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무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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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1820년대 ~ 1830년대 후반: 흥선대원군이 잠시동안의 쇄국정책을 폈으나 서구문물의 우수성과 서양식 군사 무기에 반하여 나중에는 서구열강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함을 깨닫고 서둘러 개항을 하게됨


1870년대: 일본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지 10년이 안되어 강성대국을 이룩하자 마자 대한제국(광무제국)또한 서구열강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 라인에 들어서게됨.


1880년대 말: 청나라 대륙 진출에 관한 문제 때문에 일본과 곧 충돌하게됨. 조만간 광무동맹라인(광무제국,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 등)과 일본라인(일본,미국,영국 등)이 결성됨


1893년: 제1차 한일전쟁 발발!!


1897년: 광무제국의 패배,일본이 광무제국에게 천문학적인 전쟁손해배상을 요구하지만 국제여론에 의해서 좌절되고 미국,영국,프랑스가 일본라인에서 탈퇴


1910년경: 광무제국의 경제력, 군사력 등이 엄청난 수준으로 하락하게됨으로 중국대륙 진출의 꿈이 좌절됨


1914년~1918년: 제2차 한일전쟁 발발!! 광무제국의 완패, 일본의 광무제국에 대한 노골적인 경제,주권침탈이 심화됨


1920년대: 세계각지에서 벌어지는 공산주의식 폭력혁명의 위기,경제공황의 위기로 인해서 일본군의 광무제국의 지배력이 헤이해짐


1922년: 대한제국에서 광무제국으로 변환하게되는 계기가될 'NDPK(대한국가민주당)'의 등장!!


1925년: 대한국가민주당(NDPK)이 공산당,친일파당 등을 무찌르고 정권을 장악함.

그이후로 대한제국은 국호가 광무제국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황실 중심의 군국주의,전체주의,제국주의 사상으로 경제공황을 극복해내고,공산당의 좌익 세력들을 모조리 다 잡아 숙청을 하게 되었으며, 한반도에서 여전히 남아있던 일본군들의 잔당세력들까지도 모두 무력으로 섬멸해 내는 등 엄청나게 많은 피바람이 불었음.


1925년: 대한국가민주당(왕당파)이 대한제국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


1930년대: 국명이 '광무 대한제국'에서 '광무제국'으로 간소화됨. 광무제국은 군사,경제,문화적인 방면에서 빠른속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함


1937년: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과 동맹, 주축국 가입. 히틀러의 중재로 일본도 주축국에 들어옴. 이때부터 이미 광무제국에게는 주축국에 대한 배신의 싹이 트게 되었으며 일본에 대한 복수심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음.








1940년(2차대전 시기): 광무제국은 중국간도지역,만주지역으로 진출. 일본은 동남아 쪽으로 침략.


1941년: 오만방자한 일본의 진주만 폭격성공! 이 여세를 몰아서 일본은 같은 주축국 동맹국인 광무제국을 공격.

광무제국의 주축국 탈퇴선언.

제 3차 한일전쟁 발발!!!


1942년: 일본군측의 예상과 달리 이미 2차례에 걸쳐서 일본과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광무제국은 한일전의 준비가 철저하게 잘됨으로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됨.






일본군과의 2차례에 걸친 대전쟁을 치른 광무제국군은 이미 전쟁의 도사들이 되었다.







1943년: 광무제국의 비스마르크, 텔비츠오이겐 함대 VS 일본의 무사시, 야마토 함대의 대격돌!!!!

덩치가 크고 화력이 강한 일본해군전함은 해전 초기엔 우세했으나 곧 기동력이 너무 느리고, 단가가 너무 비싸고 덩치가 너무 크다는 단점들 때문에 후기엔 밀리기 시작함. 이미 정치꾼 단체로 변해버린 일본군은 광무제국의 수송선,보급선을 공략하기 보단 주로 완전무장된 전함들의 공격에만 치중함으로써 광무제국의 보급물자를 차단하지 못함.

