해 낙동강 유역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한편 대규모 영토 확장을 실시한다.
흘해 이사금은 확장된 신라의 영토에 기반 시설을 정비하고 진한을 완전히 병합했으며 이에 따라 지방 직제를 재정비·강화한다. 흘해 이사금이 서거하면서 신라 석씨 왕조는 종말을 고한다.

백제의 전성기

중에서 제일 먼저 전성기를 맞이한 건 백제다. 백제 전성기의 기반을 마련한 비류왕이 서거하자 백제의 대성팔족 중에서 비류왕을 비롯한 초고왕계에 결탁한 진씨와는 반대로 고이왕계, 후일 비류왕계[26]로 갈아 타는 '해씨'의 후원을 받은 '부여계'가 왕에 올랐었지만(계왕), 조세 개혁 실패와 재난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며 민심이 흉흉해지자 다시 초고왕계의 '부여구'에게 정권을 빼앗긴다. 계왕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부여구는 왕에 올라(근초고왕) 마한을 완전히 남부 해안으로 몰아내며 속국으로 삼았으며, 내정에 초점을 맞춰서 진융구를 재상에 등용하고 진정을 조정좌평에 임명해서 자신을 지지하는 진씨를 조정에 기용하여 정부를 장악한다. 권력의 미천을 확보한 근초고왕은 이전 고이왕이 제정한 율령 체제를 정비하여 전제 왕권을 법제화 하는데 초점을 맞췄으며 백성에 대한 감시·통제를 강화한다. 남부 마한의 치하에 있던 호남 평야를 본격적으로 개발하며 농지를 개간하고 신식 농법을 도입하며 농업 생산량을 높였다. 근초고왕의 이러한 내정 정책으로 백제는 금방 계왕때 손실된 국력을 회복해 오히려 국력을 강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근초고왕은 군사 조직을 증강하며 가야를 정벌할 준비를 한다. 세작을 통해 이를 알게 된 가야 연맹은 연맹 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지만 딱히 중론된 결과를 도출해낼 수 없었다. 이에 가야 연맹의 맹주국으로 있던 금관국이 개입해, 연맹의 연합군을 편성, 섬진강에 배치한다. 근초고왕은 오히려 신라의 땅을 빌려 섬진강을 우회, 가야 북부의 반파국, 가라국, 다라국을 격파하자 가야 연맹은 일제히 백제에 복종을 약속한다. 곧이어 근초고왕은 왜국, 즉 일본과 사로국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구했고 일본과 사로국은 이를 수용한다. 남방을 평정·안정시킨 근초고왕은 북진을 준비한다. 근초고왕은 크고 아름다운 경제력과 재원을 바탕으로 백제 북방 말갈 지방에 석현성, 곤방성, 치양성, 팔곤성, 공목성을 건설하며 방어 요지 건설에도 만전을 기한다. 때마침 고구려가 북방 진출 노선에서 남진으로 노선을 선회[27]하여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하자, 근초고왕은 이를 명분으로 출병해서 고국원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개박살 낸다. 사기가 오른 백제는 몇차례 전투 후, 북진을 개시하여 고구려의 30여개 성과 100개의 군현을 복속했고 남부 고구려의 요충지인 평양성을 공격한다(제1차 평양성 전투). 계속히 공격하던 백제는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며 고구려마저 꺾는데 성공한다. 고구려를 꺾자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후원을 받은 동예를 침공하여 서부 4주를 복속시켰고 수군을 증병해 동중국해로 진출, 류큐(오키나와)와 대만, 중국의 남만을 개척한다[28]. 이때 근초고왕은 해상 무역을 장려하고 국가 차원에서 국역서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국역서의 수장에 '좌평'의 '회역좌평'을 두어 신중하고도 중요하게 관리했다. 바야흐로 백제의 전성기가 열린 것이었으며 이는 근초고왕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고구려의 전성기

