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미가엘)/경제

대한국의 경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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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경제체제 자본주의적 혼합경제체제
인구 99,210,583명
노동인구 44,967,500명
통화 대한국 원(圓)
통계
명목 GDP 3조 9856억 달러
PPP GDP 5조 6259억 달러
1인당 명목 GDP 40,175 달러
1인당 PPP GDP 56,706 달러
GDP 성장률 1.9% [1]
무역규모 1조 8187억 달러
인플레이션 2.3%
빈곤선[2] 미만 인구 6.5%
지니계수 29.5
고용률 73.5%
무역
수출품목 반도체, 무선통신/원거리 통신장비, 컴퓨터, 강철, 선박, 석유화학 등
주요수출국 Flag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vg 중국
Flag of the United States.svg 미국
Flag of Vietnam.svg 베트남
Flag of Japan.svg 일본
30px 홍콩
수입품목 기계, 전자제품, 석유, 강철, 운송장비, 유기화학제품, 플라스틱 등
주요수입국 Flag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vg 중국
Flag of the United States.svg 미국
Flag of Japan.svg 일본
Flag of Australia.svg 오스트레일리아
Flag of Saudi Arabia.svg 사우디아라비아
국가재정
국가부채 GDP 대비 59.5%
외환보유고 5258억 달러

개요

대한국의 경제는 자본주의적 시장질서에 기반한 혼합경제체제이다. 이는 대한국 헌법상 보장된 것이며,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 자유와 창의는 존중되며,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며, 경제의 민주화를 위한 규제와 조정을 가할 능력을 가진다.

역사

개혁기의 대한제국

한일전쟁 전후복구와 호송선단경제

대한국의 경제는 중국 대륙의 통일과 소련의 부상에 따른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냉전질서 하에서 미국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으며 전후복구와 경제부상이 이뤄졌다. 한일전쟁 발발 이전 대한제국기에 한국은 기술도입과 일부 개혁을 통한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의 경제체질 쇄신에 어느정도 성공했었고, 상공업의 발전과 인프라의 확충, 고급인력의 확보 등 기본적인 경제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미국의 차관지원 등이 결합하며 한국은 1955년 즈음 완전한 전후복구를 선언했다. 또한 북쪽의 위협이었던 중국과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특히 공업력의 확충을 진행했다. 1960년대 이후 '제n차 5개년 계획'과 같은 경제계획이 잇따랐고, 값싼 노동력, 일정량의 자원을 무기로 고성장을 보이게 된다. 이 즈음 해서, 관북 등에 포진해있던 기존 사회인프라는 물론, 부족한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한 영남, 호남, 충청 지역의 개발도 이뤄지며 이 시기 동래부는 물론 당시 일개 시였던 대전 지역이 부상하게 된다.

한성, 평양 등 주요도시에서 발전한 상단이 차후 여러 상점을 합병하며 세를 불렸는데, 이들이 이후 '재벌'이라 불리는 기업집단의 시초가 된다. 이들이 발생한 것도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고속성장과 무관하지 않다. 정부는 당시 산업효율화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 확보를 위해 큰 규모의 기업들에게 상당한 지원을 제공했다. 이 지원에는 금전적 지원은 물론, 배타적 규제를 통한 국내기업 보호정책 등 다양한 경제정책이 수반되었다. 이러한 한국의 경제를 두고 '호송선단경제'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경유착의 행태는 기업집단의 비대화로 인한 다양한 부작용은 물론, 노동운동, 정치민주화, 국제적 자유무역 강화 등 국내외적 흐름에서 약화되어간다. 하지만 이는 한국의 급속도의 경제상장에 있어 분명한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1970년대 데탕트와 낙수효과

중국과 미국의 관계정상화가 이뤄진 1970년대 한국의 경제는 또 다른 변곡점을 맞이한다. 한국도 미국의 데탕트 흐름에 편승해 이 시기 중국 및 베트남 등 일부 공산권 국가와 관계정상화를 추진한다. 아시아에서의 냉전기류가 완화되면서 한국에 대한 해외투자자의 위험인식이 낮아짐은 물론,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 새로운 시장으로의 진출을 도모한 자본들이 투자가 이어지며 그 낙수효과과 한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국 내 기업들도 직접 중국에 진출하고자 했다. 또한 한중 국경에서의 국경무역이 한중관계정상화로 점차 대규모로 진행되며, 그동안 소외되었던 국경지대의 도시들도 발전하게 된다. 그 일례가 의주부로, 의주부는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에서 벗어나 한중 경제의 중심지로서 새로운 역할을 수용하게 된다.

전후 적대적인 관계였던 일본과의 화해도 이뤄졌다. 미국의 주도로 한일관계정상화가 이뤄졌는데, 그 정치적 여파와는 별개로, 동래부를 포함한 영남의 해안 항구들을 통해 일본과의 해양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함경남도의 덕원군도 그 수혜(시 승격)를 보며 관북의 주요 항만으로 자리잡게 된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연평균 5%의 성장률을 보이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특히 1985년 일본과 미국의 '플라자 합의'로 일제 상품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며 그 빈자리를 한국이 차지하게 된다. 이에 1987년 한국은 국민소득 1만달러 달성이라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1990년에는 OECD에 가입하며 아시아에서 일본과 함께 선진국에 준하는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97 아시아 경제위기

새천년 이후의 대한국

산업

기업

  1. 2023년 10월 추정치
  2. 대한국 사회보건부의 최저생계비 기준