결국 일본군의 남해바다 해전의 패배. 일본군의 부산상륙작전실패.


1944년: 광무제국의 무제한 잠수함작전에 일본해군은 모조리 괘멸되었으며 일본 남서부 지역의 육군들또한 광무제국 공군의 대규모 폭격을 받음으로 사실상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게됨. 일본 본토의 남부방어선은 광무제국군에게 완전히 점령담함!






3차한일전쟁을 치르게 된 광무제국군은 더이상 이전의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초기엔 독일제 MG34 혹은 MG42가 원활하게 보급이 되지않아 광무제국의 대부분의 분대지원병들은 ZB28기관총으로 무장했었다. 광무제국은 일본군의 예상을 뒤엎고 철처한 대공방어망 태새도 갖추어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동경(도쿄)을 향한 40일간의 진군에서 광무제국군은 엄청나게 많은 포격을 일본의 수도에다가 가했다. 여전히 전근대적인 군사체계를 갖추고 있는 일본군과는 달리 광무제국군은 철저하게 분대화,조직화 되어 효과적으로 돌격,포격 등의 전술을 구사했었으며 참호전이 주류였던 2차 한일전쟁때와는 달리 광무제국군은 여러상황속에서도 능수능란하게 작전을 수행해 내었다.


1945년: 광무제국의 동경을 향한 진군!!!

일본의 북부지역에 광무제국 공군은 대량의 공수부대를 투입 & 점령.

광무육군은 동경으로 곧바로 전진, 공수부대는 후방으로 전진


1945년 8월 15일: 일본 야스쿠니신사와 일본제국국회의사당 건물에 광무제국기가 계양됨으로써 동경이 함락됨.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무조건항복선언. 제3차 한일전쟁 및 2차대전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1945년 이후로로 오늘날 까지 일본은 광무제국의 영구 식민지로 유지되고 있는중이다.



1940년대 말: 광무제국 군부세력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의 국공내전 깊이 개입하게됨. 그러나 국민당의 무능함으로 결국 중국은 공산화 되어버림.

  1. 그 당시 중국의 국공내전 상황:

1946년 6월 국민당군이 중국 공산당 점령 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무력 공격에 나서면서 결국 중국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사이의 잔악한 유혈 내전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내전 발발 초기 장비나 군수물자, 보급등 모든 면에서 국민당 측이 우세했고 특히 광무제국으로부터 막대한 신형 무기들과 대대적이고 적극적인 군사지원을 받고 있어서 이러한 중국의 내전 상황은 국민당군이 이길것이라는 예측이 대두되다.

그리고 1947년 국민당군은 중국공산당의 지휘 본부가 있었던 옌안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리려던 나머지 국민당군은 지나치게 병력을 분산시키는 오류를 초래하게 되었고 거기에 국민당 정부의 부정부패와 인플레로 인한 경제 붕괴,중국국민당의 거듭되는 실정과 부정부패로 떠난 민심들 또한 어우려져 중국의 대다수의 민중들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광무제국의 '괴뢰정부'라고 비난하며 공산당쪽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다.

1947년 6월말부터 내전의 전세는 중국 공산당 쪽으로 유리해지기 시작해 이러한 상황을 보다 못한 광무제국 황실중앙정부에선 본격적으로 중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노골화하기 시작했으며 점점 중국의 정계에서는 국민당의 입지가 사라져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중국 공산당은 주요 전투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며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였고 부정부패와 국민들의 외면으로 힘을 잃게된 국민당은 공산당에게 거듭되는 패배를 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1948년 요심 전투를 계기로 중국 공산당군의 힘은 더욱 강해져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중국 공산당군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이어 4월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이 공산당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어 5월과 10월에 공산당군은 상하이와 청두마져 점령하면서 국공 내전은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종료되었고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을 국가 주석, 저우언라이를 수상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국공내전 이후 중국은 완전히 공산화 되어버렸다.

1950~60년대: 본격적으로 광무제국vs중화인민공화국 간의 2차례 걸친 전쟁 발발.