고구려는 이전 고국천왕이 191년에 조선을 사실상 합병하고 난 후 산상왕이 즉위했는데 그의 즉위에 이의를 제기한 산상왕의 형, 고발기가 한나라의 공손씨와 연합하여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된다. 이후 공손씨는 몇차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한다. 산상왕은 명림영산을 국상에 선임했다가 그가 노환으로 일찍 타계하자 둘째 형, 고우루를 신임하여 국상에 임명한다. 산상왕이 죽자 그의 동생, 고계수가 왕후 우씨의 지원을 받아 후궁 출신인 태자 '고우위거'를 대신해 왕위를 승계하려 했으나 국상 고우루가 5부의 신하들과 연합하여 선수를 쳐, 고우위거를 태왕에 옹립시킨 다음(동천왕) 고계수를 멀리 옥저의 마운령으로 유배시키고 왕후 우씨는 연금 조치한다. 권력을 장악한 고우루는 18세의 동천왕의 섭정으로 내정을 운영하다가 노환으로 사망한다. 나름 나라를 잘 운영한 고우루를 통해 동천왕은 국경 지역의 순찰을 강화하고 다시금 파상 공세를 펼 수 있는 공손씨 가문을 대비해 상비 군사 조직을 공손씨와의 국경인 요하강 유역에 배치한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용병을 통해 나라를 유지하던 공손 가문은 대륙의 위나라에게 합병되었고 그 후 조선은 위나라와 국경을 닿게 된다. 초기 조선은 위나라에 우호적 제스처를 취했으나 국경을 접하자 적대 관계로 전환되버린다. 위나라는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군을 주어 조선을 정벌케 한다(위나라의 조선 원정). 관구검은 를 전투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고구려의 전시수도인 환도성을 함락시킨다(제2차 환도성 전투). 이후 동천왕은 관구검의 침략으로 파괴된 고구려를 재건하다가 과로사하고 그의 후계로 왕에 오른 중천왕은 국상을 비롯한 중앙 행정 조직을 강화했고 259년, 위나라가 울지해라는 장수를 보내 고구려를 침공하자 이를 막아낸다(제2차 양맥 전투). 고구려의 14대왕, 봉상왕이 폭정을 일삼다가 국상 창조리에게 폐위되고 난 이후 300년, 고구려의 15대왕으로 즉위한 미천왕은 대규모 영토 팽창 정책을 실시하였고 백제와의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한 동예를 313년에 침공, 후원 수준이 아니라 보호국화를 한다. 미천왕은 이외에도 302년, 311년, 312년에 차례대로 군사를 일으켜 부여의 현도와 안양군,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던 서안평, 단맥골 지역을 복속시킨다. 미천왕은 정복 전쟁을 통해 시시때때로 귀족의 군대를 인수해 나갔는데 미천왕은 이 틈을 노려 귀족의 군대를 상비군화시키고 귀족이 이에 반발하자 귀족의 대다수를 숙청하고(환도성의 화) 자신이 총애한 국상 음우를 비롯한 신흥 귀족 세력과 소노부, 계루부 세력을 중용한다. 미천왕의 왕권 강화 정책이 계속되면서 이에 반심(反心)을 품은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고구려 지도부내에서 분열이 끝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이 싱황에서 미천왕이 죽고 고국원왕이 즉위하였는데 고국원왕은 기존 귀족을 향해 강경책을 폈던 미천왕과는 달리 유화책을 써 지도부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국상에 계진을 임명한다. 그는 영토 팽창 노선을 강화하여 북진을 추구했으나 때마침 성장하고 있던 모용씨의 전연이 있었다. 고구려는 모용선비의 전연에게 대패하고 결국 선왕인 미천왕의 시신과 왕족 일가가 전연으로 이송되고 만다. 치욕을 맛본 고국원왕은 국상 마부를 파견해 전연과의 화평교섭을 하게 했고 고구려는 전연과 치욕의 강화를 맺는다(요승성의 치). 이에 따라 고구려는 조선의 제후국인 여연국을 신설해 여연국의 왕작인 여연후(與燕后)[29]의 작위를 전연의 당시 왕인 모용황에게 받쳤고 곧이어 전연이 부여에 내정간섭을 하는 것을 고구려가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 기타 여러 조항들이 체결된다. 이후 고국원왕은 팽창 노선을 선회하여 백제를 노리며 치양성을 공격하는(치양성 전투) 등, 강남반도 이남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오히려 제1차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해버린다. 고국원왕은 죽기 직전 자신이 총애하던 국상 고로로 하여금 자신의 장남인 '고구부'를 왕에 옹립시킬 것을 명한다. 고로는 고구부를 대신해 고국원왕의 동생 고무의 아들 고무연을 왕에 옹립하려던 '무연당'을 비류수의 대화[30]를 통해 제거하고 기반이 탄탄해진 상태로 '고구부'를 왕에 추대한다(소수림왕). 소수림왕은 자신들에게 굴욕을 줬던 전연을 복속시킨 전진과의 관계를 개선시켜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들여와 공인시킨다. 전문교육기관인 태학을 설치하고 중앙교육기관인 대자감과 지방교육기관인 향당의 악습을 철폐하여 교육 제도를 개혁한다. 그리고 율령을 제정하여 법치국가의 길을 연다. 그는 중앙관제를 정비하여 대양복정십신분직법(戴樣服定十臣分職法)을 제정해서 전제왕권을 견고히 하는 한편 효율적인 관료제를 완성시킨다. 소수림왕은 백제의 침공으로 약화됐던 고구려의 국력이 서서히 회복되자 대외 정책을 손보기 시작했는데 연호로 현덕(賢悳)[31]을 제정했다. 이때가 소수림왕이 즉위한지 376년, 소수림왕 5년이었다. 그리고 현덕 원년이 되었다. 현덕 원년 376년에 소수림왕은 백제의 수곡성을 공격하고 현덕 2년 377년에 백제의 북부 변경 지방을 수시로 침범하는 등 백제와는 계속 적대적인 외교 정책을 실시했다. 소수림왕은 현덕 9년 384년에 형제인 고국양왕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타계한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마련한 국력을 신장시키고 후연의 침략들을 물리치며 시간을 보낸다. 문덕(文悳)[32] 7년, 서기 391년에 고국양왕이 죽자 태자 '고담덕'이 왕위를 승계한다(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영락이라는 연호를 제정하고[33] 귀족들의 사병을 가차 없이 폐지하여 군권을 왕에게 집중시킨다. 이후 군사 조직을 강화한 광개토대왕은 친정으로 국상 미성에게 도읍인 국내성의 내정을 맡기고 백제 북부 변경을 침공한다. 