1950년대: 제1차 대륙전쟁(1951~1954)발발. 3차한일전쟁(2차대전) 이후 광무제국의 대외팽창정책과 중국압박정책이 맞물렸고 이전에 이미 중국내에서의 국공내전 당시에 내정간섭을 해온 터라 광무제국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게됨.

일본과 전쟁 이후 보다 강력해진 독일식 무기와 장비들(보병 개인화기는 주로 StG44와 MG42로 업그레이드 되고 주력전차도 독일제 4호전차에서 쾨닉스티거, 판터와 같은 맹수급 전차들로 기갑부대가 구성되었으며, 전투기는 메서슈미트에서 제트엔진을 착용한 Me-262 Sturmvogel(폭풍새)로 되었음)뿐만 아니라 미제 F-86세이버까지도 동원시킬 정도로 미군의 적극적인 지원까지 받게된 광무제국은 그야말로 승승장구 했었다.

이에 반해 중국은 그야말로 인해전술이나 국공내전때처럼 소규모의 게릴라작전으로만 밀어붙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같은 공산국가인 소련도 중국을 지원하고는 싶었지만 전후복구문제가 극심한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고 소련은 사실상 광무제국에 대항하여 할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미제의 전폭적인 군수지원을 등에 업은 광무제국군은 공군의 융커스폭격기와 미제 포트리스 폭격기로 중국의 주요 대도시들(상해, 복주, 남경, 베이징 등)에 융단폭격을 무제한으로 가했으며 중국군이 대규모로 때거지로 인해전술로 몰려올때마다 광무제국군의 MG42는 거침없이 불을 뿜었으며 티거전차를 앞세운 독일식의 Blitzkrieg(전격전)전술을 구사함에 따라 광무제국은 만주 대부분의 영토와 중국 동부 해안선의 대부분의 영토들을 점령해내는데 성공하게 된다.

  1. 광무제국의 피의 숙청:

3차례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에서 어렵게 승리를 하게된 광무제국은 일본인에 대한 경멸심과 분노감은 이미 극에 달했으며 일본인에 대한 핍박이 매우 심했다.

그러므로 만일의 폭동사태를 대비해서 광무제국은 30만 대군을 추가로 점령지인 일본에 파병하였다.

그러나 일본이란 섬나라 민족의 특성상 약자에겐 강하나 강자에겐 한없이 충성스럽고 잘 훈련된 충견과도 같은 약아빠진 국민성의 특성 때문에 광무제국이 일본에 군정을 펼치며 온갖 탄압에도 고분고분 잘 따르고 말을 잘 들어서 오히려 무장경찰 사령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서 성질이 난폭하고 다루기 어려운 막가파의 성질을 가진 통제하기 힘든 중국인들은 수시로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광무제국군부대를 습격하고 산업시설을 파괴하는 등 말썽을 극심히 많이 일으켰다.

이에 완전히 빡친 그곳에서 군정을 펼치고 있는 무장경찰들은 일본인들 보다도 중국인을 훨씬더 탄압하고 심지어는 하루평균 1000명의 중국인들을 학살하는 일까지 빈번히 일어났다.

식민화 시킨지 10년이 넘은 일본에 비해서 점령한지 불과 몇년 밖에 안된 중국에서 자행된 양민학살의 숫자가 훨씬 더 압도적으로 믾았다

1960~1970년대: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시대당시 광무제국은 원칙상 중립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하지만 광무제국의 대륙전쟁에서의 승전 및 동남아 등지로 향한 남진정책의 과정에서 자연히 공산주의세력과 마찰이 일어남으로서 친미정책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1955년에서 1975년까지 지속된 베트남내전에도 광무제국군은 깊이 개입하는 등 적극적으로 멸공전선에 가담하였다. 그바람에 같은 반공미국과 프랑스, 영국과 같은 연합국측의 눈치를 보지않고 지속적인 영토팽창정책을 유지할수 있었다.