그는 백제로부터 10개의 성과 부근 30개의 고을을 탈환했으며 이번엔 방향을 정 반대로 바꿔 자꾸 조선의 제후국인 삼주국에 공격하여 약탈해 가는 '거란'을 장수를 파견해 정벌하여 강북 전역에서 거란을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문덕 7년(391년) 10월에 다시금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북부 방어의 요충지인 관미성을 향해 맹공을 퍼붓고 마침내 함락시킨다. 관미성을 함락시킨 광개토대왕은 그대로 남진하여 오두산성을 비롯한 3개의 성과 10개의 고을을 점령한다. 한편 이렇게 고구려에게 처참하게 패배하던 백제의 진사왕은 귀족과 대신들의 신임을 잃어 나갔고 결국은 자신이 왕좌를 얻었던 방식처럼 자신도 그렇게 왕좌를 빼았기고 자신 스스로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진사왕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아신왕은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왜나라에 여러 기술을 전수해주어 이들과의 우호를 유지했다. 아신왕은 영락 2년에 장군 진무에게 군을 주어 관미성을 함락케 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영락 4년 395년에 궁중암투를 종결시키고 '부여전지'를 태자에 봉하여 왕위 계승권을 태자에게 줬고 내부 분쟁을 끝냄과 동시에 군을 일으켜 다시 고구려를 여러 번 공격했으나 이 역시 모두 패배한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말고도 강북 북쪽으로 축출된 거란족과 부여, 동부 영토에 잠식해 들어온 숙신과 일으킨 전쟁 중이었기에 백제가 거슬렸고 광개토대왕은 영락 5년 396년에 친정으로 수군을 이용해 예성강의 청목령에 정박해있던 백제 수군을 야습해 전멸시킨 후 웅리하(한강)로 침입하여 백제 수군을 무력화시켜 한강을 끼고 방어 중인 위례성의 방어 시스템을 반 정도 효력을 상실시킨 다음에 육군을 이동시켜 무려 아단성, 미추성, 대산한성, 고모루성 등 60여개의 성과 750여개의 촌을 함락시키고 위례성을 포위한다. 다급해진 아신왕은 결국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고구려는 백제를 군신관계로 외교관계를 새로히 정립시킨다. 내년인 영락 6년 397년에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요양성을 차지하고 요동 지역을 복속시킨다. 그 후 걸리적 거리던 숙신족을 서천왕 시기 다 정리하지 못한 지역까지 모두 복속하여 숙신족을 복속시키고 숙신족은 조공을 맹세한다. 영락 8년(399년)에 사로국(신라)이 백제와 화통한 왜나라, 그리고 백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가야의 연합군의 침공을 받자 영락 9년(400년) 고구려는 5만의 대군을 편성해 가야의종말성에서 삼국연합군을 격파한다. 이후 광개토대왕은 사로국에 군을 주둔시키며 내정간섭을 행했다. 영락 14년(405년) 백제는 근성의 군주아신왕이 죽자 대성팔족 중 해씨가문의 후원을 받은 태자 '부여전지'가 왕에 오른다(전지왕). 이 시기 백제는 외척가문과 파당에 휩싸여 국정운영에 난황을 겪고 국가가 전반적으로 안 좋아진 시기였다. 허나 고구려는 영락 8년에 후연의 모용성의 침공을 받아 이전에 먹었던 요동을 도로 토해 냈는데 광개토대왕은 군사 조직을 대차게 강화한 다음 군비 제도를 개편한 후 영락 11년 402년에 후연이 군사적 초점을 돌린 틈을 타 평주(요서)자사의 관청이 있던 숙군성을 공격, 점거하고 남녀 도합 1500여명을 요동으로 이주시킨 후 본국으로 돌아온다. 영락 16년(407년)에 고구려는 후연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성 20여개와 인근 수백여개의 부락을 점거하자 틈을 노린 풍발이 쿠데타를 일으켜 모용운을 황제에 추대하고 새로운 나라를 개국한다(북연). 후 풍발은 북연의 재상으로 고구려와 항복교섭을 맺어 모용운이 고구려의 왕족의 방계였다는 것을 근거로 상호 국가간 협력을 강화한다. 이렇게 서쪽과 남쪽 모두를 안정화 혹은 평정한 고구려는 본격적인 동진에 나선다. 영락 19년 410년에 숙신의 힘을 빌려 고구려로부터 자립을 선포한 동부여에 보복공격을 실시하여 동부여의 650개의 촌과 30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마지막으로 남은 수도 여성마저 함락시키자 동부여는 고구려에 완전히 복속된다. 영락 22년 413년에 광개토대왕이 죽자 그의 아들이 왕에 오른다(장수왕). 장수왕 그는 연호를 정경(晶暻)[34]으로 제정한다. 인사로는 대대로의 덕일기를 국상에 등용하여 내정을 담당케 한다. 장수왕은 남부 백제와 사로국을 견제할 겸 멀리 봐서 '정벌'까지 용이하게 하려고[35] 평양성으로 천도를 한다. [36] 이후 장수왕은 남진정책에 입각한 군사 정책들을 실시한다. 한편 장수왕은 자꾸 남부 변경에서 국경 분쟁을 일으키던 사로국에 정경 55년(468년), 적당한 구실이 생기자 사로국의 북부에 하슬라(강릉)와 실직성을 공격해 합병시킨다. 그 후 백제에서 개로왕의 강력한 경제 수습책으로 백제는 수공업이 살아나고 호남 지역의 농업이 다시 부흥했지만 이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본[37] 백제의 귀족들은 개로왕과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이 틈을 노려 고구려의 장수왕이 정경 62년(475년)에 침공해 들어온다. 고구려군은 파죽지세로 위례성을 포위했고 개로왕은 아들인 '부여문주'를 신라에게 보내고 신라에 자비 마립간은 원군 만명을 파견했지만 이미 위례성이 함락된 뒤였고 신라 원군과 부여문주가 수습한 백제의 패잔병들은 웅진에 모여 항전을 준비했는데 이후 고구려가 군을 철수하지 않을때 까지 백제는 고구려에게 뼈를 못 추렸다. 이 기세를 몰아 장수왕은 사로국(신라)을 공격하여 정경 68년(481년)에 사로국의 북부 변경 7성을 예속시킨다. 이외에도 장수왕은 웅리하로 중국과 해로 교역을 하는 제1로(第一路)와 요동의 '요관(遼館)'으로 중국과의 교역을 하는 제2로(第二路)로 중국과의 교역망을 정립시켰고 지방행정구역을 중앙을 5부로 하고 지방은 7주[38]로 정립한다. 곧이어 장수왕은 북부에서 발흥한 물길과 정경 70년(483년)에 조공관계를 맺었으며 중국의 북위남조와의 관계를 잘 살폈다. 그리고 장수왕은 조선왕의 직책을 겸임하는 형태로 흡수한 조선 지역(요동)의 통제력을 강화하려고 '4가 제위제(四家製葦制)'[39]를 요동 지역에 한정해 대폭 강화하였다. 장수왕은 통치규범을 제시한 경렴서를 만들어 후대에 전하게 했고 불교적 윤리서인 화인십이편, 농서인 농간교서를 만들었다. 그의 치세 시기에 고구려는 전성기를 이룩하였으며 그 후대인 문자명왕 시기에도 이런 영광이 이어진다.

신라의 전성기

신라(사로국)의 제17대왕으로 즉위한 내물 마립간은 왕호를 마립간으로 바꾸고 악습을 혁파했으며 백제의 국제 질서에 합류해 이득을 보았다. 또한 일본에서 쳐들어 오는 왜구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해내었고 신라의 과학 기술 발전을 장려한다. 하지만 백제가 근초고왕 이후 가야가 일본에게 망할 뻔 하지 않았나(탁순의 변) 아직 신라에 합병이 안된 진한의 가맹국들이 고구려와 결탁해 자립을 하려 하지 않나 백제 주도의 국제 질서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에 내물 마립간은 신흥 강국인 고구려에 결탁하여 신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러한 신라의 외교적 제스처에 반발한 백제가 가야, 왜와 연합하여 신라의 침공(제1차 나제 전쟁),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지만 고구려의 구원으로 인하여 백제는 신라에서의 영향력을 철수시켜야만 했다. 백제가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철회하자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국이 되었고 내물 마립간이 노환으로 죽자 고구려와 연줄이 있던 '김실성'이 왕(마립간)에 오른다(실성 마립간). 후 즉위한 눌지 마립간이 옆에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탈피하고자 한 백제의 비유왕과 협업해 군사 동맹을 맺는다. 이게 바로 나제동맹이다. 이후에 눌지 마립간은 고구려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는 한편 그 후대의 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도 그의 유지를 받들어 외교 노선을 백제에 우호적으로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자비 마립간 시절에 동맹인 백제가 영혼까지 탈탈 털려 웅진으로 천도하자 자비 마립간은 성덕후로서 변경 지방에 성들을 쌓아 통치권을 정립했고 지방과 수도간 교류를 활성화 시켰다. 그의 후임인 소지 마립간은 내정에 힘써 국가 기반시설(주로 도로)을 확충하고 490년에 시장을 열어 각 지역간 물류망을 통해 각 지역의 물자를 유통시켰다. 500년에 소지 마립간의 뒤를 이어 지증왕이 왕에 오른다. 지증왕은 502년에 순장[40]을 폐지하고 우경법[41]을 법제화 하고 장려를 했다. 이후에 왕호로 '왕(王)'을 제정하고 국호를 사로국에서 신라로 개칭한다. 지방행정구역에 주·군·현을 두었다.[42] 이 시기에 석빙고가 생기고 해운 산업이 번창했으며 수군을 만들어 항법 기술과 조선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한다. 시장을 관리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하고 군사적 활동으로 512년에 장군 이사부를 파견해 우산국을 정벌한다. 이후 그의 후임으로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이 즉위한다. 그는 내정으로는 520년에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법률은 제정했고 복색을 입힌 공복을 도입하는 한편 531년에 신라 귀족의 우두머리인 이찬 김철부를 상대등에 임명함에 따라 신라 귀족을 관료제 체계에 편입시킨다.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여 각지방을 마다라(美旦), 건갈지(結志), 우루라(鬱俄), 다다리우(多累), 차르주(察主), 매개라(貊倮)[43]로 나누고 차르주를 제외한 행정구역에 도독을 파견하여 지방 행정을 총람(總覽)하게 한다. 군사적으로는 병부를 설치하고 귀족 사병들의 지휘권을 전시에는 병부로 귀속시키도록 하여 군권 일원화를 추구했으며 군 편제를 지군(地軍)[44], 수군(水軍)[45], 여병(女兵)[46], 매호(寐護)[47], 진호(眞護)[48]로 군사 제도를 개편하고 군제를 창설한다.[49] 법흥왕은 공주를 보내 가야의 이뇌왕과 혼인동맹을 맺었지만 이뇌왕의 친신라적 행보에 반발한 가야의 소국들이 안라국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가야 연맹이 파탄나고 남부의 남가야와 북부의 북가야로 분단된다. 이후 적당항 명분을 세워 남가야를 침공하여 8개 소국을 합병한다. 한편 백제가 신라의 남가야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이의를 제기하여 남가야를 침공, 531년에 남가야는 백제의 보호령이 된다. 신라도 군을 파견해 532년, 백제의 영향권에서 탈피했던 금관가야를 공격해 예속시켜 남가야 침공의 교두보를 마련한다. 법흥왕의 뒤를 이은 신라 진흥왕은 화랑을 개편하고 지방 군사 조직을 재편한 다음 독산성 전투에서 고구려가 남부 군사력을 잠시 상실하자 틈을 노려 백제와 함께 연합군을 편성해서 고구려로 북진한다(웅리하 전역). 때마침 고구려는 동방으로 진출을 활발히 하고 있던 돌궐의 침공으로 요동 지역에 군사력을 투입해서 다급한 상황이었는데 신라는 이를 활용해 고구려와 단독 화평을 맺는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정리한 신라는 백제를공격해 백제가 점령한 한강 하류 지방을 정복하고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을 죽인다. 진흥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정리한 다음 고구려 태왕이 겸하던 조선왕 직위를 정통성을 흔들 방도로 대립조선왕을 추대하기로 하여 옛 조선의 마지막 왕인 덕경왕의 후손이라는[50] 위돌금을 추대한다(민애왕). 진흥왕은 군을 이끌고 북부로 진군하여 옛 옥저 지역까지 신라의 영토로 복속한다. 이로서 신라는 한강 유역을 확보함으로서 한강 유역의 당항성을 통해 중국과 직접 교류하여 신문물을 좀 더 쉽게 받을 수 있게 된다. 넓어진 영토를 바탕으로 번성하기 시작한 수공업과 한강 유역의 농업 부흥, 내수 물류의 대대적인 확대가 맞물려 신라는 바야흐로 전성기에 들어선다.