근대 역사

1890년대 중반, 연이은 궁성침범과 청일전쟁, 을미사변으로 자주국으로써의 지위는 물론이고 왕의 위엄과 신변까지도 위태로운 상태에 놓인 조선은 이를 쇄신해 위신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의 을미거사로 일본으로부터 벗어난 고종은 을미거사로 절호의 기회를 얻는다. 반년이 조금 지난 1896년 6월 24일 고종은 직접 황제에 오르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친다.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친 고종은 조선이 제국임을 선포하며 국호를 '대한(大韓)' 으로 제정한다. 한반도의 새로운 제국, 즉 대한제국이 출범한 것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해 자주독립을 선언할수 있었던것도 열강들의 세력균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세력균형에 변화에 대비하면서 개혁을 단행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시급했던것은 자주독립의 확립과 고종의 왕권 강화였다. 이는 차후 발표되는 '대한국국제'에서도 잘 명시되어있다.

대한제국이 출범하고 나서 2년후인 1899년 6월 황제가 군령권을 모두 관리할수 있는 최고 군령기관으로써 원수부(오늘날의 황실중앙대표부에 해당)를 설치한것이 그 예다. 지휘체계를 간소화 하고 군비를 확충하기 위함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궁극적인 목적은 황제가 대한제국의 전 육해군을 통수권한을 가짐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6월 22일 발표된 원수부관제의 서두에도 밝혀져 있다.

원수부관제 반포와 군부의 감축



원수부 설치의 근거를 제시하여 발판을 조성한 것은, 1898년 1월 3일 육군 장교가 올린 상소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군제와 관련한 문항에서 "군사란 나라의 울타리이고 임금의 손톱과 어금니"라고 전제한 다음 현재 지휘관과 병사를 막론하고 지휘체계와 군율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여 군기가 문란한 상황임을 개탄하면서 군사체계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당시의 문제점을 잘 지적한 사항이었으므로 고종은 이후 6월 29일의 조서에서 다음과 같이 원수부의 설치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였다.

각국의 대원수 규례에 의거하여 짐이 친히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며 황태자는 원수가 되어 일체로 통솔할 것이다. 비상사태가 있거나 출정할때가 아니면 비록 황자/황손이라도 대장이 될 수 없다. 그동안 명목상으로 유지되어 오던 황제의 군령권을 전담할 독립기관을 설치함으로써 이를 계통적으로 확립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군주의 명령이 직접 하달될수 있는 군령체계를 수립함으로써 황제인 대원수와 황태자인 원수이외에는 군령을 내릴 수 없도록 제도화시키려 한 고종의 의도를 반영한 원수부는 약 1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899년 6월 22일 원수부관제의 반포로 시행되기에 이른다. 당시 반포된 관제의 첫머리를 보면 대원수와 원수의 임무, 그리고 원수부를 설치한 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대황제 폐하는 대원수 군기(군정)을 총괄하고 육해군을 거느린다. 황태자는 원수이니 육군과 해군을 일률적으로 통솔한다. 이를 위하여 원수부를 설치한다. 그 아래로는 총 3관 22조로 구성된 구체적인 사항들이 명시되어있다. 제 1관은 총 5개 조로 구성되어 '특별 권한으로 군부와 중앙군과 지방군의 각 부대를 지휘 감독하는 원수부의 권력범위/대원수(황제)가 원수(황태자)를 경유하는 명령전달체계/원수부의 위치/문관 고용 엄금'등을 명시해두었다. 제 2관은 원수부의 실지적인 구성과 각 산하 기구(국)의 임무 및 직원 등에 관련된 사항들을 명시해 두었고 제 3관에서는 원수부의 명의로 실시되는 시찰과 결과보고의 절차 및 원수부 소속의 복장등에 관화여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원수부관제가 바로 반포되어 원수부가 출범했지만 아직은 미흡한 점이 있다고 판단되어 (군령권과 대부분의 권한을 상실한)군부의 관제가 당장 개편되지는 않았다. 이후 7월 8일과 7월 29일에 원수부관제가 개정되고 8월 18일에 군부관제가 대대적으로 개편된다.