백제의 중흥, 가야의 흥망성쇠

백제는 개로왕의 사후 도읍을 웅진으로 천도하고 부여문주가 왕에 옹립된다(문주왕). 문주왕 시절 대성팔족이 완전히 성립되고 지방귀족들의 전횡과 왕권의 약화, 지역농업경제의 암흑화가 이루어지며 고난의 세월을 보낸다. 이러한 위기는 삼근왕때 심화되어 보호국화된 마한의 동부 및 호남 동부가 가야 연맹에게 잠식돼 들어가 섬진강 유역을 상실했으며 479년에 가야가 가야를 통해서는 중국과의 통교를 못하게 막는 외교술을 쓰며 난제가 쌓인다. 또한 문주왕이 권신 해구와 연신의 연합에 축출당하고 삼근왕이 옹립되면서 해구의 가문인 해씨와 연신의 가문인 연씨가 집권한다. 그러나 해안 지역의 왜구를 토벌하며 공적과 군권을 쌓아가던 진로가 지방 세력 및 본가인 진씨와 해씨와 연씨에게 반발감이 있던 귀족가문과 연립해서 해구와 연신, 그들이 추대한 삼근왕을 축출한 다음 동성왕을 옹립한다. 동성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신라와 함께 막아내는 한편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나제동맹을 굳건이 한다. 대외관계를 재성립시킬려고 노력했으며 웅진성의 지방귀족인 백씨를 중앙정부에 중용한다. 하지만 재위 말년으로 갈수록 동성왕이 사치와 향락을 즐기며 국정을 내팽개치고 민심을 잃어가며 반대파들에게 축출의 사유를 제공하자 권력을 잃을까봐 공포심에 사로 잡힌 백씨 계열이 동성왕을 사사(死捨)하고 동성왕의 형인 부여사마를 왕에 옹립하는데 그가 바로 백제의 중흥군주인 무령왕이다. 무령왕은 국가 전반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감행하였다. 우선 자신을 옹립하며 권세를 유지하던 백가를 토벌하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회복한다.[51] 본격적으로 무령왕은 한솔 '해명'을 주축으로 한 해씨-예씨-사택씨 연립정부의 근왕정부를 내세워 정부를 장악한 것을 바탕으로 중앙통치기구를 재정비해 국정총괄기구로 정사암 회의에서 선출된 재상, 상좌평을 위시한 6좌평으로 구성된 좌평부(佐平府) 및 예하 행정실무를 맡는 관서들[52]을 두고 궁내사무를 담당한 내궁부(內宮府)와 대성팔족의 원로들이 모여서 사실상 덕담 주고 받으며중앙정부를 자문하는 광평성(廣評省) 등[53]으로 바꾸었다. 지방행정구역에도 변화를 주어 지방귀족과 4개의 방의 관료들이 운영하던 22개 담로에 왕족을 파견해 직할통치권을 내려줌으로서 왕족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왕족을 통해 지방과 중앙을 모두 휘어 잡아 중앙집권체제를 안정시켰다. 굶주린 백성이나 기타 사유로 고생하던 백성들을 구제하는 한편 농사를 권장하며 농업생산량을 늘리는 동시에 지역농업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어 재활성화시킨다. 소작농이나 땅 없이 유랑하던 유랑민들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유전(流田)을 나누어 주어 자영농을 양성한다(유전법). 512년과 521년에 국교정상화에 박차를 가하여 중국에 양나라로 하여금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라는 작위를 받는 성과를 이룬다. 군사조직을 개혁하여 부패고위무관을 파직하고 소장파 무장들을 고위무관에 등용하며 전력을 재정비한 다음 군량미와 병사가 충분히 쌓이자 군사 활동을 재개해 유훈각서을 파기하고 백제가 고구려에게 탈탈 털린 이후 백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던 마한과 백제의 호남 지방의 섬진강 유역을 빼았은 가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마한의 침미다례국를 합병함으로써 마한 세력을 완전히 복속한다. 그리고 군을 돌려 동진을 해서 이전에 확보해뒀던 상다리, 하다리, 모루, 사타, 상기문, 하기문, 대사국을 발판으로 진군해서 그동안 조금씩 백제의 영향력을 없애가던 남가야의 종주권을 다시금 확립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북진을 통해 고구려의 한강 이남 땅을 공략하였는데 안장왕은 이 지역을 무주공산으로 두어 전략적 후퇴를 결정한다. 이에 무령왕은 한강 이남의 14성 400개의 고을과 군, 현을 합병한다.[54] 무령왕이 이러한 기반을 다져놓은 다음 백제의 즉위한 26대왕 성왕 때 백제는 화려한 중흥을 누린다. 성왕 치세에 전시수도로 도시 방비에는 좋았지만 터가 좁았던 웅진성에서 터도 넓고 전시수도이자 기존 수도인 웅진성과도 가까웠던 사비성으로 천도한다. 이는 고구려처럼 바로 국내성 토착세력을 버려놓고 평양성으로 천도한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기존 웅진성과 멀지 않은 사비성으로 천도함으로서 웅진성의 귀족들도 중시하는 한편 자신의 지지 귀족인 사택가문과도 관계를 돈독히 하였으며 자주 웅진성에서 날을 보내 웅진성의 귀족들이 꾸준히 자신에게 충성하게끔 했다. 그래서 나온게 예식진? 국호를 남부여로 잠시 개정하여 부여로부터의 계승 정신을 내세웠으며 무령왕때 마련된 통치 질서의 틀을 완전히 매꾸어 무령왕 시절 만들어진 좌평부, 좌평부 예하 7부 및 기타 관서들에 전내부(前內部) 등 내관 12부와 사군부(司軍部) 등 외관 10부를 추가한 30부제를 확립시켰다. 중앙법률인 율령과 통치규범인 백제료서(僚書)를 재정비한다. 지방행정구역인 22개 담로 예하에 난립하던 행정구역 명칭 및 기능들을 통폐합하여 군(郡), 현(縣)으로 통일하고 담로 위에 담로 통할지방행정구역에 동, 서, 남, 북, 중의 5방을 둔다. 수도 행정구역에는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의 5부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五巷)을 둔 5부 5항제를 정비한다. 좌평부의 수반인 상좌평의 임명권을 왕에 두게 하여 왕이 정부를 장악하여 왕권 중심의 국가 운영 체제를 강화한다. 하지만 이러한 중흥 과정에서 성왕은 나제동맹으로 신라와 통모해 한강 유역을 되찾았다가 신라에게 뒤통수를 당하여 도로 탈환당하고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마저 전사하면서 백제에 혼란이 일어났다가 후임인 성덕왕이 이를 수습한 이후 가야와 통모하여 신라를 공격했다가 오히려 가야가 신라에 합병되고 진군하여 점령한 패서 지역을 잃는 등, 백제의 중흥기도 서서히 그 기력을 다하기 시작한다.
가야 연맹은 건국초 시개왕 김수로의 선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졌으며 연맹왕국 형태에 연맹회의가 최고 집행 기구로서 존재했으며 왕은 연맹을 대표하는 맹주국의 왕이 겸임하였다. 가야는 조선에서 밀려들어온 대장장이들과 학자, 지식인들을 제일 먼저 포섭하면서 삼국시대에서 학술의 중심지를 만들어 낸다. 허나 가야는 근초고왕의 침공을 받아 백제의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면서 안습 크리를 타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백제의 부름으로 신라 공격군에 참여하였다가 종말성에서 고구려에게 대패를 당하고 맹주국인 금관가야가 종말성 전투에서 큰 경제적, 군사적 타격을 입으면서 가야는 재기능을 상실하여 백제에 여러 중요한 권한을 일임한다. 허나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국가 기능이 마비된 틈을 타, 군을 일으켜 섬진강 유역을 예속시키며 영토를 확장시킨다. 이후 대가야의 이뇌왕이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으며 친신라적 외교 정책을 보이자 이에 반대한 가야 남부 안라국을 비롯한 국가들이 이뇌왕의 지도력에 이의를 제기하며, 연맹을 탈퇴[55], 독자적인 가야 연맹을 세웠고 금관가야는 이 사건으로 완전히 가야 내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면서[56] 북부 가야의 주요국인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북가야와 남부 안라국을 중심으로 하는 남가야로 가야 연맹이 분단된다. 남부 안라국을 중심으로 한 남가야안라회의를 개최하여 백제와 왜의 공조를 얻을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한다. 6세기 초에 가야는 서부의 섬진강 유역의 땅을 백제게 도로 내어 주면서 영토가 축소되었고 가맹국인 금관국과 탁순국이 신라에게 복속되면서 가야 연맹은 신라와 백제의 틈에 껴 영토를 잃고 있었다. 친신라적 행보의 북가야와 반대로 남가야는 친백제적 행보를 보이다가 백제의 보호국이 되고 만다. 이제서야 똘똘 뭉쳐야 산다는 것을 깨달은 남가야와 북가야는 백제의 주선 하에 시행된 사비회의에서 여러 외교적 성과를 보이려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독산성 전투에서 가야의 유일한 희망인 고구려마저 나제동맹에게 깨지자 가야는 국력이 급격히 축소되어 간다. 554년에 일어난 관산성 전투에서 가야는 백제의 압력으로 백제군에 참여했다가 신라에게 백제군이 참패하자 덩달아 패배당하고 가야의 참전을 구실로 삼은 신라가 장군을 보내 남가야를 침공하게 했으며 남가야의 맹주국인 안라국이 신라에게 넘어가자 남가야가 먼저 신라에 합병되고 562년에 북가야의 맹주국인 대가야의 도설지왕이 신라에 입조하면서 바야흐로 가야 연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통일 전쟁