1차 개정은 제 1관 제 4조의 '원수부의 직원은 문관을 임명하지 못한다.'라고 명시한 조항에 관원 22명(장권 4명/영관 4명/위관 14명)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제 5조의 원수부 '어보신장(御寳信章)'을 '어보인장(御寳印章)'2으로 바꾸었다. 제 3관 제 2조 에서는 원수부 사무요원 25명을 영관과 정/부/참위로 세분하지 않고 영관 4명과 위관 21명으로 양분하였다. 이어서 7월 29일의 제 2차 개정은 1차 개정보다 개정의 폭이 큰편이다. 직원의 숫자가 총 30명에서 50여명으로 증원되었고 파견근무자 40명이 100명으로 확장되었다. 그 이외에도 출동명령 하달 절차/군호바령 절차/각 국장의 명령하달과 각부 대신에 대한 통보 조치/원수부 직원들의 급여등이 새로 추가되었다.

이후 1900면 5월 20일3에 한번더 개정이 되어 일단 관제상의 정비가 끝나 제1차 한일전쟁 이전까지 명실공히 대한제국 최고의 군령기관으로 자리잡게된다.

덧붙여, 원수부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군부의 관제가 대폭 변경된다. 군부관제의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99년 7월 29일 2차 개정 이후인 8월 18일부터 이다. 본래 군부는 1895년 3월 26일에 28개 조항으로 반포된것을 시작으로 원수부로 인해 개정되기 전까지 총 5번의 개정을 거쳤다. 모두 일부 문구만 변경되는 정도였지만 1899년 8월 18일의 6차 개정에는 28개의 조항중 9개 조항이 개정을 거치게 된다.

이 개정에서 군부의 위상변화를 확실하게 확인할수 있다. 군부대신의 임무였던 군정관리와 군인군속의 통독권이 단지 '군비관리'로 전락해버렸을 뿐만 아니라 문관도 임명이 가능해졌다. 무엇보다도 군부의 산하 기구가 포공/경리/군법/의무국의 4국으로 규모가 줄어들어 단지 군수 관리와 군용 시설과 군용 토지의 구축과 관리를 담당하는 기구로 전락해 버린것에서도 위상변화를 확실히 짐작할수 있다.

이후 1900년 9월 17일 7차 개정이 한번더 이루어진다. 이때는 차관에 해당하는 군부협회에 국장을 겸임하던 군법국마저 원수부의 기능으로 이관하면서 더욱 축소되어 포공국과 경리국밖에 남게되지 않는다. 국장의 호칭도 '총장'으로 불리우지 않았으며 직원도 60여명에서 40여명으로 크게 감축된다.

원수부는 군부와는 다르게 상당히 단일화되어 산하에 4개 국만이 편성되어있다. 각 국이 담당하는 업무 처리와 결정은 원수를 경유한 후에 대원수에게 보고되어 재가를 받은 후 시행되는 절차가 있었고 군무국 이외의 3개 국 모두 동일한 절차를 거쳐야 했었다. 이와같이 구성된 4개 국의 임무에 대해서는 원수부관제의 제 2관의 13개 조항에 자세히 실려있다. 군무국의 직원은 영관급 장교 부장 2명과 위관급 장교 국원 6명, 그외 하사 5명을 두었다. 검사국은 부장 1명과 국원과 하사를 각각 4명을 두었고 비교적 담당한 임무가 단순한 기록국은 부장과 국원이 각각 1명, 하사가 2명으로 가장 소수의 인원을 두었다. 회계국은 부장 1명과 국워 3명, 하사 4명을 두어 임무를 시행했다.

아래는 각 국들의 담당한 임무들의 목록이다.