전성기를 맞이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여제연합의 무역 봉쇄 조치로 경제적 위기를 겪을 뻔 했지만 선덕여왕이 이를 수습하면서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후 신라는 백제의 왕권 분쟁을 종식시키고 전제 왕권을 강화하면서 백제의 중흥을 다시금 이끌어 낸 무왕과의 오랜 전쟁을 겪다가 한강 유역을 도로 빼앗기고 국경 지역을 탈환당하는 등, 영토가 축소됐지만 온건 계열의 의자왕이 백제의 제31대왕에 오르면서 양측간 전쟁이 종결된다. 의자왕은 한강 유역을 다시 가져오려는 고구려의 태도에 실망하여 나제동맹을 다시금 체결하게 되었고 뒤이어 벌어진 제2차 관미성 전투에서 고구려가 관미성을 백제에게 빼앗긴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나제 연합군의 손에 떨어질 양원왕 이전 왕인 안원왕때 양 외척가문간 내전이 발발하여 국력이 크게 쇠한 상태였고 양원왕 시기 외척가문에게 왕권이 휘둘리면서 중앙정부의 권한이 크게 약화된다. 이에 따라 국내성의 욕살들이 권력을 잡아 전횡을 일삼고 지방의 고위관원들의 부정부패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평원왕때 고구려는 여제동맹을 체결하여 백제와의 국교를 다시 정립한 한편, 국력을 재보강하고 관제 개혁을 통해 부정부패를 척결한다. 하지만 평원왕 사후 중국 왕조들의 침공을 당하면서 국력이 다시금 쇠퇴기에 접어든다. 고구려는 영류왕의 치세를 맞이하며, 친화적인 외교 정책을 통해 사이가 드럽게 나뻐진 나제 동맹과 중국 왕조와의 우호 관계를 다시금 체결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급진파였던 연개소문이 당시 국상인 탕홰투와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를 제거하고 꼭두각시 보장왕을 옹립한 직후, 강경적인 외교 노선으로 선회한다. 중국에 본격적으로 통일 왕조 당나라의 시대가 열리면서 국력을 재정비한 당나라는 고종 시기에 대군을 보내어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서거한 틈을 타 요동과 연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남쪽으로는 나제 동맹이 북진하여 평양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면서 고구려는 사실상 패망하고 보장왕과 대신들이 나제 동맹에 항복하면서 고구려는 멸망한다.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 나제 동맹은 고대 조선의 봉건 질서를 회귀시키면서 자연스레 강북 지역을 여러 나라로 분열케 하여 양국이 강북에서의 영향력을 보다 쉽게 조치시키게 된다. 고구려가 패망하자 나제동맹은 해체되어 신라와 백제가 다시 경쟁관계로 들어선다. 이후 신라와 백제의 국경에서는 계속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백제의 국왕인 풍왕이 군을 출병하여 신라의 영토였던 낙동강 유역 일부를 점령한다. 허나 신라는 이때 김흠돌의 난을 비롯한 진골귀족들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라 이에 제대로 반격을 못한다. 하지만 신문왕은 다시 군을 재정비하고 진골귀족들의 난을 진압한 후, 백제의 영토로 군을 진격시킨다. 장군이자 상대등이었던 '진복'의 군 1만 5000명이 낙동강 유역을 다시 탈횐하고 신문왕이 친정을 통해 이끌던 북군 5만 9000명은 백제군 4만명을 격파하며 한강 하류 지역을 탈환한다. 이윽고 진복의 남군과 신문왕의 북군이 한강 상류의 중부 지역인 춘천에서 풍왕이 이끄는 백제군 6만명을 협공을 통해 무찌르면서 백제는 영토의 절반을 상실한다. 이에 대한 충격으로 풍왕이 갑작스레 서거하고 예식진의 후원을 받던 부여선광이 선광왕에 오른다. 선광왕은 신라로부터 영토를 빼앗을 타이밍을 간보다가 중원경을 간접적으로 다스리던 진골귀족 '부태'가 신라에서 난을 일으키자 이틈을 노려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30개주를 수복한다. 그러나 빠르게 부태의 난이 진압되고 신라는 10만명의 대군을 만들어 백제의 영토로 파죽지세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선광왕은 운용이 가능했던 4만 2000명을 분산시켜 이들을 막고자 했으나 전선의 곳곳이 뚤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백제의 본토(호남)까지 신라군이 침범한다. 신라군의 장수 '김하명'이 이끄는 신라군 3만 2000명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키면서 백제는 60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망한다.

통일

다시 핵분열

통일 국가로의 재정립

2000년 왕국의 멸망과 대경국 성립

근대화와 칭제, 그리고 대일항쟁

제2차 세계대전

전후 혼란한 정국

급기야 내전이 발발

그래도 혼란한 정국

제정 폐지

공화국 시대

제정 복고

현재

기타

둘러보기

같이보기

대경제국 문장.png
대경제국
大敬帝國
Empire of Korea
대경제국의 역사대경제국의 문화대경제국의 정치대경제국의 경제대경제국의 사회대경제국의 교육대경제국의 군대
대경제국의 지리대경제국의 교통대경제국의 관광대경제국의 행정구역대경제국의 기업대경제국의 황실대경제국의 외교

각주

  1. 이런 경우엔 조선의 제1왕조인 왕씨왕조로 불러야 했으나 이후 등장한 고려의 왕씨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옛 고(古)로 교체하여 '고'씨왕조가 됐다
  2. 허나 이때는 단군이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3. 일명 부왕
  4. 일명 준왕
  5. 지방 통치관(지방행정장관)의 고문, 하지만 고씨왕조 후기엔 사실상 통치관 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짐
  6. 조선내 지방 중개무역을 통솔하는 관직
  7. 금흥의 제후
  8. 소유 통치관->작저(酌猪) 기행관->기율사->영사
  9. 공포 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백성은 이 크고 아름다운 법을 보아라. 백성은 이 법을 보고 국왕 전하의 지엄한 말을 엄숙히 이행하라.
  10. 위만도 자신을 따르는 토착 세력이 필요했기에 사씨 가문을 받아들인다.
  11. 지금의 사단장
  12. 전시에 설치되는 관직으로 예하 태선장군들의 군령권을 인수하여 군을 총지휘하는 관직이고 평화시에 설치되면 태선장군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부대를 지휘한다.
  13. 지금의 사단장이지만 2개 이상에 복수의 사단을 지휘했다.
  14. 수도인 왕검성의 북부 지역의 행정력을 포괄하는 관직
  15. 이때 부여의 해수리왕이 전사하고 중앙정부가 공백이 된 틈을 타 지방의 사출도가 득세하면서 부여는 장시간의 암흑기가 도래한다.
  16. 지금의 총리대신급 행정 수반
  17. 기밀문서
  18. 덕천후, 비류후, 졸본후
  19. 馬州, 훗날 마한
  20. 辰州, 훗날 진한
  21. 弁州, 훗날 변한
  22. 최소한 '조선'이라는 간판은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있은 듯 하다.
  23. 서주, 북부, 남주
  24. 금환국(金幻國), 제빈국(制斌國), 골성국(骨聖國), 보언국(補言國), 편송국(扁悚國)
  25.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음.
  26. 초고왕계에서 비류왕 이후 왕들을 분리해서 나눈 것.
  27. 북진을 하다가 모용씨의 전연에게 패배해, 군신 관계를 체결하여 사실상 북진이 불가해진게 가장 큰 이유. 다른 이유라면 북진을 통해 북진 주군(主軍)인 삼주 세력의 힘이 비대해지는걸 견제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28. 여기서 개척은 땅을 복속한게 아니라 그냥 탐사만 하고 거주지만 세운채 간거.
  29. 제후 후(侯)가 아닌 임금 후(后)자를 쓴 것을 보아 여연후라는 이름을 만들때도 전연의 압력이 있은 듯 하다. 아무래도 전연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조선왕' 고국원왕이 자신들을 이긴 나라의 왕을 신하(제후)로 책봉한다는게 모순이긴 했다.
  30. 그냥 화(禍)가 아닌 대(大)자를 쓴 거에서 봤듯이 당시엔 상상도 하지 못할 405명의 신하가 숙청(유배, 사형, 추방)됐다.
  31. 과거 태조 동명성왕이 총애하던 신하 마리가 남겼던 '君賢하면 多悳이지만 善하면 不意正之입니다.(원래 뜻에 가장 가까운 해석-군주가 어질면 덕이 많지만 선하면 뜻을 바르게 하지(가지) 못합니다.)'에서 '賢'자와 '悳'자를 따와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32. 고국양왕이 첫 선임한 국상 배중현이 올린 규화라는 시의 4행에 나온 구절을 모티브로 삼은 것
  33. 다만 영락 연호가 사용된건 내년(392년)부터다.
  34. 이전 광개토대왕이 민심 교화 사업으로 요동에 파견한 승려 '담시'가 지은 시인 봉건사략 中에 나온 구절인 '務競不要이니 陳愛多要고 하면 振和이다.(무경불요이니 진애다요고 하면 정진화경이다.)'에서 따왔다.