군무국 담당 임무: 1. 대원수/원수/원수부의 인장 보관에 관한 사항 2. 조칙과 공문을 군부와 경외 각 부대에 공포하는 사항 3. 평시/전시에 군 편성에 관한 사항 4. 전투준비와 군비지급에 관한 사항 5. 육해군 사관학교와 육해측량에 관한 사항 6. 군부와 경외 각 부대의 일기와 보고를 접수한후 요약 보고하는 사항

검사국 담당 임무: 1. 표창/진급/보직변경/징계에 관한 사항 2. 각 사관학교의 교육에 관한 사항 3. 경외 각 부대 소속 장교의 근만 심사에 관한 사항 4. 경외 각 부대의 장교들의 시험을 맡아 승진과 강등 시행에 관한 사항 5. 궁성호위병 시찰에 관한 사항

기록국 담당 임무: 원수부를 포함한 모든 군사 조직에 관한 조칙과 문부와 도서보존에 관한 사항

회계국 담당 임무: 1. 경비와 예산 결산에 관한 사항 2. 군 회계/경리 에 관한 사항

이렇게 총 4개 국으로 구성된 원수부는 원수의 명령에 따라 3개월마다 장교 1명이 각 중앙군의, 3명이 지방군의 부대를 시찰해 원수와 대원수에게 보고함으로써 중앙/지방군을 감독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본적으로 원수부 직원들은 이전에 반포된 '육군복장규칙'에 의거하여 대한제국군의 군복을 착용했으나 장식면에서 차별화 되어있었다. 장교들은 계급을 불문하고 반드시 무궁화 장식이 들어간 금색의 아길레떼(식서/飾緖)를 반드시 착용해야 했다. 또한 허리의 천 장식인 식대(飾帶)또한 일반 붉은색이 아닌 황색의 것을 사용했다. 다만 장군들은 은사로 이화문 장식이 추가되어있었다. 견장도 일반 견장과 동일했지만 술을 부착하지 않았다.

제 3차 원수부관제 개정과 원수부의 권력 강화


1899년에 있었던 1차와 2차개정에서는 단지 구성원의 증감정도에 그쳤고 따로 기구가 추가되지는 않은 비교적 미미한 것들이엇지만 1900년 5월 20일 제 3차 개정에서는 제 1관 5개조/제 2관 14개 조/제 3관 14개 조/부칙 5개 조7로 전면적인 조정이 이루어졌다. 국장의 호칭이 '총장'으로 격상되었고 기구와 직원이 증감되었으며 역할 면에서 보다 더 강화되어 이전보다 위상이 확실이 증가되었다. 규모의 증가에 따른 원수부의 건물도 증가될수 밖에 없었는데 황립 육군무관학교나 시위사단 사령부와 같은 완전히 근대화된 4층 건물로 확장된다. 위치는 현 을지로 부근에 지어졌다.

일단 기본적으로 각 국의 직원수가 월등히 증가한것을 알수 있는데 이것은 더욱 증가된 임무와 대한제국군의 규모에 비례해 늘어난것이다. 특히 군무국은 6명이 증가되어 총 20명으로 늘어났으며 다음과 같은 임무가 추가되었다.

1. 장교 및 상당관의 임면 진퇴(임용과 면직)하는 사항 2. 의무에 관한 사항

첫번째 조항은 군부대신에게 주어진 고유 임무가 원수부로 이관된 것이며, 두번째 의무에 관한 조항도 군부에 아직 잔존하던 의무국의 기능이 이관된 것이다. 따라서 그해 9월 17일에 있었던 군부관제 개정에서 의무국은 군법국과 함께 폐지된다. 원수부 검사국에도 임무가 추가되는데 '군법에 관한 사항'은 폐지될 군법국의 임무가 이관된 것이다. 직원도 10명에서 13명으로 증가되었다. 그외 기록국과 회계국은 호칭이 총장으로 격상된것과 직원수의 변동 이외에는 별다른 변동이 없다. 이는 원수부에서 핵심부서가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파견근무자의 숫자도 100명에서 270명으로 대폭 증가된다.