  35. 이전 왕들은 남진을 하려면 보급로가 국내성에서 남부 전선까지 길어져 보급이 힘들었기에 광개토대왕은 이참에 중간 보급기지 역할을 할 성으로 평양성을 개발했고 천도까지 생각했으나 너무 일찍 타계(30대)해버리면서 그 계획은 장수왕이 이어 받아서 실행한다.
  36. 하지만 평양성으로 이동한 5부귀족과 근왕세력, 요동 전선을 위해 국내성에 설치됐던 군사조직을 기반으로 국내성에 잔류된 무관세력과 지방에 파견된 욕살의 집안이나 지방 명문가로 구성된 지방귀족 간 갈등이 심해지는 원인이 됐는데 하필이면 국내성에서 그나마 불안한 동거를 하며 가까이서 견제를 하는 시스템은 이 평양성 천도로 박살나면서 이 두 정치세력의 갈등은 아예 나라 국토가 두동강이 나버리는 시점이 되었고 이후 평양성 귀족들과 왕의 실정으로 나라가 궁핍해지고 망조가 들자 국내성 귀족들은 나제동맹북진 당시 그냥 나제동맹(특히 백제 쪽으로 이 쪽은 그래도 핏줄(?)은 같으니까)으로 투항해버리면서 후방(요동-중부)이 나제동맹의 손으로 떨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37. 개로왕은 경제 수습책으로 귀족들의 영지를 2대 세습으로 제한하는 허하책(許廈策)과 새로운 농지를 개간하는 양전책(養田策), 수공업을 지원하고 중소상인들을 국가가 보호해주는 보매책(補賣策)과 원공책(援工策)인데 합하여 이름바 '을미5책개혁'이라 부르는데 이때 귀족으로부터 개혁 실시를 위해 재원을 몰수하고 뒤로는 귀족 소유의 토지 세습을 줄여 귀족의 금전적 기반을 제거하려고 했다.
  38. 통구주(通溝州): 국내성을 주도로 함.
    이하주(二河州) 혹은 상하주(相河州): 오골성을 주도로 함.
    옥저주(沃沮州): 책성을 주도로 함.
    신성주(新城州): 신성을 주도로 함.
    부여주(扶餘州): 부여성을 주도로 함.
    여성주(餘城州): 여성을 주도로 함.
    경현주(炅炫州): 위례성
  39. 4개의 집을 1개의 위(葦)로 두어 위 안에서 서로를 감시하게 하는 제도
  40. 고위층이 사망할때 그 처와 신하, 노예를 같이 뭍는 장례 풍습.
  41. 소를 사용해 농사를 짓는 방법.
  42. 6부(서라벌), 4주, 5군 10현
  43. 마다라의 뜻을 해석하면 아침의 아름다움, 건갈지를 해석하면 뜻을 맺음, 우루라는 갑자기 막힘, 다다리우는 여러 많음, 차르주는 주인이 살핌, 매개라는 알몸의 맥족(예맥족의 일원)이라는 뜻인데 마다라는 동쪽 동해 해안 지대를 일컫고 건갈지는 남부의 창관주, 다다리우는 신라의 서부, 차르주는 연합행정구역으로 6부의 귀족령으로 구성되있는데 서라벌에 설치되었으며(나중에 특별행정구역으로 독립), 매개라는 고구려가 후반기로 가면 갈수록 쇠퇴해지자 고구려에서 난민이 신라로 대거 피난했는데 이때 이 고구려 난민(예맥족 계열)을 통제하려고 설치한 특별행정구역의 성격이였다. 이후에 매개라는 제왕연대력에 따르면 진흥왕때 고구려와의 국경이 한강-옥저로 확장되자 바로 남부에 있던 다다리우와 새롭게 신설된 행정구역 하슬라로 분할합병된다. 자세한 건 신라(킹덤 오브 킹덤)/행정구역을 방문하시길.
  44. 현재의 육군
  45. 현재의 해군
  46. 말 그대로 여군
  47. 현재의 근위대
  48. 귀족 사병들로 구성된 편제로 평시에는 귀족 사병으로 기능하다가 전시가 되면 이 편제로 병부의 통솔을 받는다.
  49. 신라군 문서를 방문하는게 좋으나 기본적이만 말하자면 끝이 군(軍)으로 끝나면 독자적인 지휘부가 군령권과 군정권을 가진 형태고 끝이 병이나 호로 끝나면 왕이나 병부에 군령권과 군정권이 항시 귀속되있거나 특정시 귀속된 형태다. 진호는 신라 말 진골귀족이 판을 치던 시기에 해산된다.
  50. 하지만 덕경왕과 위돌금의 DNA 조사 결과 사실상 불일치(1.5%)였다.
  51. 당시 백씨의 수장이었던 '백가'는 왕이 자신은 살려둘 것이라 생각해 그냥 투항했지만 무령왕은 백가를 교수형에 처하게 한다.
  52. 내신부(內臣府), 내두부(內頭府), 내법부(內法府), 위사부(衛士府), 조정부(朝廷府), 병람부(兵覽府), 방령부(方領府)
  53. 이외 관서로는 귀족부인들이 모인 귀부소(貴婦所), 지방간 통신을 담당한 방신사(方信社), 오늘날의 국정원과 같은 업무를 담당했던 내국서(內國署)가 있었다.
  54. 기록마다 다른데 백제사기와 고력기는 14성 400개의 고을, 군, 현이라고 표기했지만 일본사기 및 삼국사기는 7성 200개 마을, 옆나라 신라의 제왕연대력에서는 10성 650개의 고을, 마을, 군, 현, 외성(外城)이라 했다. 이외 삼국유사 및 동국통감과 고구려의 제왕일대기, 조선 제후왕조의 유기에서는 15성 500개 고을, 군, 현이라 한다.
  55. 하지만 이 남부 가야 국가들은 이뇌왕의 친신라적 행태를 보며 사실상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56. 어차비 이후에 법흥왕의 신라에 합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