그리고 기존 군무/검사/기록/회계국 이렇게 4개국이 있었던것에 비해 개정후에는 해군국과 병기국이 추가되어 총 6개 국으로 증설된다. 백성기와 윤웅렬의 상소문에 영향을 받았음과 동시에 같은 시기 시작된 군함 구매 사업의 효과적인 진행과 추후 창설된 대한제국 해군의 운영을 위해 추가되었다. 그렇기에 초기 부터 상당수의 직원을 두게되었다. 병기국 또한 백성기의 상소문에 영향을 받은것이며, 앞으로 대한제국군이 운용할 무기의 체계적인 생산과 개발을 위함이었으므로 직원수가 군무국 다음으로 많았고 당시 서울에 설립된 황립 한성조병창장인 유성혁 육군 참장이 병기국 총장을 겸임했었다.

국장의 호칭이 총장으로 격상됨가 동시에 총장의 주요임무를 명시한 5개 조항이 신설되었다. 이전까지 군무국장과 검사국장에게만 주어졌던 '작전계획상의 기밀을 차주'하는 권리가 6개 국 총장 모두에게 부여되고 이싸. 그리고 각국 총장이 업무상 의정부에 제의할 사항이 있을경우 직접 의안을 제작해 의정부에 요청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총장은 봉칙/봉명하여 각 대신에게 훈령할 수 있으며, 각 재판소 판사 이하에게 훈령 또는 지령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 총장의 임무 변화를 통해(3차 개정을 통틀어)서도 원수부는 대한제국 최고의 군령기관 뿐만이 아니라 권력기관으로 부상했다는 것을 알수있다.

이외에도 부착 5개 조항이 추가되어 원수의 명령을 받은 각 총장들과 육군 장관이 순열사가 되어 부대의 군기상태/복무태도/교육실태를 검열하고 원수를 경유해 대원수에게 보고하는 기능도 추가되었다. 이것은 기존의 3개월마다 부대를 시찰하는 기능을 비정기적으로 보완한 성격을 띤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3차 관제 개정과는 별도로 5월 27일에 '무관 및 사법관 임명규칙'에 관한 칙령이 반포되어 사관생도들의 교육뿐만 아니라 선발시험/임용까지도 관장하는 임무가 추가된다.

그러나 점차 담당 임무와 위상의 변화는 다른 조직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예컨대 1900년 원수부 군무국 총장은 외부(외무부)대신이 일본인 측량기사의 활동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한 것에 대해 제한적으로 협조할 수밖에 없다고 통보하였다. 그런가 하면 군무국 에서는 외국공사관의 요청을 받아 외국인에게 통행증을 발급해 외국인들을 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 통행증 사용과 통행 문제로 외부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1900년 8월 30일에 헌병대조례가 반포되어 헌병대가 창설되지만 이 헌병대 역시 원수부에 예속되었다. 제 1장 1조8를 봐도 이미 군령권을 장악한 원수부가 황제권 강화의 일환으로써 군에 대한 통제를 한층 더 강화할수 있게 된것이다. 그리고 10월 2일 회계국 총장 미영환이 헌병대 사령관을 겸임하게 됨으로써 두 관계는 더욱 명확해 진다. 이 밖에도 원수부 군무국 총장이 그해 11월 18일에 설치되는 육군법원을 관할하게 됨에 따라 군인의 민/평사 사건의 심판과 감옥을 통제할 권한을 원수부에서 일괄적으로 장악하게 되어 1900년 5월에 관제의 정비를 일단 완료한 원수부는 그러한 과정 중에도 대원수의 지시를 받들어 중앙군과 지방군, 헌병대 등의 부대 신설 및 개편에 따르는 편제업무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다.

따라서 원수부는 무관학교의 생도들의 졸업과 임관을 포함한 실로 광범위한 분야를 관장하는 중추적이 역할을 수행하게 되어 대한제국 최고의 군령기관과 대한제국의 황제권을 상징하는 기관으로써 자리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